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제8기계화보병사단 오뚜기전우회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21연대♡전우방 제21연대 참모 등의 장병 명단과 복무당시의 추억(72.10-75.8)
서사범/제21연대본부대7210-7508서울 추천 0 조회 1,939 12.04.22 15:50 댓글 299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저는 포병부대의 3보 이상 승차와 포탄의 사거리 계산(중력과 삼각함수 이용)이란 말만 사단신교대에서 포병학교 출신들에게 들었으나,
    실제로 사격하는 모습이나 훈련모습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포병병과 중에서 관측이나 사격통제 등등 포병의 어느 분야인지는 모르나
    당시의 신교대에서 포병학교 출신 일부는 삼각함수를 이용한 사거리 계산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더군요.
    저는 우리 연대의 전투지원중대 106mm무반동총 소대 찝차가 정렬되어있는 모습만 보았지 106mm무반동총소대가 실제로 훈련하는 모습을 보지 못 하였으나
    4.2인치 박격포 소대원들은 연병장에서 소총을 둘러메고서 박격포 설치(?) 훈련을 하더군요.

  • 제가 현역 시에 제5군단 통신운용지시(SOI)를 보면 군단포병사령부에는 영어명(한글로 표시)의 단위부대가 일부 있었는데
    역할은 잘 모르지만 당시에 최신의 업무를 수행하는 부대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대강만 알았던 군단뿐만 아리라 사단의 포병에 관한 모든 기억을 제대하면서 반납하였습니다.
    전우카페에 포병에 관한 얘기도 많아서 인터넷을 검색하여 포병에 관해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예전에 몰랐던 것까지).
    그리고 제가 현역 시에 다루었던 암구호를 작성하여 배부, 회수하였던 상급부대인 당시의 韓美 제1군단도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군단 위의 군단이었다고 하네요).

  • 당시에 통신대는 다른 처부나 중대와는 떨어져서 별도의 건물이 있고 주위에 공터가 많아 약간 특이한 점도 있었읍니다.
    교회 아래 언덕에는 암호실 북쪽으로 언제 팠는지 모르지만 제 전입 전에 선임들이 판 굴이 있었습니다.
    어림짐작으로 폭 1.2m, 높이 1.5 m 정도로 길이 4-5m로 들어가다 왼쪽으로 꺽여 2-3m 정도 들어가는 크기였습니다.
    군대에서는 정수 이외의 보급품(아마 장외품?이라 불렀죠)은 반납하고 갖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 굴은 내무사열 시에 장외품을 보관한다든지 하는
    통신대사병들만의 비밀창고(?) 역할을 했습니다. 정식시설이 아니라 전기시설이 없으므로 어두컴컴하였죠.
    졸병 때는 이곳에 자주 들어가 봤습니다.

  • 암호실과 굴 사이에다는 통신대원들이 스스로 간이체력훈련장을 만들어 저녁에 운동을 했습니다.
    또 통신대 북쪽의 통신차량 엄폐호 위에는 통신대 식기대가 있어 이곳에서 졸병들이 식기를 닦았습니다.
    언제부턴가 후임들이 엄폐호 부근에다 토끼집을 만들고 토끼를 키웠는데
    저는 토끼를 키우는 것만 보고 제대했습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부대 돌담까지 사이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었는데
    통신대 쪽으로 비탈진 곳에 통신대원들이 일과 후에 모여 잡담도 하고 모포 등을 널기도 했으며,
    여름에는 본부대화장실이 냄새가 나므로 고참들이 돌담 쪽으로 비탈진 곳에서 더러 용변을 봤습니다.
    그런 곳은 야전화장실이라고들 불렀습니다.

  • 통신대의 동쪽 뜰에는 살구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고참들이 "내가 도장을 찍어놨으니 손대지 마라"고
    하였지만, 열매가 익을 때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통신대와 CP 사이에는 산골짜기에서 시작된 작은 도랑이 있어 본부대와 연병장 사이로 흘러갔는데
    수송부정비고 앞마당 부근에서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네요.
    73-74년 무렵(?)에는 잣나무 심기뿐만 아니라 주간에 연대뒷산 사방사업 사역도 더러 했습니다.
    통신대에서는 본부대와 연병장의 대부분이 보였으나 전투지원중대와 참모부 건물 쪽은 CP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 전우님이 말씀하신 관음봉도 멀리 보였습니다.

