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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시 깊이 읽기(19)
류양선(柳陽善)
1. 일제의 ‘역사’ 교육
지난 번 「만해 한용운 시 깊이 읽기(18)」에서는,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 제3연에 나오는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하는 대목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만해가 일제의 민적법(民籍法) 내지 호적법(戶籍法) 실시에 불응하여 실제로 ‘민적(民籍)’이 없었다는 것과,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특히 만해가 자신의 어린 딸 영숙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사실과 관련하여, 일제가 한국민족을 말살하여 그들의 영원한 노예로 만들고자 했던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해, 특히 그들의 ‘국어(일본어)’ 교육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일제는 1910년 한국을 강점하면서 일본어를 ‘국어’라 하고,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국어(일본어)’는 필수과목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수업시간 편성을 보면, ‘국어(일본어)’ 시간은 차츰 늘어나고 ‘조선어’ 시간은 차츰 줄어들다가, 1942년부터는 ‘조선어’ 시간이 아예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만해의 딸 영숙이의 입학 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일제 말기의 ‘국어’ 교육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일제는 1941년 3월 1일 ‘국민학교령’을 공포하고 이어서 3월 31일 ‘국민학교규정’을 공포하는데, 이 시기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고, 태평양전쟁(미일전쟁)의 전운(戰雲)이 감돌던 그런 때였으며, 전시(戰時)라는 비상시기에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國民)’을 양성하겠다는 것이 이 시기의 교육목적이 되었다는 것, 더 나아가 이런 변화는 단지 ‘국민’의 양성만이 아니라 적과 용맹히 싸우는 충성스런 ‘군사(軍士)’의 육성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급기야 당시 ‘국어’ 교과서에는 ‘전쟁놀이’ 내지는 ‘병정놀이’까지 수록되는데, 이런 사정이니, 만해가 자신의 딸 영숙이를 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은 것은 일제의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 즉 노예화 정책을 일상의 영역에서까지 철저히 거부했던 실례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상의 검토는, 단재 신채호가 그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에서, 당시의 식민지 교육을 맹렬히 성토한 대목을 읽고, 그에 따라 일제의 이른바 ‘국어(일본어)’ 교육의 실상을 살펴본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로지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헌신하다가 여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신채호의 일생을 간략히 알아보고, 만해가 그러한 신채호의 일생에 공감하여 묘비의 비문을 쓰려 했으나 일경의 감시로 쓰지 못했고, 또 신채호의 역사연구를 높이 평가하여 유고집의 간행을 추진하였으나 그 역시 일제의 감시로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조선혁명선언>의 같은 대목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이번에는 일제의 ‘역사’ 교육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자녀(子女)가 나면 「일어(日語)를 국어(國語)라, 일문(日文)을 국문(國文)이라」하는 노예양성소(奴隸養成所) - 학교(學校)로 보내고, 조선(朝鮮) 사람으로 조선사(朝鮮史)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檀君)을 무(誣)하여 소잔오존(素戔嗚尊)의 형제(兄弟)」라 하며 「삼한시대(三韓時代) 한강(漢江) 이남(以南)을 일본(日本) 영지(領地)」라 한 일본(日本) 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新聞)이나 잡지(雜誌)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强盜政治)를 찬미(讚美)하는 반일본화(半日本化)한 노예적(奴隸的) 문자(文字)뿐이며, 1)
이 인용에서 일제의 역사교육에 해당하는 부분은 “조선(朝鮮) 사람으로 조선사(朝鮮史)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檀君)을 무(誣)하여 소잔오존(素戔嗚尊)의 형제(兄弟)」라 하며 「삼한시대(三韓時代) 한강(漢江) 이남(以南)을 일본(日本) 영지(領地)」라 한 일본(日本) 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하는 대목입니다. 먼저 “단군(檀君)을 무(誣)하여 소잔오존(素戔嗚尊)의 형제(兄弟)라 하며”라는 것은, 한국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일본의 신화에 나오는 소잔오존(素戔嗚尊 - 스사노 오노미코토)의 형제(兄弟)라고 속여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단군이 『일본서기』 『고사기』에 나오는 소잔오존(素戔嗚尊 - 스사노 오노미코토)과 형제라는 논리로 일본이 한국의 형 국가라고 가르친다는 것” 2) 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을 천조대신(天照大神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동생이라면서 일본과 조선의 뿌리가 같다는 일조동근론(日朝同根論)의 논리로 사용했다.” 3)는 것이지요. 또, 일제의 식민사관에서는 소잔오존(素戔嗚尊)의 조선시조설(朝鮮始祖說)을 다룬 학설로 소잔오존과 단군의 동일설(이명동일신 - 異名同一神)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단군=소잔오존은 단군이 일본에 농업을 가르친 공로로 천조대신과 형제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4) 이렇게 해서 한국민족과 일본민족은 그 뿌리가 같다는 소위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유포한 것입니다.
