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 수요일
[우엘바-리스본-까보다로까-파티마]
7시가 가까워져 해의 기운이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는데도 바다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깔려있고, 하늘에는 아직 빛을 잃지 않은 하현달이 그 바다 위로 은빛을 뿌리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4시간 거리인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간다.
어제 포르투갈의 바로 턱밑까지 와있었던 덕에 출발하자 곧 두 나라의 국경을 겸한다는 강을 넘었다. 포르투갈이라는 나라 이름은 조용한 항구라는 뜻이란다.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 내가 예전에 지도에서 이베리아반도를 볼 때마다 자주 들었던 생각을 적지 않을 수 없다. ‘그냥 하나로 합치지 뭐 한 귀퉁이에 굳이 금을 그어서 나눠놨나?’ 두루뭉술한 땅덩어리의 모양 때문에 더 그랬었겠지만, 스스로 생각해봐도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여행을 계기로 두 나라의 이야기를 찾아보며 불쑥 생각이 미쳤다. ‘내가 그리 생각했다면 중국에 붙어있는 우리나라의 땅을 보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으로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부끄러웠다. 이 자리에서라도 포르투갈의 모든 것에 깊이 사과한다. 나아가 세상 모든 작고 힘없어 슬픈 것들에게도.
포르투갈은 지중해성으로 기후는 온화하며 강수량은 겨울에 집중되고, 여름에는 일교차가 극심하여 남부내륙은 폭염이 자주 나타나며, 산악지대는 아니지만 언덕이 많고 지진이 잦은 편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적으로 가장 먼 유럽의 국가이다. 리스본으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며칠간 계속되었던 스페인 남부의 분위기와 크게 달랐다.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구릉이 그랬고, 그 구릉은 대부분이 풀과 나무들로 덮여서 땅이 푸르다는 점이 그랬다. 며칠 내내 따가운 햇빛을 쏟아붓던 날씨마저 하늘을 가린 구름으로 흐렸다. 코르크 생산 1위 국가답게 창밖으로 커다란 코르크나무의 농장들이 즐비하였다. 와인병 마개 등으로 쓰이는 코르크는 보통 10년을 주기로 채취한다는데, 그 때문에 껍질을 벗긴 자리에는 그 해의 끝자리 숫자가 페인트로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껍데기를 완전히 돌려 벗기고도 죽지 않고 다시 껍질을 만든다는 것이 평소에 궁금하던 터라 그를 가까이서 확인해 보지 못함이 아쉬웠다.
내가 포르투갈을 스페인과 하나로 여긴 것을 나무라기라도 하듯이 가이드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조되는 것들을 열거했다. 스페인이 정열적이라면, 포르투갈은 우수 즉 멜랑꼴리하다. 스페인이 유화풍이라면 포르투갈은 수묵담채의 수채화풍이다. 스페인이 넓은 국토를 가진 것에 비하여 포르투갈은 상대적으로 좁은 국토이다. 스페인이 맑은 날씨가 많은 것과 달리 포르투갈은 상대적으로 비가 많다.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비하여 산지가 많고 인구는 적으며, 스페인에 콜럼버스가 있다면 포르투갈에는 마젤란과 바스코다가마가 있다. ‘한마디로 몰락한 양반의 모습’- 포르투갈에 대한 가이드의 말이었다. ‘몰락한 양반’ 그것은 어떤 모습인가? 포르투갈을 구경하면 그것을 알 수도 있다는 말인가?
