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면서
모처럼 여행을 나서서 그런지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여행은 단순한 떠남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 설렘이 있고 기대가 있고 꿈이 있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먼저 무심코 하늘부터 올려다본다. 날씨부터 살핀다. 하늘이 청명하다. 마음이 상쾌하니 가뿐하다. 바람에 새순 나온 나무가 휘청거린다. 바람을 거두고 버스 창가에 앉으니 바깥이 눈부시다. 너무 강렬해서 무더운 날씨다. 바람과 함께 뒤섞어놓아야 그래도 괜찮은데. 순간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쳐다보지만 어디에도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나뭇잎도 좋아 춤을 춘다. 바람이 그립다. 깃 피어나 짙어가는 신록이 꼼지락꼼지락 거리고 꿈틀꿈틀 거린다.
여행은 기다림에서부터 시작이다. 바쁘게 오는 사람, 바쁘게 가는 사람, 구석 의자에서 맥 놓고 마냥 기다리는 사람, 깊은 사색에 젖어들은 듯싶다가 저마다 시간을 재고 있다. 시간을 들여다본다. 때가 되었다고 벌떡 일어서는 사람, 아직도 멀었다고 지루해하는 사람, 표정도 움직임도 제각각이다.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 새순이 떠오른다. 그래도 거기에는 풋풋함이 있었는데 좀은 먹먹하다.
정해진 시간에 기내에 탑승하고도 기다린다. 그것도 부족하여 갑작스런 활주로 변경으로 50분을 기다렸다. 여하 간에 예정시간을 벗어나 꼼짝없이 일방적으로 당하여야 했다. 그러고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특히 기내에서는 특수공간으로 승무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끔 난동이니 갑질이니 하면서 입줄에 오르내렸잖아. 자칫 휘말릴 수도 있는 거다.
인천공항에서 보르네오의 코타키나발루 공항까지는 4시간 40분을 날아간다. 조용히 기다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목적지에 가기 위한 기다림이다. 그래도 막막하지 않은 뚜렷한 목적이 있는 기다림이니 좀은 낫다. 그동안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들면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반성해도 좋고, 곧 펼쳐질 여행에 기대와 계획을 조금은 부풀리고 핑크빛으로 칠을 하면서 그려봐도 좋다. 버스는 중간에 휴게소라도 있어 잠시 들러 화장실도 가고 쉬었다 간다. 하지만 비행기는 기내 비좁은 공간에 갇히다시피 하여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행동에 거의 제한을 받는다. 혼자가 아니기에 이웃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것저것 다 내려놓고 잠이라도 오면 앞뒤 자리나 옆자리 눈치 볼 것 없이 한 잠 푹 자는 것이 그래도 좋겠지만 생각처럼 불편한 자리에서 그마저 쉽지가 않다. 앉은 자리에서 선뜻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떴다하며 차분하게 기다려야 한다. 마음만 앞서서 혼자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좀은 불편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이고 그래도 여행이란 꿈을 이룬다는 목적이 있는 기다림이기에 견딜 만한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3대 가족이 함께 떠나는 여행이 아닌가. 비록 따라가는 입장이라도 모범을 보여야 한다.
착륙 시작 직전에 비행기는 말레이시아 당국의 규정이라며 기내에 방충제를 뿌린다. 그만큼 보건위생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음이다. 좀은 어수선하지 싶으면서도 곱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인체에는 해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기내방송이다. 기다림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제 그 기다림을 보상하고 남을 그 무엇을 보여줄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 같아 쿵쿵 상기된 마음이다. 말레시아아보다 우리나라가 더 동쪽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말레이시아가 1시간 늦은 시차를 적용하고 있다. 현지시간 자정 무렵에 코타키나발루 공항에 도착했다. 푸른 하늘에 바깥 온도는 30도라고 한다. 우리나라라면 한여름에 열대야를 앓고 있는 셈이지만, 여기는 적도에 가까운 상하(常夏)의 나라이다. 서너 달쯤 서둘러 여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가 동북아시아에 속한다면 이곳은 동남아시아의 중앙으로 남태평양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적 차이도 있다. 같은 노선의 비행기 두 대가 거의 같은 시간대에 도착하여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이 한국인 관광객으로 한밤중 입국수속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혼잡에 혼잡을 거듭한다. 가장 간편한 절차로 여권과 본인임을 확인하는 데에도 공항직원들은 허우적허우적 진땀을 쏟고 있다. 굽이굽이 줄 아닌 줄을 따라 밤이 깊어 가거나 말거나 또 마냥 기다려야 했다. 1시간 가까이 오락가락 했다. 아무래도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여행의 첫걸음이지 싶다. 예약부터 현지에 도착하기까지 수없이 거듭되는 기다림은 마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것과도 같다. 기다림이라는 명목으로 시간은 자꾸 새어나가고 그 속에서 오히려 즐기며 행복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넉넉하고 쾌적한 인천공항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지 싶다. 이곳 코타키나발루 공항은 사실상 포화상태로 공항으로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벗어났다. 입출국수속은 물론 출국할 때 잠시 대기할 좌석이나 공간조차 많이 모자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피로한 몸으로 짐짝 취급을 받는 모양새다. 그래도 어디에 불평을 내놓고 할 곳이 없다. 그냥 눈 한 번 찔끔 감고 불편함도 그러려니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급격하게 늘어난 인파로 홍역을 앓고 있지만 하루 이틀에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님에 공항 당국도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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