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 화요일
[그라나다-론다-세비야-우엘바]
오늘은 론다를 거쳐 세비야로 간다. 드넓은 들판에는 아침햇살을 받고 바람에 일렁이는 풀과 곡물들이 제각기 오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아침 들판의 평화로움은 더할 나위 없으나 사람은 역시 찾을 길이 없다. 그러고는 또 올리브농장이다. 가까이든 멀리든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올리브나무 농장뿐이다. 지난날 자주 갔었던 보루네오섬이 그랬었다. 벌써 40년이 지난 시절이지만,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그곳은 본디 열대우림이 있던 자리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팜유 생산을 위한 팜 농장만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중국인들의 소득이 높아지면 식용유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라 했었다. ‘저 많은 올리브나무가 자라서 올리브유가 쏟아진다면.....’ 땅덩어리 크기에 비해 농업생산 비중이 크지 않은 스페인에서 올리브오일은 주요 수출품의 하나라고 한다.
론다는 협곡 위의 마을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의 하나라는 투우장 앞은 철 지난 바닷가처럼 한적하여서 투우사와 황소의 동상만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넓지 않은 마을을 둘로 갈라놓은 협곡은 수직 형태로 구불거리는 낭떠러지가 오금이 저리게 아찔하다. 나뉜 마을을 잇는 누에보다리는 그 짧은 길이에 반해 협곡의 깊이에 맞추어 높고 튼튼하게 쌓아 올린 아치 모양의 두 개의 교각이 마치 협곡을 지키는 성문인 양 위풍당당하게 서 있고 그 교각 사이를 강물이 흘러간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산책로였다는 협곡의 아래로는 멀리 들판이 아스라이 펼쳐있고, 다리 한쪽 끝 좁은 광장에는 노천카페가 펼쳐져 있다. 그 테이블 위에는 따갑고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협곡을 지나온 바람은 가로수 오렌지꽃 향기를 싣고서 시원스레 불어왔다. 프랑스 코트다쥐르의 산꼭대기 그라스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가 떠올랐다. 커피를 주문하려 하니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란다.
아~ 출발 시각이 코앞인데..... 그런데 이 아가씨 ‘이 사람들 또 여기까지 와서 이러네’하는 표정이다. 아까 우리가 도착했을 때 현지 가이드라는 영감이 능글맞게 말했었지. “여기 와서 일하는 아프리카 사람들 돈 없어요. 여기 스페인 사람들 일 열심히 하지 않아서 돈 없어요. 그런데 여기 오는 한국 사람들은 모두 시간이 없어요.” 난들 무엇 다르랴. 기다려 커피 마실 시간이 없는 것을..... 무심한 햇볕만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넘쳐 협곡으로 흘러 내려갔다.
이곳 사람들은 보통 하루 다섯 끼를 먹는다고 한다. 출근 직후에 아침 식사로 빵과 커피를 마시고, 11시경에 참으로 샌드위치와 쥬스 등을 먹고, 오후 2시에는 1시간 반 정도 느긋이 점심 식사를 즐기며, 퇴근 후 6시경에 간식을 먹고, 저녁 9시 전후로 저녁 식사를 한다고 한다. 늦은 시각에 저녁 식사를 하는 탓에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그것이 씨에스타라는 낮잠으로 연결되는 것이란다.
TV 여행프로에서 봤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프리카 튀니지의 어느 산골을 방문한 여행자에게 늙은 목동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어?” “코리아에서 왔어요.” “아~ 코리아. 너희는 엄청 열심히 일들을 한다는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 더 행복해?” 당혹해하며 대답을 망설이다가 떠나는 여행자의 뒤에서 영감님이 말했다. “그렇게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좀 즐기며 살아.” 보는 나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러 생각이 얽혀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었다.
세비야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지나왔던 길과는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언제 그렇게 메마른 땅을 지났더냐는 듯이 물이 흐르는 계곡이 나타나는가 하면 큰 나무들이 자라는 숲들도 나타났다. 이윽고 컨테이너를 수북이 쌓아놓은 부두들을 거느린 너른 강을 만났고, 우리 버스는 그 강을 가로지르는 큰 교량을 건너서 세비야에 다다랐다.
세비야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기 위한 항해의 출발점이었으며, 이후 스페인 세력 확장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면서 자연히 부의 축적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에 따라오는 문화생활의 하나로 ‘세비야의 이발사’를 비롯하여 ‘피가로의 결혼’과 비제의 ‘카르멘’ 등 이름난 많은 오페라도 탄생하게 되었다. 세비야는 싸이프러스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으며 뜨거운 태양과 시원한 그늘이 우리를 함께 반겼다.
