Chevrolet malibu 2000 3.1L
종이성냥과 국제 전화 카드를 팔다
2023년 11월 25일 (토) 21:20
"굿모닝, 나 제임스입니다. 폰 카드 취급하요? 내가 좋은 가격에 갖다 줄 수 있오"
"있는데, 많이 나가지는 않는다."
"오케이. 내가 시파 카드 딜러이다. 그 부근 가는 길에 들리겠다. 이따가 보자"
워터루 대학이 있는 켐브리지 부근 두 곳의 컨비니언스에 가는 길에 키치너까지 가 볼 생각으로 옐로우 전화 번호부에서 찾은 한 동네의 한 컨비니언스에 전화하니 취급은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됐다. 오라 말 안해도 나는 간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30분이다. 그느마들은 새벽에 우유 혹은 담배 등을 사려고 일찍 오는 손님 맞으러 매일 새벽 5시 혹은 6시에 문 연다.
켐브리지의 여러 가게 중 두 곳 컨비니언스는 한인이 주인이다. 그리고 그 곳은 유학생들이 있어서 국제 폰 카드(International phone card)가 꽤 팔리는 지역이다.
나는 Sifa 하고 Essens를 CD5 × 100 장=CD500, CD10 × 200장 =CD2000, CD20 × 100장=CD2000, CD50 × 50장=CD2500 그리고 예비로 CD100 × 5장=CD500 합계 454장 CD7,500- 을 챙겼다.
이걸 다 팔면 나는 컨비니언스 몫 CD1,500-을 뺀 CD6,000- 의 현금을 가지게 된다. 카드에 인쇄된 외형상 금액의 20%를 컨비니언스가 가지고 60%의 금액 CD4,500을 회사가 가지고 나에게는 CD1,500- 이 주어진다. 이것을 오늘 하루에 다 판다면, 왕복 약 800km 깨스 값=CD90- 점심 등 먹는 비용 CD50- 그리고 담배 2/3=CD3- 합계 약 CD143- 정도(자동차 보험료와 감가상각비는 빼고) 비용으로 들어간다. 대충 약 CD1,350-은 벌게 된다.
키치너에 있는 컨비니언스는 가서 설득해야 한다. 그들 스스로는 쉽게 전화 카드를 구할 수 없다. 왕복 2~3 시간 정도를 사용해야 하는데... 수요는 일단 판매가능 지역이기에 내가 만들면 된다. 잘 인쇄된 베너 2장을 매장 입구에 붙혀 놓으면 된다. 내 차안에는 항상 넉넉하게 배너는 있다. 이런 방법으로 일주일에 3번 정도는 장거리를 다녔다. 편도 3시간 거리에 있는 컨비니언스에 갈 때는 적어도 3~4곳을 방문할 수 있는 코스를 택한다.
그들은 토요일에도 전화를 한다. 그러면 일요일이라도 나는 갔다. 그렇게 일을 하며 퇴근 때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는 버거 킹 레스토랑이 있고, 그곳에서 적어도 와퍼 6개 셋트를 샀다. 두 아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그때는 그들이 아직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그 당시 와퍼 버거는 꽤 컷다. 가격은 감자 프라이를 포함하여 CD1.90-/set 이였다. 지금은 CD9.90-/set 이상이다.
두 아들과 아내는 좀 비쌋지만 이걸 사용하고 나는 에릭슨, 꼬진 것을 사용하였다.
그때는 삐삐를 사용했고 전화는 기본 25센트 동전을 넣고 시작하는 공중전화를 주로 사용해야 하는데 장거리라서 하기 쉽지 않았다. 1998~9년의 이야기이다. 캐나다는 2005년 부터 휴대폰, 그리고 그 후 스마트 폰이 활성화 되었고 인터넷은 2008년에서야 느리지만 보편화 되었다.
보통 오후 6시 쯤에는 집에 도착하였다. 애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식사로 그 버거킹으로 하였고, 금, 토 그리고 일요일은 중국 마켓(그때는 아직 겔러리아 같은 대형 마켓은 없었다)에서 돼지 뒷다리 고기를 사서(한국 돈으로 4천원 정도면 2kg의 고기를 샀다) 내가 이리 저리 2cm 정사각형으로 살을 도려내어 냄비에 넣고 고추장을 넣고 콘 오일을 넣고 마늘과 양파를 넣어 볶아 흰 쌀밥과 함께 푸지게 먹었다. 자주 푸짐하게 먹은 돼지고기 요리들이 내가 통풍(gout)이 시작된 이유일 것이다. 애들이 잘 먹고 각자 방에 돌아간 후 설거지는 내가 한다. 방 2개와 화장실 2개 그리고 주방이 딸린 거실이다. 나는 5층 길 옆 아파트 거실에서 생활하였다. 그때는 아내가 6개월에 한번씩 와서 2주 정도 함께 하였다. 한국의 재산과 사업이 다 정리가 되지 않았기에...
