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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5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대구 농수산물 도매시장 대형화재 점포 60여개 전소
2020년 삼성 이건희 회장 사망
'초일류 기업' 이끈 개척자,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한국 재계의 거목(巨木) 이건희 삼성 회장이 10월 25일 삼성서울 병원에서 향년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 회장을 애니콜과 반도체 신화를 통해 삼성전자를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시키고, IOC 위원으로서 국내 스포츠 발전에도 기여했다.
2018년 문학평론가 김윤식 세상 떠남
2018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남남서쪽 9km지역에서 규모 2.3 지진이 발생하였다.
2010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남쪽 해역 진도 7.7 지진 쓰나미 사망·실종 700여 명
2009년 이라크 정부청사 테러
2009년 10월 25일 오전 10시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정부청사를 겨냥한 2건의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해 150여 명이 사망하고 최소 720명이 다쳤다.
이라크에서 이처럼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지난 2007년 500여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라크 북부 트럭 테러 이후 최대이며, 정부 청사가 테러 대상이 된 것은 지난 8월 100여명이 사망한 재무부 및 외무부 청사 공격 이후 두 번째다.
법무부 건물의 도로변 창문과 벽은 폭발로 날아가 없어져 흉물스런 뼈대만 드러내고 있으며, 그 주변 건물들도 크게 파괴됐다.
이번 공격을 자행했다고 주장하는 단체나 사람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나 차량 폭탄을 이용한 대형 테러는 시아파 주도의 현 정부를 전복하는 것이 목표인 수니파 반군단체의 전형적인 공격 유형이다. 따라서 알-카에다나 수니파인 바트당이 이번 공격의 배후로 의심되고 있다.
한편, 이번 테러로 이라크 정부의 자체적인 치안 유지 능력이 문제되고 있으며, 2010년 1월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이라크 내 테러 등 폭력 사태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2002년 북, 선핵포기 공식거부. 美에 불가침조약 제의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여 척을 격퇴한 해전이었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이 남해안 대부분의 재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음력 8월 15일,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 점령 이후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나라군과 대치중인 상황이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으며,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게 된다.
2001년 헌법재판소, 국회의원 선거구 헌법 불합치 결정
헌법재판소가 2001년 10월 25일 현행 국회의원 선거구의 인구편차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현행 국회의원 지역구에서 최대 선거구와 최소 선거구의 인구비율을 4대1 미만으로 규정한 선거법 조항은 헌법의 평등선거 정신에 위배돼 2003년 12월 31일까지 관련 규정을 개정하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이날 "현행 선거법과 관련 규정에 따르면 선거구 중 인구가 많은 경기 안양시 동안구와 가장 적은 경북 고령·성주군의 인구 비율이 3.65대1로 합리적인 허용한계를 넘었다”며 “이는 헌법상의 평등선거 정신에 위배돼 위헌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법의 공백이 생길 우려가 있어 2003년 12월 31일까지 관련 법규 개정의 유예기간을 둔다”는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 불합치 결정이란 어떤 법률이 위헌이긴 하지만 당장 위헌 결정을 내릴 경우 그 날부터 해당 법률의 효력이 상실돼 사회적 혼란이 생길 것을 우려, 관련법이 개정될 때까지 일정 기간 법의 효력을 인정하는 결정이다
1999년 `그린 신사` 스튜어트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그린의 신사’ 페인 스튜어트(42)가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스튜어트는 1999년 10월 25일 타고 가던 전세 비행기가 미 사우스다코타주 에드먼즈카운티에 추락해 탑승한 4명과 함께 숨졌다. 스튜어트 일행은 산소결핍으로 전원이 질식한 상태에서 연료가 떨어져 추락할 때까지 4시간 동안 1500마일(2400km)이나 죽음의 비행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올랜도에 사는 스튜어트는 PGA투어챔피언십에 출전하기 위해 텍사스 휴스턴으로 가는 길이었다. 스튜어트는 사냥용 모자와 무릎을 살짝 덮는 바지의 니커스보커스 스타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스타이다.