또 하나 포르투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파두(Fado)’라고 하는 노래 장르이다. 파두는 라틴어의 운명‧ 숙명 등에서 유래한 말이라 한다. 지리적으로 삶을 위해서는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고 그 바다로 나가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음에서, 운명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삶이 만들어 낸 노래라는 것이다. 파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하자.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노랫말 중 일부이다. 이 노래가 파두를 번안하여 부른 것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었는데, 사실은 양희은이 부른 이 노래가 너무나 파두와 닮았기에 포르투갈의 파두 가수가 다시 불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스페인에서는 타호강이라 부른다는 떼주강을 건너서 리스본에 도착했다. 내내 흐리던 하늘에는 굵은 비라도 쏟을 듯한 검은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그런 날씨 탓인지 포르투갈을 이야기하며 들은 우수‧ 멜랑꼴리‧ 비‧ 몰락‧ 파두 등의 단어 때문인지, 리스본이 주는 첫인상은 스페인에 비하여 어딘가 약간은 궁핍하고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시청 앞 광장은 꽤 넓은 면적의 바닥임에도 모두 타일로 장식해 놓은 것에서 옛 영광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고 구름은 걷혔다가 짙어지기를 반복했다. 세 발 오토바이 툭툭이에 올라 시내 투어에 나섰다. ‘툭툭이’라는 이름은 어느 나라 말인지, 이곳도 동남아도 모두 툭툭이라 부른다. 그 툭툭이는 좁은 골목길을 자동차와 낡은 트램과 나누어 쓰며 언덕을 오르내린 끝에 시내를 굽어보는 언덕에 올랐다.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 좁은 언덕에서 파리의 몽마르뜨를 떠올렸다. 멀리 바라보이는 타호강까지 펼쳐진 리스본은 지금껏 내가 보아온 스페인에 비하여 조금은 무질서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다채롭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같은 듯하며 다르고, 다른 듯하며 같은 분위기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중식으로 소금 쳐서 말린 대구를 잘게 찢어 채소와 함께 요리한 바깔라우라는 것을 먹었다. 바깔라우에는 짧게 잘렸다지만 삼킬 수는 없는 크기의 대구의 뼈가 섞여 있었다. 내가 달갑지 않아 하는 요리 형태 중의 하나가 생선을 살과 함께 입에 넣은 다음 잔뼈를 발라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동태전이 그러하다.
신항로를 개척한 바스코다가마의 원정 기념탑이라는 벨렝탑은 강의 끝에서 바다를 향한 보초병과도 같이 구름 낀 바다를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포르투갈 예술의 백미로 꼽는다는 제로니모스수도원은, 압도적인 규모의 석회석 건물 안에 제로니모스 신부와 성모‧ 성자 상 등 천 개의 조각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을 입장하려는 대기 줄 또한 끝이 없었고 움직임도 없었다. 우리는 아예 수도원은 입장하지 않고 외관만 구경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기에 긴 줄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나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서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못지않게 여행지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거듭 들러서 그림을 관람하는 것 또한 좋아하지 않는다. 알아볼 수가 없는 그림을 보고 또 봐야 한다는 것은 내게 너무 큰 고역이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지금까지 거쳐온 기독교 성당들만 하더라도 하나하나 모두가 대단히 크고 대단히 화려하지만 내 눈에는 모두가 하나같이 그 ‘대단함’으로 보일 뿐이었다. 비교가 적당할는지 모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맛집을 거듭 들러 가면서 음식을 먹어보는 격이라고나 할까? 자칫하면 첫 집에서 맛있게 먹은 음식의 맛마저도 잃어버리는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지금은 해양박물관으로 쓰인다는 그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 관람하지 않은 것이 차라리 좋았음이 솔직한 내 마음이다. 수도원이거나 박물관이거나.....
수도원 바로 옆에 있는 유명한 에그타르트집에는 그 에그타르트를 사려는 긴 줄과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우리 일행의 긴 줄이 나란했다. 우리는 단체로 미리 주문해 놓은 에그타르트를 받아 나와서 광장 한쪽의 벤치에 앉아 그 맛을 즐겼다.
한 시간을 달려서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끝인 까보다로까로 갔다. 신항로가 개척되기 전까지는 유럽인들에게 지구의 끝으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대서양을 앞에 두고 돌출되어 절벽으로 솟아오른 땅끝은 몸을 날릴 듯한 세찬 바람으로 우리를 맞았다. ‘여기서 땅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안내판을 달고 머리에는 십자가를 얹은 탑이 그 바람에 맞서고, 떨어진 언덕 저편에는 흰 건물에 빨간 지붕을 고깔처럼 덮어쓴 등대가 바람을 달래며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파티마까지는 2시간이 걸렸다. 1917년 세 어린이가 성모마리아를 목격한 자리에 세웠다는 성당은 카톨릭교인들의 세계적인 성지로서 광장과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하다고 한다. 역시나 내가 보아온 성당의 광장중에는 가장 넓고 시원스러웠다. 숙소가 그 성당의 광장에 붙어있었다. 밤이 되어 성당 광장에서 열리는 촛불 예배에 참석하는 집사람을 동행했다.
