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가 없어서 완전한 인생
인생은 시작부터 축복으로 시작된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죄에 빠진 인간에 대해서 먼저 말했기 때문에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말했는데 그에 비해 에베소서에서는 교회는 창세 전에 미리 예정하신 것이라 하였다. 땅에 교회가 있기 전에 이미 하늘에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땅에 있기 전에 하늘에 있었다고, 하늘에 있는 것이 땅에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두 갈래로 갈라졌다. 현대신학은 땅에서부터, 사람에서부터 하늘로 찾아가는 신학인 셈이다. 그와 반대로 전통적인 신학은 하늘에서 내려온 소식을 전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
땅에서부터 시작한 복음은 없다. 세상 모든 종교가 인간을 어떻게든 개선시켜 보려고 출발했다. 다 땅에서부터 하늘로 찾아가는 것이다. 불교도 그러하고 유교도 그러하다. 인간의 상태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불교는 힌두교에서 나와서 우리나라에 와서 선불교가 되었다. 불교는 실재가 아닌 것은 다 버리고 해탈하려고 한다. 그런 해탈을 원한 것은 힌두교가 아주 복잡했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다신교에 여러 가지 관습들로 복잡하다. 예를 들어 소를 숭배한다거나 사성제도가 있어서 종으로 태어난 사람은 종으로 살아야 하고, 다음 생에서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복잡하게 엉켜있다. 그런 세계니까 석가모니 같은 분이 나와서 “다 허상이다. 사람 마음으로 만든 것이지 원래부터 종이 있었느냐. 선이 어디 있고 악이 어디 있느냐. 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며 가르쳤다.
그렇게 사람이 만든 것을 다 제하고 나니까 마지막에 남은 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즉 자기 마음이다. 그 마음이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일체유심초가 그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법륜 스님이 하는 즉문즉설을 들어보면 답이 다 그것이다. 어떤 사람이 분노 때문에 찾아와서 물으면 “그 분노가 어디 있습니까? 가져와 보세요. 그러면 내가 처리해 주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 말은 그 사람 마음속에서 분노가 생긴 것이지 분노라는 것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부 마음먹기 달렸다는 것이다. 인생고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한 대책이다.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히려 교회에 잘못 다니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인생은 왜 있는가. 인생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없다. 아무것도 없고 마음만 있다는데 그렇다면 사람은 왜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없다.
성경은 처음부터 전능하신 자가 나를 지으셨다고 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내 근본이 생기지 않는가. 창조론이 맞는지 진화론이 맞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나를 지었는가?’ 하는 것이다. 누가 나를 지었는가, 내 아버지가 누구인가, 내 근본이 어딘가? 세상 어디에도 전능하신 자가 나를 지으셨다는 데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말씀을 복음으로 취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말씀을 두고 무엇을 또 찾겠는가. 이런 인생이 무엇을 안다고 무슨 복을 찾아다니겠는가.
나에게는 이 문제가 아주 엄숙한 문제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나는 처음에 이 말씀으로 시작했다. 내가 하나님을 알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지만 이 말씀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어디에도 이렇게 복된 말씀은 없다. 복된 것을 찾아야 되지 않겠는가. 복된 것을 두고 또 다른 것을 찾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이 복된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 우리 사명이 이것이다. “이렇게 복된 일이 있는데 어디 가겠습니까. 이렇게 복된 것이 있는데, 이런 복된 말씀을 두고 무슨 말씀을 또 듣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 일이다.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그것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당신과 관계없는 말을 왜 합니까. 내 인생을 찾으려면 누가 나를 지으셨는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해야 한다.
창세기는 전능자가 나를 창조하셨다고 하였다. 나는 이것이 최초의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창조했다는 데로 가보면 당연하게 “왜 지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왜 지었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이것이다.