  • 통신대는 본부대나 지원중대와는 완전하게 다른 부대 인것같았습니다.연대안에 있으면서 통신대안에는 못들어간것
    같읍니다. 암호실은 암호병과친해서 가끔 밖에서 만나고 보안대는 부르면 가보고 교회는 들어가보지는 않고 보초서는 망대에서 쳐다보곤 햇지요. 잦나무는 뒷산에 열심히들 심었던기억이 납니다. 작은도랑에 겨울이나 밤에는 뒤에변소에 가기싫어서 소변들을 많이보아서 저는 본기억은 안나지만 인사계가 아침조회시간에 도랑에 소변보지말라고
    이야기한것이 기억 납니다. 연대는 나름대로 여러부처끼리 따로 생활하는 체계라서 서로 교류가 없었던것은 사실입니다.

  • 연말이나 연초에는 장교들은 장교식당이나 일동에서 파티하는데 특식이나 먹고 보초나서고 별로 의미없이 시간을 보낸것같습니다. 지금은 달라지었을것입니다. 재미있게 군대에서 시간보내기보다는 모자라고 춥고 시간만가기바라고
    어떤면에서 생각이 정지된것이지요. 시키면 시키는대로하라는식의 일제군대식이 살아있어서 무언가 자기이야기할수없고 서로의 전우애도 일반중대보다는 약했던것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제대후 만나는것도 타군에비해서 드문것같습니다. 서로가 한창 혈기왕성 시절의 고생한 경험을 나누면 좋기도할것같은데요.

  • 제 경우는 병력이 많이 동원되어 대규모로 작업한 잣나무 심기보다도 사방사업의 사역을 더 많이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도랑이나 석축에다 소변을 본 것은 특히 제가 졸병 때의 고참들이었는데 그 때의 고참들은 인사계 말을 잘 안 들은 것 같습니다.
    연말연시 분위기는 제가 연대 전입될 무렵의 고참들이 많이 조성한 것 같은데 그 후는 점차 줄어든 것 같습니다.
    매년 연말이면 대통령 하사품이라고 쓰여진 종합과자세트를 사병들에게 나눠주었죠.
    주로 해태제과의 제품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통신대의 경우에 제 동년배와 직전, 직후가 선임, 후임 등의 다른 연배들보다 전우애나 단결심이 적었던 듯 싶습니다.

  • 제가 아주 졸병일 때 통신대가 다른 처부와 같은 내무반을 이용할 무렵에는
    연병장 쪽 출입문을 이용하는 인사과 등의 침상은 화장실이 상대적으로 멀기 때문에
    주로 그쪽 침상의 고참들이 도랑이나 석축에다 소변을 특히 많이 본 것으로 기억됩니다.
    본부대행정반을 통하는 출입문을 이용하는 통신대 등의 침상은 화장실이 가까운 편이었습니다.

  • 부대있을적에 인사과병사가 휴가증을 안적은것을 주어서 본부대 서무계는 알써줄것이고 본인이 써가지고 외박허가받아가지고
    집으로 가려고 부대앞에서 뻐스타고 나가다가 만세교 헌병이 휴가증 보여달라고 했더니 내리라고해서 내려보니 아마도 비표시가 휴가증에 쓰는데 모르고 쓰다보니 걸린것입니다. 부대에서 연료담당한다니 부대로 들어가라고해서 부대로 들어오면서 이것걸리면 문제 될텐데하면서 지내다가 그냥 간적이 있습니다.축석검문소,만세교검문소 , 운천가려면 성동검문소등
    위수지역 벗어나기 힘들고 백바가지(헌병통칭)들이 힘좀쓰고 역의 tmo에 병사들 괴롭혀서 보면 도망가는것이 상책이었습니다.

  • 제대후 졸업하고 거래처에 대리,과장등이 군시절 rotc로 헌병장교를 하였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사단헌병장교이면
    짚차타고 위세가 대단하였지요 .휴가나와 군복입고 길에다니면 잡아서 군기불량이라고하고 돈도뜯어내곤 했던것같습니다.부대앞삼팔교에도 헌병이 있는데 부식차에서 특식나오면 지나가면서 조금주어야야 했습니다.
    후방에서 근무한친구들이야기 들으니 완전히 자유롭게다니고 야외보초는 안서고 주로 불침번만 서고 따듯한동네이고 보급이 좋으니 기름난로나 스팀속에서 살고 마음대로 외출,외박다니고 저희처럼 군대생활한것과는 왼전히다르더군요. 부대가 좋아졌어도 아직도 포천에서 근무하면 고생스러울것입니다.

  • 부대에서 휴가나올 때에 서울까지 검문소가 여러 군데 있어서
    검문소에서 버스에 헌병이 올라오면 정식휴가인데도 왠지 긴장이 되었습니다.
    삼팔교 검문소는 이동 쪽으로 구보할 때에 많이 봤는데 그런 짓도 하였군요.
    안 전우님이 유류담당이라 다행이었군요.
    저는 73년 추석무렵의 첫 휴가 후 귀대 시에 청주고속터미널에서 사복입은 보안대원에게 휴가증을 보여준 적이 있읍니다.
    제대 후 직장동료 얘기를 들으니 후방부대는 군장 등이 아예 없는 곳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철모까지?)
    헌병출신 얘기로는 사병이 권총차고 근무했던 것이 자랑스러운 모양입니다.
    예전보다는 좋아졌겠지만 포천지역의 현역들은 아마 고생도 되겠지요.