4월 13일. 목요일
[파티마-톨레도-마드리드]
5시간이나 걸리는 톨레도로 가기 위하여 새벽길을 나섰다. 6시가 가까워도 칠흑처럼 어두운 밤을 하현달이 지키고 있었다. 달은 포르투갈에서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우리를 배웅하듯 한참을 동행했다.
버스 창을 통하여 멀리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았다. 검은 땅과 새파란 하늘의 틈에서 솟아나는 붉은 빛이 아름다웠다. 새벽 기운을 품은 숲과 구릉지와 마을이 나타나고, 크고 작게 구획된 토지와 도로들이 사람 살아가는 곳이라는 표식과도 같았고, 무엇보다도 사방 모두가 물기로 촉촉하다는 점이 남부의 메마르고 황량함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다만 이곳도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점만은 다르지 않다. 요즈음 우리 농촌도 사람 구경하기 어려운 세상이니, 남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 그립다는 말이다.
작은 노랑꽃을 가지 끝마다 흐드러지게 매단 댑싸리를 닮은 나무들이 곳곳에서 나그네를 반긴다. 이름 모를 그 꽃나무*는 골짜기와 숲속은 물론 도로변과 집 마당과 밭둑에서 하늘을 향해 폭죽 터지듯 노란색을 흩뿌리고 있었다. 프랑스 칸에서도 갑자기 만난 노랑꽃의 이름을 궁금해하다가 그라스에 가서야 그 꽃이 미모사라는 것을 알았었지. 지천으로 널리듯 피어있는 그 꽃의 이름이 무척 궁금했지만, 어디 물어볼 곳조차 없다. 가이드마저도 여행 첫날 “길가의 나무나 꽃 이름은 나도 알지 못하니 이름을 묻지 마세요.”라고 했으니.가이드가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다면 더 좋으련만.....
물이 흐르는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나오면 이곳도 역시 넓은 들이 펼쳐졌다. 구릉은 초원이나 나이 든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초지에는 많은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넘어오는 국경은 아무런 눈에 띄는 경계가 없다. 지평선까지 목초지가 푸르게 이어졌다. 같은 벌판임에도 붉음과 푸름은 왜 그리도 느낌이 다를까? 붉은 흙에서는 가슴을 긁어내는 듯한 애절함과 애틋함이 있다. 반면에 푸른 들판에서는 푸근함과 편안함이 가슴을 적시며 스며든다. 그것이 단순히 색이 가져다주는 차이일까? 끝없는 벌판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목월의 나그네가 걸어갔던 밀밭처럼 목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피리소리가 들려오는 데니보이의 애잔함도 없다. 또한 이육사가 목 놓아 불렀던 광야도 아니다. 내 눈에는 그저 무료한 듯 공허하다. 강진 월출산에 있는 무위사(無爲寺)의 빈 뜰이 겹쳐 떠올랐다. 내 마음속에 담긴 무위사의 빈 뜰은 이 들판보다 결코 좁지 않았다. 무위사의 뜰이 지금도 그렇게 비어있었으면 좋겠다.
밤이 되어 홀로 이곳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들판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달빛이 있으면 그 달빛을 타고, 달빛이 없으면 별빛을 따라 아득한 그 어느 곳을 떠다녔으면 좋겠다. 갑자기 풍산들*이 떠올라 혼자 웃음 지었다. ‘아무려면, 그 풍산들보다야 못하지.’
톨레도는 마드리드로 옮기기 전 천 년간 스페인의 수도였던 곳이며 카스티야 라만차의 주도여서 돈키호테의 땅이기도 하다. 에스컬레이터를 몇 차례나 갈아타고서야 높은 곳에 있는 구시가지에 다다랐다. 구시가지를 두르는 로마 시대의 성벽 위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돌기를 톱니처럼 올렸다. 그렇듯이 이곳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유적이 함께 공존하는 대표적인 도시여서,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하기야 이 땅은 가는 곳 보는 것마다 유네스코 등재물이 널려있다시피 하여서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듯 도하다. 이곳에서는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걸어가기에도 넉넉지 않은 좁은 언덕길의 모퉁이를 돌아서다 보면 짐작도 하지 못했던 자동차를 갑자기 만나게 되어 당황하게 된다. 그런 때문인 듯 여기 와서 지금까지 내가 봤던 거의 모든 차가 작은 SUV이다. 쏘나타 크기도 없고 모두가 하나같이 프라이드 정도의 SUV이다. 좁은 골목을 돌아야 하고 짧은 공간에 주차하여야 하고, 실내 공간은 확보하려니 그런 차가 제격일 듯하다.
