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역 근처 플라타너스 거리
1888년 3월, 캔버스에 유채
1888년 2월 20일 고흐는 하얗게 눈 내린 아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그는 꽃이 핀 과일나무 연작을 그렸다. 1880년대 말, 모네가 여러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을 그렸던 것처럼 고흐도 꽃나무 그림을 각각 분리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연작으로 생각하며 작업을 했다. 3월 말에는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파리 엥데팡당 살롱전(관선官選의 살롱에 대항하여 신파 화가들이 1884년에 창립한 전람회)에 다른 인상파 화가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아를에 와서도 테오를 통해 파리에 있는 젊은 화가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고흐는, 노란집을 아틀리에로 꾸며서 화가 공동체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그는 고갱을 초대했다. 9월 16일 고흐는 고갱이 와주기를 기대하며 노란집으로 이사했고, 10월 23일 도착한 고갱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두 사람 모두 작업에 몰두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2월 들어 예술에 대한 견해 차이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심해졌다. 12월 23일 고갱과 심하게 다툰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랐다. 고갱은 급히 파리로 떠났고 고흐는 2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1월 예상 밖으로 빨리 회복한 그는 노란집으로 돌아왔고,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 '양파가 있는 정물', '자장가' 등을 그렸다. 그러나 여전히 환각 증상이 나타났고, 그를 불안하게 여기던 주민들의 고발로 3월 말까지 강제 입원되었다.
4월 17일, 동생 테오가 조안나 봉제르와 암스테르담에서 결혼했다.
아를 시절에 고흐는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200여 점에 이르는 그림을 그렸다.
형이 없으니 텅 빈 느낌이다
(반 고흐가 남프랑스로 떠난 후 테오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
여동생 윌에게...
형이 지난 일요일에 남부로 떠났다. 우선 아를에 가서 그 지역을 둘러본 후 아마도 마르세유로 갈 것 같다.
2년 전 형이 여기로 왔을 때만 해도 난 우리가 이토록 서로 의지하게 될지 몰랐단다. 하지만 이제 아파트에 나 혼자 남고보니 텅 빈 느낌이구나. 적당한 사람을 구해 함께 지낼 생각이지만, 형을 대신할 만한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형의 지식과 세상에 대한 명석한 시각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란다. 그러니 형이 더 나이 들기 전에 유명해질 거라고 확신한다. 형 덕분에 나는 많은 화가들을 알게 되었지. 그들 역시 형에 대해 아주 좋게 생각한다. 형은 새로운 생각의 챔피언이거든.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생각한다면, 더 정확히 말해 낡은 생가들을 뒤집는 일의 챔피언이라 해야겠지. 평범함 때문에 퇴보했거나 그 가치를 잃어버린 생각들에 대해 말이다. 게다가 형은 항상 남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란다.
형의 편지는 정말 재미있어. 형이 더 자주 쓰지 않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188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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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각의 챔피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