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19강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말씀/눅11:37-12:12
요절/눅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오늘 말씀에는 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가 나옵니다. 그들은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금식도 매주 두 차례씩 꾸준히 했습니다. 십일조하는 것도 철저했습니다. 회당예배에 절대 빠지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고 성경대로 살고자 노력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잘 압니다. 암송도 많이 합니다. 이들은 인본주의, 세속주의를 배격합니다. 참 훌륭해 보입니다. 제가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께 책망을 듣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참 훌륭해 보이는데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요?
37,38절을 보십시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손도 씻지 않은 채 빵을 손으로 뜯어먹기 시작합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밖을 돌아다니다가 혹시 부정한 물건이나 죄악된 사람과 접촉해 오염되었을까 염려해 정결의식 차원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죄와 부정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 겉만 깨끗하지, 속은 아주 더럽다는 충격의 말씀입니다. 겉만 씻고 속을 씻지 않은 그들의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합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마음속 탐욕과 악독이 무엇이었을까요? 누가복음 16장 1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나와 있는 것을 볼 때 바리새인들의 대표적인 탐욕이 돈에 대한 탐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악독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선하신 예수님을 시기하고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결하게 살기 위해 열심히 손을 씻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것입니까? 40절을 읽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한마디로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겉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속도 보십니다. 그들이 겉만 부지런히 씻는 것은 하나님이 겉만 보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속도 보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행위도 보시고 내면도 보십니다. 그러므로 손을 씻어 겉을 깨끗이 하는 만큼 속도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겉에만 치중했을까요? 마태복음 23장 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그들은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손을 그토록 열심히 씻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치중한 나머지 더러운 속은 제대로 드려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속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4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우리가 속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것은 구제, 즉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나누지 않고 남을 돕지 않고 혼자만 쥐고 있으면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또 여기, 그 안에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을 말합니다. 또 마음이 있을 때 가진 시간과 물질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내면으로부터 나눔과 섬김을 실천할 때 우리의 내면은 깨끗해집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관심 갖고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 내 물질과 시간을 나누는 사람, 내 마음을 나누는 사람, 내가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 사람이 나의 가족, 나의 친구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구제와 섬김은 다른 사람을 살릴 뿐만 아니라 탐욕과 악독의 죄에서 나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갖고 ‘내가 가진 것, 내 안에 있는 것’으로 나누는 구제와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세 가지 화를 선포하십니다. ‘화 있을진저’는 “아 슬프다! 얼마나 두려운 일이 될 것인가!”라는 의미입니다. ‘화 있을진저’는 미움에서 나온 저주가 아닙니다. 심판 받을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통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과일과 농작물은 십일조를 바쳐도 채소나 약용 향료는 십일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극단적으로 적용해 바치게 했습니다. 개인이 기쁨으로 자원한다면 뭐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본질적인 일에 매달리다가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십일조에 매달리다가 하나님께 대한 공의와 이웃 사랑을 놓쳐버렸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중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들은 무엇에 관심갖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목자가 양들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칭찬만 받으려고 한다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화입니다. 이런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평평한 무덤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닙니다. 구약에서 무덤은 부정한 것인데 모르고 지나다니니 부정에 오염되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이 의로운 사람인 척하니, 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의로운 줄 알고 접근했다가 그들의 위선과 죄악에 오염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때 한 율법교사가 뭐라고 항의합니까? 45절을 보십시오.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그는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을 도매급으로 몰고 가니 화가 났습니다. 왜냐면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직격탄을 날립니다.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 여기서 ‘지기 어려운 짐’은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추가한 세부적인 규정들, 즉 장로들의 유전을 말합니다. 총 613가지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많은 규정들을 백성들에게는 강요하면서 그 규정들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지는 않았습니다. 또 정작 자신들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런 종교 지도자 아래 있는 양떼들만 불쌍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손양원 목사님은 부흥회를 인도하시기 전에 항상 먼저 읽는 결심문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나도 못 행하는 것을 남에게 무거운 짐 지우게 말 것’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양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보다 먼저 솔선수범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는 매기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신 예수님처럼 양들이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는 도와줘야 합니다.
47,50,51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아벨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다가 죽은 첫 순교자입니다. 사가랴는 당시 유대인들이 보던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역대기에 나오는 순교자입니다. 사가랴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교당한 선지자들의 무덤을 지금 율법교사들은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선지자들의 후손이라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 선지자들을 죽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의 조상들입니다. 조상들은 죽이고 후손들은 그 무덤을 화려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만약 조상 때 살았더라면 자신들은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마23:30). 그러나 그들 또한 장차 선지자들보다 더 크신 분인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죽일 것입니다.