“내가 너를 내 대신 세우기 위해 나의 형상으로 지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니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좋은 인생의 목적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대신하게 하셨다는데 이보다 더 좋은 답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알면 자연히 “사람을 어떻게 지었기에 그것이 가능합니까?”라는 질문이 생긴다. 사람이 어떤 존재이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창세기 2장에 나온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흙은 아무 능력이 없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 한다. 가치중립적이다. 하지만 농부가 와서 씨를 뿌리면 씨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 콩을 심으면 콩밭이 되고 옥수수를 심으면 옥수수 밭이 된다. 씨에 따라서, 농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흙이다. 그것이 흙의 가치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없다. 내일 일도 모르는 존재에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씨가 들어오면 달라진다. 미국에 가서 옥수수 밭을 보았는데 얼마나 옥수수를 많이 심어 놓았는지 끝이 없었다.
흙에 귤을 심으면 귤 밭이 되고 옥수수를 심으면 옥수수 밭이 된다. 흙은 없다. 누가 귤 밭을 보고 흙이라 하겠는가. 누가 옥수수 밭을 보고 흙이라 하겠는가. 흙은 귤을 만들어 내고 옥수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인생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하나님이 씨를 뿌려서, 자기의 생명을 뿌려서 그 생명의 열매를 거두신다고 생각하면 밭으로서 나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
여자가 임금에게 시집가면 왕자를 낳는다. 그러면 왕비가 된다. 여자로서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조선시대에는 왕비 간택에 나갔던 사람이 간택에서 탈락하면 평생 시집을 못 갔다. 너무나 영광스러운 부름에서 탈락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생 혼자 살았다. 잔인한 일이다.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부름받았기 때문에 여기서 간택받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시집을 못 간다. 딴 데로 시집갈 수 없다. 하나님께 부름받아서 하나님의 생명을 생산할 밭이 되어야 할 존재가 다른 것이 되면 어찌 되겠는가. 간부가 된다. 그래서 한번 이 맛을 보면, 이것을 알게 되면 다른 데로 시집갈 수 없다. 옛날에는 법으로 금했지만 지금은 실재 안에서 다른 데 갈 수 없다. 그러니 사람이 얼마나 복된가!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다. 창세기 3장에는 영영 망해 버린 사람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셨다. 그것도 복이다. 왜냐하면 엉겅퀴 밭이 되어 멸망했지만 그래도 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이다. 완전히 희망이 없는 존재인 것 같아도 다시 갈아엎으면 되니까 흙은 희망이 있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복된 존재다. 이 복음 안에서 보면 어떤 사람도 버릴 사람이 없다. 영영 쓸모없어도 흙으로 돌아가면 되니 얼마나 복된 일인가. 벽돌은 도로 흙이 될 수 없지만 흙은 엉겅퀴가 나서 쓸모없게 되었을지라도 다시 돌아가면 흙이다. 완전히 다른 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너무나 큰 복을 타고난 존재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위치를 버리고 이탈했다. 이것이 문제다. 그것을 그대로 누렸으면 이보다 좋은 축복이 없는데 마다하고 버린 것이다. 사탄이 선악과를 보이면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니까 자기 신분을 버리고 하나님같이 되려고 나갔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던가? 이것이 의문이다. 제왕이 되고 대통령이 된 사람은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언제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에 넘어갔다. 이것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하나님같이 된다는 데 넘어갔다는 뜻이다. 잘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기회가 없었으니 모르는 것이지 기회만 있다면 왕 노릇하고 싶지 않겠는가. 집에서든 사회에서든 능력만 있다면 자기가 왕 노릇하고 싶은 것이 사람이다.
이런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은 은연중에 '이것만 있으면 되는데’라는 생각이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건강만 있으면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텐데…….’라고 했지만 건강, 그 한 가지가 없었다. 그런데 건강이 조금 회복되니 ‘돈만 있으면 살 텐데’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한 가지가 없다.
성공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 가지가 보이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실패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한 가지가 없는 사람이다. 나도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항상 한 가지가 없었다. 그래서 ‘이것만 있으면 될 텐데……라고 생각했다.
