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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7일 오늘의 역사
2019년 커밍아웃 동성애자 클라우디아 로페스(49세)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첫 여성시장 당선
2015년 미르재단 설립
2014년 가수 신해철 세상 떠남
2010년 인도네시아 천재지변으로 국가비상사태 선포
인도네시아 정부가 2010년 10월 27일부터 2주동안 천재지변으로 인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5일과 26일 잇따라 발생한 지진해일(쓰나미)과 화산폭발로 인해 최소 300명이 사망하고 412명이 실종됐다.
2010년 10월 25일 오후 9시 42분(현지시각) 수마트라섬 서부 연안 믄타와리 군도의 )의 한 섬으로부터 남서쪽으로 78㎞ 떨어진 해저 20.6㎞ 지점에서 발생한 규모 7.7의 강력한 해저 지진에 의해 쓰나미가 발생했다. 최고 높이 6m의 파도가 주변 섬마을 10여곳의 내륙 600m까지 밀려들었으며, 규모 6 안팎의 여진도 이어졌다.
또한 중부 자바섬 메라피(Merapi) 화산의 폭발로 산 주변에 살던 주민 최소 28명이 사망하고, 1300여명이 긴급대피 하였다. 메라피 화산 지역의 악천후와 열악한 접근성 2차 폭발 가능성 등으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되었다.
2009년 문학평론가 장백일씨 별세
2009년 10월 27일 오전 0시30분 문학평론가 장백일(본명 병희·78) 국민대 명예교수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장 교수는 국민대 문과대학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수필의 이해' '문학비평론' '김동인문학연구' 등이 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국제펜클럽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5년 쌀협상 비준안 국회상위 통과
2005년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 무슬림 사태 발생
3주 동안 실업과 차별대우에 반발한 이민 2,3세 청소년의 방화로 차량 9천여 대 불타고 3천여 명 체포. 프랑스는 반세기만에 비상사태 선포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은 소설이다. 이민자들은 ‘우리는 없는 존재’라며 좌절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크리스토퍼 베르토시앙은 일자리나 교육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며 쌓인 소외계층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 분석
2005년 노충국씨, 군 오진(위궤양)으로 전역 한달 뒤 암으로 사망
전역 보름 만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아 사망한 예비역 병사를 진단했던 군의관이 진료기록을 조작하였다.
2005년 6월 24일 병장으로 전역한 노씨는 보름 만인 7월 7일 민간 병원에서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소화불량과 가슴 통증을 호소하던 노씨는 전역 직전인 3월 29일과 4월 28일, 5월 27일 세 차례 군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노씨는 두 번째 진료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국군광주병원은 노씨의 위에서 심한 염증 등 비정상적 증세가 나타남에 따라 노씨의 위 조직 일부를 떼어내 민간 전문병원에 ‘조직검사’를 의뢰했다. 1주일 후 나온 검사 결과는 ‘위궤양’이었다. 이 과정에서 군의관인 이 대위는 군 진료기록부에 염증 등에 대한 내용만 적었다. 이후 7월 말 노씨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노씨의 가족이 진료기록 복사를 요구하자 이 대위는 진료기록에 “내시경 소견상 악성 종양 배제 어려워, 환자에게 설명”이라고 써 넣은 것으로 밝혀졌다. 노씨는 전역 한 달 뒤인 2005년 10월 27일 숨졌다.
2004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지진 발생 후 매몰 92시간 만에 두 살배기 유타군 구조
2000년 정현준-이경자씨, 동방금고-대신금고 불법대출과 로비혐의로 구속
1998년 정주영 현대명예회장 방북, 2차 소 501마리 지원
1998년 6월과 10월 2차례에 걸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였다. 1998년 6월 16일 83세의 정주영 회장은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 이날 오전 임진각에서 정주영 회장은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그 소회를 밝힌바 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은 향후 10여 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1997년 남북한 비행정보구역 통과 국제항로 개설 양해각서 합의
1995년 프랑스, 남태평양 프랑스령 무루로아 환초에서 3번째 핵실험 강행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 시인’ 기자회견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9년 10월 27일 자신이 재임중 5천억원의 통치자금을 조성, 퇴임 당시 1천7백억원이 남았다고 시인했다. 노씨는 이날 오전 연희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비자금 파문과 관련, 발표한 대국민 사과성명에서 이같이 밝히고, 필요하면 당국에 출석해 조사도 받겠다고 했다.
