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지역 묘
▲강맹경(姜孟卿,1410-1461)묘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진주(진주) 시호 문경(문경) 자 자장(자장) 호 지창령현사(知昌寧懸事) 우덕(友德)의 아들이다. 세종11년(1429)에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사인(舍人) 지승원문사(知承文院事) 이조정랑(吏曹正郞)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등의 관직을 지냈다. 문종때는 도승지을 지냈으며, 단종때는 이조참판. 한성판윤등을 지냈다.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임용되었고 동년9월에는 세조의 즉위에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2등에 책전되고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종2년(1456)좌찬성을 거쳐 다음해에 우의정에 올라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조4년(1458)에 좌의정이 되고 다음해에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항노(李恒老,1792-1868)생가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535-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시호 문경(文敬) 자 이서(而述). 초명 광로(光老) 호 화서(華西) 순조8년(1808) 한성시에 합격했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고종3년(1866) 병인양요때는 주전론을 적극주장하였다. 공조참판 우부승지를 지냈으며 내무대신에 추증되었다. 이집은 선생의 부친때 지은집으로 약300여년이 되었으며 선생이 탄생하여 일생을 보낸곳이다. 양헌수,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 홍재학등 많은 선비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던곳이다.
▲이준경(李浚慶,1499-1572)묘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광주(廣州) 시호 충정(忠正) 자 원길(原吉) 호 동고(東皐). 남당(南堂). 홍연거사(紅蓮居士) 부수찬 수정(守貞)의 아들이다. 황효헌(黃孝獻). 이연경(李延慶)에게 수학. 중종17년(1522) 생원, 중종26년(153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부수찬, 사경(司經)으로서 기묘사화때 피죄인(被罪人)의 무죄를 논했다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서 한때 파직되었다가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중종38년(1543)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대사성. 편안도 관찰사.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다. 병조판서때 이기의 뇌물청탁 구관(求官)을 거절, 윤임(尹任)일파로 몰려 한때 보은에 유배되었다. 그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함경도 순찰사(咸鏡道巡察使) 명종10년(1555) 전라도도순찰사(全羅道都巡察使)로 호남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후 우찬성,우의정.좌의정을 거쳐 명종20년(1565)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자 선조를 영립(迎立)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총괄하였으나 신진사류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서 임종(臨終)때 장차 붕당(朋黨)이 있을거라는 내용의 유소를 올려, 이이(李珥)와 3사의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 그의 예언이 적중되었다.
▲류관(柳寬,1346-1433)묘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산157 여말선초의 문신 본관 진주(晋州) 시호 문간(文簡) 자 몽사(夢思) 경부(敬夫) 초명 관(觀) 호 하정(夏亭) 공민왕 20년(1371)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이 개창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이후 여러관직을 거쳐 태종때는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때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세종6년(1424) 우의정에 올라 고려사를 수교(讐校), 찬진(撰進)하였다. 세종때에 황희(黃喜). 허조(許稠)와 같이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학문과 시문에 능통하였다.
▲이순몽(李順蒙,1386-1449)묘 양평군 개군면 공세리 칠읍산 여말선초의 무신 본관 영천(永川) 시호 위양(威襄) 태종16년(1416) 상호군(上護軍)이 되고 무과에 급제한후 1419년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로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나갔으며, 여러벼슬을 거쳐 세종6년(1424) 좌군총제(左軍摠制)을 지냈다. 1433년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로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여 그 전공으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여러차례에 걸쳐 대간들의 탄핵을 받가도 하였으나 세종 임금의 두터운 신임으로 무사하였다. 1447년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덕형(李德馨,1561-1613)묘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광주(廣州) 시호 문익(文翼)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 임진난(壬辰亂)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이후 명나라에 건너가 지원군 요청에 성공하여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의 접빈관(接賓官)으로 활약하였다. 1594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좌의정이 되었고, 전후의 사태를 수습하였으며, 대마도 정벌을 주장하였다. 영의정에 올랐으나 삭직(削職)당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인조(仁祖)때 복관되었다
▲김사형(金士馨,1333-1407)묘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4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시호 익원(翼元) 자 평보(平甫) 호 낙포(洛圃) 부지밀직사사 천의 아들이다. 음보로 형계관직( 溪館直)이 된후 감찰규정을 지내다가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3년(1377)에 사헌부집의에서 조준등과 함께 대간직에 이르러 당시 명관의 칭송을 받았다. 조선개국공신으로 공신1등에 책록되고 문하시중에 제수되었으며, 상락백의 작위를 받았다. 태조5년에는 좌정승으로서 오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토벌하러 갔다가 이듬해 환도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때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장자에게 선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조즉위를 도운공으로 정사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정종1년(1399) 등극사로 다시 좌정승이 되었다가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여지(金汝知,1370-1425)묘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산27 여말선초의 문신 본관 연안(延安) 시호 문익(文翼) 자 자행(子行) 호 창주(滄州) 밀직제학 도(密直提學 濤)의 아들이다. 창왕1년(1389) 문과에 장원한뒤 정언(正言). 사헌규정(司憲糾正)등을 역임했다. 조선태종때 장령(掌令).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집의(執義)를 거쳐 충청도관찰사. 대사헌. 공조판서. 예조판서에 올라 문란(紊亂)했던 호패법(號牌法)을 개정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판한성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세종7년(1425) 예조판서.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했다.
