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요 8:31-36
성경본문|요한복음 8장 31절 ~ 36절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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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상호목사(크라이스트처치 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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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독 고양이가 서독으로 넘어왔습니다. 서독 고양이가 동독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왜 서독으로 넘어왔니?
먹을 것이 없어서?” 동독 고양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러면 살 집이 없어서?”
“아니!”
“그러면, 사랑이 그리워서?”
“아니!” 동독 고양이가 계속 ‘아니’라고 대답하자,
서독 고양이가 화가 나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생명을 걸고 서독으로 넘어 온 이유가 뭐니? 이유가 있을 것 아니니?” 서독 고양이의 질문에 동독 고양이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응, 그건 말이지. 자유가 그리워서!”
어제는 64주년 광복절이었습니다(2009.9.10설교)
어릴 때 한국을 떠나온 어린이들이나 이곳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광복절’이란 영어로 ‘Independent Day’입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36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겪다가 1945년 8월15일 그러니까 64년 전 어제, 나라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 자리에도 일제 시대를 경험하신 분들이 몇 분이 계시는데, 아마도 그 분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일제시대 36년 동안 우리나라는 주권을 스스로 행사하지 못한 채, 일본에게 외교, 통상, 국방, 경제, 법률 등의 권한을 빼앗겨버렸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국말 이름을 쓰지 못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을 해야 했고, 학교에서는 우리나라 말이 아닌 일본말을 해야 했습니다. 또한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강제로 몰수당한 후 강제로 만주로 이주해야 했고, 건강한 젊은이들은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며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말에는 전쟁물자와 식량의 공급을 위해 수많은 물자를 약탈당했습니다. 또 많은 청년들이 전쟁터에 끌려가서 총알 받이가 되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젊은 여성들은 전쟁터에 끌려가서 일본 군인들의 성적인 노리개가 되기도 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채 신사참배를 강요받았습니다. 만약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체포하여 옥에 갇히기도 하고,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당하는 등, 심한 고초를 당했습니다. 이처럼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36년 동안 자유를 잃었다가 64년 어제 다시 되찾은 것입니다. 일제 시대를 경험하신 분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자유를 빼앗긴 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64주년 광복주일을 맞이하여 이 ‘자유’에 대해서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자유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자유가 있습니다.
1941년 1월6일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연설을 하면서 인류에게 꼭 필요한 네 가지 자유를 선언한 적이 있습니다.
▶ 첫째로 ‘표현의 자유’입니다.
▶ 둘째로 ‘종교의 자유’입니다.
▶ 셋째로 ‘궁핍으로부터 자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 넷째로 ‘공포로부터 자유’입니다.
그는 미국을 이 네 가지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어떻습니까?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언한 이 네 가지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까?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오히려 묶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21세기 지구촌 곳곳에 자유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전쟁 포로처럼 묶여서 자유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까운 우리 주위를 돌아보아도 죄의 포로가 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죄에 올가미에서 묶여 살아갑니다. 또 찬란한 미래를 설계하며 달려가도 시원치 않은 판에 밤잠 설치며 복수의 칼을 갈며 인생을 허비하는 복수의 포로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미워하며 살아가는 미움의 포로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날마다 눈만 뜨면 한숨 쉬며 살아가는 염려의 포로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또 과거에 실패를 경험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새로운 것에 도전조차 하지 못하는 실패의 포로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또 돈만 생기면 카지노에 달려가서 다 말아먹는 도박의 포로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정욕의 포로, 술과 담배의 포로, 마약의 포로, 시기와 질투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죄인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는 등, 포로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경우도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여러 가지 것들에 묶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분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포로가 되어 묶여 있는 분들에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통해 자유 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33절을 보겠습니다.
