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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나의 백부(정진영 옹의 3남)께서 건국훈장 애족장 표창을 받은 것은 1986년으로 이 표창은 인천상업학교 27회 동기 정홍택님의 노력에 의하여 해방전 대전 형무소에서 옥사한 4인의 공적을 기려 신청되었다. 그 후로 1991년 서훈이 되었으나 당시 표창을 받은 장손이 국내에 있지 않고 연락처가 불분명하여 그 훈장은 잠자고 있었는데 2015년 인천시에서 서훈 미전달자에 대한 기사가 올라온 것을 2017년 발견하고 보훈처에 찾아가 서훈 신청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나의 부친이 왜 소년 첩보 유격대원이 되어 북파되었고 다시 탈출하여 왜 용유도에서 국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할 뻔했는지를 추적하기로 했다.
내가 옛 이야기를 들은 것은 본문에 기술이 되어 있는데 당시 들은 얘기는 집안에 나의 조부 3 형제가 있었고, 그 위로 사촌(나에게는 재종조)이 되는 유명한 3형제가 있었다 하였는데, 이들은 인천 개항기에 내려왔고 대대로 항일운동의 첩보원과 독립 운동 자금 지원의 업을 했으며, 그 마지막으로 조부님의 이남(정태흥, 인천상업학교 26회 졸업)과 삼남(정태윤, 인천상업학교 27회 졸업)이 만주로 가서 고생했으며, 국내에 돌아와 바로 생을 달리하였고, 밀입국 후 집에 왔다 이별을 고하고 나가서 바로 체포되어 대전에서 옥사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1978년의 가을이다.
당시 전해 들은 말은 아버저 형제의 윗분들은 모두 할아버지로 표현되었고 그 분들이 한 행적은 어느 분의 일로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역으로 추적하며 어려운 국운 속에서 개항장 정씨 형제와 후손들이 역사의 한 부분을 만들어 왔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현재 족보가 멸실된 상태이다. 일제 강점기 때 모두 분산이 되었고 연락이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인천에 남은 친척은 해방전에 이북으로 갔다가 남한 정부 수립후 탈출해 온 아버지 형제의 가족이 개항장 정씨 형제 후손의 일부이다.
처음 인천에 발을 붙인 인물은 정흥택님으로 개항 원년에 내려왔다. 이 분은 1870년 5월10일생으로 1930년 5월에 회갑연을 치룬 것을 근거로 확인이 되었다. 인천 개항원년에 인천에 들어온 인물로는 역시 1870년생의 부산 동래 출신인 김윤복이 인천 외리에 정착을 했다. 또한 인천의 거물로는 1871년생 장내흥이란 분이 있는데 다른 이름으로 장석우로 불리웠는데 원태생이 인천이다. 장석우는 후에 1919년 임시정부의 연통부 인천부 참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기여하였고, 인천 박문여학교의 전신인 소화학교를 아들 장광순과 설립했으며, 인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 활동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 임시정부 연통부 활동의 주역으로 활동한 인물로는 해주 출신의 최응삼으로 1897년경에 인천에 정착을 했는데, 다른 이름으로 최승우라는 불리웠고 대동양조의 대표로 송림리의 갑부이며, 동산 학교의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한데, 이는 임시정부 연통부의 인천부 부장으로 비밀 활동을 했다. 즉 장석우와 최응삼은 밝혀진 임시정부의 조직원이자 첩보원이었다. 또 하나의 거물로는 부평부(현 인천 서구) 시시내의 유지 유완무(이명 유인무, 1861년생, 호 백초, 검여 유인강의 백부)라는 분이 있는데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으로 인식되고 있다.
정흥택님은 청파동 반가의 자손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14살에 인천에 내려와 인천을 돌아보고 어물 행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행상이라는 직업은 당시 시장이 없는 인천에서 일본을 비롯한 각국 조계지의 집을 방문하며 정보 탐색을 하기에 좋은 위장 사업이다. 정흥택님의 동생인 정순택은 1873년 12월 출생으로 나이 25세에 말제 정인택(후에 정세택으로 개명)과1888년 또는 1889년에 인천에 정착을 했는데, 이 때 정순택의 이름으로 내리 112번지에 어물전 터를 얻었고 터진개라 불리우는 이곳에서 정흥택 어시장이 시작되고 바닷가(후에 축항)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어상조합을 형성하여 조선인 어시장을 형성했으며, 조선인의 어시장을 50년이 넘게 일본인으로부터 무풍지대이자 독립지대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1899년에는 독립협회와 대립관계에 있던 홍종우는 국가 자강의 비책으로 객주를 보호하며 내장원의 내탕금의 확보 기반을 구축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민족자강을 위한 방안으로 많은 계몽운동에 참여하도록 하여 많은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 때 인천항신상회사와 인천항어상회사가 설립되었는데 인천항어상회사는 신상회사의 객주 집단과는 달리 인천에 정착한 정흥택 형제 외에는 모두 객주의 경험이 없는 관군 출신이거나 유림 출신의 인물로 배정하여 고종 황제에 인명부를 보고했다. 이들의 면면을 모두 살피기는 어려움이 있지만 공통적인 코드는 후에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후 정윤성(나의 증조부)님과 세 아들 정순영님, 준영님, 진영님이 인천에 정착을 했다.