17년 동안 미PGA에서 메이저대회 3승을 포함해 통산 11승을 거둔 스튜어트는 1999년 6월 US오픈을 제패,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특히 1999년 우승 당시 4.5m짜리 파 퍼팅에 성공하고 포효하던 모습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95년 한국-라오스, 국교수립
1986년 한강유람선 운항 개시
한강유람선이 1986년 10월 25일 운항을 개시했다. 이날 오전 9시 서울 여의도 선착장과 잠실 선착장에서 (주)원광소속 새한강 1호와 새한강 2호가 뱃고동을 길게 울리면서 출항, 한강유람선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양쪽 선착장에는 유람선 취항을 구경하려는 시민, 유람선운영회사인 (주)원광과 (주)세모측 직원 등이 모여 박수로 축하했다.
당초 이날부터 2개 회사 소속 유람선 8척이 모두 운항할 예정이었으나 세모측은 선착장 내부단장 작업이 늦어져 첫날 운항에 참여하지 못했다. 첫 출항한 새한강1호는 승객이 28명, 새한강2호는 3명에 불과했으나 오후2시 여의도선착장을 출발한 무궁화호에는 370명이 탑승했고, 일본인, 미국인 등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여의도~잠실간을 운항하는 1시간30분 동안 승객들은 대부분 “말끔히 정돈된 한강이 참으로 시원하다.”고 입을 모았으나 일부 승객들은 “볼만한 것이 빈약하다.” “속도가 너무 느려 지루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1983년 미국, 그레나다 침공
인구 11만명의 카리브해 작은 섬나라 그레나다에서 1983년 10월 19일 친소 좌익쿠데타가 발생하자 그곳에 주재하는 미국인 1천여명의 안전을 지키고 `동카리브해 국가기구(OECS)`의 요청을 구실로 미국이 1983년 10월 25일 해병대 2천여명을 동원,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직접적인 무력침략의 이유는 친미성향이 강한 주변나라들과는 달리, 집권에 성공하고 자주적 민족주의 노선을 펼쳐가는 그레나다 인민혁명정부가 미국의 이해를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이 침공으로 중남미 각국은 위기감을 느껴 유엔 안보리의 `무력간섭 즉각 정지`라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해 채택되지 않았다. 미국은 그레나다 침공으로 카리브해의 `붉은 물결`을 용납치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영국, 프랑스 등 우방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후 미국은 침공 후 약 20개월 만에 그레나다를 철수했다.
그레나다는 1979년 좌파세력이 정권을 탈취했으나 오스틴 사령관이 친미라는 이유로 비숍수상을 살해하고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탄생시킨 바 있다.
1979년 미국 언론, 남아공 첫 핵실험 성공 보도
1979년 소련, 대(對)중공 정상화 제의
1973년 마라토너 아베베 사망
아베베는 해발 3,000m의 고지대에서 태어나 초원에서 소를 몰며 심장과 다리 근육을 키웠다. 황제를 호위하던 친위대 하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골절상으로 출전이 어렵게 된 동료를 대신해 로마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다.
발에 맞는 운동화가 없어 맨발인 채로 출발선에 섰을 때 69명의 선수 중 이 무명의 아프리카 선수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주최측까지 이름을 두 번이나 정정할 정도로 출전 선수 중 가장 낯선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었으니 모두가 놀라워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베베는 1966년까지 각종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고 대부분 우승했다. 하지만 잇단 다리 부상으로 1967년 유일하게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중도 기권하게 되자 사실상 은퇴한 상태로 지냈다. 아베베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도 출전해 생애 3번째 금메달을 노렸으나 17km 지점에서 또다시 중도 포기해 실패로 돌아갔다.
아베베가 평생 마라톤에 출전한 횟수는 모두 15차례였다. 그중 1위로 골인한 레이스는 무려12번이나 되었다. 1967년과 1968년의 기권을 빼면 그가 우승하지 못한 유일한 레이스는 5위로 골인한 1963년의 보스톤마라톤 뿐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레이스는 1966년 10월 30일 서울과 인천을 왕복하며 2시간 17분 4초의 기록을 세운 동아마라톤이었다.