스페인광장이라고도 불리는 에스파냐광장은 1928년 에스파냐 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건축되었으며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알려져 있다. 갈색 벽돌의 건물은 광장을 감싸 안으려는 듯 길고 둥글게 펼쳐있는데, 규모에 비하여서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듯 단정한 건물은 우뚝한 벽돌 탑이 흰 대리석의 아치형 기둥들과 이질적인 듯이 조화로웠다.
그 기둥 아래에 스페인 58개 도시의 역사적 사건들을 채색 타일로 수놓은 듯이 장식한 벽면의 다채로움이 더없이 멋졌다.
건물 중앙에서 광장으로 내민 현관에서는 플라멩코를 추며 발판을 두드리는 여인의 발이 현란하기 그지없는데, 넓은 광장을 초승달처럼 두르는 수로 위에는 몇 척의 카누가 뜨겁게 쏟아지는 햇살을 즐기며 한가로이 떠다녔다. 그 수로 위를 무지개처럼 걸치고 있는 작은 다리는 오색의 타일로 한껏 사치를 더 해서 요염하였다.
마차에 올라서 말발굽 소리도 경쾌하게 세비야 시가지를 달렸다. 말 위에서 창과 방패를 치켜들고 있는 기사의 동상을 만났다. 세비야가 돈키호테와 인연이 깊은 곳이라 해서 그인가 했더니 엘시드의 동상이란다. 어째 늠름하더라니..... 젊은 날의 내 기억에 남은 영화 속의 엘시드는 장렬하고도 안타까웠다. 엘시드와 돈키호테라니..... 아쉽게도 우리의 이번 여행에는 돈키호테를 만나는 일정은 없단다. 나야 괜찮지만 영감님이 서운해하지나 않으실지..... 마차는 그렇게 도로를 따라 행진하며 연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아메리카광장을 돌아왔다. 나의 첫 마차 퍼레이드를 축복해주기 위하여 하늘은 푸르게 펼쳐졌고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고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왔다.
그라나다에서도 그랬듯이 이곳은 박태기나무가 거의 가로수 수준으로 크게 자라서 길가나 공원에서 붉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있어 놀라웠다.
세비야대성당은 규모에서 스페인 최대이며 유럽에서 3번째라니 내 말재주로 무엇을 더 보태겠는가? 스페인이 무어인들로부터 세비야를 수복한 후,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모스크를 부수고 세운 교회로서, 현재 남아있는 모스크의 흔적은 히랄다 종탑이 딸린 현관의 안뜰뿐이란다. 드넓은 성당 안은 갖가지 이름의 거대한 제단과 감실 등은 물론,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온통 금으로 치장한 듯 번쩍여서 보는 이를 압도했다.
제단 정면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 1.5톤으로 만들었다는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상이 있다. 규모와 함께 화려함도 극치라는 말밖에 더 표현할 방법도 필요도 없을 듯하다. 저 번쩍이는 금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남미 잉카나 마야의 어느 추장의 머리 위에서 왕관으로 빛나고 있었으려나? 성당은 1401년에 시작하여 100년이 넘는 건축 기간으로 인하여 고딕‧ 르네상스‧ 이슬람의 흔적이 고루 섞여 있다고 한다. 내부를 빼곡하게 채운 그림들이 모두 고야‧ 무리요 등 스페인 대가들의 대단한 작품들이라지만, 항상 그렇듯이 그 방면에는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저 그게 그것으로 보일뿐더러 일행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따라가기에도 바쁘니 이것저것 구별하고 비교하며 감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런 것보다, 나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것이 대성당의 중앙부에 있는 콜럼버스의 묘이다. 묘라기보다는 관이라고 해야겠다. 그의 관은 묻히지 않고 작은 상여처럼 꾸며져서 당시 스페인의 4명의 왕의 어깨 위에 얹혀있다. 신항로 개척 이후 이런저런 일들로 스페인의 왕들과 극심한 불화를 겪은 콜럼버스가 죽어서도 스페인 땅에는 묻히지 않겠다고 했기에 그리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저 모습을 미리 꿰뚫어 내다본 그가 괜한 몽니를 부렸던 것은 아니려나? 관을 메고 있는 4명의 왕의 모습도 이야깃거리다. 생전의 콜럼버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2명의 왕은 관의 앞쪽을 차지하고서 고개를 곧추세우고 팔을 치켜올려 보무도 당당히 발을 내딛고 있으나, 그를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는 2명의 왕은 관의 뒷부분을 메고서 마치 속죄라도 하듯이 고개를 아래로 떨군 풀죽은 모습으로 뒤따르고 있다. 그 사연이야 어찌 되었건 콜럼버스는 살아생전에는 신항로 개척으로 남미의 금은보화를 스페인으로 끌어오게 하였고, 죽어서는 그의 관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으로 이곳이 발 디딜 틈 없으니, 그를 품지 못한 그의 조국 이탈리아의 손실은 이만저만이 아닐 듯하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이란 말인가? 공과 과를 나누는 것은 차치하고 세계사에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친 사람도 드문 것만은 사실이다 보니, 우리가 알든 모르든 그에 얽힌 이야깃거리는 그의 업적보다도 더 넘쳐나는 듯하다.
