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일곱째 이야기, 외세에 짓밟히고 조국에 버림받은 화냥년(1)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17)
[삽화-백소(白笑)]
6월에 들어서자 완전히 여름 날씨다. 햇살도 따갑고 땅에서 올라오는 열이 대기를 후끈후끈 달아오르게 한다. 6월이면 원래 여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한 것 같다. 해마다 여름이 점점 더 빨라진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기후위기 때문인 것 같다는 말을 누구나 한다. 제법 심각하게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보기는 극히 드물다. 대체로 남의 세상 이야기하듯 하고, 간혹 걱정을 하다가는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도 아직 삼복더위까지는 미치지 않아서 그런지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하고 낮에도 선선한 바람이 이따금씩 분다. 그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기며 신돌석씨는 서울 가는 전철에 올랐다. 오늘은 수요시위가 있는 날이다. 정식 명칭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이다. 오늘이 1650차라고 한다. 30년이 넘게 이어져 온 것이다. 대단하다. 신돌석씨는 매주 수요시위가 있는 줄은 알았다. 그런데 정작 참가한 적은 거의 없다. 김복동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참가했던 기억이 있다. 오늘은 지역의 시민연합에서 주관한다고 참가해달라고 해서 가게 되었다.
수요시위의 주최는 늘 그렇듯 정의기억연대에서 하는데 이번 주 주관을 신돌석씨가 사는 지역의 시민연합에서 한다. 돌아가면서 주관을 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특히 수도권이라도 서울이 아닌 지역의 단체에서까지 주관을 하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시민연합이 주관한 것이 처음이 아니란다. 그 동안 무심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주관을 하는 시민연합의 대표와 사무국장은 참가 인원이 너무 적을까 무척 걱정하는 듯하였다. 지역에 사람이 적어지다 보니 서로 품앗이를 해서 인원을 채우는 경우까지 생겼다. 평일에 서울까지 가야 하는데 참가인원이 적은 것은 너무 당연했다.
시민연합의 대표와 사무국장은 시민단체 사람들 중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지지와 이해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노동문제 관련 집회에 꼭 동참했고, 홍보도 잘해주었다. 작년 가을부터 함께 지역비상시국회의도 만들어서 활동하였다. 그래서 되도록 많이 함께 해야 했다. 그런데 신돌석씨와 같이 활동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아직 일을 했다. 은퇴할 나이가 안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은퇴를 했어도 아파트 경비, 택배 등을 하면서 일을 하였다. 그러니 자연히 신돌석씨 혼자 오게 되었다. 그래서 신돌석씨가 다른 일정이 있더라도 바꾸어서 와야 할 형편이었다.
작년 전까지만 해도 신돌석씨 역시 직장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오늘은 마침 송영이 있는 날인데 다른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송영 끝나고도 시간 맞추어서 가기에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오랜만에 1호선 전철을 탔다. 신돌석씨는 각 칸의 맨 앞이나 맨 뒤에 탄다. 경로석을 찾아가는 것이다. 아직 늙었다고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에 앉아서 가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중간에 앉으면 젊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는 신돌석씨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정말 민망하다.
오늘도 경로석에 좌석은 물론 서 있는 사람들까지 꽉 차 있어서 중간으로 옮겼는데 웬 학생인 듯한 사람이 벌떡 일어난다. 그런데 문제는 양보하려고 일어서는 것인지 내리려고 일어서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괜찮다거나 고맙다거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있다가 앉았는데 그 젊은이는 옆으로 가서 서 있다. 양보하려고 일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다 종료되었는데 새삼 불러서 괜찮다거나 아니면 고마움의 표시를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 된다. 자연히 그냥 모른 척하고 앉아서 가는 수밖에 없다.
신도림역을 지나면서 승객이 대거 교체되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왕창 탔다. 여자애들은 좌석 앞으로 가서 조용히 서 있는데 남자 애들이 난리가 아니다. 몇 역을 지나자마자 갑자기 와르르 뛰어나간다. 여자애들은 그대로 있어서 일행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옆 칸에서 문을 열고 다시 이쪽 칸으로 왔다. 알고 보니 이 칸에서 막 뛰어나가서 다음 칸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고 다시 이리로 오는 것이었다. 중학생 때 혈기왕성한 몸으로는 해볼 만한 일이다.