큰 아들 정순영은 주로 객주업보다는 행정에 능한 인물로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의 주무 활동을 가장 오래한 인물로 1916년 인천상업회의소에 합병될 때까지 회의소 부회두를 역임하며 보건조합장을 겸임했다. 보건조합은 후에 인천자선회의 전신으로 인천의 보건업무보다는 팽창하는 인천의 인구를 수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빈민구제의 역할이 주업이었다. 정순영님(종조부)은 인천에 정착하며 목재와 신탄의 사업에 주력했는데, 이 사업은 후에 정씨 형제의 막내인 정진영님(조부)이 1940년대 초까지 유지했다. 나의 이야기에서 가장 의문의 인물이 정순영 종조부님이었다. 1920대부터는 박창한이 이끄는 미신친목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신사상의 지도자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 다음 의문의 인물이 정치국 사망후 축항사(전 협률사)를 인수하여 애관극장을 세운 김윤복이다. 그는 후에 권번 인수와 인천체육회의 회장이 되며 인천의 예체능계를 통패합한 인물이다.
나는 이 글을 정리하며 고종이 내가 갖고 있던 관념처럼 조선의 나약한 왕이 아니었음을 느꼈고, 고종의 치밀함과 과감함은 어느 왕에도 뒤지지 않음을 느꼈다. 고종은 민비(후에 명성황후)는 급변하는 정세에 능동적이었다. 인천 개항과 국제적 조계지 개방을 하면서 고종은 보다 적극적인 전략을 세웠다고 추리된다. 누구일까?
민씨 일가는 그리 능동적이지 않은 기득권이었다. 이용익은 임오군란 이후 떠오른 인물로 후일 그의 자금이 보성학원 설립과 서북학회 및 간도 독립군 정착 자금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개항기에는 민영익이 권력을 쥐고 있었을 때로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 체결후 미국에 보빙사로 중국인 오례당을 통역사로 동반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개화를 이끌어 가려했다. 홍종우(1850년생)는 용의주도한 인물이지만 프랑스에서 견문을 넓히고 고종에게 원한을 심어준 김옥균을 척살하고 1894년에 돌아와 고종의 신임을 받았고 고종을 왕에서 황제로 등극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는 유림과 객주 세력을 비호하며 대한제국 자강의 정책을 구상하였다. 홍종우는 인천 개항이 되고 10년이 넘어서 혜성처럼 나타났다.
고종은 개항 당시 눈과 귀가 되어줄 인물이 필요했고 그 조직은 노출되어서는 안되는 비밀조직이어야 했다. 역사 학자가 아닌 나는 그 비밀조직의 수장이 백초 유완무라고 추리한다. 유완무의 존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97년 치하포 사건으로 사형의 위기에 처한 김창수가 유완무와 성태영 그리고 이시발을 만나면서 비밀스러운 조직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 조직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는 연구가 되어있지 않지만 당시 김창수의 됨됨이를 평가하고 향후 민족운동가로 육성하고자 했을 당시 백초 유완무 선생은 자신의 실체를 설명했다. 정치를 원하는 이에게는 정치가의 자리를 줄 것이며 상업을 원하는 자에게는 상업의 기반을 마련해 줄 수 있다. 이는 배후에 정치적으로 막강한 세력이 있으며 든든한 자금력의 기반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고종 황제는 1902년에 최초의 비밀 정보 조직으로 설립했다는 ‘제국익문사’는 유완무에 의해 이미 구상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당시 유완무는 간도로 넘어가 간도의 소유를 주장하는 북여요선의 초안을 작성하여 장기적인 자강과 항일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을사조약이후 이용익의 일가과 많은 항일 독립 운동 주동 인물들이 만주와 연해주에 발판을 잡는 초석을 마련했다. 유완무는 이동휘를 주축으로 하는 서우 학회의 회원으로 서북학회의 지향점을 제시했으며, 후에 그 정신은 신민회로 연결이 되었으며, 신민회의 이동녕, 이회영, 장유순 등 그리고 경무사령관 양성환 참장과 아들 양재훈을 합류하게 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초석이 되기도 했다. 유완무는 김주경의 보고와 노력으로 김창수의 관찰을 시작했고 고종황제가 인천감리서에 전보를 보내게 하여 김창수의 사형을 보류하게 한 후 감리서 탈출 작전을 구상했다. 감리서 주변은 당시 유력 객주와 정흥택 어물전이 포진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의지는 일사불란함이 있었을 것으로 추리된다.
유완무는 자강 운동과 계몽 운동을 주력으로 하며 인재 발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김구 선생도 다시 태어났다.
