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에 대하여
5년 전 글을 살짝 바꿔서 퍼옴
요즘이야 월드컵에든 올림픽에든 한국 축구 국대가 나서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되어 버렸지만 아시아의 호랑이라며 거들먹거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엉뚱한 팀에게 발목을 잡히고 허리를 꺾여서 이른바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던 역사는 길고도 쓰라렸다. 84년 올림픽의 무대는 미국 L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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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의 올림픽 본선 진출에 대한 기대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83년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당당 4강에 진출했던 "용감하고 씩씩한 대한 건아"들이 적잖이 수혈되어 있었고, 눈만 봐도 오소소소 소름이 돋는 독사 박종환 감독이 그 팀을 이끌었다.
2승 1무씩을 기록한 가운데 맞붙은 사우디 아라비아. 대회가 열린 곳이 싱가포르였기에 시차가 별로 없었던지라 온 동네에서 TV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있었다. 제법 붐비던 동네 어귀 퇴근길은 빗자루로 쓸어낸 듯 평화로왔다. 일찌감치 집에 돌아왔거나 TV 나오는 다방으로 사람들이 집결했던 것. 잔뜩 상기된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번에는.....'하는 기대가 사우나 안 땀방울 떨어지듯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우디만 잡으면 나성에 가서 편지를 띄울 수 있다~~~~~ 그런데 하나 불안한 점이 있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8강전이 끝난 후 북한 선수들과 임원들과 일부 응원단은 태국 심판을 집단으로 구타했다. 남한에게 진 북한 선수들은 아오지 탄광행이 틀림없으리라는 무시무시하고도 우스꽝스런 착각이 우리 국토 우리 산하를 지배하던 무렵이었기에 북한의 '망동'은 '징한 놈들'의 악명을 드높이기에 좋은 입방아 재료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수군수군 들리는 소리로는 그 경기가 정말로 말도 안되는 편파 판정이 난무했고, 결국 머리카락이 곤두선 북한 애들이 심판을 밟아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때 북한의 상대는 중동의 부국 쿠웨이트였다. "그 알라 (신의 이름이기도 하고, 부산 사투리로는 아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섬기는 중동 아~~들이 돈은 많아가꼬 심판들 억수로 맥일 꺼 아이가."
또 다시 한 번...... 우리의 상대는 그 중동의 맹주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공을 들고 오는 심판은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단정히 머리를 깎고서 엄숙히 양팀 선수들을 불러 주의 사항을 전달하는 품이 매우 익숙하고 절도가 있었다. 마침내 그의 입술에서 휘슬 소리가 울려퍼지고 경기가 시작됐다.
한국팀은 몸이 가벼워 보였다. 최순호 이길용 정해원 신연호 등으로 구성된 공격진은 지금 더듬어 봐도 사상 최강에서 한 두 푼 빠질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첫 골을 터뜨린 것은 그 화려한 공격진이 아니라 수비수였다. 전종선으로 기억하는 수비수가 센터서클을 넘어 어슬렁거리는데 공이 떼굴떼굴 그 앞으로 굴러들었고, 달려들어오는 탄력으로 날린 슛이 근 4-50미터를 날아가 사우디의 네트에 꽂히는 게 아닌가. 분위기 좋았다. LA는 거저 가는 거처럼 보였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나의 살던 동네는 삼등 삼등 완행열차 타고 동해바다로 떠나가는 분위기가 됐다.
사우디 별 것 아니었다. 이윽고 또 한 골이 터졌다. 2대 0. 잘하면 대량득점으로 낙타 타고 다니며 알라 찾는 석유 졸부들을 고향 앞으로 쫓아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부터였다. 심판의 휘슬이 개념과 어이를 상실한 채 불러제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백태클을 해서 한국 선수가 넘어졌는데 사우디 선수를 고의로 덮쳤다고 파울을 주지 않나, 역습 찬스를 잡아 신나게 뛰고 있는데 휘슬을 불어서 우리 문전에서 프리킥하라고 친절히 안내해 주지 않나, 분명히 사우디 선수에 몸 맞고 90도로 꺾이고 터치아웃이 되었는데 드로잉이 사우디 것이 되지 않나.......
그리고 마침내 사우디의 만회골이 터졌다. 전반을 깔끔하게 2대 0으로 끝내고 싶었던 우리의 염원을 짓밟는 골이 우리의 네트를 가른 것이다. 그나마 골키퍼가 잘 막아냈는데 얄밉게도 주워먹기로 한 골이 들어갔다.
축구에서 2대 0과 2대 1은 하늘과 지하철 차이다. 또 1대1에서 2대 1이 되는 것이랑, 2대0에서 2대 1이 된 것은 또 느낌과 분위기가 판이하다. 2대0에서 2대1이 되는 것은 지금까지 여유있던 자들의 마음이 바빠짐을 의미하며, 동시에 눌리고 있던 자들의 활개가 펴지는 순간이다. 아니나다를까 후반 시작하자마자 휘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맥없이 사우디에게 한 골을 허용했다. 2대2 경기는 원점이었다. 그러나 한 골 먹으면 두 골 넣자는 박종환 감독의 스타일대로 한국팀은 공격의 고삐를 놓치지 않았고, 덕분에 세 번째 골을 얻어냈다. 사우디의 자살골이었다. 또 한 번 거대한 함성이 동네를 뒤덮었다.