노씨는 “비자금을 조성한 것도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를 유용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은 더더욱 큰 잘못”이라며 “국민 여러분이 내리는 어떠한 심판도 달게 받겠으며 어떠한 처벌과 돌팔매질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사과했다. 비자금 조성과 용도는 주로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을 받아 노씨의 책임하에 대부분 정당운영비등 정치활동에 사용됐다.
그러나 대통령선거 자금 지원 등 구체적인 용처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으며 기자회견 후 여론은 솔직하지 못한 발언과 변명으로 일관한 노씨의 사법처리를 촉구했다.
1989년 바르샤바조약기구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 선언
1987년 제9차 개헌안 국민투표 실시, 93.1% 찬성으로 통과. 제6공화국 성립
1983년 산악인 허영호 마나슬루봉 단독 등정 성공
1981년 원효대교(1470m) 준공
여의도에서 원효로쪽으로 본 원효대교. 최초로 민자(民資)에 의해 세워졌다.
한강다리 13개 중 가장 긴 다리인 원효대교(길이 1470m, 폭 20m)가 1995년 10월 27일 착공 3년3개월 만에 개통됐다. 이날 준공식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영부인 이순자 여사, 박영수 서울시장, 배명국 국회건설위원장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테이프를 끊고 승용차편으로 새 다리 위를 시주했다.
용산구 원효로4가와 영등포 여의도초등학교 옆을 연결하는 폭20m, 길이 1470m의 원효대교는 건설에 총2백45억원이 소요됐다. 원효대교가 개통됨으로써 서부역-청파동-원효로-여의도-대방동간의 새로운 간선도로가 확보돼 제1한강교와 서울대교의 과밀교통량을 분산시키고 도심과 여의도, 영등포 지역간의 교통 소통이 원활하게 됐다.
원효대교는 서독의 디비닥(DYWIDAC) 공법을 사용, 교각을 1백m마다 설치해 교량 외관이 아름답게 시공됐다.
처음 개통 당시에는 유료도로였으나 1984년 서울시에 기증되면서 무료로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81년 중요무형문화재 서울전수회관 준공
1981년 소련 잠수함, 스웨덴 해군기지 근해에서 좌초
1980년 제8차 개헌안(제5공화국 헌법) 공포
1980년 `10.27 법난` 발생
계엄사 합동수사단의 지시를 받은 무장 계엄군들이 1980년 10월 27일 전국 사찰에 들어가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배송원 전 총무원장 등 153명의 승려 및 신도들을 강제 연행, 18명을 형사입건하는 이른바 `10.27 법난`이 발생했다.
계엄군은 또 각 사찰의 총무-재무관계자들의 방을 수색, 사찰의 서류와 예금통장 등을 모두 압수했다. 이어 10월 30일에는 군경합동으로 사찰내 용공분자-범법자 색출명목으로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및 18개 종파에 소속된 3천여 사찰을 일제히 수색했다. 계엄사는 이어 11월 14일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승려들이 부정치부 사유화한 재산 2백억6천만원을 종단에 귀속시킨다고 밝혔다.
불교계에서 당시 사간을 `법난`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정권적 차원에서의 불교탄압정책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즉 이같은 조치의 배경에는 불교계 내부 비리를 핑계삼아 불교를 탄압하려 했던 당시 정권의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는 게 불교계의 주장이다.