▲김자지(金自知,1367-1435)묘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여말선초의 문신 본관 연안(延安) 시호 문정(文靖) 자 원명(元明) 호 일계(逸溪) 밀직제학 도(密直提學 濤)의 장자이다. 고려우왕11년(1385) 문과에 급제한 뒤 조선 태종8년(1408) 형조참의 태종17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세종2년(1420) 대사헌에 올랐고 그 뒤 원주목사 평안도관찰사에 이어 세종10년(1428) 형조판서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를 역임했다. 특히 대사헌 재직시에는 당대의 방자(放恣)한 세도공신(勢道功臣)을 탄핵하기 위해서 상소를 다섯차례나 올려서 세인을 놀라게 한일은 유명하다. 선생은 학문에 뛰어나 응양(陰陽) 복서(卜筮)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음율(音律)등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준재이고 박학한 학자였다.
▲숙안공주(淑安公主,1635-1596)묘양평군 용문면 화전리 궁촌마을 조선조 제17대 효종(효종)의 제1자녀 지혜가 총명. 효경. 내훈. 소학(孝經. 內訓. 小學)에 능통했고,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부왕의 사랑을 받았다. 인조27년(14669) 익평군 홍득기(益平君 洪得箕)와 결혼 예의범절로 시가(媤家)와 부군(夫君)을 잘 받들었다. 익평군 홍득기(益平君 洪得箕,1635-1673) 본관 남양(南陽) 시호 효간(孝簡) 자 자범(子範) 호는 월호(月湖) 우의정 중보(重普)의 아들이다. 숙안공주와 결혼후 익평부위(益平副尉)로서 도위겸 도총관(都尉兼 都摠管)이 되었고, 효종이 즉위하자 익평위(益平尉)에 진봉 현종1년(1660)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품이 겸손하고 소탈하여 주위사람과 백성들의 숭앙(崇仰)를 받았다.
▲이적(李勣,1162-1225)묘 양평군 지제면 지평리 배비산 기슭 고려 무신 본관 지평(砥平) 대장군 준선(俊善)의 아들이다. 합문지후(閤門祗侯). 병부랑중(兵部郞中)을 거쳐 고종3년(1216) 우군병마판관(右軍兵馬判官)으로 서북면(西北面)에 침입한 거란군(渠丹軍)을 몽탄역(蒙灘驛)에서 격퇴, 장군이 되었다가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이듬해 거란의 재침이 있자 좌군병마부사(左軍兵馬副使)로 출전, 광탄(廣灘)에서 대승하고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임명되었으나 강동성(江東城)이 아직 적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어 적을 무찔렀다. 희종6년(1210) 우승선(右丞宣)에 오르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추밀원사(樞密院事). 어사대부(御使大夫)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그의 뛰어난 인품을 이렇게 쓰고 있다. 공은 천성이 청렴여절(淸廉勵節)하고 평이온유(平易溫柔)하여 기쁨과 성냄을 용모에 드러내지 않고 평시에 아무런 담기가 없는듯하나 적병을 치고 진지에 임하여는 남들이 미치지 못하는 용맹이 있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몸이 귀히되고 벼슬이 높아도 그 거처와 이목은 관사와 다름이 없었다.
▲양헌수(梁憲洙,1816-1888)묘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 남원(南原) 시호 충장(忠莊) 자 경보(敬甫) 수봉관 종임(守奉官 鍾任)의 아들이다. 이항노(李恒老)의 문인으로 가세가 빈곤하여 연로(年老)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대과를 기다리지 않고 헌종14년(1848) 무과에 급제했다. 선전관(宣傳官). 참상(參上)을 거쳐 고종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때는 순무천총(巡撫千摠)으로 정족산(鼎足山)에 침입한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오즈제독이 지휘하는 해군을 대파한 뒤 한성부좌윤에 특진되었다. 이후 어영대장(御營大將). 금위대장(禁衛大將). 포도대장(捕盜大將)등을 거쳐 고종12년(1875) 형조판서 1884년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선생은 보수적인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유장(儒將)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저서로 [하거집(荷居集)]이 있다.
▲윤승길(尹承吉,1540-1616)묘 양평군 용문면 조현리 막골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해평(海平) 시호 숙간(肅簡) 자 자일(子一) 호 남악(南岳) 감찰 헝언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명종19년(156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정자. 장령등 여러요직을 역임하였다. 선조25년 임진왜란때는 귀성부사로서 병사모집과 군량미 조달등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선조33년(1600) 형조판서겸 도총관에 올랐고, 이해 딸이 선조의 7남 인성군과 결혼했다. 한성부우윤. 좌참찬을 역임하고 선조38년(1605) 선무원종공신에 녹되고 광해군1년(1609) 해선군에 봉해졌다. 광해군8년(1616)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예관과 조관을 보내 장례를 치루었다.
▲이량우(李良祐,1346-1417)묘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여말선초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시호 안소(安昭)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완풍대군(完豊大君) 원계(元桂)의 아들이며 태조 이성계의 조카이다 고려말에 사복정(司僕正)으로 출사하였으며 태조7년(1398) 제1차왕자의 난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正社功臣) 2등으로 영안군(寧安君)에 봉해졌고 태종2년(1402)에 의정부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태종8년(1408)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 다녀왔고 태종12년(1412) 완원부원군에 진봉된 뒤 품계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이제신(李濟臣,1536-1583)묘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전의(全義) 자 몽응(夢應) 호 청강(靑江) 병마절도사 문성(文誠)의 아들이다. 노욱(趙昱)의 문인으로 명종13년(1558) 사마시(司馬試) 명종19년(156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검열(檢閱). 전적(典籍). 현조. 공조. 호조의 정랑(正郞).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사은사(謝恩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예조정랑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해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울산부사(蔚山府使). 정언(正言). 군기사첨정(軍器寺僉正). 지평(持平)등을 거쳐 선조11년(1578). 진주목사(晋州牧使)로 특진되었다. 그 뒤 강계부사(江界府使) 선조15년(1582)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시문에 능했고 글씨를 잘써 서예가로도 이름높았으며 저서에 [청강집(靑江集)]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호민(李好閔,1553-1634)묘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연안(延安) 시호 문희(文僖) 자 효언(孝彦) 호 오봉(五峯) 수와(睡窩) 이천현감 국주(利川縣監 國柱)의 아들이다. 선조12년(1579) 진사 선조17년(158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응교(應敎). 전한(典翰). 집의(執義)를 거쳐 임진왜란때는 이조좌랑으로 의주에 왕을 호종(扈從)한 뒤 요양(療陽)에 가서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의 군대를 끌어들이는데 활약했다. 부제학으로 명나라와 외교문서를 기초(起草)하는 일을 전담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선조37년(1604)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으로 연능군(延陵君)에 봉해졌고 뒤에 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昇遐)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嫡庶)의 구별없이 장남을 등극시켜야한다는 입장론(立場論)을 주장했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4년(1612)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 문외출송(門外出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향리에서 시주(詩酒)로 소일했다. 저서에 [오봉집(五峯集)]이 있다.