다음, “삼한시대(三韓時代) 한강(漢江) 이남(以南)을 일본(日本) 영지(領地)라” 하는 것은, 일제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部)’가 곧 ‘가야伽倻)’라고, “일본(日本) 놈들의 적은 대로”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덕일 소장은 이에 대해, “‘임나=가야설’은 메이지 시대 일본군 참모본부가 만들어 조직적으로 유포한 논리” 5) 라고 지적합니다. 이처럼 일제는 역사를 왜곡 날조하여, 과거에도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었으니, 일제의 한국 병탄은 역사적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또, “신문(新聞)이나 잡지(雜誌)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强盜政治)를 찬미(讚美)하는 반일본화(半日本化)한 노예적(奴隸的) 문자(文字)뿐이며,” 하는 대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의 교육만이 아니라 신문 잡지에서 유포하는 내용도 넓은 의미의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신문 잡지를 통해서 얻게 되는 왜곡 날조된 역사 역시 당시 한국인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그에 따라 사실(史實)에 대한 판단을 어둡게 하여, 당시 일제의 한국 강점을 모르는 사이에 받아들이도록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학생들이 모두 일제의 이러한 역사 왜곡과 날조에 속아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용감하게 저항하는 학생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일제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런 학생들의 경우에 대해, 신채호는 위에 인용된 부분에 바로 뒤이어 비감하게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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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개정판 단재 신채호전집 하』, pp.35~36.
2) 이덕일, 『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만권당, 2019), p.250.
3) 위 책, p.249.
4) 박경수 김순전, 「『국어독본』의 신화에 응용된 <일선동조론>」, 김순전 외, 『일제강점기 일본어교과서 『국어독본』을 통해 본 식민지조선 만들기』(제이앤시, 2012), p.108~109.
5) 이덕일, 앞 책,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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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자제(子弟)가 난다 하면 환경(環境)의 압박(壓迫)에서 염세절망(厭世絶望)의 타락자(墮落者)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陰謀事件)」의 명칭하(名稱下)에 감옥(監獄)에 구류(拘留)되어, (-중략-) 모든 악형(惡刑), 곧 야만(野蠻) 전제국(專制國)의 형률사전(刑律辭典)에도 없는 갖은 악형(惡刑)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僥倖)히 살아서 옥문(獄門)에 나온대야 종신(終身) 불구(不具)의 폐질자(廢疾者)가 될 뿐이라.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發明) 창작(創作)의 본능(本能)은 생활(生活)의 곤란(困難)에서 단절(斷絶)하며, 진취(進取) 활발(活潑)의 기상(氣象)은 경우(境遇)의 압박(壓迫)에서 소멸(消滅)되어 「찍도 짹도」 못하게 각(各) 방면(方面)의 속박(束縛) ⸱ 편태(鞭笞) ⸱ 구박(驅迫) ⸱ 압제(壓制)를 받아, 환해(環海) 삼천리(三千里)가 일개(一個) 대감옥(大監獄)이 되어, 우리 민족(民族)은 아주 인류(人類)의 자각(自覺)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自動的) 본능(本能)까지 잃어 노예(奴隸)부터 기계(機械)가 되어 강도수중(强盜手中)의 사용품(使用品)이 되고 말 뿐이며, 6)
아, <조선혁명선언>의 이 부분은 일제의 폭압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것이었는지, 그야말로 몸서리쳐지도록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똑똑한 자제(子弟)’ 즉 일제의 야만적인 역사교육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생들은 “염세절망(厭世絶望)의 타락자(墮落者)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陰謀事件)」의 명칭하(名稱下)에 감옥(監獄)에 구류(拘留)”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감옥에 갇혀서는 끔찍한 악형을 당하게 됩니다. 위의 인용 중에 필자가 (-중략-)으로 처리하여 생략한 부분에는 일제가 수감자들에게 가한 온갖 고문(拷問),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을 정도로 끔찍한 각종 고문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모질고 혹독하기 짝이 없는 고문을 당하여 죽거나, 요행 살아 나온다 해도 “종신(終身) 불구(不具)의 폐질자(廢疾者)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혹 그렇지 않다 해도, ‘생활(生活)의 곤란(困難)’과 ‘경우(境遇)의 압박(壓迫)’으로, “환해(環海) 삼천리(三千里)가 일개(一個) 대감옥(大監獄)이 되어”, 우리민족은 “강도수중(强盜手中)의 사용품(使用品)이 되고 말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물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신채호의 이러한 언명(言明)은 결국, 일제가 강압적으로 노예교육을 실시한다는 것, 그런 일제의 정책에 저항하는 경우에는 무슨 ‘음모사건’이라는 명칭으로 체포하여 온갖 고문을 자행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사정은 감옥 밖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제가 행한 이토록 악독한 행위들은 결국, 그들이 얼마나 미개한 야만 민족이었는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2. 역사전쟁(歷史戰爭)
