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수염 기르고 팔뚝 굵은 사내가 손바닥에 스킨로션을 부어 두 뺨을 때리듯 바른다. "사나이여, 강렬한 나만의 개성을 찾자." 배우 신일룡이 등장한 1980년대 남성 화장품 광고다. 미국 배우 찰스 브론슨도 한국의 화장품 광고에 나와 야성미를 뽐냈다. 대학 나오도록 얼굴에 뭘 발라볼 생각조차 않던 때라 신기하게 광고를 봤던 기억이 난다. 어려서 겨울철 튼 손에 '안티푸라민'이나 '멘소래담' 바른 게 고작이어서 '남자가 무슨 화장품을 쓰나' 했다.
▶20여년 전만 해도 남성 화장품은 면도나 샤워하고 바르는 스킨과 밀크 로션이 전부였다. 화장품 회사들도 신일룡과 찰스 브론슨을 내세워 '사나이다움'을 강조했다. 이제 남성 화장품의 목표는 '예쁜 남자'다. 피부를 하얗게 만드는 미백(美白) 크림, 눈가 주름과 입가 팔자 주름을 줄이는 크림, 밤사이 피부 탄력을 키우는 나이트 크림과 오일이 남성용으로 등장했다. 얼굴 각질과 기름기, 술 마신 이튿날 부기(浮氣) 가라앉히는 로션도 있다.
▶패션과 미용에 돈을 들이는 남자를 '그루밍족(族)'이라고 부른다. 마부가 말갈기를 빗질하거나 원숭이가 털 고르는 것을 뜻하는 '그룸(groom)'에서 왔다. 그루밍족은 '외모도 경쟁력'이라고 믿는다. '다른 사람에게 더 깊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화장한다'고 말한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그루밍족이 한국 남자다. 지난해 화장품 사는 데 5600억원을 써 세계시장의 21%를 차지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공항 면세점을 지나다 보면 화장품 코너에 여자 못지않게 남자가 많다. 외국 화장품 회사가 한국 남자를 겨냥해 인삼 성분 화장품을 개발할 정도다. 군대 내무반 사물함엔 선크림은 기본이고 얼굴 팩과 코 팩, 발꿈치에 붙여 각질 없애는 패치도 들어 있다고 한다. 한 화장품 회사는 매복 훈련 때 바르는 위장 크림을 만들어 인기 상품이 됐다. 남성 화장품을 사는 연령도 꾸준히 올라가 20·30·40대 비율이 비슷하다.
▶미국 CNN이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열 가지'를 골랐다. 한류·인터넷·여자 골프·일중독·폭탄주·성형수술에 '한국 남자의 화장품 문화'가 끼였다. 유독 한국에 '화장하는 남자'가 많은 것은 외모를 앞세우는 풍조 탓일 것이다. 다들 잘생겨야 취직 잘되고, 좋은 배우자 만나고, 일도 사업도 잘 풀린다고 생각한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안간힘인 셈이다. 요즘 TV에서 눈 화장 짙게 한 남자 연예인을 쉽게 본다. 이러다 색조 화장하고 아이섀도 바른 남자가 거리에 넘쳐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