“그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이제까지 우리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우리가 자유롭게 된다고 하느냐’라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그들은 다른 나라의 종이 된 적이 많이 있습니다. 주전 1,400년 경 그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했습니다. 또 주전 722년에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남유다가 멸망당한 후 포로로 잡혀가서 종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인 자긍심이 뛰어난 유대인들은 자유를 잃고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설사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된 적이 없다 하더라도, 3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정치적인 자유’보다 ‘죄로부터의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정치적인 억압보다 죄의 억압이 훨씬 더 무섭고 강력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 이야기를 보면 죄가 무섭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맨손으로 사자를 염소 새끼 찌듯이 찢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의 소유자였습니다. 또 나귀 턱뼈 하나 달랑 들고 블레셋 사람 천 명과 맞짱 뜰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손과 들릴라>라는 영화에 보면, 삼손이 이방 여자 들릴라에게 가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의 집으로 갑니다. 그 때 자막에 뭐라고 나오는 줄 아십니까? "안 된다, 안 된다" 삼손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은 들릴라에게 가서는 안 되는 줄 압니다. 그런데도 들릴라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힘이 근원이 되는 머리털을 깎이는 바람에 힘을 잃어버리고 블레셋 군사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두 눈이 뽑혀지고 쇠줄에 매여 맷돌을 돌리다가, 나중에는 다곤 신전에서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끊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여기에서 죄에 묶여 있는 사람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죄에 묶여서 죄의 종이 된 사람은 죄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의 노예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서커스단에서 아기 코끼리를 훈련시킬 때, 처음에는 단단한 말뚝에 튼튼한 쇠줄로 묶어 둡니다. 아기 코끼리가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코끼리는 ‘나는 쇠사슬에 묶이면 꼼짝할 수 없구나. 몸부림 쳐봐야 소용없구나. 아예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아기 코끼리가 점점 자라 어른 코끼리가 되면, 코 하나로 1톤 정도를 들어 올릴 수가 있는 엄청난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성냥 개비만한 말뚝에 가느다란 실로 그 큰 코끼리를 묶어놓아도 코끼리는 도망치거나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줄에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죄에 묶여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습니다. 죄의 포로가 되어, 마귀의 포로가 되어 끌려 다니게 됩니다.
분명히 몸은 해방되었지만,
죄의 사슬에 얽매여 삽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로부터 자유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야훼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야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아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61: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행하실 사역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주님의 사역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역은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는 사역입니다. 결국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이 예언은 700여 년이 지난 후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 아래에서 자유를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온 인류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같이 3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여기에서 ‘아들’이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만이 참자유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참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신 분들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자유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자신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신 분들은 자유를 주시는 주님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참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을 붙들어야 자유 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말씀을 붙들어야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32절을 보겠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에 의하면 참된 자유는 진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떠나서는 결코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언제 물고기가 자유 할 수 있습니까?
물 밖으로 나갈 때 물고기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는 순간, 사람에게 붙잡혀서 사시미가 되든지, 아니면 매운탕 속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햇빛에 쬐여 말라죽고 말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뉴질랜드에 살기 때문에 잘 압니다만, 양이 언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 밖으로 뛰어나오면 양이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양이 우리 밖으로 나오는 순간, 달리는 자동차에 치여 죽든지, 사나운 짐승에 잡아먹히든지, 양도둑의 손에 붙잡혀 Butcher Shop에 팔려가서 사람들의 식탁에 오를 것입니다.
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차가 레일 위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기차가 레일 밖으로 빠져나오면 그 때부터는 꼼짝달짝도 못하는 고철 신세가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자유자의 신분이 된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말씀 안에 거할 때 자유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996년 8월 남태평양 괌 부근 해상에서 발생한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중국 조선족 선원 6명은 선장과 한국인 선원들의 끊임없는 하선 협박과 폭행과 인간 이하의 취급에 견디지 못해 선장을 비롯한 11명을 살해된 뒤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했지만 연료부족으로 표류하다가 일본수산청 어업 지도선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한국으로 압송된 6명은 처음에는 전원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나중에 대법원에서 전재천이라는 조선족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전국 각지의 교도소로 흩어져 수감되어 있습니다. 전재천이라는 조선족은 '반란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현재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부산구치소에서 자신이 저지른 참혹한 범죄를 뉘우치며 하루하루 형 집행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재천이라는 조선족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작은 독방에 갇혀서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너무 불안하고 괴로웠습니다. 먹는 것도 변변치 않고 팔다리는 사슬에 묶여 불편하기 짝이 없고, 날씨는 추워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기 어려운 상황에서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고양이만한 큰 쥐들이 자기 주위를 어슬렁대면서 도망가지도 않고 틈만 나면 달려들어 물어뜯는데 잠은 잘 수가 없고 마음에는 분노만 치솟아 오르고 원한만 쌓여 가는데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지나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이 자신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자기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펼쳐지더니 하얀 구름이 저 멀리서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랍니다. 구름 주위로 찬란한 불꽃이 번쩍거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흰옷을 입은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를 하나 집어 들더니 자기를 향하여 힘차게 내던지더랍니다. 쏜살같이 자기를 향해서 날아오는 그 불덩이를 보는 순간 "으악......"하고 뒤로 넘어져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그 불덩어리가 하나님의 성경책으로 변해 있더랍니다.