여기서 잠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기 직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역사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방금 ‘역사전쟁’이라는 표현을 썼거니와, 이 총성 없는 전쟁은 한국과 일본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참(진실)과 거짓(허위)의 전쟁이라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이 ‘역사전쟁’은 애당초, 일제가 한국을 침탈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조작한 역사 왜곡과 날조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먼저, 신용하 교수의 연구에 의지하여 일제의 한국 병탄 전후에 있었던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의 개략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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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개정판 단재 신채호전집 하』,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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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일본은 미국의 함포위협에 굴복하여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체결한 뒤, 서양 열강과의 교역으로 무역적자가 누적되자 한국과 만주를 점령하여 무역 손실을 보전하고자 하는 소위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일본 국민들의 정신적 동원 수단으로 한국 역사를 왜곡 날조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그 시작은 1882년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조선국사편찬’ 작업입니다. 이렇듯이 한국역사 편찬 작업을 육군참모본부에서 시작했다는 것만 보아도, 일제의 한국사 편찬 의도가 애초부터 한국 침략을 위한 것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후, 1885년 도쿄제국대학이 설립되고 1887년 사학과가 설치되자,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조선국사편찬’ 사업이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로 이관됩니다. 1889년에는 국사학과를 다시 설치하고 여기서 본격적으로 식민주의 사관을 정립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한국이 고대 개국과 동시에 일본의 복속국가라 하여, 일본 신화에 나오는 소잔오존(素戔嗚尊)이 고조선의 지배자가 되고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정벌하여 항복시켰다는 등의 허위 날조를 감행합니다.
일제는 1910년 한국을 병탄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주의 사관을 더욱 강화합니다. 일본 역사학자들은 한국 병탄을 일본 구강토의 회복이며 복구라고 강변하면서 이전부터 주장해 오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들은 또한, 한국 역사와 사회의 타율성(他律性)과 정체성(停滯性)을 주장하면서, 일제가 식민지 정책으로 한국사회의 수천 년 묵은 정체성을 타파하여 행복하게 발전시켜 줄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일제는 1916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1922년에 ‘조선사편찬위원회’로,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로 개칭됨)를 조선총독부 안에 설치하고, ‘조선사학회’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합니다. ‘조선사편수회’는 1932년부터 37책의 방대한 규모로 『조선사(朝鮮史)』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한국역사를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적합하도록 왜곡 날조합니다. 일제의 한국사 왜곡 날조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하겠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한국사 왜곡 날조에 대해, 당시 한국의 역사가들은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족주의 사관을 발전시켜 나갔으니,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박은식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고 한국의 역사서들을 압수하여 불태워 버리자, 이를 탄식하면서 1911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그리하여 만주에서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의 여러 저술들을 남기고, 1912년 상해로 건너가서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저술하여 1915년에 간행합니다. 앞서 언급한 일제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조선사편수회)’는 박은식의 『한국통사』의 간행에 놀란 일제가 이에 대응하여 만든 것입니다.