1979년 최규하 총리, 대통령권한대행 취임
1979년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1979년 경북 문경 은성광업소 불 42명 사망
1978년 태풍 리타 필리핀 상륙 사망 4,000여명
1978년 주한유엔군사령부 판문점 부근서 제3땅굴 발견 발표(10월17일 발견)
1976년 안동 다목적댐 준공
4대강 유역 종합개발계획의 하나인 안동 다목적댐이 1976년 10월 27일 준공됐다. 경북 안동군 와룡면 낙동강 본류에 자리잡은 안동댐은 산업기지개발공사가 1971년 4월 1일에 착공, 5년6개월만에 준공하게 됐다.
총사업비가 4백14억6천5백만원이나 들었고, 이중 내자가 79%를 차지한다. 토석(土石)으로 만든 안동댐은 높이 83m, 길이 6백12m, 하폭 4백20m, 상폭 8m, 체적 4백1만5천 입방제곱미터, 총저수량 12억5천만t으로 소양강 다목적댐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큰 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댐건설 역사상 처음으로 화강토를 사용한 점과, 국내 최초로 양수발전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선 소양댐을 앞지른다.
안동댐 준공으로 낙동강 유역의 한수해가 크게 줄고 풍부한 농업-공업용수를 공급하게 됐다. 또 영산강 상류에 있는 장성·담양·광주·나주 등 4개 댐을 주축으로 한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 제1단계 사업을 착공한지 3년6개월 만인 10월 14일 하구언을 준공했다. 여기에 든 총사업비는 7백30억원이다.
1976년 워싱턴포스트(WP), 박동선의 로비활동(코리아스캔들) 폭로
1973년 제1회 월드컵 배구대회에서 한국 여자팀 3위
1972년 10월 유신 헌법안 공고
1972년 10월 27일 정부가 사실상 대통령 종신제를 기조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오후 7시를 기해 국회해산 및 정당·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정지된 헌법의 기능을 비상국무회의에 넘기는 특별선언을 발표한지 열흘 만이었다. 1년여 전인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풍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추진해 온 '10월 유신'의 실체였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언론과 출판, 방송에는 사전검열이 행해졌다. 정부는 유신홍보를 위해 100억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 마이카 시대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유신헌법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고, 국민들은 11월 21일에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응답했다. 인권이 마구 유린된 유신시대의 막을 열어준 유신헌법이 통과된 것이다.
헌법은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새로운 기구에 의해 간접 선출핟록 규정했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었지만,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었으며, 법관 임명권도 대통령에게 귀속시켰다. 임기 6년의 국회의원선거는 전국 73개 지역구에서 1구 2인을 뽑는 중선거구로 바꾸었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 정족수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73명의 의원을 일괄 선출하도록 해 국회 역시 대통령이 장악하도록 했다.
12월 23일 박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 중 2,357명(99.9%)의 지지를 얻어 임기 6년의 대통령에 당선되고 12월 27일 제 8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유신헌법을 기저로 한 1인 장기체제가 뿌리를 내렸다.
1969년 디오리 하마니 니제르공화국 대통령 방한
1969년 서독 정부, 2개의 독일(서독-동독) 인정
1968년 유엔총회, 서남아프리카에 대한 남아공 위임통치 종식
1966년 중국, 핵미사일 실험 성공
1962년 태국, 태풍 하리에트 엄습으로 138명 사망
1961년 로마 사회주의 인터내셔날회의, 한국의 투옥된 민주사회주의자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결의안 채택
1955년 제네바서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외상회담
1955년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군사협정 조인
1950년 정부, 서울 환도
1945년 독립투사 박열, 22년2개월 만에 석방
1944년 군수회사법 시행
1938년 일본군, 중국 무한 3진 점령
1938년 듀폰사, 나일론 첫 상품화
20세기 섬유혁명은 시대를 앞선 듀폰사의 안목과 투자, 이에 부응한 월리스 캐러더스의 끈질긴 노력으로부터 시작됐다. 캐러더스는 합성고무 ‘네오프렌’을 발명하고 1935년 2월에는 최초의 합성섬유 ‘폴리머 66’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듀폰의 연구 책임자였다. 듀폰은 이 합성섬유가 자기 이름도 갖기 전인 1938년 2월에 첫 상품을 냈다. 칫솔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주로 돼지털로 된 칫솔을 사용했다. 15세기 말 중국 황실에서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돼지털이 실로 450여년 만에 인간의 이(齒)와 작별을 고한 것이다. 캐러더스는 1년 전에 자살하는 바람에 공치사를 들을 기회를 놓쳤지만 듀폰은 상품화에 박차를 가했다.