돈을 못 버는 사람은 백만 원도 없으면서 ‘돈이 천만 원만 있으면 될 텐데’ 하고 한탄한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은 백만 원만 있어도 ‘이 돈으로 시작하면 되겠다.’라고 생각한다. 백지 한 장 차이인데 성공과 실패가 여기서 갈린다. 한 가지가 있으면 될 텐데 하는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야, 이렇게 좋은 것이 있구나.’ 라고 아는 사람은 성공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그러하다. ‘사람이 이렇게 복된 위치에 있구나.’라고 알았으면 무엇 때문에 나갔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가 모자란다. 나는 왜 밭밖에 안되는가. 씨를 뿌렸다 가져가면 나는 아무것도 없잖아.’ 이러면 멸망이다. 그래서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보니 한 가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없다. 한 가지가 없어서 안 되었던 것이 아니라 아예 전부가 없는 것이다. 나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를 보니까 전부가 없다.
지금 십자가에 달려서 뛰어내리지 못하는데 전에 있던 것이 무슨 소용인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으면 뭐하겠는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이 아무 소용없게 되었다. 자기가 뛰어내리지 못하니 아무 소용없지 않은가. 그것이 흙이다.
흙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또 다른 밭이 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부활하게 되고, 하나님이 다시 살려서 다르게 사용하셨다.
육신으로 있을 때는 예수님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다시 사신 후에는 한계가 없다. 생명의 연합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육신으로 있을 때는 우리와 연합이 불가능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그분으로서는 우리와 연합이 불가능하다. 다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분으로서는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포함할 수 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연합이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자리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면 저절로 예수와 연합이 된다. 연합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으니까 예수님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찾아다녀 봤자 내가 연합할 수 있는 예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겠다고 애를 쓰지만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런 분과 내가 연합이 되겠는가. 그런데 십자가에서 보면 그분과 내가 하나다. 쉽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은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원래 거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랑하려면 오직 주 안에서만 하라고 하였다.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으니까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자랑거리가 그 안에 가득 차 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데 그분 안에서 지혜를 자랑할 수 있고 의를 자랑할 수 있고 거룩함, 구속함을 자랑할 수 있다. 지혜라고 해도 별 것 없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알면 사람은 지혜로워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존재구나.’라고 알면 지혜로워진다. 힘이 있으면 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미련해지는데 힘이 빠지면 지혜로워진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이 끝나고 나니 지혜로워졌다. 야곱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니 지혜로워졌다. 이삭은 모든 것이 사라지니 지혜로워졌다.
사람들은 어디서 지혜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CCC에 있을 때 잠언 박사라는 간사가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혼을 했다고 한다. 미련하니 이혼을 하지 지혜로우면 이혼하겠는가.
그런즉 지혜가 어디 있는가? 지혜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위치가 바르게 되면 저절로 지혜로워진다. 우리 말로 분수를 안다고 하는데 분수를 알면 어리석은 사람, 미련한 사람이 없다. 누가 분수를 알고 물에 뛰어들겠는가. 누가 분수를 알고 불에 뛰어들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다. 그리스도는 내 지혜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내 운명을 대표하고 있는 그분이 나의 지혜다. 거기서 우리는 저절로 지혜로워진다.
병원에서 억울한 때가 많아도 의료진과 싸우면 안 된다. 내가 당장 피해를 받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는 은혜를 누려야 할 사람이라서 큰소리를 못 친다. 죽으려면 몰라도 살려면 큰소리를 못친다. 지혜라는 것이 간단하다. 자기 분수를 알면 지혜로워진다.
이번에도 옆구리에서 물을 빼는데 침을 찌르기가 어려워서 간신히 찔러서 물을 빼면 조금 나오다 멈췄다. 그러니 다시 찌르고 또 다시 찔렀다. 세 번을 찔렸다. 비참하지만 물을 안 빼면 죽으니까 할 수 없이 참아야 했다. 거기서는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 따로 없다. 마지막에 “시술을 받을 겁니까, 안 받을 겁니까?”라고 묻기에 나는 시술을 받으러 왔는데 이번이 세 번째니까 좀 신중하게 해 달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라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신중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못 했다. 거기서 이유를 대면 나만 손해다. 병원에서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자기들은 전문가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안된다. 그러니 잠언을 아무리 읽어 봤자 되겠는가.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지혜가 있다.