  • 안 전우님이 말씀하는 암호병은 아마도 73년 9월에 입대한 서진경 전우를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서 전우는 서울 서대문구 출신인데 얼굴이 약간 크고 마음이 무척 순했습니다.
    부친은 큰 목공소를 운영하셨고, 어느 동네인지는 잊었지만 서 전우가 제대한지 얼마 안 되어 제가 한 번 목공소에 거서 만나봤습니다.
    아직 복학 전이라 목공소사무실에서 부친일을 도와주고 있을 때입니다.
    그 후로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암호병은 특이한 주특기로서 암호병숫자 등 병력관리를 철저히 한 듯합니다.
    다른 주특기는 어느 정도 제대병과 겹치게 신병이 오는데 암호병은 거의 동시에 전출입이 된 것으로 기억됩니다(제 복무기간 중 딱 한 번 교대).

  • 서진경전우가 맞습니다. 이제다시생각이 나는군요. 혼자암호실에 있고 착한얼굴이 맞습니다. 다른병들과 업무상 잘접촉이
    안되었던것 같습니다. 일전에이야기한 군단통신특수차량옆에 철조망을 둘러쌓인 조그만 막사속에서 근무하엿지요.
    후방의 병들은 너무도 전방과달리 한마디로 마음대로 군대이었던것으로 알고잇습니다. 한번도 총을 수입(청소)한번안하고
    녹슨 총구를 보고 나왓다고 자랑하던 친구가 있었고 육본등에 근무하던병은 완전히 집으로 출퇴근하고 휴가도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더군요. 일전에이야기한 군복이 물이빠져서 대대등에가보면 완전히 허였게 변색되어서 사역등많고 고생들을
    많이 하는것을 보았는데

  • 수방사나 후방에 근무하는 같은 육군이라도 카키복이나 초록색의 군복을 입고다니고 전후방복장이나 근무조건이
    너무나도 차이가 났습니다. 김영철군수과 서무계가 어디에서 구해서 여름에 카키색 반팔군복 입고다녔던것 생각납니다.잠바도 너무 허술해서 미군이 입던 잠바를 사서 많이 입고 다녔지요. 아직도 군복의 질에대해서 많은 논란이 일고있는데 대전군수기지창에서 군복군화등을 만들고 국방연구소등에서 편안한군복을 연구하는데 이것이40년지난는데도 그리개선안되고 하는지는 잘이해가안옵니다.특수천으로 등산복이상의 효과를 다량구매로 단가낯추고 마군이상
    의 질과 장교나 사병차이두지말고 먹고자고입는것은 똑같아야합니다

  • 안 전우님 말씀대로 암호병은 암호실에서 24시간 생활하였습니다.
    암호병은 단 1명이기 때문에 본부대 사역이나 일석점호 등은 열외였지요.
    다만, 통신대 자체 작업이나 배구 등 통신대를 벗어나지 않은 활동에는 참여하였고
    축구 등 연병장에서 하는 시합 등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서 전우는 국민대학교에 다니다 입대하여 후반기 교육을 받느라 연대는 74년에 전입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군복이 물이 빠져 하얗게 된 것은 73년부터 입대한 전우들 옷이 그랬습니다.
    72년도에 내복이나 양말은 질이 형편 없었지만 군복은 73년 보급품보다는 색갈이 덜 바랬습니다.
    복무 중에 어렴풋이 들었는데 군복보급관련 부대에서

  • 군복구매비를 착복했기 때문에 73년부터 군복질이 더 나빠졌고 장성 등이 구속되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73년에 그런 얘기가 사병들에게 돌았습니다).
    통신대도 카키색 반팔군복을 입고다닌 선후임이 더러 있었씁니다. 미군야전잠바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제대하고 한참 후에 거리에서 보이는 현역의 군복을 보니까 다른 것을 몰라도
    얼핏 보기에 야전잠바만은 제가 현역일 때보다는 상당히 좋아진 것 같았습니다.
    제 아들이 남태령의 수방사 화학대에서 복무(2000-2002)할 때 보니까
    부대 내에서는 일반군복을 입고, 외출, 외박, 휴가나올 때만 카키복 등을 입는다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외출복인 셈이지요.