▲조공근(趙公瑾,1547-1629)묘 양평군 양평읍 도곡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양(漢陽) 자 회보(懷甫) 호 소옹(梳翁)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 덕원(德源)의 아들이다. 선조20년(1587)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직서 참봉으로 종묘(宗廟)의 신주를 모시고 피난하여 영변에 봉안케 했고, 분조(分朝)가 설치되자 광해군을 시종(侍從)했다. 이듬해 진원현감(珍原縣監), 1595년 형부원외로 능성현령(綾城縣令), 1599년 호조의 민부정랑과 그 뒤 형조정랑, 선조29년(1596)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선조39년(1606) 평창군수 광해군 4년(1612) 옹양군수를 지낸 뒤 앞서 임진왜란때 광해군을 모신공으로 위성공신이 되고 한흥군에 봉해졌다. 1614년 가선대부로서 광주목사, 1617년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직했으며 광해군10년(1618)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자 병을 빙자 사직하고 양근(楊根)에 은거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때 훈작(勳爵)이 삭탈되자 그의 공신록도 깍였다. 인조4년(1626) 가의대부(嘉義大夫),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임명된후 인조7년(1629)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조욱(趙昱,1498-1557)묘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 평양(平壤) 시호 문강(文康) 자 경양(景陽) 호 용문(龍門). 세심당(洗心堂). 우암(愚庵). 보진제 판관 수암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의 문인으로 중종11년(1516)생.진 양시에 합격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때 겨우 화를 면하고 준원전 참봉(濬源殿 參奉).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낸 뒤 용문산에 은거하며 그의 학문이 널리 알려져 용문선생(龍門先生)이라 일컬어졌다. 명종때 성수침(成守琛). 조식(曺植)등과 함께 현사(賢士)로 뽑혀 내섬사주부(內贍寺主簿)가 되었고, 명종10년(1555) 을묘왜변(乙卯倭變)때는 장수현감으로 왜구를 선방하면서 읍민들을 수습. 교화하는데 힘썼다. 시문. 시화에 능했으며,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김안국(金安國)등 당대명사들과 교유했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권경우(權景祐, 1448-1501)묘 양평군 지제면 수곡리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 자수(子綏) 화원군(化原君) 중달(仲達)의 후손. 판정시사 사종(嗣宗)의 고손. 판예빈시사 집지(執智)의 증손. 증호조참의 영화(永和)의 손. 광주판관(光州判官) 질의 자. 좌찬성 이승(李承)의 외증손. 좌의정 어세겸(魚世謙)의 서. 세조14년(1468) 사마시에 합격되었고 성종1년(147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뒤에 예문관 봉교(奉敎)에 승진하여 사관선발의 중용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1477년에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로 옮겨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통사(通事) 조종손(趙宗孫)등의 밀무역을 검찰한 공로로 4계급 승진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곧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옮겼으며, 이어 제주경차관(濟州敬差官)으로 파견되어서는 제주도민의 궁핍현상을 지적하고 그대책의 강구를 요청하였다. 1478년 교리로 승직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어 임사홍(任士洪)이 국정을 농락함과 간사함을 규탄하여 축출을 청하였는데 그 언사가 심히 강직하였다. 한편이 수렵활동에 있어 승지와 사관의 대동을 금하자 그 불가함을 주장하고 국왕의 거동에 대하여는 사소한것이라도 기술하게 하였다. 1482년에는 예조정랑이 되어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때 당시의 왕비 윤씨를 폐비(廢妃)시킨 처사의 잘못을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다. 1486년 다시 직첩이 환급되어 공조.예조정랑에 복직되었고, 1488년에는 전호군(典護軍) 조산대부(朝山大夫)로 배수되었다. 1489년에 봉상시 첨정으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성균관 사예에서 내자시부정(內資寺 副正)으로 승진되었으며, 다시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이때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이조양(李朝陽)의 군비소홀과 군공사칭을 탄핵하여 면직시켰다. 1491년에는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옮겼다 이때 이시애(李施愛)난이 일어나자 허종(許琮)이 북정원수(北征元帥)가 되었는데 막부(幕府)의 종사관(從事官)이 군중에서 상을 당하자 임금의 명에 따라 그직을 대신하고 개선하여 돌아오자 특별히 중훈대부(中訓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1492년 형조참의로 발탁되니 평민이라도 억울함이 없도럭 공정하게 판결하였다. 의주의 조페가 심하여 조정의 중앙이 있는자를 가려 목사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에 물망에 오르자 한현을 다스릴 정도에 불과한자는 아니다라고 하니 임금도 역시 그 재능을 아까워하여 결국 보내지 않았다. 이듬해에 부제학이 되었다가 얼마후 동부승지로 제수되었고, 전직되어 도승지에 이르렀다. 연산군2년(1496) 경기도관찰사로 나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8년 사헌부 대사헌에 올라 사찰건립의 불가함을 논하고 정숭조(정숭조). 이창신(이창신)등의 탐폭을 규탄하였다. 얼마후 호조참판으로 이배되었다. 이해 7월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동생 경유(梗楡)가 주모자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강릉부 관노로 배속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신에게 구차하게 의부하지 않았으며, 직무를 공정히 다스려 많은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중종반정으로 적몰가산이 환급되고 죄명도 신원되었다.
