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전설이 되었어야 할 권오설과 그의 흔적
[연재] 한종수의 ‘이달의 근현대사적지’(1)
‘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근현대사적지를 선정해 소개하는 '이달의 근현대사적지' 연재를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장에 이어 이번 호부터 한종수 작가가 맡아주시기로 했습니다. 더 많은 격려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말 그대로 한국 근현대사는 파랑만장, 우여곡절 그 자체이고, 매일 매일이 기념해야 될 사건과 인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국경일은 물론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날은 그렇게 많지 않다. 2월 28일(대구 학생 의거일), 3월 1일, 4월 3일, 4월 19일, 5월 18일, 6월 10일, 10월 16일(부마항쟁기념일) 등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국가기념일의 위치에 오른 날들이다. 그 중에서도 6월 10일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6.10만세운동과 6월 민주항쟁 기념일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6월 민주항쟁 기념일로만 기억을 하고,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3.1혁명과 광주학생 운동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3대 항일운동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실제로 6.10만세운동을 다루는 책과 논문도 거의 나와 있지 않다. 관련 사진도 몇 장 되지 않는다.
이렇게 낮은 ‘지명도’도 문제지만 6.10만세운동은 지도자가 누군지 아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이다. 이달의 근현대 사적지는 이렇게 잊혀진 항일운동인 6.10만세시위의 기획자였지만 정작 당일 그 순간에는 종로경찰서 지하 고문실에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던 권오설 선생의 무덤과 그 흔적이다.
권오설 선생의 옥중 사진. 가혹한 고문을 받았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사진-필자]
탄생과 성장
권오설 선생은 1897년 12월 18일,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에서 그리고 몰락한 퇴계학파의 끝세대로 태어났다.
1897년은 이미 빛과 힘을 모두 잃은 조선왕조가 마지막 몸부림으로 대한제국으로 변신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1926년, 이 ‘제국’의 두 번째이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붕어하며 권오설이 주도한 6.10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운명이라면 운명일 것이다.
그는 어릴 적 안동의 향토학교들을 다니다가 그 유명한 경주 최부자 가문의 주인 최준의 지원을 받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중퇴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역시 중퇴하고 말았다.
중앙고등보통학교는 훗날 6.10만세 운동의 주역 중 하나가 된다. 또 잠시 동안이지만 일본으로 넘어가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녔으나 이 또한 얼마 못 가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에이소쿠 영어학교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만난 곳인데, 조소앙, 안호상, 김교신, 김도연, 현진건, 리승엽, 신익희, 김상덕 등 한국 근현대사를 움직이는 쟁쟁한 인물들이 몸을 담은 학교이기도 하다.
세이소쿠 학교의 안내판 [사진-필자]
각성과 행동
귀국 후에는 전라남도청의 고용원으로 근무하던 중 광주에서 3.1혁명에 참가하였다가 6개월 여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1월경 출옥한 그는 귀향하자마자 여러 학교를 세워 교장 겸 교사로 활동하며 교육운동에 매진하는 동시에, 농민조합과 안동청년회, 일직금주회를 조직하며 사회계몽 운동을 병행하였다.
학교 진학과 중퇴, 먹고살기 위한 일제에의 일시적인 협력, 3.1혁명 참가와 옥고, 일본 유학 시도, 교육 활동, 사회계몽 운동...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청년시기에 보냈던 삶의 궤적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1922년에는 동향의 여러 인사들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변신했다. 사회 각 분야의 대중조직 건설을 중요시하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풍산소작인회를 결성하여 농민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는데, 무려 5천명의 회원을 둘 정도로 성장시켰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노동운동에도 참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인쇄직공조합과 철공조합 등 여러 분야의 노동조합 결성에도 앞장서고 여러 파업을 지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6월 일제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 언론집회압박탄핵회에서 방침을 결정하는 위원으로 선임되어 결의문을 작성하여 언론투쟁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1923년에는 홍명희, 민창식 등과 함께 신사상연구회를 창설하였다. 이 조직은 1924년 11월 19일 화요회로 개칭하고 행동단체로 변신하면서 조선공산당 창립에 한 축을 맡는다.
1925년 4월 17일, 중국식당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자 이튿날인 18일 제1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고 같은 날 조선노농총동맹 대표로서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여하여 고려공산청년회 7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조직부 책임자를 맡는다.
하지만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니라 6.10만세운동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5월 1일 노동절을 기해 노동조직을 중심으로 파업과 시위를 할 예정이었지만, 4월 25일 순종황제가 승하하고 장례식이 6월 10일로 정해지자 계획을 변경한다.