  • 군대 외출복 얘기를 하니까 제가 초등학교 무렵에 들은 얘기가 생각닙니다.
    저보다 10살 가량 많은 동네 형들 얘기가 군 복무를 하면서
    부대 내에서는 허름하고 낡은 옷을 입다가 휴가 나올 때 새옷이나 깨끗한 옷을 입고 나온다고 하더군요.
    그 때는 그려려니 했는데 제가 군에 입대하니까 어릴 적에 들은 얘기가 이해되더군요.
    제가 어릴 때라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그 분들 때는 통일화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겨울의 추위이야기기 하면은 포천추위 정말 지금생각해도 이렇게 추울수있을까생각이 들더군요.보초를 2시에나갔다3시에들어오려면 앞뒤로30분에 들어와서 잠못자고 설상화신어도 춥기는 마찬가지이고 하기는 일긴예보에 철원이항상추운곳으로 나오더군요. 춥고배고프고 괴롭고 하는 군대생활이지요 하여간 눈이오면 군대가기전은 산에가야지 기분이 좋았는데 눈을치우는것을 혼자서해야하니 정말 지긋지긋하더군요 전우애 없이 내몰라라하는 앞에먼저들어온 나이같은 병들이 더하더군요.
    비파로 빽써가지고 중간에 낙하산으로 2명인가 들어오니 졸병이 안들어오고 그들이 또한 성품알아 줄만합니다.
    추위는 지금생각해도 어떻게들 보내는지

  • 물이 항상부족해서 본부대취사하려면 물을 바깥에서 물차트레일러에 실어와야하였습니다.운천으로 부대 옮기고
    나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물에가서 물을 스피야통에 두개들고 연병장가로지르려면 힘이듭니다. 그때는 몸이좋아서
    기운이 나는데도 겨울철 물뜨기는 정말힘들더군요. 물이 바닥에 흐르면 즉시얼어붙더군요.여기가이러니 최전방 gop나 격고지부대는 엄청고생하였을것입니다.지금도 휴가나왔다 들어가기싫을것입니다. 전방이나 이러한지역에 대하여서는 휴가더 더주고 지원을 우선적으로 하여주어야할것입니다, 전철역에서 오뚜기부대 마크단 병들을 보면 가끔
    물어보고 격려해주는데 다른데보다 고생하는티가 나는것같습니다

  • 군대김장담그는것 보셨는지요. 배추와 재료갔다놓고 하사관부인단이 주로 와서도와 주면서 김장후 저장창고에
    보관하고 부식차로 저장창고에서 가져오는데 저장창고는 큰통이라할수있습니다.하여간 김치나 단무지등도 퍼담아
    오느것도 보통일이아니고 김장담그는것도 보통일이아니었습니다.그래도 부대밖에 텐트치고 나가서 일하니 한결 부대안에 있을적보다는 났더군요. 그많은 부대인원이 먹고 하느일이 보통 아닙니다.부대메뉴에의거하면은 집에서
    먹는것보다 재료는 많습니다.명태,도루묵, 이면수등이 생선이 주종인데 무조건 끓이다 보면 다부서지고 특히 도루묵은 말장도루묵이되어서 까시만있고 정말먹기힘들지요.

  • 제가 미국해운회사에서 있어서 주한미군화물도 저희회사배로 들어오고 미군의 물류보급에 관해 알수있었습니다.
    미군은 물류에 중점을 많이두고 물류사령관이 있고 물류에관해 해박한지식을 가진 장교들이많이있고 민간인들과
    협조가 많이되는 편이었습니다.두번째회사로간 미국해운회사가 컨테이너를 창시한업체이고 월남전에 필요에의해
    그때 컨테이너가 한층발전하게되고 기가막힌발명품이 컨테이너입니다.예전에는 벌크라는 이름으로 움직여서 운송이 용이하지않고 불편하였습니다.한국군도 군수사령부와 사령관이있지만 파워도없고 발전등에서 미군과는 많이 차이나는것이 사실입니다.

  • 보급선이 중요하고 잘먹고 입고잘수잇게하는것이 군수인데 물류지식에 군인뿐아니라 일반인도 인식이 약해서
    그냥 움직이는것으로 치부하는게 우리나라의 탈입니다. 서비스산업중에서 많이발전하는것이 물류라는것을
    깨달아야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잇점을 살릴수있고 물류강국으로 일어날수있습니다.군대시스팀이 잘 발전되어
    있으면 이를 민간에 도입내지 응용하는것이 미국식인데 한국은 반대고아니고 서로가 상생과 협조도안되지요.
    납품비리가 아직도 끈이지않은것 보면 물류가 군대에 멀었다는 생각드는것이 기우만 아니길바랍니다.