▲김이원(金履元,1553-1614)묘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선산(善山) 시호 자 수백(守伯) 호 소암(素菴) 현령(縣令) 홍우(弘遇)의 자 성암(省庵) 효원(孝元)의 제 157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83년의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호조좌랑. 수찬. 정언등을 역임하였다. 1593년 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해에는 전국적으로 흉년이 심하게 들어 굶어죽는 백성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의주읍만은 명나라로부터 곡식을 들여왔기 때문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할수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때에는 모두를 후임자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명나라 군사들을 잘 다루어 명의 오랜 주둔으로 시달림을 받아온 도내행정을 바로잡았다. 당쟁이 한참 치열하였던 때에는 대북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1609년 같은 대북파였던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등과 모해하여 임해군(臨海君)진을 역모죄(逆謀罪)로 몰아 사사케 하였으며 1612년에는 대북일파가 소북의 생력을 없애기 위해 일으킨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사건이 일어나자 옥사를 주관하면서 많은 소북파를 죽게하였는데 이 두 번의 사건으로 훈봉을 받게되어 숭양부원군(嵩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훈작이 추탈되었다.
▲민암(閔耈,1636-1694)묘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여흥(驪興) 자 장유(長孺) 호 차호(叉湖) 세주(世舟)의 증손. 영의 손. 참판 응협(應協)의 자. 김수현(金壽賢)의 외손 판서 김시진(金始振). 현감 정세준(鄭世浚)의 서. 현종6년(1668)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후 지평(持平). 승지.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숙종5년(1679)에 고산찰방(高山察訪) 조지겸(趙持謙)이 당시 함경도 관찰사인 이원록(李元祿)이 참람하게 역마(驛馬)를 탄다고 탄핵하였다. 함경도관찰사 재임시 그곳 실정과 경험을 자세히 들어서 이원록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극구 변명하다 도리어 탄핵한 조지겸을 문초받게한 사실은 유명하다. 1678년에 동지사 겸 변무사(冬至使兼辨誣副使)로 복평군(福平君) 연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을 거쳐 1680년 대사헌으로 있다가 경신대출척으로 남인(南人)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 파주군 교하면 금산리(錦山里)에 살면서 회포강(灰浦江)가에 정자를 짓고 소일하였다. 1682년 서인(西人) 김중하(金重夏)로부터 모반한다는 무고(誣告)를 받았으나 조사 뒤 무사하였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다시 대사헌에 기용되어서는 이조판서인 심재(沈梓)와 함께 서인 김수항(金壽恒).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여 그들의 처형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이어 대제학.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1691년에는 우의정에 승진하였으며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에는 김춘택(金春澤)등이 숙종의 폐비인 민씨를 복위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고변(告變)이 있자 남인의 영수이던 그는 훈련대장인 이의징(李義徵)과 함께 일대 옥사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숙종이 갑자기 남인을 쫓아내고 서인을 등용하는 갑술옥사를 일으켰다.. 이로서 일찍이 인현왕후(仁顯王后) 출궁(出宮)의 교문을 지었다는 죄명으로 대정(大靜)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의 탄핵으로 이의징과 더불어 사사(賜死)되었다.
▲민희(閔熙,1614-1687)묘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여흥(驪興) 시호 문충(文忠) 자 호여(호如) 호 설루(雪樓). 석호(石湖) 참판 응협(應協)의 자 효종1년(1650)에 중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 장령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종2년(1661) 경상도관찰사. 승지를 지냈다. 1663년 양주목사를 거친후 조정에 들어와 좌부승지. 형조참판.을 역임하였고 현종7년(1667)다시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668년 호조참판으로 진하겸사은사서장관(進賀兼謝恩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후 한성부 판윤. 관상감제주. 공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1671년 강화부유수. 숙종1년(1675) 국장도감당상(國葬都監堂上)을 제수받았고 우참찬. 대사헌.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6년(1680)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숙종12년(1686)향리로 귀양되었다가 죽었다. 숙종15년(1689)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신원되었다.
▲성세평(成世平,1516-1590)묘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 주읍산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창녕(昌寧) 자 정중(正仲) 증좌찬성(贈左贊成) 효연(孝淵)의 증손, 호조좌랑의 손 종부시정(宗簿寺正) 희주(希周)의 자 채자침(蔡自琛)의 외손. 부사(府使) 노공좌(盧公佐)의 서 명종1년(1546) 사마시를 거쳐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50여세에 비로소 승문원에 등용됨으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전적(典籍). 어천찰방(魚川察訪)을 지냈으나 병으로 돌아왔다. 그 뒤 횡성현감(橫城縣監). 금산군수(金山郡守). 성주목사(星州牧使)등을 거쳐 군기시정. 사재감정. 장악원정. 통례원 좌통례를 역임하였다. 다시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갔다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선조23년(1590)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전에 병사하였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성영(成泳,1547-1623)묘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 주읍산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창녕(昌寧) 시호 양혜(襄惠) 자 사함(士涵) 호 우천(愚川). 태정(苔庭). 호조좌랑 완(玩)의 증손. 판교(判校) 희주(希周)의 손 강원도관찰사 세평(世平)의 자 첨치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노공좌의 외손. 영의정 이양원(李陽元)의 서 선조1년(156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76년 사헌부감찰을 거쳐 의정부사인에 임명되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지평현(砥平縣)에 안장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1589년 사헌부집의. 장령등을 거쳐 1592년 여주목사(驪州牧使)가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 순찰사로서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고 이듬해 경기좌도 관찰사겸 개성유수로 임명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호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1597년 정유재란때 남정양향사(南征糧餉使)로서 군량미의 조달을 담당하였다. 1599년 공조참판. 한성부좌윤을 거쳐 대사헌. 예조참판. 대사간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1601년 한성부판윤이 되고 1602년 지중추부사로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헌.충청도관찰사. 호조판서. 병조판서등을 거쳐 1605년 좌.우참찬, 1607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등에 의해 유영경(柳永慶)의 당인이라는 이유로 파직되었고 광해군8년(1616) 연일(延日)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인조반정후 복관 되었다.