우리에게는 딱 한 가지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 같지 않은 것, 씨가 아닌 것, 이것이 우리의 분수다. 씨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나는 씨가 아니다. 씨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인간은 씨가 아니다. 이 한 가지가 모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탄식하면 멸망이고 이것을 기회로 여기면 성공이다. 예수님을 보자! 모자라는 이 한 가지를 받아들이니까 우리의 구속주가 되셨다. 마찬가지다. 우리도 한 가지 모자라는 것을 항상 받아들여야 한다.
영의정이 되어도 한 가지는 모자란다. 그 한 가지를 채우려고 하면 역적이 된다. 사람이 그러하다. 영의정이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자리가 없는데 ‘나는 왜 임금이 안될까. 왜 나는 임금 밑에 있어야 되는가.’ 하면 역적이 된다. 아담은 역적이 된 셈이다. 그러니까 3족을 멸하는 죄를 지은 것이다. 역적은 무자비하게 능지처참했다. 살던 집은 파괴해서 우물을 팠고 삼족을 멸했다.
하나님은 항상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언제나 묻는 것이 “네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가져야 한다.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벗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옷을 벗었다는 것인데 옷은 신분을 의미한다. 신분을 벗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서 부여받은 가장 좋은 신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두려운 것이다. 신분을 잃었으니까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은 것이다. 루터는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신을 믿는다고 했다.
모든 사람 속에는 깊은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공갈에 넘어가는 것이다. “예수 믿지 않으면 당신은 멸망합니다. 지옥 갑니다.”라는 말에 넘어간다. 두려움이 있으니까 다 거기서 넘어간다. 왜 두려운가? 우리 위치가 이탈되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옷을 벗은 것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행위를 잘해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왜 옷을 입지 않았는데도 부끄럽지 않은가? 위치가 당당하기 때문이다. 위치가 당당하면 옷을 벗어도 부끄럽지 않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였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람은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입혀 주셨다.
맨 처음 입혀 주신 것이 가죽옷이고 두 번째 입혀 주신 옷이 제사장 옷이다. 제사장의 옷은 의복 중에 가장 화려하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신분을 표현하기 위해서 오만 것으로 단장했다. 일부러 방울을 달아서 백성들 사이에서 걸어 다닐 때 짤랑짤랑 소리가 나도록 했다.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신 것이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오면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는데 우리는 무슨 옷을 입고 다녀야 하는가? 믿음이라는 옷을 입고 다니겠는가. 경건이라는 옷을 입고 다니겠는가. “나는 믿음이 좋다.” 하고 나가 보면 당장 걸린다. “나는 경건합니다.” 하고 나가 보면 당장 걸린다. 세상이 먼저 안다. 우리가 입고 나갈 옷은 다른 옷이 없다. 예수님이 입으신 옷, 그 옷을 입고 나가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뛰어내리지 못한 것, 그것이 그분의 당당한 옷이다. 가장 완전한 옷이다.
이 옷 말고 다른 옷을 입으려고 하면 빗나가게 된다. 아담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우리가 흙이라는 것을 옷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흙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자리가 부끄립다면 우리는 아담처럼 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하나님이 지어 주신 우리의 신분,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른다는 것이다. 오늘 교회들에게 이 사실이 선포되어야 한다. 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는 교회에 선포되어야 한다.
확실한 신분이 있으니까 예수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확실한 신분이 있으면 부끄럽지 않고 두렵지 않다. 이 위치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인생의 불변하는 위치, 더 이상 변할 수 없는 위치,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위치,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위치, 이것만이 우리 인생이 영원히 변치 못할 위치다.
이 위치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고, 내가 그 자리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그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거기 전시되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 돌아간 것이다. “장대에 달린 뱀을 보라! 그러면 산다.”고 하셨다. 장대에 달린 뱀은 예수다. 그 예수를 보고 우리가 그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전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완전해질까 했지만 할수록 더 불안했다. 왜내하면 우리가 온전하다는 기준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희랍인들은 끝없이 온전함을 찾는다. 완전함, 절대적인 것, 진리를 찾는다. 그런데 찾을수록 더 부족해진다. 자기가 설정한 기준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항상 더 높기 때문에 천만 원이 있으면 일억, 일억이 있으면 십억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가도 가도 온전해질 수 없다.