  • 저도 74년초까지는 보초를 섰는데 보초설 때 손발과 귀가 무척 시려웠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잘 잊기 때문이라 그런지, 아니면 제대할 때 반납해서 그런지
    훈련소 추위만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연대배치 후의 추억은 상기 외에는 이상하게 가물가물합니다.
    설상화도 기억이 잘 안나네요.
    삼팔교에서 성동교 쪽의 도로의 눈치우기는 몇 번 하였고, CP 뒷길, 본부대내무반에서 통신대로 가는 길 등은 눈만 오면 눈치우기를 하였습니다.
    내무반에서 통신대로 가는 길은 비가 많이 오면 골이 패이므로 평탄화 작업도 상시 하였습니다.
    통신대는 인기있는 소속이 아니라 그런지 비파는 없었습니다.

  • 예. 일동의 연대 주둔지가 물이 귀했지요.
    겨울철에는 계곡으로 흐르는 물이 얼어버리고 여름철은 장마질 정도가 되어야 물이 흘렀지요.
    전투지원중대 쪽 우물은 모르나 수송부 마당의 우물은 상당히 깊었습니다.
    저는 얘기만 들었지 부대에서 김장 담그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저장고는 어디에 있었나요?
    제가 알기로는 김치를 부대 밖에서 가져다가 배식하는 것 같았는데요.
    혹시 대대별로 1개 중대가 동원되어 담그지 않았나요?
    제 기억으로는 김치가 1 주일에 3-4식 정도밖에 안 나오고
    대신에 가끔 무말랭이나 깍뚜기도 나오고 다른 반찬도 가끔 나온 것 같고요.
    제 기억으로는 매 식사 때마다 반찬이 나오지

  • 않고 세끼 중에 1-2끼씩 1-2 종류밖에 안 나오고 그 외는 밥과 국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오래 되어서 가물가물 흐릿하게 밖에 기억나지 않습니다(저장고는 제3대대?).
    제 기억이 맞나요?
    통신대의 경우는 주특기 별로 인원은 제 각각이지만 가설병, 교환병, 무전병, CW병, TT병, 무선정비병, 유선정비병, 암호병 등으로 세분되어 있었으므로
    제대병과 신병의 인원수를 감안하여 배치되었습니다.
    다만, TT병은 연대에 정원이 2명인데 어쩐 일인지 74년 초에 3명이 된 적이 있었지만 정원초과이므로 1명이 사단통신대대로 전출됬습니다.
    통신대장님이 저에게 누구를 보내면 좋겠느냐고 물으시므로 입대시기를 감안하여 3명 중에

  • 가운데 군번의 전우를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전우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1명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전우는 마음이 착하였습니다. 그 외는 주특기별로 정원이 초과된 적은 없고 정원을 유지하였습니다.
    훈련소 때도 거의 밥과 국이고 깍두기가 가끔 나왔는데, 중대장이 가끔씩 된장 몇 g, 뭐 몇그램 ..... 등등이
    국에 들어갔다고 하시면서 이들 부식이 정량대로 나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 전우님께서는 군대와 회사에서 크게 보아 물류계통에 근무하신 것 같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미국이 그냥 선진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안 전우님께 미군의 물류보급에 관해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 통신대만 별도의 내무반을 쓴 이후로는
    통신대뿐만이었는지 다른 처부도 마찬가지였는지 잘 모르지만
    겨울철의 식사 때는 식당에서 하지 않고
    처부별로 식당에서 음식을 통으로 가져다가
    내무반에서 각기 배식하여 식사한 적이 드물지만 가끔씩 있었습니다.
    이런 배식을 뭐라 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내무반 배식? 처부배식?)

  • 김장이야기를 하다보니 tv에서 옛기록물사진에 부대원들이 산더미같이 배추,무를 가져다놓고 김장담그는것이
    기록물로나오더군요. 물가근처에서 김장은 담금기억이 있습니다.아마도 본부대/지원중대는 1대대나,2대대
    저장고에서 가져다먹은것같습니다.1식2찬이엇지요, 국밥 찬 , 제대무렵인가 1식3찬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부식표에 의거하면은 중류가정보다 좋은반찬입니다,명태,두부,고기,생선,닭등등이 나오는데 요리법이
    나 조리법이 제대로 하달되지않고 한솥에 무조건 끌이는 스타일입니다.그러니 맛이나올수없고 밥도 찌다
    보니 누릉지도나오는 가마솥에서 하는것같은데 밥도 형편없고 짬밥냄새가나지요 .