▲신효창(申孝昌,1364-1440)묘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여말선초의 문신 본관 평산(平山) 시호 제정(齊靖) 자 성대(聖大) 호 화봉(華峰) 문학사대언(文學士代言) 중명(仲明)의 증손. 진현학사(進賢學士) 군평(君平)의 손. 이조참의 수(璲)의 자. 증영의정 김사형(金士衡)의 서. 우왕9년(9138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389년 사헌부지평에 오르면서 관직에 들어섰다. 1390년 형조좌랑을 거쳐 1939년 조선의 개국시 음관으로 사헌시사(司憲侍使)에 임명되었고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태조3년(1394)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역임하였다. 1396년 대사헌이되고 태조가 북행(北行)할때에 동행하였다. 태종3년(1403)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1404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관찰사 재직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칭소이 자자하였다. 1405년 외직에서 돌아와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제수되었고 1418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에 이르렀다. 같은해 겨울 탄핵을 받아 삭직됨과 동시에 전라도 무주로 유배되어 7년간 귀향생활을 하였다. 세종7년(1425)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손녀가 광평군과 혼인하고 외손녀가 임영대군과 혼인하게 되자 고신(告身)을 환수 받았다.
▲심열(沈悅,1569-1646)묘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월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청송(靑松) 시호 충정(忠靖) 자 학이(學而) 호 (南坡) 영의정 연원(連原)의 증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使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綱)의 손. 병조판서 충겸(忠謙)의 자. 성천부사 예겸(禮謙)에게 입양. 봉성군(鳳城君 : 중종의 자) 완의 외손 선조22년(1589)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93년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禮文館檢閱)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등 삼사(三司)의 요직을 역임하고 경기도. 황해도. 경상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1623년 호조판서로 승진하였고 인조16년(1638) 염철사(鹽鐵使)로서 중국의 심양에 가서 물물교환을 하였고, 그 뒤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1638년 우의정, 1643년 영의정에 이르렀고 이듬해에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관직에 있는동안 탁지(度支)에 대한 뛰어난 경륜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시와 글씨에 능하였는데 시는 심오전아(深奧典雅)하면서 호상활달(豪爽豁達)하였다고 평가된다.
▲유봉휘(柳鳳輝, 1659-1727)묘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문화(文化) 자 계창(季昌) 호 만암(晩庵) 현감(縣監)속의 증손. 좌랑(佐郞) 성오(誠吾)의 손 영의정 상운(尙運)의 자. 청송부사(靑松府使) 이행원의 외손. 충청도 도사(都事) 조근(趙根)의 서. 숙종10년(1684) 진사시에 오르고 숙종25년(169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부제학(副提學)등을 역임하고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 경종1년(1721) 사직(司直)으로서 노론이 세제(世弟:英祖)책봉을 주장하자 이를 반대하였으며, 이어 세제의 대리청정이 시작되자 소론의 영수로서 왕이 병을 앓지 않도록 대리청정케함은 부당하다고 극간하여 마침내 이를 철회시키고 노론을 실각시켰다. 이듬해 세자시강원부빈객(世子侍講院副賓客)이 되고 경종3년(1823) 이조판서를 거쳐 1725년 영조가 즉위한후 탕평책(蕩平策)으로 노론. 소론의 연립정권이 수립될 때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 소론 사대신의 한사람으로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킨 주동자라는 노론의 탄핵으로 경흥에 안치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죽은 뒤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영조31년(1755) 다시 반역죄로 추형(追刑) 당하였다. 같은 소론이었던 이광좌(李光佐)와는 달리 과격파에 속하여 노론의 탄압에 적극적이었으므로 노론 집권후 신원(伸寃)되지 못했다.
▲유상운(柳尙運,1636-1707)묘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문화(文化) 시호 충간(忠簡) 자 유구(悠久) 호 약재(約齋). 누실(陋室) 첨정(僉正) 몽익(夢翼)의 증손. 현감 숙(夙)의 손 좌랑 성오(誠吾)의 자. 좌참찬(左參贊) 박동량(朴東亮)의 외손. 우의정 이행원(李行遠)의 서. 현종1년(1660) 진사가되고 16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예조와 병조의 좌랑. 사간원 정언. 병조정랑. 경상도사.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필선. 사헌부 장령. 종부시정. 강계부사.등을 거쳐 통정대부에 올랐다. 숙종5년(1679) 문과정시(文科庭試)에 장원급제하여 가선대부에 오르고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도승지(都承旨). 한성좌윤(漢城佐尹). 공조참판. 대사간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자 평안도 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숙종9년(168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병조. 호조. 예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때 행한 선정으로 이곳사람들은 사당을 지어 살아있는 초상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후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분당되자 소론에 속하여 노론의 영수 김석주(金錫舟)의 전횡을 탄핵하였다. 숙종11년(1685)호조판서가 되고 이어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나 숙종15년(1689) 중궁이 폐위되어 출외(黜外)당하였다가 숙종20년(1694)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자 이조판서로 기용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고 숙종22년(1696) 영의정에 올랐으나, 1698년 노론의 배척을 받은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을 변호하여 삭직(削職)되었다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임되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당쟁을 일삼는다는 노론의 탄핵으로 판중추부사에 전직되었다. 1701년 무고의 옥사가 일어나 그주모자로 투옥된 장희재(張希載)의 노비 엽동(葉同)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로서 사건을 수습하려 했으나 계속 사건이 확대되어 장희빈까지 연좌되자 세자의 생모를 사사(賜死)할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노론의 반대로 남구만(南九萬)과 함께 파직되어 이듬해 직산(稷山)에 부처당하였다. 1704년 풀려나와 이듬해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에 제수되고 70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갓다. 글씨를 잘썼으며 1712년에 세워진 신도비는 영의정 남구만이 짓고 영의정 최석정이 썼다.