박은식은 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써서 1920년에 간행합니다. 박은식의 이 두 저서는 일제의 온갖 탄압 조치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국내에 대량 반입되어 애독되었고, 국외에서는 교포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널리 애독됩니다. 특히 『한국통사』는 간행 직후에 미주에서 순국문으로 번역되어 교민들의 교과서로 보급되기까지 합니다.
신채호 역시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에 정면 대결하여 식민사학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신채호는 1908년 8월부터 12월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초기 민족주의 사관을 확고하게 정립합니다. 신채호는 이 책에서, 일본 역사가들이 단군(檀君)을 소잔오존(素戔嗚尊)의 제(弟)라 하며, 고려는 원래 일본의 속국이라 주장하는데, 그들의 말을 믿으면 우리 4000년 역사가 일본사의 부속품이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신채호는 또, 일본 역사가들이 이런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는 이유를, 첫째 한국을 오래 전부터의 일본의 소유물처럼 만들어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것이며, 둘째 그렇게 하여 일본 국민의 외경(外競) 사상을 고취하고 국민정신을 진작시키려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신채호는 1910년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한국사 연구에 진력합니다. 그리하여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등을 저술하여, 주로 고대사(古代史) 분야에서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을 철저히 비판하고 민족주의 사관을 크게 발전시킵니다. 신채호는 한국의 상고사가 중국을 능가하는 웅혼한 역사이며,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피워 일본에 가르쳐주었다고 하여,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하고 철저히 비판합니다.
박은식 신채호 외에도 1920년대 이후 국내에서 민족주의 사관을 발전시킨 학자들이 있으니, 정인보(鄭寅普) 장도빈(張道斌) 안재홍(安在鴻) 문일평(文一平) 등이 그들입니다. 또, 1934년에는 실증주의 역사학자들과 국어국문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여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역사연구를 진전시킵니다. 1943년 9월 ‘진단학회’가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진단학회의 학술지 『진단학보(震檀學報)』는 14호까지 발행됩니다. 이를 통해 다수의 학자들의 귀중한 논문들이 발표되어 민족주의 사관과 사학을 크게 발전시킵니다. 7)
이상에서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에 따른 한국사의 왜곡 날조와 그에 대한 한국 역사학자들의 통렬한 비판을 극히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1945년 민족해방을 맞이하여, 이러한 ‘역사전쟁’은 끝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아니, 그 ‘역사전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바, 그것이 과거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현재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역사전쟁’은 대체 어떤 ‘전쟁’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잠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연구에 의지하여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덕일 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한사군의 위치는 어디였는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사군이란 중국 고대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군현(郡縣)의 이름이다. 쉽게 말하자면 고대판 한(漢)나라 조선총독부다. ‘임나일본부는 실제로 있었는가?’라는 주제는 다른 말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라고 부른다. 임나일본부란 근대뿐만 아니라 고대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 기관을 설치해 놓고 한반도 남부를 식민 지배했다는 것이다. 고대판 일본의 조선총독부다. 이것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으로도 불리는 이유는 앞으로 서술할 예정이다. 물론 그 밖에도 ‘한국사 정체성론’ 등 많은 논리가 있지만 이 두 주제를 놓고 조선총독부 설치 당시부터 지금까지 두 진영이 격렬하게 싸우는 핵심 사안이다. 압축하면 이 두 주제가 독립운동가의 역사관과 조선총독부의 역사관이 충돌하는 핵심 사안이다. 조선총독부 역사관은 보통 식민사관이라 불린다. 이 충돌은 ‘전쟁’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격렬했고 또한 오래되었다.8)
여기서 보듯, 이덕일 소장은 ‘한사군의 위치는 어디였는가?’라는 주제와 ‘임나일본부는 실제로 있었는가?’라는 주제를, 독립운동가의 역사관과 조선총독부의 역사관이 충돌하는 핵심 사안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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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상, 일제의 식민사학과 그것을 비판한 민족사학에 대한 서술은 신용하, 『일제 식민지정책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문학과 지성사, 2006), pp.77~131에서 발췌 요약한 것임.
8)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2018), p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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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독립운동가의 역사관을 민족사관, 조선총독부의 역사관을 식민사관으로 바꾸어 보면, 위의 두 주제는 민족사학과 식민사학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사안이라는 것이지요.