성당은 규모만큼이나 자랑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세계 최대의 고딕양식‧ 세계 최대의 황금 제단‧ 세계 최대의..... 예수께서 실제로 썼던 것이라는 가시관의 한 조각‧ 수많은 동상‧ 오묘하게 빛을 발하는 스테인드글라스들‧ 벽면과 천정을 한 곳도 빈틈이 없이 메우고 있는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들..... 하지만 이를 어쩌랴, 보고 느껴 담을 수 있는 내 그릇의 크기는 술잔 하나를 넘지 못하여서,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아름다움들을 속절없이 흘려보낼 수밖에 없음을. 그 담지 못한 것들의 흔적인 양 성당의 바닥과 건물 앞 넓은 도로가 온통 파라핀으로 두껍게 덮여 있었다. 며칠 전 치른 부활절 행사에서 신도들이 들고 행진한 양초가 녹아 흐른 것이라 했다. 촛농이라 하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부디 그들의 믿음과 소원과 은총도 이 촛농처럼 넘쳐나기를.....
세비야의 상징이라고도 하는 히랄다탑은 원래 이슬람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용도의 탑이었으나, 기독교에서 차지한 후에 종과 풍향계를 설치하여서 풍향계를 뜻하는 ‘히랄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내부로 탑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지만 우리는 그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세계 최대 목조구조물이라는 메트로파라솔로 갔다. 최대라는 말이 수긍하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굳이 따질 일은 아니라 듣고 흘렸다. 우리도 한때 최대‧ 최초라는 단어를 참으로 많이 내세우던 시절이 있었다. 이름이 파라솔이지 파라솔을 연상케 하는 모양은 아니었다. 누군가 버섯을 닳았다더니, 내 눈에는 차라리 구름을 닮은 듯도 하다. 구름은 형태가 천양지차라 너무 무책임한 비유일런가? 덥고 지치고 몽롱하기도 해서 멀리서 쉬듯이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흰색으로 칠해진 나무판자를 격자 형태로 짜 맞춰 세운 구조물인데 소재가 스웨덴산이라는 말로 미루어 자작나무를 가공한 집성판재일 것으로 짐작했다. 고풍스러운 도시미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찬반양론이 대치 중이라고 한다. 알지 못하지, 세비야의 에펠탑이 될는지. 그 한쪽 너른터에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시원하게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가이드 말이, 누군가가 보리수나무라고 하더란다. 그것참. 나무, 그것도 보리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아니할 수 없겠다.
나무라는 것이 같은 나무가 여러 나라에 있다 보니 그 이름도 제각기 다른 말로 불릴 수밖에 없다. 소나무를 파인으로 오크를 참나무라고 부르는 식이다. 그런데 보리수에는 좀 다른 사연이 있다. 우리말 그대로 ‘보리수’라는 나무는 우리나라 산에 자라는 작은 관목으로 팥알 남짓 크기의 붉고 작은 열매가 열린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는 그를 ‘보리둥’이라고 부르며 따 먹기도 했더랬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유명한 보리수가 바로 그 아래에서 부처께서 득도했다는 인도보리수이다. 인도에서 자라는 그 나무는 범어로 깨달음을 뜻한다는 ‘Bodhi’ 또는 ‘Pippala’라고 불리는 열대지방의 나무인데, 불교가 중국으로 오면서 그 나무와 비슷한 모양새의 찰피나무와 보리자나무에다 Bodhi를 음역하여 ‘보리수(菩提樹)’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라 한다. 그와는 다른 또 하나 유명한 보리수가 있으니 바로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이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가곡이다. 이 ‘Linden Baum’이라는 나무는 피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인데, 일본 사전에는 그것이 ‘서양 보리수’라고 되어있어서 노랫말이 보리수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그냥 받아서 ‘보리수’라고 노래해 오는 것이다. 아마도 보리자나무와 찰피나무가 피나무의 일종이라서 혼동한 탓이 아닐까 싶다. 정작 인도의 보리수는 뽕나무과의 나무라고 한다. 하기야 우리나라 절들도 그 보리자나무를 심어두고 부처님의 보리수라고 알리고 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또 어찌 생각하면 단꿈을 꾼 곳이 피나무 아래라고 하기보다는 보리수 아래였다고 노래하는 것이 좀 더 고상하게 들릴 듯도 하다. 아무려나 나무 이름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정해주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부르면 그런 것이지만, 김철수‧ 이철수‧ 큰 철수‧ 작은 철수를 모두 같은 철수로 착각하지는 말았으면 해서 해본 말이다.