인천에서 김구 선생의 가족을 지원했던 박영문 객주와 안호연 객주는 우연히 김구 선생의 가족을 돌본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준비된 보호작전이었다.
박영문은 인천 보건조합 이전에 인천 자선사업의 뿌리를 만든 객주로 1912년까지 매년 봄 가을로 걸인 잔치를 열었다. 1884년에는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동학시에는 관군으로 참전한 유생이었다. 후에 정흥택님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정확한 근거는 찾지 못 했다. 안호연 객주는 강화출신으로 1889년부터 인천에 정착하여1916년까지 인천의 거상으로 년매출이 200만원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객주 이전에 소녕완참봉의 직을 갖고 있었으며 당시 문필이 뛰어나기로 자자했다. 그의 아들 안영원은 총독부의 직원으로 임시토지국의 기수로 있었다. 말기에 총독부의 기밀 정보를 빼냈을 것이다. 그의 작은 아들 안영우는 인천상업학교에서 명석함을 자랑했는데 1916년 이후 만주로 이주를 하고 후에 또 다른 독립 단체 신민부의 간부가 되었다.
이렇게 등장한 많은 인물들은 정흥택 재종조님과 많은 연계점을 갖고 있다. 정흥택님의 아들인 정태익(재당숙)은 1909년 서북학회의 생도로 졸업을 했으며, 이 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자강의 뜻과 항일 정신을 심어주었다. 후에 정태익은 인천부 부의원으로 활동하며 조선인의 대변자로 역할을 했는데 나가이 부윤과의 잦은 충돌과 어시장 문제로 결국 부의원을 사임하고 정흥택 어시장의 끝을 지켰다. 그리고 친척을 이끌고 만주로 향한 것으로 추리되며, 이 계기가 육촌 동생 태흥과 태윤을 만주로 이끈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정태익은 인천상업학교의 전신인 인천실업학교 원년 졸업생으로 태흥과 태윤 두 동생에게는 형이자 항일정신의 전통을 잊는 동문 선배였다.
인천 서구의 시내가 시작된다는 시시내(시천동)에서 유완무 선생이 시작한 대한의 구국활동은 항일 운동의 물줄기가 되었고 독립운동의 강이 되었다.
정흥택 형제를 비롯하여 인천에 정착한 객주는 자주적이며 항일 정신이 투철했던 인물들로 포진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수입은 내탕금의 재원이었으며 후에 항일 독립 운동의 재원으로 연결이 되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해방전까지 민족의 자강을 위한 교육 사업에 그들의 모든 것을 걸었지만, 현재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들 객주들의 활동은 전형적인 매판 자본가라는 평을 한다. 그러나 인천 대부분의 인물들은 일본 제국의 자본을 이용한 매판 자본가가 아닌 민족자본으로 일어난 이들이며, 인천에서의 매판자본 형성은 일제 강점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조사된다.
나의 이야기는 인천 개항을 함께한 정씨 형제의 관점에서 본 역사이며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을 겪어야 했던 일들을 관찰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정리하며 내가 느끼는 점은 역사는 멀리 있지 않고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왜곡되어서는 안되는 사실로 존재하여야 한다. 때로 시류에 따라 또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 따라 해석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 자체로 남아야 하며 변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사업가이며 사회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기도 했으며 시대의 환경에 최선을 다하는 휴머니스트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사는 방법이 곧 현재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이야기는 인천 개항으로부터 100년을 따라가 마무리를 했으나 그 역사는 살아 있는듯 늘 내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록을 인천의 개항장과 함께한 인천인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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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만약 정씨집안의 돌아가신 조상이라면 너무 기특하고 대견스러워
다시 돌아와 니 애썼다. 내살아온 날들을
어찌 이리 소상히도 잘알고 잘 기록하였는지 쓰다듬고 또 쓰담으며
무슨 상으로 보답해줄까나 고민했을것같습니다.
긴 기록 찾아 연구하고 기록하시느라
정말 애쓰셨습니다.
한 일가의 일기가 아닌 역사이야기로
정씨연대기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으면 저의 욕심이겠지요.
용유도 길가에서 독립운동비를 본 기억이 납니다
개항기의 역사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기록해 오신
쉬어가소 선생님의 의지에
마음을 다해 큰 박수를 올립니다
자랑스러운 조부님!~~~
누구나 할 수없고
아무나 할 수 없는
훌륭한 가족의 일대기를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손주가 얼마나
든든하실까요~~~
앞으로 인천의 역사에
길이 남을
귀한 자료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통해
역사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화두로 떠오른
글이라 깊이 깨우칩니다
지난 역사 현재 우리 아닐까요~~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꾸벅
늘 건강하시고 행운이 함께 하십시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보람이 있네요. 감사해요.
인천인 장석우와 최응삼(최승우)의 이야기를 추가 보완합니다. 그들은 임정의 조직원임이 명확해 졌음을 확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