먼저,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식민사학에서는 한사군이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민족사학에서는 한사군이 한반도와는 멀리 떨어진 현재의 북경 동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임나일본부의 존재여부에 대해 식민사학에서는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민족사학에서는 그런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중, 식민사학에서 주장하는 바,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였다는 주장은 현재 기승을 부리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고,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주장은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임나일본부에 대한 식민사학의 주장을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으로도 부르는 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매도해야만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날조된 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역사전쟁’이 겉보기에는 역사학자들끼리 싸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거대한 구조문제가 이 전쟁의 본질이며, 역사학자들은 그 전면에 나서서 싸우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식민사학에서 주장하는 한사군 한반도 북부설이나 임나일본부 한반도 남부설은 비록 고대사 영역이긴 하지만, 고대사가 곧 현대사라는 점에서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언제든지 이와 같이 날조된 역사를 들이밀면서, 영토에 대한 야욕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단적으로 말해, “독립운동가들이 단순한 역사학자들이 아니라 한 손에는 총을, 한 손에는 붓을 든 레지스탕스였던 것처럼 조선총독부도 역사연구 단체가 아니라 식민통치 기관” 9)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학자는 이 거대한 구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이 거대한 구조 문제가 역사전쟁의 본질이기 때문에 이렇게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는 것이고, 이러한 현상은 곧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아직도 친일적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것입니다. 10)
아닌 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19년, 느닷없이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발간되어 여러 분야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한국을 ‘거짓말의 나라’라고, 한국인을 ‘거짓말하는 국민’이라고, 한국의 역사학을 ‘거짓말하는 학문’ 11) 이라고 하면서, 일제 식민주의 사관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어 일본에서 잘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그야말로 매국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곧, 이 책의 내용을 반박하는 『일제종족주의』가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만고의 죄악이었던 반면, 저항적 민족주의는 숭고한 도덕적 열정으로서 항상 윤리적으로 선이었고 지금도 선이며, 따라서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와 일본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반일종족주의’로 폄하하는 부왜노(附倭奴)들의 일제옹호적 역사부정을 논박하며 그들의 반인도 반국가활동을 고발하는 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는 그 부왜노들을 법적으로 고발하고 있는데, 이는 부왜노들이 이승만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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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위 책, p.103.
10) 이상, 현재 지속되고 있는 민족사학과 식민사학의 ‘역사전쟁’에 대해서는 위 책, pp.101~115에서 발췌 요약한 것임.
11) 이영훈 외, 『반일종족주의』(미래사, 2019)의 「프롤로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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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방송활동, 방송내용의 출판, 유엔기구를 통한 부왜(附倭) 반한(反韓) 활동, ‘징용자상’ 및 ‘평화의 소녀상’ 건립반대운동 등 정치활동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2)
또, 호사카 유지 교수의 『신친일파』라는 책도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의 주장 중에서 현재 한일 양국이 외교적 갈등을 빚고 있는 문제들, 즉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문제, 독도 문제 등에 대해 그 오류를 지적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은 원래 일본 우파의 논리에 자신들의 생각을 더해 저술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13)
일제의 식민사학을 답습하는 역사학자들은 단지 이뿐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극히 소략하게 그 편린을 들어 보인 것에 불과합니다. 앞에서 지적했듯 이 역사전쟁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의 거대한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구조적 문제의 연장선상에 일본 자금의 유입 문제까지 가로놓여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일본 극우파 재단에서 유입된 돈을 받고 조선총독부의 식민사학을 계승하는 매국적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14) 참으로 통탄해 마지않을 노릇입니다.
3. ‘정조(貞操)’
지금까지 「당신을 보았습니다」의 제3연에 나오는 ‘민적(民籍)’과 관련하여, 만해가 일제의 민적법(호적법) 실시에 불응하여 실제로 ‘민적(民籍)’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딸 영숙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는 것 아니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또 그와 관련하여 일제의 교육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제가 한국의 역사를 왜곡 날조한 식민사학과, 그런 식민사학을 통렬히 비판하는 민족사학에 대해 극히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에 대해 알아본 것은, 정말 안타깝게도 그런 총성 없는 ‘역사전쟁’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시의 제3연에 나오는 ‘정조(貞操)’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시의 제3연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民籍) 없는 자(者)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人權)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刹那)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이 시는 ‘연애시 - 저항시 - 선시’의 3중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의 겉이야기는 그 표층구조인 연애시로 되어 있고, 시적 자아인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는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나’는 ‘민적’이 없어서 ‘인권’을 상실했고, ‘인권’을 상실했기에, “인권(人權)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情操)냐.” 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將軍)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그에게 항거하여 ‘당신’을 향한 ‘정조’를 지켜냅니다만, 그러고는 곧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과 ‘스스로의 슬픔’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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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황태연 외, 『일제종족주의』(넥센미디어, 2019)의 「프롤로그」 참고.