여행기를 쓰면서 여행일정표를 보니 황금의 탑을 외부에서 관람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적의 침략에서 지키기 위하여 과달키비르강 어귀에 세워졌다는 탑은, 돔을 덮었던 황금 타일이 햇빛에 반사되어 이름 붙여졌다는데 세비야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일품이라 적혀있다. 이를 어쩌랴, 지금 아무리 생각을 되돌려 보아도 그에 대한 기억이 눈곱만치도 나지 않음을..... 가기는 갔었던가? 급히 먹고 나온 뷔페의 식단을 모두 다 기억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고 자위하는 수밖에. 이 틈에 한 줄 적자. 무식한 소리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슬람식 건물은 황토벽돌과 흙을 이용한 건물이 많은 것에 비하여 기독교식 건물은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지어진 듯하다. 실제로 그렇다면 그것은 부의 차이인지 문화의 차이인지 어떤 가치관의 차이인지..... 이슬람이 주변환경과의 어울림을 좋아하기 때문은 아닐까?
플라멩코공연 관람은, 내가 평소에 춤이란 것에는 그 종류에 무관하게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었던 데다가 관람료도 싸지 않은 탓에 조금은 망설이던 끝에 선택했었다. 공연장을 들어서자 비좁게 배열된 사오십 석 정도의 관람석과 그보다도 낡고 허름한 무대가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후회스러운 기분을 불러왔다. 이미 관객으로 대부분 채워진 관람석 중에 비어있는 무대 바로 앞줄에 앉았다. 무대는 높지 않고 눈높이여서 괜찮았지만, 팔을 뻗치면 손이 닿을 가까운 거리가 마음 편치는 않았다. 공연은 촬영금지란다. 처음부터 크게 가지고 있지 않았던 기대마저도 거의 내려놓았던 터라 새로운 아쉬움도 크지는 않았지만, 불만은 조금 더 늘어났다.
남자 셋이 무대로 나와서 뒤편 벽 아래 늘어놓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중 하나는 기타 연주를 겸하면서 셋이 함께 노래했다. 순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소리가 나를 놀라게 했다. 내 귀에 그 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이슬람사원에서 예배 시간을 알리며 울려 퍼지는 아잔과 너무나도 닮았다.- 어쩌면 그 아잔도 일종의 노래일는지는 모르겠다. 춤이 집시들의 것이듯, 그 노래도 집시들의 고향이라는 인도에서부터 이곳으로 오면서 도중에 여러 소리들이 담기고 섞인 것이 아닐까? 여자 둘과 남자 하나의 무희들이 등장했다. 인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남자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사랑 다툼을 그린 듯했다. 여자 무희가 부채를 손에 들고 춤추는 것이 우리 부채춤을 닮았고, 뒤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들이 연신 ‘올레 올레’를 외치는 것이, 우리나라 창극에서 ‘얼쑤 얼쑤’하는 고수의 추임새를 연상케 했다. 다음 순서로 붉은 바탕에 땡땡이 검은 점이 찍힌 옷을 입고 여자 하나가 등장했다. 오로지 맨손에 발과 몸과 얼굴로만 나타내는 그 고뇌와 격정적인 춤사위는 삽시간에 내 혼을 온통 빼앗았다. 공연이 시작되며 서서히 반전하기 시작했던 내 가슴이 이제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구를 박차듯이 바닥을 튕겨 올리는 그녀의 발바닥이라니! 살풀이- 앞서 말했듯이 그 살풀이춤마저도 내 기억에 온전히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의 살풀이가 바로 이러하지 않을까 짐작했다. 처음 구경하는 플라멩코에서 도리어 우리의 살풀이춤을 그려보게 될 줄이야! 이어서 손에 각각 캐스터네츠를 단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나왔다. 마치 한 쌍의 나비가 춤을 추듯 현란한 캐스터네츠연주와 춤사위가 우리의 소고춤과 짝을 이루는 듯했다. 뒤이어 나를 숨 막히게 했었던 여자 무용수가 다시 등장했다. 군더더기 없이 강렬했던 그녀의 춤을 닮은 듯한 검붉은 장밋빛의 옷은, 신부의 드레스처럼 바닥을 끄는 긴꼬리에 장미꽃 장식이 무더기로 달려있었다. 한껏 뒤로 휘어 젖힌 몸에 손을 힘없이 아래로 늘어트려 시작했던 그녀의 춤은 역시 격정적으로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았다. 그 춤이 내게는 무녀의 신내림 굿을 연상시켰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이 또한 나의 상상 속 연계일 뿐이다. 마지막 등장한 남자 무용수는 양손에 캐스터네츠를 달고서 우리 농악의 상모 돌림처럼 펄쩍펄쩍 몸을 뒤틀어 돌며 춤을 추었다.