▲윤승훈(尹承勳,1549-1611)묘 양평군 강상면 화양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해평(海平) 시호 문숙(文肅) 자 자술(子述) 호 청봉(靑峯) 증영의정 훤(萱)의 증손. 헌강공(憲簡公) 은필(殷弼)의 손. 사헌부 감찰 홍언(弘彦)의 자. 이순민(李舜民)의 외손. 성호문(成好問)의 서. 선조6년(1573) 진사가되고 그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선조14년 정언으로 있을 때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신창현감(新昌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응교로서 선유어사(宣諭御使)를 겸하여 전란의 뒷수습에 공을 세워 1594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고 곧이어 형조참의. 서로조도사(西路調度使)가 되었다. 이때 번호(番胡)가 난을 일으키자 토벌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을 시켜 중군(中軍)을 이끌고 세갈래로 진격 소탕하였으니 어유간(漁遊間)에서 풍산보(豊山保)에 이르는 300여리에 번호의 무리를 찾을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다시 호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선조30년(1597)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후 병조판서를 거쳐 1610년 우의정으로 승진되었으나 이듬해 이항복(李恒福)을 신구(伸救)하려다 3사의 탄핵으로 면직되었다. 곧 다시 기용되어 1603년 좌의정이 되고 1604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선조에 대한 존호(尊號) 의 결정에 소홀하였다는 좌의정 유영경(柳永慶)의 모함으로 한때 파직되었으나 곧 신원되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만웅(李萬雄,1620-1661)묘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전의(全義) 자 심보(心甫) 호 몽탄(夢灘) 증영의정 제신(濟臣)의 고손. 증좌찬성 기준(耆俊)의 증손. 신계현령(新溪縣令) 중기(重基)의 손. 중추부사 행건(行健)의 자. 이정간(李挺幹)의 외손. 달성위(達城尉) 서경주의 서. 인조17년(1639)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참봉을 지냈다. 효종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었다. 통정대부에 올라 병마수군절도사를 지냈고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이명준(李命俊,1572-1630)묘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전의(全義) 자 창기(昌期) 호 잠와(潛窩). 진사재(進思齋) 절도사 제신(濟臣)의 자. 첨지중추부사 김찬(金纘)의 서 퇴우당(退憂堂) 이정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 선조33년(1600)에 진사가되고 1603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조. 형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광해군5년(1613)에 계축옥사(癸丑獄事)때 경상북도의 영덕(盈德)에 유배된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장령으로 재기용되었다. 다시 홍문관에 등용되었다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인조7년(1630)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를 올려 대사간이 되었고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한후 사망하였다.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이병모(李秉模,1742-1806)묘 양평군 양서면 복포리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덕수(德水) 시호 문숙(文肅) 자 이칙(彛則) 호 정수재(靜修齋) 증좌찬성 악진(岳鎭)의 손 증영의정 연(演)의 자. 증 수찬 남유상(南有常)의 외손 심추(沈錐)의 서 영조49년(177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후 경기도암행어사. 수찬. 교리. 규장각 직각등을 역임하였다. 1778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후 승지가 되었다. 영조8년(1784)경상도 관찰사. 1786년 규장각 직제학. 형조판서등을 역임한후 1790년 외직으로 함경도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794년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순조1년(1801)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이 되었고, 영중추부사를 거쳐 1805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나 평안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묘향산 수충사(酬忠寺)의 휴정(休靜)의 비문을 지었으며 정조21년(1797)에 왕명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등을 편찬하였다.