1938년 10월 27일 듀폰은 합성섬유의 이름(브랜드)을 ‘나일론(Nylon)’으로 하고 이를 이용한 본격적인 상품화 계획을 발표했다. 1년 뒤 나일론의 이름을 빛내준 여성용 스타킹이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첫선을 보인 데 이어 1940년 5월부터는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다”는 선전 문구와 함께 전국 주요 도시에서 팔려나갔다.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나일론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2차대전 때는 낙하산·텐트 등 군용으로도 쓰여 승전(勝戰)에도 크게 기여했다.
‘코오롱(KORLON)’은 이 회사의 뿌리 기업인 한국나이롱이 1963년에 처음 생산한 제품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국(Korea)’과 ‘나일론(Nylon)’을 합성한 단어다.
1937년 몽골연맹 자치정부 수립
1934년 제1회 조선어도서전시회 개최
1924년 조선학생총연합회 창립
1923년 국문학자 정한모 출생
1923년 미국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 출생
1922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쿠데타
1919년 영화 ‘의리적 구토’ 첫 상영
연쇄극은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 신이나 특수 장면을 미리 필름에 담아두었다가 무대 사이사이에 보여주는, 이를테면 무대극과 영화를 합친 것이다. 1919년 10월 27일 첫 연쇄극 영화이자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가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됐다.
100% 필름영화가 아닌 탓에 1923년에 상영된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月下의 盟誓)'를 우리 영화의 출발로 주장하는 영화 전문가도 있지만 아직까지 공식적인 ‘영화의 날’은 1962년부터 10월 27일로 기념하고 있다.
월하의 맹서 외에 '과거의 죄'라는 영화를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삼는 영화전문가도 있다. 과거의 죄는 1917년 당시 매일신보에 연재됐건 심천풍의 원작소설 '형제'를 활동사진으로 만들어 공개했다는 작품인데, 매일신보에 따르면 당시 황금관에서 일반에 공개됐으며 매일신보가 독자할인 영화감상회까지 주최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상명대 조희문 교수는 과거의 죄가 일본 영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반박한다. 조 교수는 또 근거도 없이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로 잘못 불려온 영화제목을 '의리적 구토'로 바로잡기도 했다.
영화는 단성사 주인 박승필이 돈을 대고 김도산이 각본·연출·주연을 맡았다. 이 때문에 김도산은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31세 때인 1922년 본격적인 장편영화 '국경'을 연출하던 중 교통사고로 숨졌다.
배우는 그가 이끄는 신파극단 신극좌 단원을 썼으나 여배우가 없던 때라 여장 남배우를 출연시켰다. 개봉 첫날부터 신파극에 식상해 있는 사람들이 몰려와 만원사례를 기록했고 관객들 중에는 기생이 200명이나 됐다고 당시 신문은 전하고 있다.
1918년 인천항 갑문식 선거(船渠) 준공
1917년 제2차 소비에트 대회, 소련 새 정부 수립
1915년 경주 분황사 탑에서 사리함 등 유물 다수 출현
1905년 대한적십자사 창설
1904년 뉴욕지하철 개통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오늘 4년7개월에 걸친 공사를 끝내고 뉴욕 지하철이 개통됐다. 이날 시청 주변에는 6000여명의 군중이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당시 뉴욕 시민들은 기차와 달리 매연하나 뿜어내지 않으며 몇시간이 소요되던 시청에서 할렘가까지를 15분에 주파하는 이 땅속 기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후 2시 26분, 군중의 환호 속에 말끔한 정장 차림의 시장과 관계자들이 지하철 역내에 나타났다. 플랫폼에는 8량의 특별열차 1호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예정대로 시장은 격식을 차리며 준비된 은색 열쇠로 스위치를 올렸지만, 이 희귀한 체험에 그는 103가 역에 도착할때까지 운전실에서 나가지 못했다. 오후 7시 영업개시 시간이 다가오자 축제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군중은 마치 대통령 선거 개표일인 거 마냥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댔다.