  •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중간과정에서 없어지고 부식추진해주면 하사관들 집의 부식이 되고,장교식당에도
    올라가고 제대로 전달되어 먹기가 힘든것이지요. 본부대식당이 세멘트로 되어잇고 겨울에 난방을 안하여서
    아마도 마음좋은 주번사관의 경우에는 식당에 양해하에 병사들을 배려하여서 식깡(식관)에 담아서 내무반으로
    이동하여서 먹은기억이 있는것같습니다.병기과상사,병기관 통신선임하사나 ,수송관등이 주번사관의경우
    배려를 많이하고 야간점호없이 취침에 주간기상시간 연장등의 배려를 하였던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일부는 강하게원칙이상의 하는사람들도 잇엇지요. 특히본부중대장이나 인사계들은 인자하지않았던가?

  • 1식2찬이었나요?
    그런데 저는 왜그런지 반찬이 없는 식사도 많이 한 것으로 기억나는데 착각인가 봅니다.
    군대조리는 좋지 않았죠. 오래 되서 잊었는지, 아니면 현역 때도 몰랐었는지도 모르지만, 김치저장고가 가까운 대대에 있었군요.
    내무반 배식을 겨울에 한 것만 기억됬는데 안 전우님의 말을 듣고 나니 추운 날씨에 대한 주번사관의 배려였다는 것이 기억됩니다.
    예. 마음씨 좋은 주번사관의 배려로 가끔씩 야간점호를 받지 않은 때도 있었고, 평일은 6시 기상인데 휴일은 가끔씩 7시에 기상하였지요.
    저도 통신, 병기, 수송 등의 선임하사님들이 마음씨가 좋으셨다고 생각됩니다. 통신대장이나 보좌관님들도 좋으신분들이셨습니다.

  • 부식표가 나오면은 선임하사들이 눈독을 들이고 특식나오면은 고기등등이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본부대는 덜하편이지만 조리법이 영 엉망이라 생선국을 끓이면 도루묵같은경우는 부서지고 맛이하나도안나지요.
    동태가나오면 수송부요원은 몰래 다시방이라고 공구함에 집어넣어가지고 탄통이나 통이많으니 끓여먹는데 ,한번은
    짝으로 훔쳐서 숨겨서 걸려서 부식추진하사에게 혼나는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모자를 보면 요즈음은 약간네모나게 군대모자비슷한것이 유행이라 남자들이 많이 쓰고 다닙니다.군모를 벗고 사진들을
    찍은것을 보면 이목구비가 잘나오고 훨씬전보다 모지를 안쓰고 다니는것이 난것같습니다.

  • 그시절은 무조건 군모를 써야만 한다는식이고주머니에 손넣고다니면 군기위반이라고 하던 시절이지요.
    그런데 군모나 군복도 보면 통일이 안되어있고 저마다 개개각가의 모자를 사서 쓰고 다닌것같습니다.특히군수
    선임하사는 키가 크지않은데 날카로운사람이 미군모자같은것에 중사계급장달고서 다닌것이 기억납니다.
    모자는 아마도 지금은 많이 통일되어서 사제가아니고 통일된모자와 꼭 모자쓰라고 군기위반등은 외치지않고
    의식등에서 쓰는것으로 알고 잇습니다.사제물건이야기하면 비누는 정말 안풀어지고 엉망인 비누이었느데 마치
    대중목욕탕의 싼비누제품하고 비슷한데 많이 나아졌는지 궁금합니다.칫솔도 질이않좋죠.

  • 사제물건에 대하여 지금은 많이 완화된것으로 알고있느데 보급품을 좋은것을 안쓰고 무조건 사제물건이라면
    책도 포함되고 내복, 비누,화장품등 무조건 사제라면 못쓰게하는것은 큰 폐단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제를 많이 쓰면 위화감이 형성될소지도 있을수있지만 어느정도선에서는 허용을 하여도 될것같습니다.
    특히군대와 민간의 소통을 그런것을 차단 시키므로써 보안을 강화한다는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전방이나 추운곳에 고생하는 병들은 특별휴가를 더주거나 후방의 병들이 전방에 교대근무하게하여야합니다
    비용이 들더라도 부대전체가 함께 교대하면은 빠지는사람없이 교체가됩니다.4대대 이동때보니 간단하더군요.