▲이여(李寄,1645-1718)묘 양평군 양동면 계정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덕수(德水) 시호 문경(文敬) 자 치보(治甫) 호 수곡(睡谷). 수촌(睡村). 포음(浦陰) 안성(安性)의 증손. 식(植)의 손. 시정 신하(紳夏)의 자. 신후원(辛後元)의 외손. 임좌(任座)의 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숙종6년(1680) 춘당대시문과에 4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고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승지를 거쳐 숙종12년(1686) 부제학이 되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과 함께 면직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몰락하자 형조참판에 기용되었고 중궁복위교명문(中宮復位敎名文)을 짓기도하였다. 이후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1696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으며 이듬해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하고 숙종27년(1701)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옥사(獄事)를 엄정히 처리 이름을 떨쳤다. 1703년 좌의정에 제수되고 숙종36년(1710) 영의정에 올랐으며 이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옮겼다. 학식이 있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이행건(李行健,1588-1654)묘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전의(全義) 자 사이(士以) 호 기곡(箕谷) 청강공(靑江公) 제신(濟臣)의 증손. 기준(耆俊)의 손. 현령 중기(重基)의 자. 임색(任穡)의 외손. 이정(李挺)의 서. 어려서부터 준걸스럽고 특이하여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이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5,6세에 비로소 글을 읽어 경사(經史)를 모조리 통달하였는데 광해군4년(161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당시 종조부 경준(耕俊)이 적신(賊臣)의 그물에 걸려 죽게되니 아버지도 어머니를 모시고 향리로 낙향하여 은둔하였다. 이에 벼슬을 단념하고 은둔하였다가 인조1년(1623) 인조반정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가 되었다가 상을 당하여 동생 행원(行遠)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여막을 짓고 시묘하였다. 1628년 별시문과에 정치화(鄭致和). 이흥발(李興渤)과 함께 을과급제하여 예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곧 병조좌랑으로 옮기어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으며 이후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530년 2월 원주목사 심명세(沈命世)가 소를 올려 선조의 능인 목릉(穆陵)은 땅이 불길하고 또한 물기운이 있다고하자 의견이 궁중에 분분하였다. 그리하여 땅을 판결과 그렇지 않음이 판명되었다. 이에 심명세의 관직을 삭탈하자고 하였으나 이때 홀로 당초에 조정에서 극력 다투지 않고 일이 끝난 다음에 죄를 오로지 심명세에게만 돌리니 심히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공격받아 사간원에서 해임되어 사예(司藝)를 거쳐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의 외직으로 나갔다. 이후 충정공 이귀(李貴)가 이조판서가 되어 다시 청망을 되찾았고 치적이 많아 품복인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대부인의 탈상후 시강원 필선. 통례원상례를 역임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ㅅ겅으로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선임되어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이후 적군이 물러가자 왕을 호위한 공로로 통정대부가 되어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이르렀으며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4년 8월 동지중추부사로서 일생을 마쳤다.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행원(李行遠,1592-1648)묘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전의(全義) 시호 효정(孝貞) 자 사치(士致) 호 서화(西華) 고려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 청강공(靑江公) 제신(濟臣)의 증손. 증 좌찬성 기준(耆俊)의 손. 신계현령 중기(重基)의 자. 임색(任穡)의 외손. 감사(監司) 박동열(朴東說). 현감(縣監) 한사덕(韓師德)의 서 광해군2년(1610) 진사가 되고 1617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 박사를 거쳤다. 인조1년(1623)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날밤 가주서(假注署)를 숙직하였다가 이귀(李貴). 심명세(沈命世). 최명길(崔鳴吉)등이 난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호응하였다. 곧 장유(張維)가 교서의 초고를 부르면서 쓰게하자 한자의 착오도 없이 잘 수행하였는데 바 사람들이 비주서(飛注書)라고 칭찬하였다. 1624년 부원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와 함께 종군하여 역적을 토벌하겠다고 청하였다. 원종(元宗) 부묘때 극구만류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당하고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검열. 교리. 정자.를 역임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승지로서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여 척화(斥和)를 적극주장하였다. 화약(和約)한후 부빈객(副賓客)으로 볼모로 잡혀가는 봉립대군(鳳林大君)을 호종하여 심양으로 갔다. 이곳에서 청나라 관리들이 김상헌(金尙憲)을 잡아가서 갖가지로 공갈하고 힐책하니 좋은말로 변명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또한 일본사신 현방(玄方)이 왔을때에는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10년후 현방이 시를 지어 보내고 문방구(文房具)를 선사하면서 안부를 물었다 한다. 심양에서 귀국한후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1647년 우의정에 올랐다. 인조26년(1648) 사은정사(謝恩正使)로 병을 참고 떠났는데 의주(義州)에 이르러 일생을 마쳤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문장이 좋았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정근옹주(貞謹翁主)묘 양평군 강상면 병산리 조선조 14대 선조(宣祖)의 딸 후궁인 정빈(靜嬪) 민씨의 소생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김이원(金履元)의 아들인 김극빈에게 출가하였다. 김극빈은 일선위(一善尉)에 봉해졌다.
▲정지연(鄭芝衍, 1527-1583)묘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동래(東來) 자 연지(衍之) 호 남봉(南峰) 영의정 광필(光弼)의 증손. 봉상시정(奉常侍正) 유인(惟仁)의 자. 이중호(李仲虎). 이황(李滉). 서경덕(徐敬德). 성제원(成悌元)의 문하. 명종4년(1549)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뒤 1566년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전 세자로 있을 때 이황의 추천으로 왕손사부(王孫師傅)가 되어 하성군(河成君) 균(鈞)을 보도(輔導)하였다. 선조2년(1569) 의금부도사로 재직시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사헌부지평. 홍문관부교리. 사간원헌납. 홍문관직제학등을 지내면서 청론(淸論)을 벌였다는 칭송을 들었다. 1574년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1581년 우의정에 올랐다. 1583년 병이 깊어지자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여러번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병중에 있으면서도 글로 국사를 논의하다가 죽었다. 죽기전 대신할 인물을 추천하라고 하자 이산해(李山海)를 천거하였고 또 유소(遺疏)로 이이(李珥)를 추천하였는데 특히 이이의 장단점을 골고루 이야기 한 뒤 기질을 잘 파악하여 등용한다면 나라에 큰 보탬이 될것이라 하였다.
▲혜순옹주(惠順翁主)묘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조선조 제11대 중종의 딸 후궁 경빈(敬嬪) 박씨의 소생으로 김헌윤의 아들 김인경(金仁慶)에게 출가하였다. 김인경은 중종17년(1522) 광천위(光川尉)에 봉해졋다.