1969년 3월 23일 아베베는 차가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 때문에 목이 부러지고 척추가 손상되어 하반신이 마비되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해 7월 영국에서 열린 장애인올림픽에 양궁선수로 출전해 손가락 대신 손목으로 활을 당겨 9위로 입상하는 초인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1970년 7월 영국에서 열린 장애인올림픽에는 양궁과 탁구선수로 출전했다. 양궁은 1회전에서 탈락하고 탁구는 두세 차례만 이겼을 뿐 전반적으로 성적이 좋지 않았으나 최선을 다하는 ‘영원한 스포츠맨’ 이미지를 다시 한 번 세계에 각인시켜 주었다. 1973년 10월 25일 교통사고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4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는 수만 명의 조문객이 몰려와 그의 도전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기렸다.
1973년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
1971년 중국 유엔 가입과 대만의 축출
1971년 10월 25일, 제26차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을 명시한 '알바니아안'이 찬성 76, 반대 35, 기권 17, 불참 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됐다.
대만 대표는 표결 전에 유엔 탈퇴를 선언하고 대회장을 떠났다. 투표에 앞서 미국과 일본 등 22개국이 제안한 '역 중요사항안'이 부결됨으로써 대세는 이미 기운상태였다. 역 중요사항안이란 중국의 유엔 가입과 자유중국(대만) 추방을 제안한 알바니아안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유엔 가맹국 3분의 2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안이다.
1971년은 '죽의 장막' 중국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첫해였다. 대외적으로 대만을 지지했지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타진하던 미국은 그 해 4월에 탁구 선수단을 중국에 보내 이른바 '핑퐁외교'의 물꼬를 터뜨렸고, 6월에는 닉슨 미국 대통령이 대 중국 금수조치를 해제해 화해 제스처를 내비쳤다. 6월 11일에는 리비아 대통령 카다피가 대만과의 수교를 끊고 중국을 승인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대만 63개국, 중국 62개국이었던 수교국가수가 하루 만에 뒤집혔다. 국제적인 세력판도가 중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중국은 유엔 가입까지 추진할 수 있었다 .
이로써 중국은 건국 22년 만에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했으며, 대표권 분쟁을 둘러싼 대만과의 외교경쟁에서 확실한 우위에 서게 됐다.
1961년 유엔사회복지위, 인권조례 채택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 발족
1960년 제5차 한일회담 개최
1958년 고등법원서 조봉암에 사형 언도
1957년 유엔총회, 한국의 유엔가입자격 재확인
1954년 민국당 선전부장 함상훈, 신익희, 조소앙의 뉴델리 밀회설 발설
1951년 판문점서 휴전회담 재개. 휴전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변경
1950년 춘원 이광수 사망
현대문학사상에 한 획을 긋는 ‘무정’이라는 업적을 남긴 이광수가 1950년 10월 25일 사망했다. 춘원은 ‘무정’과 ‘유정’의 작가로 일제식민지시대의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작가이자, 친일행위로 인해 한국인들에게 정신적 좌절감을 안겨준 지식인이었다.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새로운 문학세계를 개척하였고, 1921년 허영숙과 결혼,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작품들을 남겼다. 1939년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하고 본격적으로 친일행각을 시작했다.
1950년 중국군, 한국전 개입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계속하던 1950년 오늘 설악지구 전투에서 국군의사단 15연대 중국군 한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중국이 결코 한국전에 개입하지 않을것이라고 장담했던 맥아더 장군의 예측을 뒤업는 사건이였습니다.
이후 중국군인 2만여명이 전쟁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전쟁은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입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유역까지 진군하자 중국군의 개입도 더욱 노골화 됐습니다.