  • 저도 하사관들이 치약 등의 보급품이나 부식 등을 가져간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몇 번 들은 기억은 있지만
    저는 보급관련 일을 하지 않아 확실하게는 몰랐는데 안 전우님 글을 읽으니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수송부 요원들까지도 슬쩍 했군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식당취사병들이 요리사 출신은 거의 없고 극히 일부는 문제사병 출신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저도 훈련소에서 지급받은 군모가 영 좋지 않아서 자대배치 후에 몇 번 개인적으로 사서 쓴 적이 있습니다.
    제가 군보급품 대신에 개인 돈으로 산 것은 군모와 전에 말씀드린 양말 등 두 종류입니다.
    73년 졸병 때는 양말의 질이 안 좋아 금방 구멍이 났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상기의 두 품목 이외에는 사제를 이용한 적이 없습니다.
    키가 약간 작은 군수선임하사의 군모는 저도 기억납니다.
    해병대 군모 비슷하게 모가 난 군모와 중사계급장 위에 공수훈련마크를 달고 다닌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분의 성격이 깐깐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제 기억에 73년에 본부대에서는 내무반에서 하얀 운동화를 이용하도록 하였지만
    내무사열 때에 사병들이 규정에도 없는 운동화를 실내에서 신는다고 지적당하였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제4대대가 차출된 것은 언제이지요? 저는 74년 초반으로 기억되는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 잘기억하시내요. 깐깐하고 절대웃는것은 보지못한 군수선임하사이십니다. 2.4종창고에 군수과요원을 전원 집합시켜서
    줄빳다를 때리시더군요 . 74년인가 그랬을것입니다.그러니 병들은 고참부터 중참,신참등 군기세운다고 좀 살벌하였습니다. 아마도 처부별군기는 인사과가 쎄고 군수과 ,병기과, 통신,정보작전순이었을것 같습니다. 제위가 김영철서무계인데 차드쓰느라고 조그만키였습니다.이사람과 거의 비슷한 두명이있는데 성격이 좋은편이아닌데 그후비파까지2명이겹치니 제가 좀고생좀한편이지요. 4대대는 74년 봄에 차출된것같습니다.김포에 공수특전단을 만들려고 8사단이시범적으로 1개대대가 각연대마다 많아서 차출한것입니다.

  • 전에도 언급했지만, 74년인가 본부대의 많은 인원이 무슨 훈련인가를 나가고 소수병력이 연병장에 남았는데
    남아있는 병력들에게 군수선임하사님이 갑자기 총검술훈련을 시켰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조금 하다 중지된 적이 있었습니다.
    선임하사는 좋은 뜻으로 시켰겠지만 기합도 아니고 평소에 하지도 않던 것을 시키니 병사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었지요.
    인사과가 약간 군기 센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군수, 병기과도 군기가 셌었군요. 저는 수송부와 통신대의 군기만 알고 있었습니다.
    선임하사라면 소속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 하여야 하는데 군수선임하사는 아직 중사라 그런지 너무 심하게도 병사들이나 하는 것을 했군요.

  • 군대에서 족구들을 많이 하였다는데 연대에서는 족구를 별로 많이한기억이 안납니다.축구도많이 한것같지않고 부처대항
    운동시한이 있었을것같기도한데. 일전에 말씀하신 빙상경기가 산정호수에서 사단대항이 있어서 가보지는 못햇지만 선수들이 이기면 포상휴가들을 가고 겨울내내 연습한다고 대대에서 올라와서 대기하던것이 생각납니다.아마도 시합관람은 장교나
    관계자들만 이 한것같습니다.지원중대와는 ROTC 소대장은 알고지냇는데,지원중대장님 기억은 잘안납니다.
    부처에는 상사달으신분들이 많고 중사달으신분은 별로없었던것 같습니다.,
    인사과의 키큰상사가 일찍달았다고 군수선임하사 중사님이 같이대등하게 지낸기억이 납니다.

  • 산정호수의 얼음이 한번얼면은 거의5개월이상 유지 된다고 하더군요.그런호수가 일전의 가뭄으로 바닥을 들어냈다
    하니 대단한 가뭄이었습니다.산정호수는 한화콘도있는쪽에서 올라가면은 주차비도 안내고산림욕장이 연결됩니다.
    군대근무시절은 산정호수는 구경도 몿했고 애가 조그마할때 스케트를 가지고 여러가족이 갔는데 그때도 추위가
    대단하더군요. 그런추위에 빙질이 좋게나온다하더군요. 우리나라에 태능등있지만 빙상훈련할곳이 그리많지않은데
    산정호수가 적격지로 알고있습니다.지금은 연대본부와 대대등이 운천에서 산정호수가는길에 있어서 휴가병들이
    산정호수로 면회객들과 놀러온 모습을 볼수있었습니다.

  • 가을에는 명성산억새축제가 유명해서 억새구경하려고 차들이 많이 붐빔니다. 억새구경하러 두번갔는데 한번은 올라가는길이 잘정비안되고 사람이 밀리는 기억이 있습니다. 두번째는 일찍가서 억새가 그리 많이 피지않았습니다.
    가느길을 다리도 놓고 여러모로 정비를 잘하던군요. 오면서 푸주골애서 두부먹는 재미가 좋고 평강식물원도 구경하고 포천시내에는 아트밸리라고 채석장이 다 캐낸곳을 물을 부어서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났습니다.포천석재가 알아준다하더군요. 군대있을적도 채석장이 산을 크게 훼손시키는것을 본적이 있느데 훼손된자연을 잘가꾸어서 관광지로
    포천시에 만든곳으로 한번정도는 들릴만하고 허브랜드도 있습니다.