사우디 놈들 이제는 한풀 꺾이겠지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사우디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슈퍼리그 득점왕이었던 이길용의 날랜 몸놀림은 연신 사우디의 문전을 헤집고 있었다. 이제 좀 안심하고 보자면서 다리 긴장 풀고 무릎을 펴던 찰나, 지금도 잊기 어렵고, 생각만 해도 주먹이 부르쥐어지는 장면이 펼쳐지고 말았다.
한국팀의 패스미스를 기화로 역습을 펼치던 사우디 선수가 페널티박스 바깥에서 걸려 넘어져서 페널티 에리어를 굴렀는데 갑자기 인도네시아 주심의 팔이 날카로운 반월도처럼 골대를 향하는 게 아닌가. 슬로우 비디오를 백번을 들여다봐도 접촉은 페널티 박스 바깥에 있었지만 페널티킥이었다. 독사 박종환 감독이 눈 부라리며 항의해도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다. 거센 항의를 요리조리 피해다니던 주심이 그라운드에 공을 갖다 꽂은 이상 정기동 골키퍼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려야 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을 얻지 못했다. 3대 3 적어도 그날 하늘을 주관하는 신의 이름은 알라였다. 바로 몇 분 뒤 또 한 골이 한국 문전을 통과한 것이다. 4대 3 사우디 입장에선 꿈같은 역전. 우리 입장에선 프레디와 제이슨이 동시에 출연한 악몽의 가위같은 역전.
"저 무식한 졸부 쉐이들. 기름 팔아 돈 좀 만졌다고 저리 더럽게 축구하네."
"와...... 물도 돈 주고 사먹는 또라이 쉐이들이....." (그때 우리는 사우디를 이렇게 욕했다 우리의 미래를 미처 예측 못하고)
"마 마 조용히 해라 국력이 약한 죄다."
"이거는 축구가 아잉기라. 북한 아들 맹키로 확 밟아 직이뿌라."
그래도 승리의 여신은 한국에 미련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상한 골 감각의 이길용 (이 분 돌아가셨다..... 고인의 명복을,,,... )이 또 한 골을 터뜨리고 185센티의 장신 최순호에게 매미처럼 덥석 안겨 버렸을 때 사람들은 정신나간 것처럼 환호했다. 아무리 악의 무리가 기승을 부려도 끝내 승리하고야 마는 짱가와 마징가와 로보트 태권브이와 똘이장군과 그렌다이저처럼, 돌진하는 우리 용사 막을 자 그 누구냐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경기의 맥을 돼지갈비 자르듯 턱턱 자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심판이었다.
심판의 모션은 유독 컸다. 휘슬 소리는 다른 심판의 배는 되었고 프리킥 이후 어느 쪽의 반칙인가를 지정하는 손짓은 엄숙할 지경이었다. 물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칼같은 심판이었다. 미드필드 싸움에서 사우디에게 반칙 판정을 할 때도 있었다. 사우디 선수가 이건 아니지 않냐고 항변하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근엄하게 눈 내리깔며 사우디 방향으로 팔을 뻗었다. 그렇게 공정을 가장하면서, 검은 옷을 입었으되 사우디 국기를 가슴에 단 듯한 주심은 경기 흐름을 사우디 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선거개입 사범은 엄단”하겠다면서 지난 대선 때 정보기관이 한 짓은 “판결을 지켜보자”는 어느 나라 대통령처럼.
마침내 사우디의 5번째 골이 터졌다. 5대 4 ........ 결승골이었다. 야구도 아니고 핸드볼도 아닌 발로 하는 축구에서 90분에 아홉 골이 터졌다. 아시아 축구 연맹이 성립한 이후 최고의 명승부라는 감탄이 터져나왔고, 사실 한국 사람이라는 입장을 벗어 던진다면 그 경기는 명승부의 반열에 들만한 경기였다. 그러나 실력으로 해도 충분한 명승부가 될 수 있는 게임에다가 쥐약을 뿌린 것은 다름아닌 심판이었다. 바로 오늘 새벽 소치 올림픽 여자 피겨를 망쳐 버린 러시아의 그 심판들처럼.
심판이란 그런 것이다. 규칙이란 그런 것이다. 불공정한 심판과 편파에 의한 룰의 해체는 단순히 그 경기를 망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기 자체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에 있다. 충분히 박수 받을 승리에 먹칠을 하고 패자에게서 승복의 아량을 앗아가며 관중으로 하여금 무기력감과 분노에 충천하여 뭐 이런 경기가 다 있냐 병을 던지게 만든다. 그래서 심판은 중요하고 규칙은 공정해야 한다. 그건 운동 경기든 선거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찌 된 게 입만 떼면 준법을 강조하는 대통령 이하 자칭 ‘미스터 법질서’였던 기춘 대원군 합하는 도무지 그 무안함을 모른다. 국가 정보 기관과 군대가 한쪽의 승리를 위해 뛰고 다른쪽에 험담을 퍼붓고 그 사실을 경찰이 은폐하는 양태에 비하면 오늘 새벽 김연아의 금메달을 앗아간 러시아 심판 쪽은 오히려 봐줄만하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서 5대 4를 만들어 냈던 인도네시아 심판 쪽이 오히려 더 정직할 지경이다. 왜? 사우디와 한국의 경기가 끝난 뒤 심판이 한국 선수들에게 악수를 청했을 때 한 명의 선수가 홱 돌아서서 제 갈길로 가 버렸고, 심판은 멋적게 웃었다. 최소한 자기가 한 짓은 알고 있는 자의 무안함이었다. 우리 나라의 나으리들은 그럴 염치조차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