개통 당시 승차료는 1인당 5센트로, 어느 역에서는 5센트의 승차권에 25달러의 프리미엄이 붙기도 했다. 개통 첫날 지하철을 승차한 시민 수도 총 15만명 달했다. 그후 뉴욕시는 지하철 역세권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해 오늘날 세계 제1의 도시가 됐다.
1902년 춘사 나운규 출생
영화 ‘아리랑’을 연출한 춘사 나운규가 1902년 10월 27일 태어났다. 춘사는 함북 회령태생으로 한국영화의 개척자이며 민족수난기의 항일투사로서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춘사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간도의 명동중학 재학시절 3·1운동에 참가하는 등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해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감 후 1924년 부산에서 처음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은 ‘운영전(雲英傳)’에 단역으로 출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35세로 요절하기까지 약 13년동안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29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주연까지 맡은 ‘아리랑’ ‘풍운아’ 등이 있다. 1927년에는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 여러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1929년에는 국내최초의 문예영화인 ‘벙어리 삼룡’을 발표했다. 무질서한 사생활과 지병인 폐결핵 악화로 1937년 요절했다.
1900년 장충단 조성
장충단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 열사들을 제사하기 위해 1900년 10월 27일 대한제국 고종이 사당을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고종은 어영청의 분소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최초의 현충원이라 할 수 있는 장충단을 짓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러나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1908년 제사는 중단되었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거국적인 국민대추도회라는 행사가 장충단에서 열렸습니다. 국민대추도회 추진 세력들은 장충단에 이토의 사당을 짓고 추모제를 지냈다.
1895년 손문, 최초의 거병 시도 실패 (광주사건)
1883년 한국-독일 수호통상조약 조인
1871년 영국,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 산지 병합
1870년 미국의 법학자 링컨 출생
1858년 미국 26대 대통령 데오도르 루스벨트 출생
1844년 스웨덴의 정치가 아놀드손 출생. 1908년 노벨평화상 수상
1811년 가정용 재봉틀 `싱거 미싱` 개발자 아이작 싱어 출생
1782년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출생
1728년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 출생
1553년 에스파냐 신학자 세르베투스 화형
1553년 10월 27일 에스파냐의 신학자이며 의사인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뱅에 의해 산 채로 화형당했다. 의사로 심장의 작동 원리를 발견한 그는 진지한 성서주의와 그리스도 중심적인 세계관을 펼쳤으나, 삼위일체와 세례에 대한 견해 차이로 기존 종단에서 이단 혐의를 받았다.
그가 처형된 후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사이에서는 이단자에게 사형을 부과하는 문제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고 장 칼뱅에게는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의 처형은 칼뱅의 과오라는 점이 인정돼 1903년 처형지인 제네바 근교에 속죄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는 나발왕국 투델라에서 태어나 1528년부터 법률과 성서를 공부했고, 1530년에는 독일에서 루터와 함께 반(反)교황 입장에 섰다.
1469년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출생
1335년 조선 1대 국왕 태조 이성계 탄생
조선 태조(1335년 10월 27일 ~ 1408년 6월 18일, 재위 1392년 8월 5일 ~ 1398년 10월 14일) 이성계는 고려 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태조이다.
함경도 영흥 출신이며,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라고 한다.
고려에서 관직은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고려 우왕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문하시중으로서 전권을 장악하고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양위의 형식으로 조선을 개국하였다.
원래 이름은 성계였으나 조선건국 후, '단'으로 개명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했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상왕으로 약 10년 동안 있었다. 향년은 74세이고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113년 트라야누스 로마 황제,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로마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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