▲홍중보(洪重普,1612-1671)묘 양평군 용문면 화전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남양(南陽) 시호 충익(忠翼) 자 원백(遠伯) 호 이천(梨川) 병조참의 서익(瑞翼)의 손. 평안도관찰사 명구(命耈)의 자. 인조13년(1635) 진사시에 장원. 강릉(康陵). 영릉(英陵)참봉. 시직(侍直)등을 지내고 164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정언. 성산현감(星山縣監)을 거쳐 효종1년(1650) 수찬으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후 수원부사(水原府使).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호조참판. 예조참판.을 거쳐 현종5년(1664)지경연사(知經筵事). 호조아 병조판서등을 역임했는데 특히 도략에 밝아 병조판서를 4번이나 지냈다. 그후 우참찬. 판의금부사등을 거쳐 1669년 우의정에 올랐다. 숙위(宿衛)가 허술한 것을 우려하여 기내(畿內)의 군병중에서 날쌘 군사를 뽑아 친히 조련하여 정초군(精抄軍)으로 삼아 임금을 호위케 하였는데 이는 숙종때에 와서 금위영(禁衛營)으로 개칭되었다.
▲김극개(金克愷,1474-1544)묘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광산(光山) 자 무화(茂和) 아버지는 공안공(恭安公) 겸광(謙光)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삼척진씨(三陟陳氏)로 사직 계손(繼孫)의 딸이다. 연산군 3년(1496)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14년(1519) 식년시 문과에 병과 19인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이 되었고 훈련원 첨정과 사헌부 지평을 거쳐 중종 16년(1521) 사간원 사간, 사도시 부정이 되었다. 중종 17년(1522) 승정원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중종 21년(1526) 개성부 유수로 옮겼고 이어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가선대부 예조참판(嘉善大夫禮曺參判), 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인경(金仁慶,1515~1583)묘 양평군 옥천면 신복1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광산(光山) 자 경유(景裕) 호 송월헌(松月軒) 아버지는 증판서 헌윤(憲胤)이며, 曾祖는 참찬(參贊) 겸광(謙光)이다. 어머니는 증정부인 구성이씨로 동추 안세(安世)의 딸이다. 7세 때 중종 임금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결혼하여 부마로 선발되어 중종 17년(1522) 순의대부 광천위가 되었다. 중종 22년(1527)에 혜순옹주의 어머니인 장모 경빈(敬嬪) 박씨가 작서(灼鼠: 당시 세자였던 仁宗을 저주하던 일로 진범은 김안로의 아들 延成尉 김희(金禧)로 밝혀졌음)의 변에 화를 입어, 이에 연좌되어 상주(尙州)에 유배되고, 중종 28년(1533) 김안로(金安老)가 다시 옥사를 일으켜 당성위 홍려가 장살(杖殺)되었고 또 이듬해인 중종 29년(1534) 적소를 공주로 옮겼다. 중종 32년(1537) 김안로가 복주되자 즉시 석방되어 복작되어 명종 2년(1546)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자의대부(資義大夫)로 승진되었다. 명종 16년(1560) 왕이 종실부마들을 모아 제술시(製述試)를 보이는데 장원하여 통훈대부로 승진되었다. 자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너그러워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제매와와 우애가 돈독했으며 부조(不?)의 은전을 받았다. 配는 혜순옹주(惠順翁主), 繼配 진주강씨(晋州姜氏)이다.
▲김기석(金箕錫,1828-1890)묘 양평군 옥천면 신복2리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광산(光山) 시호 정무(貞武) 자 성극(聖極) 호 우정(藕汀) 아버지는 증숭록대부 상순(相順).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좌,우승지, 병조참의,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 삼군부 훈련원사, 의정부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고, 이어 총융사(摠戎使)요, 숭록대부에 승자되었다.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금위대장(禦衛大將) 등을 역임했다. 1884년 친군영(親軍營)이 설치되자 우영사(右營使), 별영사(別營使), 해방영사(海防營使) 등을 지냈다. 配는 정경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김수현(金壽鉉,1825-1895)묘 양평군 양서면 상심리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광산(光山) 자 경일(景一) 아버지는 정간공(貞簡公) 재창(在昌)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덕수이씨로 정모(鼎謨)의 딸이다. 헌종 15년(1848)에 참봉 현감을 거쳐 철종 12년(1860) 식년시 문과에 갑과 3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보국 이조판서였다.
▶심충겸(沈忠謙,1545~1594)묘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산 135-1 (아오곡)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청송(靑松) 시호 충익(忠翼) 자 공직(公直) 호 사양당(四養堂) 청능부원군강(靑陵府院君 鋼)의 아들, 서인(西人)의 영수 의겸(義謙)의 아우, 명종비 인순왕후(明宗妃 仁順王后)의 동생이다. 명종19년(1564) 사마시(司馬試), 선조5년(1572)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한 후 정언(正言)에 발탁되었다. 지평(持平)·헌납(獻納)·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임진왜란 때는 병조참판으로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가 되어 왕을 호종(扈從)· 의주(義州)에 피난할 것을 역설했고, 세자 광해군(光海君)을 호위하여 일본군 방위에 힘썼다. 선조26년(1593) 호조와 병조의 참판으로 우빈객(右賓客)을 겸직, 군량미 조달에 크게 활약한 뒤 병조판서에 특진(特進)되었다.
청림군(靑林君)에 추봉(追封)되었다. 특히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에 [사양당집(四養堂集)]이 있다. 묘는 정경부인 전주이씨(貞敬夫人 全州李氏)와 합장묘로서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등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장방형의 암석 위에 대리석 비신을 세웠는데, 규모는 높이 197㎝, 폭 87㎝, 두께 30㎝ 이다. 비문은 신흠(申欽)이 짓고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는데, 비의 전체 부분이 풍화(風化)로 마멸되고 이끼가 켜서 판독(判讀)하기 어렵다. 묘역 부근에는 선생을 제향(祭享)하는 사당 충익사(忠翼祠)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