플라멩코는 내게 미지의 새로운 세상을 본 듯한 감동을 몰아다 줬다. 허술히 방심하고 있던 나를 놀래키며 정신이 번쩍 들게 한 그것을 무엇에다 비유할 수 있을까? 위스키와의 첫 만남- 젊은 시절 어느 날, 처음 대하는 위스키라는 술을 무심코 홀짝 넘겼을 때 목구멍을 타고 내렸던 그 짜릿함이란!
나는 스페인에도 우리말의 ‘한(恨)’에 상응하는 단어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 한이 없고서야 어찌 저런 춤이 생겨나고 어찌 저렇게 춤추어질 수가 있겠는가. 플라멩코, 사랑해요!
내 글을 읽는 당신이 스페인을 여행한다면 나는 빠트리지 말고 플라멩코는 꼭 관람해보라고 권한다. 그것도 넓은 홀에 펼쳐진 테이블 위에는 맥주가 놓여있고 멀찍이서 느긋이 춤을 즐기는 그런 곳이 아닌, 내가 갔던 곳처럼 메뉴라고는 오로지 된장찌개 하나뿐인 오래되고 자그마한 식당과도 같은 그런 공연장에서, 마치 현란하게 춤을 추는 듯한 가수의 소리에 전율을 느껴보고 또 마치 절규와도 같은 무희의 춤을 가슴에 담아 보시기를 바란다.
내일 리스본으로의 이동시간을 벌기 위하여 1시간 거리의 우엘바로 향했다. 창 아래로 대서양 바닷물이 잔잔한 호텔은 호화로웠다. 늦어진 시각 덕분에 현지인들과 같은 시각에 호텔의 뷔페로 저녁 식사를 했다. 내가 짐작하기에 지금까지 우리의 아침과 저녁의 식사는 항상 현지인들보다 빠른 시각에 가졌는데, 그게 언제나 바쁜 우리나라 단체여행팀들의 일정과도 맞고 또 현지 호텔은 그들대로 빈 시간대를 이용해서 단체 손님을 치를 수 있어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당연히 음식의 내용도 서로 다른 것일 수도 있었을 터였다. 호화롭게 장식된 식당 테이블 위에는 포도주가 1병씩 올라 있었고 음식 진열대에는 각종 형태의 올리브가 듬뿍 쌓여있었다. 포도주와 감칠맛 나는 올리브로 나는 기분을 한껏 돋우었다.
호텔 마당을 지나서 아무도 없는 해변을 가로질러 대서양을 만났다. 달이 뜨기를 기다리는 대서양의 밤바다는 칠흑이었다. 그 검은 바다를 향해 경건히 제례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걸어 들어가서 발을 담그고 손으로 물을 떠 마셨다. 지난날 프랑스 망통의 자갈 해변을 걷고 와서는, 지중해에 발을 담가 보지도 물을 맛보지도 않고 왔던 것에 대한 미련이 두고두고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와신상담 앙갚음이라도 하듯, 이번에는 잊지 않고 발 담그고 오리라 별러왔던 바다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바뀔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참으로 길고 가슴 뿌듯한 하루였다. 여행의 묘미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미리 계획되고 예상했던 일들만 그대로 펼쳐진다면 굳이 먼 길 찾아 나설 일이 무엇 있겠는가? 남은 여행에 새로운 기대를 북돋우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