돈이 없나는 사람을 보면 만 원이 있을 때도 돈이 없다고 하고 백만 원이 있을 때도, 천만 원이 있을 때도 없다고 한다. 그러다 일억이 있으면 더 없다고 한다. 없는 것이 더 심해진다. 십억이 있으면 더 심해진다. 모자라는 것이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기준을 설정하고 거기 찾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리 가고 가도 완전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세계로 사람들을 몰아넣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된다. 거기서 나와서 사람 본연의 위치로, 언제라도 변하지 않는 위치로 신분을 회복시켜야 한다.
창조는 바골 수 없다. 피조물은 한번 창조된 것을 바꿀 수 없다. 소나무를 잣나무로 만들 수도 없고 잣나무를 소나무로 만들 수도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위치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무슨 수로 바꾸겠는가.
이것을 절망이라고 생각하면 망하는 것이고 이것을 소망으로 생각하면 인생이 성공이다. 우리 모두는 성공하는 대열에 들어와 있다. 여러분은 여기 왜 왔는가. 이것 때문이 아닌가. 내가 “올라갑시다. 올라가면 높이 오를 수 있습니다.”라고 했으면 여러분이 오셨겠는가. 틀림없이 여러분 말고 다른 사람들이 왔을 것이다. 그러면 바벨탑을 쌓으려고 가게 되어 있다.
여러분은 내가 “원상으로 돌아갑시다. 원상을 회복합시다.”고 하는데 오셨다. 여러분과 나는 인연이 딱 맞는다.
이제 우리는 연합이 가능하다. 이 세계가 최종적인 세계다. 연합을 통해서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아독존적인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멸망이다. 생육과 번성이 안 되는데 혼자 똑똑하면 뭐하겠는가. 생육이 안 되는데 혼자 완전하면 무슨 소용인가. 지식은 전달될 수 있지만 생육은 불가능하다.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식을 낳는다.
요즘은 너무 똑똑해서 결혼을 못한다. 유럽에서는 젊은이들이 일 년씩 살아보고 결혼한다고 한다. 그러면 완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 가지 모자라는 사람이 결혼하지 다 있는 사람은 결혼을 안 한다. 여자가 돈도 잘 벌고 혼자 아기도 낳는다면 결혼을 하겠는가? 혼자 아기를 못 낳으니까 결혼하는 것이다.
그런즉 둘이 연합해서 아기를 낳고 사는 세계는 영원히 있을 것이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세계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잘난 사람만 몇 명 살다가, 잘난 사람끼리 살다가 없어지고 만다.
도를 통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하고 거리낄 것이 없다 한다. 완전 자유자인 셈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래. 너는 잘한다 할지 모르지만 너는 후손이 없다.”라고 말해 주고 싶다. 후사가 없는데 자유자가 무슨 소용인가.
아브라함이 아무리 잘 믿었어도 자기 혼자 무엇을 하겠는가. 후사가 없으면 그만이다. 이스라엘은 야곱으로부터 시작한다. 야곱이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낳은 것이 열두 아들들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야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은 야곱부터다.