13) 호사카 유지, 『신친일파』(봄이아트북스, 2020)의 「머리말」 참고.
14) 이에 대해서는 신용하, 앞 책, p.16 및 이덕일 앞 책, pp.9~10 및 pp.77~7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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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정조’라는 말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시가 연애시의 외피를 입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이렇게 겉이야기(표층구조)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중층구조인 저항시로 들어가면, 이 대목의 핵심어인 ‘정조(貞操)’는 다름 아닌 ‘민족적 지조(志操)’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조’를 유린당한 뻔했다는 것은 ‘지조’를 잃을 뻔했다는 말이며, ‘나’를 능욕하려는 장군에게 항거했다는 것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올곧은 지조를 버리고 변절하도록 폭력적으로 압박하는 일제에 저항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적 자아인 ‘나’는 일제강점기의 폭압을 이겨내고 ‘민족적 지조’를 지켜낸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넓은 의미로 보면, 허위와 불의의 사악한 세력에 맞서 진리와 정의를 지켜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달리 말하자면, 진리와 정의를 향한 사랑을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멈출 수 없는 사랑의 실천이 끝내 민족적 지조를 지켜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해가 지조를 지켜내는 모습에는 좀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만해와 관련된 많은 일화들은 다른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들과는 달리, 기행(奇行)이라고 할 만한 여러 가지 행적을 보여줍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일화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선생이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으로 있을 때 공문을 전국에 돌려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해 온 봉투 뒷면에는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 년 몇 날이란 글자가 찍혀 있었다. 이것을 본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천여 장이나 되는 그 봉투들을 아궁이 속에 처넣어 태워 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생은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
하는 한 마디를 던지고는 훌훌 사무실을 떠나 버렸다.15)
신간회(新幹會)는 1927년 2월에 결성된, 민족협동전선의 독립운동노선에 따른 전국적 규모의 좌우합작 항일단체입니다. 만해는 이 신간회의 서울지회장을 맡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신간회에서 전국에 공문을 돌리려 하는데, 그 공문을 넣을 봉투 뒷면에 “소화(昭和) 몇 년 몇 날이란 글자가 찍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해는 그것을 보고 그 봉투들을 다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 버렸다는 것입니다.
만해가 이처럼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렸다는 것은 매우 깊은 상징적 의미를 띱니다. 그것은 단지 봉투에 쓰여 있는 ‘昭和’라는 글자를 태워버렸다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를 화형(火刑)시켜 버렸다는 의미를 띠기도 합니다. 나아가 아예 일본 자체를 불살라 버렸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만해가 천여 장이나 되는 봉투를 아궁이 속에 처넣어 태워 버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이 뜻밖의 광경에 적잖이 놀랐을 것입니다.
만해는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 하고는 훌훌 사무실을 떠납니다. 이때,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만해와 같은 가슴 시원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만해의 일화를 읽어도 가슴이 후련해지지 않습니까? 이 가슴 시원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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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관호 편, 「만해(萬海)가 남긴 일화(逸話)」, 『전집 6』,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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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소개한 일화를 포함하여, 김관호는 실로 만해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여러 기행(奇行)을 담은 일화들을 수집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만해의 이런 기이한 행위들은 한편으로는 매우 강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못 놀라운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산문적 차원에서는, 아니 범상한 근현대시적 차원에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이 것이 아닙니다. 마치 만해의 시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범인들의 눈에는 기행으로 비칠지라도, 만해 자신에게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긴 것뿐일 테니까요.