톨레도대성당은 예수를 업고 강을 건넜다는 크리스토퍼성인이 어깨에 어린 예수를 올려놓고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래서인가, 크리스토퍼 성인은 여행자의 수호성인이라 한다. 강과 관련된 종교적인 이야기는 적지 않다. 노인을 업어서 강을 건네 줬는데 그 노인이 부처였다거나, 알몸으로 여인을 업어 건넨 승려*의 이야기라든가..... 그 강들은 그저 단순한 강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곳 역시 금은보화로 장식한 각종 성물과 엘그레코와 고야의 그림들이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가는 곳마다 찾는 곳이 성당인데, 성당을 입장할 때 지켜야 할 예절 중 하나가 모자를 벗는 일이다. 지난 시절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민머리로 있다가도 손님이 오면 갓이나 유건을 쓰고 인사하는 것이 예의범절에 맞는 것이었다. 의관을 정제한다는 말이다. 분명 같은 모자인데 한쪽은 쓰는 것이 예의에 맞고 한쪽은 벗고 인사하는 것이 예절에 맞다니..... 내 어릴 적 어른들은 한복 두루마기에 머리에는 갓을 대신해서 간편한 중절모를 많이들 쓰고 다니셨다. 그런데 남의 집 방에 들어서거나 인사를 나눌 때는 꼭 중절모를 벗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니 갓 대신 썼다지만 인사법에서는 갓은 갓이고 중절모는 중절모였다. 그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모자 종류의 문제였던 셈이다. 지금 떠올려도 우스웠던 풍경 하나는, 장터나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면 한 손으로는 모자를 벗을 듯이 들어 올리고 나머지 한 손은 마치 절을 하기 위해 바닥을 짚으려는 듯이 아래로 늘어트리고서 허리를 굽히기보다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들을 나누었다. 나중에는 아예 모자만을 머리에서 위로 조금 치켜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는 식으로 한 발 더 간소화(?)되었다.
톨레도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돌아나가면 곳곳마다 이슬람사원과 서고트(Visigoth)스타일의 건축물이라는 유대교회와 르네상스식 궁전이 대단했던 중세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세계 3대 성화로 꼽는다는 엘그리코의 대표작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소장하고 있는 산토토메교회를 찾았다. 오르가스 백작은 사후에 산토토메교회에 큰 기부를 한 인물로, 그의 장례식에는 금색 의상을 걸친 성 스테판과 성 오거스틴이 나타나 백작의 시신을 직접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그림은 크게 장례가 거행되는 현실 세계를 그린 하단과 백작의 영혼이 천상으로 올라가 심판을 받는 영적인 세계를 묘사한 상단으로 나뉘어 있는데, 화가는 그림 속에 자신과 자신의 아들도 함께 슬쩍 그려 놓았다.
그림이라는 것이 나와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이야깃거리가 담겨있다고 해서 좋은 그림은 아닐진대 어쩌랴, 누차 말했듯이 그날의 내 관심과 지금의 내 기억과 재주로는 그들을 찬양하기에 역부족이다.
나는 여행에서 부족한 기억력과 이해력을 대신해 보고자 사진을 찍어서 남기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바쁜 일행들을 따라가랴 설명을 들으랴 거기에 사진도 찍으랴, 정신이 없다. 사진까지 찍으려니 현장에서의 감상은 더군다나 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마치 학교 다닐 때 참고서를 사는 것만으로 그 내용이 다 내 것이 된 양 정작 공부는 소홀히 했던 꼴과 같다. 하지만 어쩌랴, 참고서 사지 않는다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것도 아닐 바에야 그라도 해봐야지 않겠는가.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더니, 내가 기댈 것도 사진뿐이다. 하기야 가이드도 가는 곳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어디 어디에서) 사진을 찍고 오시면 되겠습니다.”라고 안내하고 있으니.....