그 때는 작은 와퍼는 CD1.59- 큰 와퍼는 CD1.99-였다. 나는 작은 것만 샀다. 돈은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좀 안타깝다.
큰 넘과 작은 넘은 학교 다니며 슈퍼마켓에서 혹은 게임 룸에서 혹은 일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둘 모두 그리고 시민권 받기 위하여 돌아 온 후 아내도 백화점 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였다.
아이들과 아내에게는 미안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만 약하게 만들 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기에 머리를 흔들며 잊어버리고 넘어갔다. 지금에서야 그것들이 다 아픔이고 슬픔이었다. 그리고 다시 할 수 없는 너무나도 좋은 경험이고 추억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자동차 사고가 한번도 나지 않았던 것이 운명의 신이 도은 것이라 생각한다. 보통 80km/h~120km/h로 달렸었다. 때로는 고속도로에서 170km 정도로도 달리곤 한 적이 있었다. 그 넘의 6기통 시보래 말리부로. 과속이나 신호위반 티켓 하나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때, 큰 아들은 시보래 알레로 투 도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가끔 과속 티켓을 받아와서 속을 썩이곤 하였다. 아내도 이곳에서 드라이브 라이센스를 땄지만, 늘 집에 함께 모여야 안심하곤 하였다.
그러다 전화기가 업그레이드 되면서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시작하자 판매 환경이 좋지 않게 되었고 서서히 다른 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차가 한대 더 필요하게 되었지만, 주차 공간이 없어서 결국은 22년을 살게 된 쏜힐 콘도를 구입해 옮겼다. 2대는 우리 꺼였고 한 대분의 주차장은 따로 사야했다. 이 모두가 참 쉽지 않았다. 드디어 큰 아들은 오타와 대학에 들어면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넘은 그곳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마쳤다. 나는 돈이 더 필요했다. 한국의 시화호 부근에 남겨 둔 3천 3백평의 땅은 그림의 떡이었
다.
TD Bank Manager로 근무하고 있는 큰 아들. 뒷 배경이 Ottawa University 그리고 손녀와 며느리
전화카드 판매를 하게 된 동기는 순전히 종이 성냥을 팔게 되면서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권유에 의하여서 였다.
어느 날, 베리(토론토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카우스틈 주얼리 고객 가게에서 가게주인인 매튜가 100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 종이 성냥이 든 작은 박스를 받아 토론토 처치스트릿에 있는 술집(bar & grill)에 배달해 주면 내가 팔고있는 제품을 CD500- 어치를 사겠다 하였다. 어치피 니는 나에게서 사야 하는데... 그래. 이것도 좋은 일이고. 조금만 더 수고 하면 된다. 생각하여 딜(deal) 하였다. 제품은 서울에서 아내가 매장과 생산 공장을 가지고 있어서 물건을 받아 팔기만 하면 일단 내 돈이 되었다. 파는 것이 문제였다.
그곳에 가니, 그 곳은 70이 된 할배 혼자서 수작업으로 종이 성냥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나는 챙기며 포장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만드는 것 보다 고객에게 배달해 주는 것이 문제라 하였다. 그때는, 온타리오 안에서는 종이성냥(paper match) 1개도 돈을 받았다. 컨비니언스에서는 CD1.50-/ 개당 을 받았다. 공짜는 없었다.
게이 & 레즈비언 들의 거리인 church st. 의 목적된 까페에 가니 2박스를 다시 주문하였다. 500개 들이 1박스에 C.I.F로 CD600-을 받았다. CD200-을 공장에 주고 나는 CD400- 혹은 CD300-을 남겼다. 구매한 그들은 고객에게 개당 CD2-을 받았다. 서로 괜찮은 장사였다. 흑백에 상호와 전화번호만 인쇄한 것이다.
2005년 쯤 부터 종이 성냥은 사라졌고 담배회사에서 그들의 로고가 인쇄된 잘 만들어 진
성냥 같은 것이 나타났는데, 가게에서는 그것도 CD1.50-을 받고 팔았다. 지금은 그나마 다 없어졌다.