20만명에 이르는 중국군은 북한군과 함께 역공을 해왔고 38선 근처까지 남진해 격전이 계속됐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을 압록강 넘어 중국까지 확대한 것을 비쳤지만 현상유지 정책을 추구하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외교노선과는 배치됐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결국 트루먼 대통령과의 의견차이로 이듬해 4월 국군 사령관에서 해임됩니다.
1946년 함흥 학생 반공의거
1945년 대만, 일본으로부터 독립
1945년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회중앙협의회 구성
1944년 가미카제 특공대 첫 전투
1944년 10월 20일, 맥아더의 미군이 레이테섬에 대해 총공세를 취함으로써 7일간의 레이테만(灣) 전투가 시작됐다. 레이테섬은 필리핀 중부에 위치한 섬으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군사요충지였다. 전투는 미군 상륙과 함께 레이테만의 하늘과 바다에서 치열하게 전개돼 섬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미군은 이 전투 승리로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집을 수 있었다.
미군이 상륙한 20일 새벽 1시. 오니시 일본 제1항공함대 사령관은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서 참모들과의 밤샘 작전끝에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편성을 결정했다. 폭탄을 실은 전투기를 그대로 적함에 부딪치게 하는 옥쇄작전이었다.
‘가미카제’는 1281년 몽골(원나라)군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여ㆍ몽(麗ㆍ蒙) 연합함대를 침몰시킨 계절풍을 ‘신의 바람(神風)’이라며 일본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던 10월 25일 오전8시, 각각 250kg의 폭탄을 적재한 4기의 ‘제로 전투기’(영전ㆍ零戰)’가 미 항모를 향해 돌진했다. 가미카제가 세상에 모습을 처음 드러낸 순간이었다. ‘영전’은 미 항모 1척을 격침시키고 3척을 파괴하며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가미카제의 위력은 이듬해 4월부터 전개된 오키나와 전투에서 발휘됐다. 그 전투에서만 2,200기나 되는 전투기가 가미카제로 나서 미군에 큰 타격을 입혔으나 성공확률이 6% 밖에 안돼 대부분의 전투기들은 목표물에 접근도 못한채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패망때까지 총 290차례 이상 출격해 2500명의 인간폭탄이 불섶으로 뛰어들었다. 강제로 끌려간 한 한국인이 이륙 후 편대 편성을 거부한 채 비행기에 장착돼 있던 폭탄을 터뜨려 자폭하는 일도 있었다. 출격은 하되 미군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사표시였고 일제에 대한 통렬한 항거였다.
일본은 가미카제 말고도 인간어뢰 가이텐, 자폭용 고속정 신요, 인간로켓 사쿠라바나 등의 변종 가미카제로 자살공격대를 만들의 그들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1943년 항일투사 홍범도 사망
항일무장 투쟁의 전설적인 영웅 여천 홍범도 장군이 1943년 10월 25일 사망했다. 장군은 1908년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 독립군 통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군`을 편성했다. 1920년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장군은 일본군이 추격대를 조직해 봉오동으로 진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출전, 대승을 거둬 이른바 봉오동 대첩의 신화를 남겼다.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서북간도로 몰려드는 일본군을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격멸한 데 이어, 장군의 독립군도 완루구에서 일본군을 섬멸해 역사에 빛나는 청산리 대첩을 이뤄내기도 했다. 국가보훈처는 장군을 1998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43년 제1회 학병징병 검사 실시
1941년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 사망 - 오르피즘 창시
1925년 경성운동장 개장
1921년 좌측통행제 실시(1906년 이후 우측통행제 실시)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볼셰비키혁명)
10월 혁명, 혹은 볼셰비키 혁명 (十月革命, 러시아어:Великая Октябрь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cкая революция)은 1917년 2월 혁명에 이은 러시아 혁명의 두 번째 단계이다. 10월 혁명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하에 볼셰비키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10월 혁명의 진짜 주체는 레닌 등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닌, 민중들이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특파원으로 와 있던 일본 언론인은 민중혁명의 기운이 달아오른 모습에 대해 "노동자와 사병들이 근위병들의 탄압에도 혁명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레닌 자신도 "혁명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고 한다.