  • 제가 현역 시에 우리 부대에서는 족구를 해보거나 하는 것을 전혀 못 보았고 제대 후 한참 후에 족구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축구는 저도 졸병 때에 연병장에서 몇 번 해 보았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처부대항 시합도 가끔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75년 초반에는 통신대가 우승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동이 별로라서 고참이 되고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고참 때는 후임들이 축구를 많이 했는데 중고참들만 축구하고 신병들은 물을 뜨러 다닌다든지
    통신대잡일만 하므로 신병을 제외하려면 축구를 하지 말던지, 신병들도 모두 같이 하던지 하라고 했던 적이 가끔 있습니다.
    통신대는 공터가 많아 배구도 더러 하였습니다.

  • 저는 졸병시절의 전투지원중대장님을 제외한 소대장들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투지원중대 하사들은 식당이나 주번하사 하면서 순찰을 돌아 더러 얼굴이 기억납니다.
    본부대에서 중사는 확실한 기억인지는 모르나 수송부와 정보과 등의 일부 선임하사 외에는 적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현역시에 산정호수가 유격훈련장 부근에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가보지 못했고, 제3대대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런제 현재는 그 부근으로 제21여단의 부대들이 많이 이전한 모양이지요?
    저는 제대하고 대략 20년 후에 산정호수나 명성산에 가 봤습니다.

  • 안익섭 전우님과 제8사단 전우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맏으십시오.
    여러 전우님들과 안 전우님 전우님 덕택에 저는 금년에 행복했습니다.

  • 저도 타임머신을 타듯이 70년대의 독수리연대본부를 되돌아보니 그나름대로의 기억이새롭게나고 서사범전우님의
    기록과 기억이 여러모로 도움이되고 과거를 반추하고 나의기록의 한장을 남긴 멋진 글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감사합니다.신년에 좋은일이많으시길. 모친이 연말부터아프셔서 정신이 없었고1월5일에 모친
    상을당해 잘치르고 이렇게 안부전합니다. 계사년에도 좋은글을 기대합니다.모든 전우님들 건강하세요

  • 그러하셨군요.
    얼마나 상심이 되시겠습니까?
    뒤늦게나마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안 전우님의 글을 다시 보니 반갑습니다.

  • 제대후 만난사람들에 대한기억을 되살려보면 이재천보급관 (후에 준장예편),병기관 고해주준위, 백우열 유류계 선임,
    이돈희서무계 정도를 손으로 꼽고 만나도 그리 친해지지않는것 같습니다. 육군의 부대 특성상 또 행정병이라느 특성이
    서로간의 유대감과 연대의식이 희박한것같습니다.서선배님은 제대후 그래도 여러전우들 만나시거나 기억하시는 것
    같습니다. 타군은 인원이 소수이고 서로간의 연대의식이 강한지 자주만나는것같습니다.
    제친구들이 해군 ocs (학사장교) 출신들이 많은데 약350명이 같은기수로서 지금까지도 매주청계산등에 등산하고
    한달에한번이상 모임을 가지고 꾸준히 만나는것을 보면 부러운감을 금치 못합니다.

  • 그래도 8사단전체 모임을 유지하면서 이런 홈페이지를 유지하고 서로만나는 시간들을 가지는 후배전우님들을
    보면 상당히들 노력과성의를 쏟아부어서 이렇게 운영되고있다는점을 이자리를 빌려서 칭찬과 감사를 다시드리고
    싶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않은 아련히 좋지않은기억과 지금은 거의 40년이상시간이흐르고 나이가
    장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어서 관심이 적어진이유도 있을것입니다. 그래도 옛전우들이 생각이 납니다.

  • 통신대의 경우를 보면 저의 바로 전후 전우들이 한참 먼 전후 전우보다 상대적으로 유대가 적었다고 생각됩니다.
    연대본부 전체적으로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저는 연대본부에 혼자서 전입되었고,
    통신대에도 입대시기가 비슷한 고참(2명)이 한 달 정도, 후임(4명)이 두 달 정도 차이가 나는데
    비슷한 고참과 준동기로서 말을 놓고 지냈습니다. 통신대를 보면 동기가 많은 전우들이 파워를 쓸 수 있었지요.
    다른 처부의 전우들은 업무적으로 접촉이 있었던 전우들과 일부 외에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통신대의 상관들과 전우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환갑을 넘긴 세대라 인터넷을 하는 전우들이 적을 것입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