톨레도의 외곽은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는 강이 둥글게 돌아나간다. 이 ‘타호’강이 포르투갈로 흘러가서는 ‘떼주’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중국과 달리 이곳의 강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나라에 만절필서라는 말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소코트렌이라 부르는 꼬마열차를 타고 톨레도 곳곳을 누비며 타호강을 건너 맞은 켠 언덕에 올랐다. 건너 바라보는 톨레도 풍경은 단연 압권이었다. 뾰족하고 뭉툭하고 크고 작은 붉은색의 건축물들이 떡시루 위의 갖가지 고명들처럼 높은 언덕을 빈틈없이 가득 채우며 들어차 있고, 그 둘레를 꽉 조이며 껴안기라도 하듯이 바닥을 훑는 깊고 푸른 강물이 둥글게 돌아나간다. 돈키호테의 도시답게 그 언덕 이름이 세르반테스 언덕이라 하였다. 나에게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전망대에서 바라다보았던 알함브라와, 이곳에서 바라다보는 톨레도 구시가지의 모습 중 하나만을 고르라고 하지는 마시라.
2시간에 걸쳐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갔다. 지금까지는 이곳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공장형 건물의 물류창고들이 나타나면서 마드리드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렸다. 마드리드의 시장은 우리나라의 먹거리 좌판과도 같이 조그마한 타파스와 하몽 가게들로 들어차고 맥주를 곁들인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펠리페 3세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는 넓은 마요르 광장에서는 과거 투우‧ 가면무도회‧ 왕실 결혼식‧ 대관식 등의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종교 재판이 성행했을 때는 이단자 등을 공개 처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고 한다. 광장에는 햇살이 기울고 그 빛으로 인해 붉은 건물이 더 붉었다.
어두워지는 광장 옆 작은 타파스점에서 한잔 술을 즐겼다. 여행의 끄트머리를 향해 가는 밤이 아쉬운 듯 일행 몇몇이 노래 실력을 뽐내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 이름 모를 그 꽃나무: [Wikipedia 인용] 스페인 빗자루로 알려진 Spartium junceum. 러시 빗자루 또는 직공의 빗자루. Fabaceae 계통의 꽃 피는 식물의 종이며 Spartium속의 유일한 종입니다. 다른 빗자루(Cytisus 및 Genista속)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늦봄과 여름에 새싹은 1-2cm 너비의 향긋한 노란색 완두콩 모양의 꽃으로 덮여 있습니다. 섬유는 천에 사용되었으며 노란색 염료를 생성합니다. 이 식물은 또한 향료로 사용되며 유전자 앱솔루트로 알려진 에센셜오일로 사용됩니다.
* 풍산들: 경북 안동의 풍산읍에 소재한 들녘을 이르는 말. 대부분이 분지 형태인 경북 북부지방에서 풍산들은 그나마 넓은 들이라 할 만하다. 안동 사람들의 고지식함과 턱없는 자존심을 풍자하는 일화로 ‘니 풍산들 봤나?’라는 말이 전해온다. 김포평야‧ 만경평야 등 넓은 들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안동 사람들은 ‘니 풍산들 봤나? 풍산들 보기 전에 그런 말 하지 마라.’며 풍산들이 최고라고 한다는 말이다.
* 알몸으로..... 승려: 승려 둘이 길을 가다가 큰 강을 만났다. 강둑에는 젊은 여인 하나가 강을 건너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스승이 옷을 훌렁 벗고 알몸으로 여인을 업어 강을 건네주었다. 한참을 걸으며 생각하던 제자가 물었다. “스님, 아무리 그러기로 그것은 계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스승이 답했다. “나는 그 여인을 강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그 여인을 여기까지 업고 왔구나.”
* 만절필동(萬折必東): 중국의 하천이 이리저리 굽어도 결국에는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말이다. 황제에 대한 제후의 변함없는 충성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몇 년 전 중국을 방문한 우리나라 관료가 방명록에 적은 바람에 사대(事大)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