10월 혁명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분열하여 형성된 좌파 세력인 볼세비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련의 러시아 혁명 속에서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을 붕괴시키고 공화국을 탄생시킨 2월 혁명에 이은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10월혁명에서는 2월혁명으로 출범한 입헌 민주당(카데트) 주도의 임시 정부가 쓰러지고 임시 정부와 병존하고 있던 볼세비키 중심의 소비에트(노동자, 농민, 군인위원회)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것에 이어 러시아 내전( 1917 - 1922 )이 일어나, 결국 1922년에 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탄생한다.
1915년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발표
1907년 `이태리 건국 삼걸전` 국내 첫 출판
1900년 독도를 울릉도 부속섬으로 명시(독도의 날)
1900년 10월25일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명시한 것을 기념하고 일본의 영유권 야욕으로부터 독도 수호의지 표명 및 대내외적으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천명하기 위하여 제정한 날이다
칙령 41호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국내외에 공표하는 것으로 일본이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내민 1905년 2월22일자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허위임을 입증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00년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가 독도의 날을 지정하고 2005년부터 국가기념일 제정을 위하여 서명운동을 시작하였다
2008년8월27일에 독도의 날 제정을 위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 되었고 2010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에서 16개 시,도 교총 우리역사교육연구회, 한국청소년연맹, 독도학회와 공동 주체로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전국 단위 독도의 날을 선초하였다 독도의 날 지정은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널리 알릭 강력한 독도수호 의지를 세계 각국에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칙령 41호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국내외에 공표하는 것으로 일본이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내민 1905년 2월22일자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허위임을 입증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1881년 프랑스 화가 피카소 출생
프랑스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1881년 10월 25일 태어났다. 피카소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중에 한사람으로 미술사에 있어서 큐비즘 즉, 입체주의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는 14세 때 스페인의 수도 바르셀로나로 이주,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르누아르, 툴루즈로트렉, 뭉크의 화법에 매료되었으며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다. 1897년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바르셀로나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1900년에 예술도시 파리에 입성, 이듬해에 다시 방문하여 몽마르트를 중심으로 자유분방한 작품활동을 하던 보헤미안무리에 합류하기도 했다.
청색이 주조를 이룬 소위 청색시대를 거쳐 도색시대로 색채가 변화되면서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었다. 1907년 명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세상에 내놓음과 동시에 브라크와 두터운 교우를 나누면서 그와 함께 입체파운동에 힘써 분석적 입체파, 종합적 입체파를 완성했다.
세계2차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조국 스페인에 있던 피카소는 독일군의 파리 침입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에 가담하기도 했고 정전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회화뿐만 아니라 도자기에 심취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1877년 볼셰비키 지도자 레온 트레치키 출생
1838년 가극 작곡가 조르주 비제 출생
1826년 정신질환자에 대한 인간적인 치료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프랑스의 의사 피넬 사망
1825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출생
1811년 프랑스의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 출생
1767년 프랑스 소설가 앙리 뱅자맹 콩스탕 출생
1759년 영국의 해외 노예무역을 폐지한 영국의 정치가 그렌빌 출생
1597년 명량 해전 발발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여 척을 격퇴한 해전이었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수군이 남해안 대부분의 재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음력 8월 15일,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 점령 이후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나라군과 대치중인 상황이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으며,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게 된다.
1415년 영국왕 헨리5세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에 대승
영국왕 헨리5세가 열악한 군사조건을 무릅쓰고 프랑스에 대승을 거둔 아쟁쿠르 전투가 1415년 10월 25일 일어났다.
헨리5세는 야심을 가진 젊은 왕으로 프랑스 왕권을 되찾기 위해 6,000명의 군사로 1415년 8월 13일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한다. 그러나, 프랑스 대군에 몰려 퇴각하는 중 퇴로를 봉쇄당하자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과 일대 접전을 벌이게 된다. 더구나 영국군은 이질과 영양실조에 걸려 군기가 엉망이었다. 헨리5세에게는 고작 1,000여명의 무장 군인과 5,000여명의 굶주린 궁수들과 보병 뿐이었으나 프랑스 군은 8,000여명의 기사와 10,000여명의 무장 군인들과 보병들이 있었다.