우주적인 문제는 연합이 되어야만 해결된다. 한 가지가 없는 사람, ‘아! 이것만 있으면 될 텐데…….’ 하는 사람, 이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영원히 한 가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는 세상 살면서 늘 한 가지가 없어서 실패한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와 보니 한 가지가 없는 것이 복이다. 만일 나에게 그 한 가지가 있었다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말았을 것 아닌가. 그런데 한 가지가 없어서 하나님 앞으로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왜 한 가지가 없는가. 왜 항상 한 가지가 없는가.’ 하고 원망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이 복이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없다. 내가 예수와 연합하다니! 이것이 가능한 말인가. 전에 신앙생활을 할 때 예수와 연합하는 것이 가능했던가. 상상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따라가려고만 애를 썼고 “예수 닮기 원합니다.”라고 했다. 참 좋은 말이지만 안 되는 것만 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보다 욕심이 두 배라고 한다. 세상에서도 잘되고 천국에서도 잘되려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대단히 욕심 많은 사람들이 절에 다닌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부처님 앞에도 가고 하나님 앞에도 가는 사람이 많다. 배웠기 때문에 고상해져서 다른 방향으로 안 될 것을 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가 모자란다. 한 가지가 모자라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것이 축복이다. 이것이 세상에서는 쓸모가 없다. 나 같은 사람은 당장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항상 한 가지가 모자라니 어쩌겠는가. 목회하러 갔는데 나만 방언이 안되었다. 남은 다 하는데 나만 안 되었다. 그때는 방언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그것이 안 된 것이다. 이에 가니까 믿음만 있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안 되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굉장히 좋은데 나는 안 되었다. 어디든지 가면 한 가지가 모자랐다. 그 세계에서 나는 영원히 실패자였다.
그런데 한 가지 모자라는 것이 예수와 마주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필요하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우리 모두 모자라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수를 자랑하는 것 아닌가!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거대하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 자랑하는 것, 그분 안에 있는 나로서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자랑해도 예수가 자랑이 되고 예수를 자랑해도 내가 자랑이 된다.
그러니 만나는 사람마다 늘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더구나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사람을 만나면 한 마디 해야 되지 그냥 보내면 안 된다. 다시 만날지 못 만날지 모르는데 그냥 보내면 되겠는가. 어제도 누가 왔기에 한참 동안 얘기했다. 듣거나 말거나 해야 될 것 같다. 그 사람을 다시 못 만나면 큰일 아닌가.
이것이 복음이다. 어떤 사람은 죄 사함 받은 것을 복음이라고 한다.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것으로 히트를 쳤다. 나는 그것도 안 되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 부러웠다. 이렇게 좋은 복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만민에게 전파할 복음, 누구나 참여되는 복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주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는 이 우주 안에 자기 백성을 갖는 것이다. 그것을 아내라고 표현하든 신부라고 표현하든 이 우주 안에서 자기 백성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창세기 1장 1절 이전에 하나님은 이미 이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 에베소서의 말씀이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온 이 귀한 축복을 살았을 때 누릴 수 있다는 것, 살았을 때 전파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잘못했으면 우리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나도 못 가고 다른 사람도 못 가게 밀어 넣고 말 뻔했다. 나도 못 가면서 가자고 강조했을 사람이다. 이제 나는 내가 못하는 것을 남에게 하라고 할 수 없다. 나에게 가장 쉬운 것, 나 같은 사람도 가능한 것, 이것을 전파해야 다른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마지막 뜻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이렇게 해야 안 되겠는가.
모든 학생을 대학에 합격시키려면 시험을 없애야 한다. 그 방법 밖에는 길이 없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은 무시험으로 입학하는데 옛날에는 국민학교 학생들도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중학교 입시준비를 하다가 밤 10시쯤 집에 돌아왔다. 중학교 시험을 봐야 되니까 그 때는 그렇게 해야 했다. 지금은 고등학교까지 무시험이니 거기서 해방된 것만도 얼마나 가벼운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시험이 없어져야 한다. 왜 시험이 있었는가? 하나님은 시험지를 내지 않았는데 우리가 시험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주의에서 나왔기 때문에 유대교의 잔재가 남아 있다. 그래서 율법을 강조했다. 바울이 율법과 부딪쳐서 맨날 고생한 이유가 유대교 때문이다.
불교의 출처는 힌두교다. 그래서 맨날 헛것과 싸운다. 헛것을 제거하는 싸음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나왔기 때문에 율법과 싸운다. 그러나 율법과 싸울 일이 아니다. 이제는 창세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창세기 1, 2, 3장은 사람이 썼다고 할 수 없다. 어찌 이렇게 명확할 수 있는지, 우리 인생에 대해서 이보다 명확한 대답이 없다. 창세기 1, 2, 3장을 소화하면 인생의 모든 대답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