권오설은 '6.10 투쟁 특별위원회'라는 지도부를 조직하고 그 책임을 맡았다. 그는 학생운동계의 중심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을 포섭하는 한편 만세운동을 7년 전, 3.1운동 때와 같이 전 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학생계를 망라한 통일전선체로서 '대한독립당' 조직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6.10 만세 운동에는 조선공산당·천도교·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그리고 해외조직까지 광범위한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또한 격문을 조선일보 지사·소비자조합·천도교 조직·청년단체 등을 통해서 전국 각지에 발송하였다.
전국을 호남선·경부선·경의선·경원선 등 4개 방면으로 나누고, 책임자를 정하여 만세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다는 구체적 계획도 세워 놓았다.
경성에는 6월 8일 밤을 기해 격문을 배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보가 누설되어 권오설은 6월 7일 검거되어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에 피체되고 말았다. 권오설은 이곳의 지하고문실에서 주리틀기와 압슬 등 무자비한 고문을 당해 불구가 되었지만, 굽히지 않고 동지들을 보호하였다. 이 덕분에 동지들은 6월 10일 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권오설 선생이 체포된 장소. 종로22길 14-1이다. [사진-필자]
그러면 이쯤에서 일본은 이 날을 어떻게 대비하고 있었을까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당연히 그들 입장에서는 7년 전의 ‘악몽’을 되풀이 할 수 없었기에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돈화문 앞에 임시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운명의 장소 탑골공원에는 기관총 부대까지 배치했다.
본국에서 병력을 데려왔으며 부산항과 인천항에 군함을 띄워놓았을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권오설이 검거되었으니 경비는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성에 배치된 군대만 5천이 넘었고, 상당수는 위압적인 기병대였다.
몇 안 되는 6.10만세운동 관련 사진이다. 순종의 상여를 줄러싼 군중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돈화문 앞을 출발한 상여가 종로3가 단성사 앞에 이르자 권오설의 지도를 받은 이선호를 위시한 중앙고보생 1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격문을 뿌렸다. 거의 동시에 인근 관수교에 대기하고 있던 보성과 연희전문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확산시켰다.
연희전문 학생 중에는 권오설의 먼 친척이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인 권오상도 있었다. 을지로5가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많은 이들이 학생들을 따라 만세를 외쳤지만 일제의 대비가 워낙 단단했고 무자비한 진압으로 지방으로는 거의 확산되지 못했다. 20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에는 권오상도 있었다.
주인공이었어야 할 권오설은 이를 보지 못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공교롭게도 조선공산당 창립 5주년인 1930년 4월 17일 순국하고 말았다. 시신은 안동의 고향에 묻혔다. 권오상은 그보다 2년 전인 1928년 6월 3일,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권오설 선생의 묘.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346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진출처-오마이뉴스]
6.10만세운동의 의의와 후세의 평가
그럼에도 6.10 만세운동은 이후에 전개되는 항일 민족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이념을 초월하여 반일 민족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고 여러 번 시도되는 좌우 합작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다음 해 신간회가 탄생하는 데 큰 동력이 되었다.
또한 학생운동이 더욱 조직화되어 조선학생회, 조선학생대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의 독자적 운동 조직을 만들었고, 6.10만세운동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3.1혁명 때와는 달리 학생들이 6.10만세운동 때에는 독자적인 주체로 부상했고 3년 뒤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년)에서는 완전히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거사 3일 전 체포되어 순국하기는 했지만 권오설은 이런 엄청난 항쟁의 기획자이자 지도자였다. 이런 인물에 대해 ‘해방된’ 조국은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너무나 무심했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6.10만세운동도 형해화되어 중앙고등학교가 사실상 ‘독점’하는 기이한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 기념비가 중앙고등학교 교정이 달랑 하나, 단성사 앞에 기념표석이 달랑 하나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2005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다.
권오상도 같이 받았지만 두 등급 아래인 애족장이었다. 2009년, 고향 안동의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그가 쓴 편지와 그가 받은 편지를 모아 <권오설>을 두 권의 두꺼운 책으로 엮어 내었다. 그리고 최근인 2024년 5월 18일, 기념사업회가 창립총회를 열었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6월이 되면 박종철과 이한열 뿐 아니라 권오설도 기억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한종수 작가
한국사마천학회 부회장(2017년~)으로 일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정신계승사업 기획자문위원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해설사로 활동하며, 역사민주올레 대표로서 매주 근·현대 역사탐방을 하고 있다.
공공도서 집필과 각종 강연을 병행하고 있으며, 지역사에서 세계사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저술로 주목받고 있다.
저서로 대표작인 『세상을 만든 여행자들』(2010)을 비롯하여 『민주주의를 걷다』(2021), 『페니키아 카르타고 이야기』(2023) 등이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