[삽화-백소(白笑)]
그렇게 몇 역을 뛰어나갔다가 뛰어 들어오고 본래 칸으로 다시 옮기고 하니까 앉아 있던 5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한마디 했다. 뭣들 하는 짓이냐고 꾸짖은 것이다. 그래도 아무 반응도 없다. 문득 50년 전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버스에서 승객 수를 확인하기 위해 계단에 측정기를 달아놓는 경우가 있었다. 밟고 내리면 수가 기록되는 것이다. 하루는 같은 학교 학생들 10여 명이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다. 몇 명이 재미 삼아 계단을 밟지 않고 뛰어내리고 다시 올라탔다. 광화문까지 그렇게 갔는데 어느 승객이 버스에서 내리면서 친구 하나의 따귀를 때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순진한 세상이었던 것 같다. 맞은 애는 그냥 멍하게 있었고, 다른 애들도 아무 말도 못했다. 어른이 때리면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것일까? 따귀를 때린 사람은 유유히 자기 갈 길을 갔고, 맞은 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도 함께 그 사람을 욕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이미 버스에서 내려 자기 갈 길을 갔으니까. 지금 같으면 아마 제일 먼저 누군가 동영상을 찍지 않았을까? 그리고 고소했겠지. 고소를 하지 않아도 SNS 통해서 확산시켰을 테고 수많은 댓글이 달렸을 것이다. 그 사람 신상털이도 했을지도 모른다.
뭐라고 한 사람의 말이 그래도 먹혔는지 중학생 애들은 떠들기만 하고 뛰어내리는 것은 그만두었다. 지쳐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신돌석씨는 종각역에서 내렸다. 서울 와서 전철을 타고 내릴 때마다 불편한 것이 있다. 경로카드를 대면 ‘행복하세요’라고 한다. 경기도에서는 그런 게 없다. 그러니까 신돌석씨는 탈 때는 그런 소리가 안 나오다가 내릴 때 나오는 것이다. 매일 듣는 사람은 무감각해질지 모르지만 신돌석씨처럼 어쩌다 듣는 사람은 괜히 쑥스러워진다. 아직 멀쩡한데 공짜로 탄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누가 쳐다볼까봐 괜히 쑥스러워진다.
그런데 ‘행복하세요’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들린다. 공짜로 타는 사람이 정말 많나 보다. 확실히 고령화 사회가 맞긴 맞는 듯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곳 쪽으로 걸어가는데 전화가 왔다. 시민연합 대표였다. 소녀상 앞에서 집회를 할 수 없어서 앞으로 장소를 옮겼단다. 안국역 쪽으로 오란다. 미리 알았으면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안국역으로 가는 것인데 그랬다 하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걸어야 하니 햇살이 더 따갑게 느껴졌다. 건물들 그림자 있는 곳으로 걸어가려고 애를 썼다.
소녀상 근처에 오자 엄마부대라는 글자가 쓰인 티를 입은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이들과 극우 수구세력들이 수요시위를 방해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신돌석씨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 극우들은 자기 나라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외국을 배격하는데, 이건 어떻게 된 것이 극우라는 자들이 성조기를 흔들지 않나, 나아가서 일본을 두둔한다. 도대체 뭐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평화의 소녀상은 몇 겹으로 울타리가 쳐 있다. 외세에 짓밟히고 고통을 당하다 해방된 나라라고 오니 사람들이 냉대해서 침묵을 지키다가 이제 겨우 소녀상이라도 만들어서 한을 풀려고 하는데 극우수구세력 때문에 갇히는 꼴이 되었다. 쓰레기 같은 자들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압도적인 시민들의 양식으로 무력화시키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신돌석씨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승만, 박정희를 옹호하는 것까지도 용서하기 힘들지만 그것은 몰라서 그렇다 치고, 어째서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박해한단 말인가?
다시 옆 쪽으로 오자 반일행동이라는 단체의 젊은 학생들이 잠시 후 12시에 소녀상 지키기 집회를 한다고 한다. 이들을 보니 몇 년 전에 일본대사관 앞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거기서 농성을 하면서 1인시위도 하는 학생들을 보고 너무나 반가워서 달려갔는데 경찰이 막았다. 왜 막냐고 언성이 높아졌는데 경찰이 당황하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신돌석씨를 성조기 부대로 안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는 그런 자들을 막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늙었다는 생각에 괜히 우울한 마음도 들었었다.
