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munjang.or.kr%2Ffile_lib%2Fauthor%2F0001%2F000038.jpg)
김여제는 한국 시문학사에서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자유시의 효시로 꼽히는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이, 실상 “신시의 첫작가”는 김여제라고 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또 하나는 상해 <독립신문> 소재 항일민족시를 다수 창작한 ‘김여(金輿)’가 바로 김여제였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새롭게 주목 받았다.
김여제는 신문학 초기 특히 1910년대 《학지광》을 통해 근대자유시를 모색한 시인이다. 그는 1895년 5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1911년 오산학교를 제2회로 졸업하였다. 김여제가 오산학교에 다니고 있던 1910년에 이광수가 교사로 부임하여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여제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이광수의 주선으로 상경하여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숙식하며 각종 업무를 보조하였다. 그는 청년학우회, 중앙기독청년회, 경성일어연구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는 주시경의 주도로 진행된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참여하였고, 《붉은저고리》(1912. 8 창간) 발행인으로 활약했다. 《붉은저고리》가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후, 김여제는 최남선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13년 8월 경, 일본에 와서 처음 1년 동안 동경 세이소꾸(正則) 영어학교에 다니고, 1915년 9월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1918년 7월 졸업했다. 그는 동경유학생학우회, 조선학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또 김억, 현상윤, 최승구 등과 어울리며 바이런, 오스카 와일드와 같은 서구 시인들을 애독하며 한국근대자유시를 실험하고 모색하였다. 그는 1910년대에 동경유학생학우회 기관지 격인 《학지광》에 「산녀」(5호), 「한끝」‧「잘 때」(6호), 「세계의 울음」(8호), 「만만파파식적을 울음」(11호) 등 5편의 자유시를 발표했다. 주요한은 김여제의 시가 “그 내용(정조, 사상, 감정)이 새롭고, 형식은 고래의 격을 파한 자유시”였다고 회고했다.
김여제는 1918년 8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에서 영어와 일어를 가르치던 중, 3‧1운동과 관련하여 쫓기는 몸이 되었다. 마침내 1919년 5월 상해에 도착해서 이광수의 주선으로 임시정부에 몸을 담았다.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원 비서 겸 외무부 선전위원, 사료편찬위원회 위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기자 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사료편찬사업의 일환으로 『한일관계사료집』 전4권을 완성하는데 참여하였으며,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김여제는 ‘해일(海日)’, ‘해’, ‘김여(金輿)’라는 필명으로 <독립신문>에 총 7편의 시를 발표하였는데, 「독립일」, 「아아 경술 팔월 이십구일」, 「오오 나라의 한아버지들」, 「추석」, 「아아 내 나라」, 「3월 1일」, 「향수」 등이다. 김여제가 스스로 회고하기를 이 작품들은 “설움이 복받칠 때마다, 분노가 끓어오를 때마다, 조국을 향해 울부짖은 단장의 곡성이요, 분노의 절규”라고 했다. “거룩한 싸움 의로운 싸움 / 어느덧 1년이로다 // 지하의 의로운 영령(英靈) / 철창에 자는 용사 // 그러나 안심하소서 / 안심하소서 // 자유의 햇빛이 정의의 깃발이 / 새 광채 발할 날 머지 않나니 머지 않나니”(「3월 1일」 부분). 이 시들은 현장성과 운동성, 그리고 서정성이 함께 어울린 것들로 우리 시문학사에 특기할 만하다. 환멸의식이 팽배하던 국내의 문학계와는 또 다른 문학활동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할 일이다. <독립신문> 제47호(1920. 2. 17)에 발표된 「독립군가」의 경우, 1,2절은 이광수가, 3절은 김여제가, 4~6절은 주요한이 지은 것이다.
한편, 김여제는 1920년 5월 도산 안창호의 권유로 이광수, 주요한과 함께 흥사단에 입단했다. “교육과 실업을 진흥함으로써 경제적 문화적 실력을 양성하고 나아가 부국강병을 달성하여 장차 구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흥사단의 이념은 김여제의 삶을 규정하였다. “구국의 길은 인재양성에 있다”는 안창호의 권유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1926년 시카고의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MA학위를 받고, 1929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중등교육 전공으로 PH.D 과정을 이수하였다. 8년간의 미국 유학을 통해 김여제는 시인이 아니라 교육가로서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였다. 북미유학생 잡지 《우라키》에 「향수」, 「어머니」, 「마리아는 갔다」, 「무엇이 이쁘다고?」 등의 시를 발표했고 이후 국내에서도 「친구여」, 「너와 나」 등의 시를 《동광》에 발표했으나, 한두 편을 제외하고는 주목할 것이 못되었다. 서북지역 출신들의 문예동인지였던 《영대》의 동인으로도 이름이 올라있으나,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1929년 말 경에 귀국하여 이광수의 주례로 신여성과 결혼하고 다시 독일 베를린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1년도 안되어 귀국하여, 1931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자유주의적 교육 방식이 군국주의적 교육 당국과 대립하고, 또 일부 학부모들과도 갈등을 빚어 7개월만에 사퇴했다. 이후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에서 교원으로 시무하다가 1937년 6월, 흥사단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75일간 유치장에 수감되기도 했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중앙중학교에 재직하다가 일본군의 영어 통역관으로 징집되어 인도네시아에 참전했다. 1946년 5월 귀국하였다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1954년까지 미국무성 소속 ‘미국의소리’ 방송국 편집관 및 번역관으로 활동했다. 1959년부터 인하공과대학 교육학 담당 교수로 재직하며 흥사단 활동에 전념하며 그 단보인 《기러기》에 10여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노래지향의 교술시에 머물렀다. 1968년 독일 괴테대학에 연구차 갔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1993년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여제의 삶은 식민지 근대 현실 속에서 역사적 책무를 짊어진 지식인이, 시인에서 교육가로 자기 정체성을 변화시켜 가는 과정과, 이 과정에서 문학의 의미와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