헨리5세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군디, 아르나냑, 오를레앙, 부르봉, 알랭숑 등지에서 모인 프랑스 군대를 지휘한 사람은 달브레 백작이었다. 숫적으로는 프랑스군의 완승이 예상되었지만 승리의 여신은 헨리5세에게 미소지었다. 이날 전투가 있기 하루 전에 내린 비가 원인이었다. 질퍽한 들판은 갑옷으로 중무장한 프랑스군 기사들과 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영국 궁수들은 그들에게 분당 40,000개의 화살을 쏘아대며 달려오는 프랑스군을 무력화시켰다. 기병 뒤를 따라가던 프랑스 보병들은 쓰러진 기병들의 시체로 진군을 방해받을 정도였다. 역사가들은 시체가 벽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더구나 헨리5세는 프랑스군 포로를 감시하는 데 허비하는 군사력을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2000~3000명의 포로들을 모두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날 전투로 사망한 프랑스군은 거의 10,0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헨리5세는 역사에 포로들을 살해했다는 오명을 남겼으며 중세의 기사도 정신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프랑스인들은 전쟁에 패배했다는 사실보다 이러한 영국왕의 행위 때문에 그후 수세기 동안 영국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증오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1429년 오를레앙 전투에서 잔다르크가 보여준 애국심을 보고 나서야 아쟁쿠르 패배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400년 ‘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시인 초서 세상 떠남
1394년 이성계, 한양 천도 시작
공양왕 4년(1392년) 7월 개성에서 조선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곧 한양천도를 명했다. 풍수지리상 개성에 이어 두번째로 좋다는 길지(吉地)인데다 교통이 편리해 효율적인 중앙집권정치가 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웠지만 내심으로는 무조건 개성을 떠나고 싶어했다. 개경을 기반으로 한 구귀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힘을 무력화시킬 필요도 있었고 개국과정에서 많은 정적들의 피가 뿌려진 개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하들의 입장은 달랐다. 기득권을 가지고 오랫동안 터잡고 살아온 개성을 떠나는 것이 좋을 리 없었던 그들은 “한양에는 새 궁궐도 없어 관원들이 민가를 빼앗으면 백성은 어디로 가느냐”는 명분을 내세워 천도를 반대했다.
결국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해 계룡산 신도읍에 10개월이나 공사를 진행했으나 위치가 너무 남쪽에 치우쳐있고 풍수지리적으로 쇠약한 땅이라는 신하들의 주장이 잇따르자 태조는 건설을 중단시켰다. 두 번째 후보지인 모악(서대문구 안산을 등진 연희동과 신촌 일대)도 도읍지로 부적절한 곳으로 결론이 나자 결국 1394년 8월 다시 한양천도를 확정짓고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 새로운 수도의 도시계획을 명한 뒤 그 해 늦가을 천도를 단행했다. 11월 26일(음력 10월 25일) 왕실과 문무백관을 이끌고 개성을 출발한 이성계가 한양에 당도한 것은 11월 29일이었다. 600년 `서울시대`의 개막이었다.
한양은 고려 문종 때 남경으로 승격돼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궁궐을 지어(1104년) 국왕이 가끔 들러 묵었던 곳이다. 범위는 북악산을 중심으로 낙산(동)과 인왕산(서), 남산(남)으로 에워싼 지역이었다.
한양 천도 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과 방번을 잃고 신덕왕후 강씨까지 죽자 상심한 태조는 상왕으로 물러나고, 왕위를 물려받은 정종 또한 한양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자 다시 개경으로 천도를 결심한다. 1399년 3월 7일 정종은 결국 개경으로 발길을 돌렸으며, 다시 한양으로 환도한 것은 방원 즉위 후인 1405년(태종5년) 10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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