보아하니 여기 집회는 수요집회는 아닌 듯하였다. 좀더 올라가니 안국동에 거의 다 간 곳에 집회무대로 쓰는 트럭이 놓여 있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공간이 적어서 그랬겠지만 그런대로 사람들이 많이 온 것으로 보였다. 다행이었다. 신돌석씨는 둘째 줄에 빈 곳이 있어서 가서 앉았다. 대표와 사묵국장과 인사를 했다. 대표가 주는 피켓을 받아들었다. 실무자들이 주는 방석과 부채도 받았다.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구호가 담긴 부채였다. 또 다른 실무자는 모자 필요한 분 말씀하시라고 하면서 모자를 나눠 주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일단 앉은 자리에 그늘이 져서 괜찮다고 했다.
[삽화-백소(白笑)]
그런데 해가 빨리 빨리 움직였다. 금세 그늘이 사라지고 땡볕이 되었다. 부채로 머리를 가리고 있는데 사무국장이 와서 모자 드릴까요 묻는다. 그래서 달라고 했다. 종이로 만든 집회용 모자를 쓰니 한결 나아졌다. 점점 사람들이 늘었다. 집회 사회는 사무국장이 하였다. 뒤에 사람들이 많이 서 있으니 앞으로 한줄씩 나와 달란다. 모두 한줄 앞으로 나아갔다. 신돌석씨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옆과 뒤를 둘러보니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서양 사람이 꽤 많았다. 이곳이 서양 사람 많이 오는 인사동이지만 이 문제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12시 정각에 사무국장이 집회를 시작하겠다고 개회 선언을 했다. 그러면서 오프닝으로 정의기억연대 활동가들의 율동이 있었다. ‘바위처럼’에 맞춘 율동이었다. 대학생이거나 그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자들이 율동을 했다. 정의기억연대는 젊은 여자들이 많이 참여하는 것 같았다. 앞쪽에 앉은 나이든 사람들은 지역에서 온 것 같았고, 가운데쯤에서 뒤로는 대학생들로 보였다. 젊은 사람들이 개인주의에 빠졌다느니 하면서 한탄하는 어른들이 많은데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율동을 보면서 신돌석씨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신돌석씨가 젊은 시절에 율동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해방춤, 농민춤 정도인데, 그것도 1박 2일 하는 수련회 등에서 술을 마시면 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율동을 한다. 노래에 춤이 함께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우리 민족 역시 그런 정서와 문화를 갖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런 문화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젊은이들이 이제 다시 그것을 살리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주관하는 시민연합에 대해 사회자가 소개하였다. 그리고 구호를 외쳤다. ‘일본 정부는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공식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수요시위에서 항상 외쳐지는 구호였다. 그런데 요즘 상황에 따른 새로운 구호가 있었다. ‘일본 정부는 평화의 소녀상 철거 로비 즉각 중단하라’였다. 최근에 베를린 시장이 일본을 방문해서 외무상에게 평화의 소녀상이 일방적인 주장에 따른 것이라고 철거하겠다고 한 것 때문에 나온 구호인 듯하였다. 전쟁 범죄를 전혀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에 대해 독일도 따라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게 하는 사건이었다.
주관 단체 상임대표가 여는 발언을 하였다. 시민단체에 대한 소개를 간단하게 하고, 수요시위와 연대를 한 지가 19년째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래 되었는지 신돌석씨는 처음 들었다. 대표는 전쟁범죄에 대해 언급하였다. 팔레스타인 라파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주로 어린이와 여성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학살 중단을 강력히 촉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에 군사무기를 지원하고 있단다. 전세계가 연대하여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전쟁범죄의 문제는 한일관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서 너무나 관대하다. 물컵 반을 우리가 채우면 일본 정부가 반 컵을 채울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오히려 일본은 일본군 성노예제와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 이야기도 못한다. 과거사 문제만이 아니라 라인 야후 기업을 강탈하고 있는데도 제대로 된 대책도 못 세우고 있다. 일본 정부가 반성 의사가 없는데 도대체 누구와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의 반성이 없고, 윤석열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는 채, 잘 지내려고 굴욕적인 행태만을 보이니, 우리의 투쟁은 그칠 수 없다고 하였다. 세계적으로도 인정하고 있는 성노예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는 지속될 것이고, 그 강도를 더욱 세게 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신돌석씨는 발언을 들으면서 우리가 왜 이렇게 한심한 상태인지 화가 나다가도 그래도 이렇게 그칠 줄 모르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으니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노래가 생각났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