그 순간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 나는 지금까지 이 공산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 지내왔는데,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통해서 내게 무엇인가 주실 말씀이 있는가 보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서 읽다가, 말씀이 하나하나 깨달아지면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신하게 되어 교도소 안에서 약식 세례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살인마 고재봉을 아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는 죄없는 6명을 도끼로 쳐서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여러분, 나 같은 살인마도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까지 사랑한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호소하며 자신이 갇혀있던 감옥 안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2,000여 명 중 무려 1,800명을 예수 믿게 했다고 합니다.
또 죽은 시체를 불태우는 시설까지 갖추어 놓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 ‘더 못 죽여서 한이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길 만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지존파 멤버들도 감옥에서 마음을 열고 뒤늦게 주님 예수를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돈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세상의 법과 지식과 제도가 그들을 변화시켰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역사를 일으켜 놓은 줄로 믿습니다. 진리가 그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한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삶 속에서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의 복음을 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 안에 거해야 자유 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성령 안에 거해야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책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다니는 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네 명의 친구가 야고보서를 함께 공부하면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약5:16)는 말씀에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첫째 친구가 “나는 사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담배를 끊지 못했어.”라고 고백했습니다.
▶ 두 번째 친구는 자기에게 있는 복잡한 이성 관계를 고백했습니다.
▶ 세 번째 친구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속해온 도벽의 습성이 있어.”라고 고백했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사실은 슬쩍 훔친 적이 몇 번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 네 번째 친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라고 다그쳤더니, 할 수 없이 얘기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남들의 흉이나 결점이나 약점을 알게 되면, 불고 다니는 것이 나의 약점이라” 네 번째 친구의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의 약점을 드러내고 남을 판단하는데서 묘한 쾌감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타락한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한 영에게 사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죽이는 영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히면 자기의 의지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히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고 이간질 시킵니다.
'어쩜 인간이 그럴 수 있나?'라고 말하지만, 인간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히면 사람을 죽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지존파나 유영철이나 강호순 같은 살인마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악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죽이게 조종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다릅니다.
▷ 악령은 죽이는 영이지만,
▶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보면,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영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은 자유케 하는 영이요, 살리는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부요케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은 악령과 정반대입니다.
▷악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험담과 수군거림이 있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에는 용서와 사랑이 있습니다.
▷ 악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당짓는 일과 분열이 있지만,
▶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에는 연합과 일치가 있습니다.
▷ 악령이 역사하면 살아난 영혼도 죽지만,
▶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죽은 영혼도 살아나는 줄로 믿습니다.
▷ 악령이 임하면 자유를 누리던 자도 눌리게 되지만,
▶ 성령께서 임하시면 눌린 자도 자유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저는 살리는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영이 여러분과 가정과 사업장과 삶의 현장에 충만하게 역하사실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매순간마다 성령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묵고 있는 모든 영적인 결박과 죽음의 권세를 풀고,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볼품없는 아이가 태어났지만, 아빠가 없었습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가 엄마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자녀가 사생아 출신인 벤 후퍼와 함께 노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벤에게는 당연히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날마다 왕따를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 동네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해오셨습니다. 어린 벤은 목사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교회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 시간에 일부러 늦게 교회에 가서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말씀이 끝나고 축도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습니다. 그날도 그렇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다가 목사님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고 축도 전에 빠져나오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사람들 틈에 끼여 나오는데 목사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미소를 띠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래.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한 벤은 황급히 교회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더 큰 소리로 그의 등에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날로부터 벤 후퍼는 사생아라는 의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 사생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그는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날부터 패배의식에서 해방되어 인간 승리자, 곧 테네시 주의 주지사로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어떤 핸디캡을 가지고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여러분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이미 자유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유자답게 자유를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더 나아가 묶여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