또 율법교사, 그들은 얼마나 못된 짓을 했습니까? 52절을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율법교사들은 말씀을 잘 깨닫도록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대로 살지도 않고 양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가르치더라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양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우리는 양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가르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돕는 좋은 성경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오. 여느 때처럼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모였는데 그 수가 수만 명이나 되어 서로 밟힐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BTS, 축구선수 손흥민 못지않았습니다. 과거 갈릴리 시골 마을에서 살았던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있다가 덩달아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자,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b).” 여기, 외식은 진짜 나의 본모습은 숨기고 좋은 이미지를 주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째서 이 외식을 바리새인들의 누룩으로 비유하셨을까요?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외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외식은 누룩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 전체를 크게 부풀게 합니다. 이처럼 외식은 우리 삶에 침투해서 삶 전반에 퍼져 우리를 실제 모습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참모습이 아닙니다. 그저 남들의 평가에 의해 부풀려진 껍데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에 이렇게 외식하는 모습이 있는지 주의하고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자신의 본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이제는 잊혀졌고 아무도 모를 것 같지만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요행히 아무도 모르게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실체를 감추며 위선자로 살아가는 데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끝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1,12).”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총결산하는 그 날에 하나님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외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감추고 숨겨봐야 일시적 방편일 뿐입니다. 꾸며낸 겸손과 경건으로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아봐야 부질없는 짓입니다. 불꽃 같은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그토록 신경 쓰고 그들의 기준과 기대에 부응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을까요? 외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요? 외식의 뿌리는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외식에 빠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민감합니다.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인 경우가 많습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 좌절하고 괴로워합니다. 나를 평가하는 기준, 나의 행동을 규정하는 기준이 내 앞에 있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 의해 내 삶을 규정짓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 23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 죄의 뿌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사람을 두고 살기 시작한 이후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외식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바뀐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몸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을 해치려 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생명의 위협이 아니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람, 내 인생길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 직장 상사나 권위자들, 이들은 우리에게 두려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어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권한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사실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두려움 많은 한 인간이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다 알아도 우리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은 누구일까요?
5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할 분은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그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모든 인생들을 심판하실 권세가 있으신 분, 이생뿐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제자들의 생명을 빼앗을 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자들의 목숨을 뺏는 자들을 영원히 지옥에 보내는 권세가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협박처럼 들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당시 시장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렸습니다. 사실, 당시 참새 한 마리는 길거리에서 사먹는 아이스크림이나 붕어빵 같은 정도의 간식거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한 마리도 하찮게 여겨지지 않고 잊어버리신 바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7).”
지금 제 머리에 난 털이 몇 가닥인지 아십니까? 아침에 머리 감을 때 빠진 머리카락은 대략 15개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온통 머리털은 셀 수 없습니다.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 세신 바 될 정도로 우리 각 사람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미물인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얼마나 더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내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과장님에 대한 두려움은 부장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더 큰 권세를 가지신 부장님이 나를 지지한다면 과장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권세는 지극히 한계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천사들 앞에서 너희들을 시인할 것이고, 만약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천사들 앞에서 너희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시인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현재의 일입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를 시인하거나 부정하시는 것은 먼 미래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현재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정체성을 버리고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교회 안에서는 위선으로 나타난다면, 교회 밖에서는 소위 말하는 두더지 신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할까 두려워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이 잠시 박해를 모면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아주 심각한 사태가 미래에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이 수많은 천사들 앞에서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큰 일입니다. 사람에게 미움받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또 예수님은 성령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누구든지 말로 예수님을 거역한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용서받았고, 무지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바울도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고의적으로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내쫓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이 일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 일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도리어 비난만 일삼는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 성령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11,12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성령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권력자 앞에 끌려갔을 때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할 말을 성령님이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 좋은 예입니다. 대제사장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들은 사람들이 베드로가 가방끈이 짧은 줄만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탁월한 연설을 할 수 있느냐며 의아해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님이 그를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경외하고 인도함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친히 도와주십니다.
결국 오늘 말씀을 보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본질적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교회 안에서는 외식하는 위선자가 되고 교회 밖에는 겁쟁이로 두더지 신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눈치 보며 가면을 쓰고 사람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은 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할 분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진실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