최대 4컬러(colors)까지 500개 한 박스에 CD1,600-을 받았는데, 컬러성냥 주문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쉐파드 스트릿 웨스트 1200 번지 전 후 도로 옆으로 작은 3층 타운 하우스(1200 Shepard st. West)들이 많은 그곳에서도 하나 둘 주문이 있었고, 그 곳은 예약에 의한 성매매 지역이었으며 처치 스트릿의 게이 레즈비언들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 곳은 1964년부터 1974년까지 캐네디언 공군 들이 주로 거주하였던 하우스였다. 지금 생각해도 성냥 가격은 높지 않았나? 하지만, 그때 그곳은 그렇게 부르고 받아도 그건 관심꺼리도 그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들은 매치(성냥)를 광고로 사용하였다. 내가 졸지에 나타난, 어떤이에게는 구세주였다. 아름다운 아가씨는 골드. 실버, 그린. 와이트에 블랙 그리고 초보는 와이트 그린을 주문하였는데, 어느 사이 그것이 주문의 불문율로 되었다. 팀장(마담)이 내게 그렇게 주문해 주었고 절대 발설 말라 하였다. 점차 내 스스로도 판단할 수 있었다.
집과 가까운, 시내와 2시간 거리인 베리 사이를 오가는 아주 괜찮은 사업(?)이였다. 자주 새로운 얼굴들을 만났으며 그녀들은 다양한 국적 출신이었다. 아마도 나에게 본명은 절대 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헬레나, 제니퍼, 헬렌, 코코, 뷰티, 안젤라 등 등 다행히 코리언은 없었다. 그들은 본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고 확인하고 이야기 하기 위하여 국제통화 카드가 필요했다. 내가 그 필요를 제때에 충족시켜 주었고...
그렇게 하여 집과 1시간 거리인 브렘턴의 카드 공급회사와 만나 딜을 한 후 시작하였다. 그 후 점차 카드 판매는 접게 되었다. 운전이 너무 위험했다. 그때는 영주권자였었다.
그리고 그후 곧 브램턴의 한 백화점 매장 통로에 카우스텀 주얼리 매장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그 하나가 캐나다 전국 백화점 안에 21개의 매장을 가지는 시작이었다.
캐나다에서의 숱한 희노애락을 넘기며 나는 노년으로 접어들었고, 저 흐르는 강물과 그 속에서 놀고있는 새싹들을 바라보며, 성냥팔이와 국제전화 카드를 팔며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체험들과 기억하던 모든 것들을 툴툴 털어 버리고, 잊고 그리고 더는 가지지 않고.
이제는 노동을 하며 소설을 쓰며 그러나 절대 내 경험을 미래 세대에 권하지 않고 미래 세대 스스로 또 다른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하고 그렇게 해 나아 갈 때 혹 참고 나 된다면... 하고 바라며 서서히 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
딱히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운명이 너 그만! 하면 끝이다. -끝-
첫댓글 긴글 잘 보았어요.
남다른 삶을 사셨네요.
대단하세요.
함께 해 주신 희망이 님, 감사합니다~
예. 원래 보통으로 하는 것을 피하고 새롭고 다른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을 잘 합니다.
그렇게 살다 지금 와서 보니 좀 특이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소설을 쓸 수 있게 하였다 생각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멋진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캐나다 이민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회상하며 글을 쓰시죠?
성냥과 전화카드등
먼거리 달리며 서로에게 상부상조
햄버거를 즐겨먹었던 시절 LA에서 깜놀
너무커서 손에다 올려놓고 쾌재를 그러나
입에 넣을수가 없어 먹으며 줄줄 흘리던ᆢㅎ
글을보며 캐나다 여행시
쾌백의 몽모랑시 폭포에 다시 가고픈 생각이
드네요 종종 오셔서 글 올려주세요
ㅎㅎㅎ 예. 맞습니다. 이민 생활은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어려움 들을 겪게 되지요.
그런 이민 생활을 하며 내공을 쌓고... 그런 것들이 지금에는 소설 재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23~25년 쯤 전의 생활들이지요. 그래도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참 감사합니다.
그 외에도 사연들이 참 많습니다. 캐나다는 어디가도 버거가 주 먹거리가 되어서 잘 하는 곳이 많아요.
케벡의 그 폭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입디다. 그 외에도 올드 프랑스 같은 거리도 좋고요.
늘 건강하시고 멋진 날들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