소화(昭和) 몇 년 몇 날이란 글자가 찍혀 있는, 천여 장이나 되는 봉투를 불태워 버리는 만해의 행위는, 그러고 나서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 하는 만해의 한마디는, 당시 주위의 사람들의 마음에 알게 모르게 할(喝)과 방(榜)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시 만해의 주위에 함께 있던 신간회 회원들에게, 대체 독립운동이란 무엇인가 또 독립운동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작은 깨달음이나마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에 대해서 좀 더 근원적인 성찰을 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해의 이런 행위 속에는 깊고 그윽한 깨달음, 즉 철저한 무아(無我)의 경지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가아(假我)는 진아(眞我)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기에, 그 그림자가 지워지는 것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만해의 기행은 기행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태에 처하여, 그 사태의 맨 밑바닥까지 꿰뚫는 안목으로, 다시 말해 어느 한 순간 마음 바탕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선적인 움직임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행위, 그것이 범부들의 눈에는 자못 기이하게 비쳐지는 것일 테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만해의 그런 선적인 경지를 전제로 하면서도, 만해의 시편들을 일단 현세적(現世的)인 차원으로 이동시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진제(眞諦)에서 속제(俗諦)로, 무위법의 세계에서 유위법의 세계로 다시 넘어와서 이해하려는 것이지요. 특히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본다면, 그 놀라운 강렬함은 매운 향기를 풍겨주는 드높은 지조(志操) 그 자체라고 할 것입니다.
조지훈은 그의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에서,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精神)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16)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기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困辱)을 무릅쓸 각오” 17) 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지훈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신의 자존(自尊) 자시(自恃)를 위해서는 자학(自虐)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단재(申丹齋) 선생(先生)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弟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東西南北)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韓龍雲) 선생(先生)의 지조 때문에 낳은 많은 기벽(奇癖)의 일화(逸話)도 마찬가지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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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조지훈, 「지조론(志操論)」, 『조지훈전집 5』 (일지사, 1973), p.16.
17) 위의 글, p.17.
18)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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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조지훈은 스스로를 존중하고 스스로에게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자학(自虐)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는 지조를 지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까지도 지녔던 것”이라고 하면서, 그런 기벽의 예로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 늘 꼿꼿이 앉아서 세수하던 저 유명한 신채호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해가 낳은 ‘많은 기벽(奇癖)의 일화(逸話)’ 역시 바로 그런 지조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난번에 검토한 바 있는 「한용운론」에서도, 조지훈은 만해의 높은 지조와 거기서 우러나오는 ‘고매한 인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인품(人品)을 평가(評價)하여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도 따르지 못한다 하였다. 「매운 향내」! 이 넉 자야말로 선생(先生)의 진면목(眞面目)을 도파(道破)하였다고 할 것이니, 고매한 인격(人格)과 식견(識見)은 본디 그윽한 향기를 지니는 법(法)이지만, 그 향내의 짙음이 맵다는 표현(表現)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선생(先生)의 지조의 높이를 아는 사람만이 가능(可能)한 발언(發言)이기 때문이다. 심림(深林)에 숨어 있되 향기가 십리(十里)에 들린다는 난초 — 그 난초 중에도 풍란(風蘭)의 매운 향내를 능가하는 선생(先生)의 향기는 바로 학식(學識)과 예지와 정서가 무르녹은 더 근원적인 기품(氣品)에서 우러난 것이기에 그 서리(犀利), 그 준열(峻烈), 그 애수(哀愁)가 지금도 문득 우리의 심두(心肚)를 울리고 있다.19)
어떻습니까? 이 글에서 만해의 고매(高邁)한 기품(氣品)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의 평가를 빌려와서 만해의 높은 지조를 이야기하는 조지훈의 이 글을 통해, “학식(學識)과 예지와 정서가 무르녹은” 만해의 기품(氣品)은 “지금도 문득 우리의 심두(心肚)를 울리고 있”지 않습니까? “심림(深林)에 숨어 있되 향기가 십리(十里)에 들린다는 난초 — 그 난초 중에도 풍란(風蘭)의 매운 향내를 능가하는” 만해의 그윽한 향기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은은히 풍겨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 서리(犀利), 그 준열(峻烈), 그 애수(哀愁)가”, 그 단단하고 날카롭고 엄격하고 매서운, 거기에 깊은 슬픔이 함축되어 있는 만해의 향기가 지금도 문득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조지훈이 만해의 인품을 평가하기 위해 위당 정인보에게서 빌려온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도 따르지 못한다.” 하는 말은 어디에 연유(緣由)해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1945년 해방된 직후 정인보가 만해를 기리면서 쓴 시조(時調)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정인보의 이 시조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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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조지훈, 「한용운론」, 『조지훈전집 3』(일지사, 1973),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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