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불로뉴숲과 마르셀 프루스트, 종이에 채색, 15×20㎝, 2020
■ 파리 불로뉴 숲
유년시절 불로뉴 숲의 기억
그의 문학 세계에 평생 영향
병약한 몸에 움츠렸던 자아
소설로 세상에 도전해 승리
위험하고 폭력적인 세상속
어머니의 근원 찾아 헤매는
어른 아이의 몽상日誌일 수도
불로뉴 숲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이가 보인다. 창백한 그 얼굴에는 이상한 슬픔이 어려 있다.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길을 떠나는 아이는 백발을 휘날리며 지친 걸음으로 불로뉴 숲을 다시 찾아온다. 순전히 내 생각인데 대양의 저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00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깃발 하나가 펄럭이고 있다면 이편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다른 깃발 하나가 펄럭이고 있다. 그런데 바다를 마주하며 펄럭이는 문학의 두 깃발은 흡사 에드거 앨런 포의 ‘황금벌레’ 이야기처럼 작고 사소한 이야기로부터 서사의 막을 열게 된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작고 사소한 이야기. 모든 길고 감동적인 이야기, 그리하여 신화가 되는 이야기의 출발은 대부분 이렇게 작고 사소하게 출발한다. 일곱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역시 홍차 한 잔으로부터 장강대하 같은 서사의 실타래가 풀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세기의 두 소설 중 마르케스의 그것이 마치 전설과 신화의 곳간을 뒤지며 몽상과 환상을 좇아가는 데 반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몽상과 환상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철저하게 지식을 이정표 삼아 길을 찾아간다. 거의 전문가 수준의 인문적 혹은 미술사적 지식을 바탕에 두지 않고서는 독해가 쉽지 않다. 마르케스의 소설이 구전과 설화로 이어오던 땅의 이야기를 박물학, 서지학적으로 엮어 하늘로 띄우는 것이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야말로 그 환상적인 시간의 박물관, 미술관을 지식의 나침반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거의 지적폭력에 가까울 만큼 군데군데 문학적, 철학적, 음악적, 미술사적 지식이 총동원돼 이어지는 일종의 철학소설이고 음악소설이며 미술소설이다. 누가 프랑스인 아니랄까 봐 미술사적 지식을 총동원시킬 뿐 아니라 부단히 문장의 회화화를 시도한다.
이런 사조는 사실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독일 문학이 철학적 서사 구조를 가지며 영국 문학이 전통문학의 특징을 갖는 것에 반해 프랑스 문학은 문장의 시각화가 두드러진다. 사실 프랑스 문인은 거의 모두라 해도 좋을 만큼 시나 소설, 희곡 등의 장르를 불문하고 미술평론가를 겸한 경우가 많았고 교양으로서의 미술이 그들의 작품에 튀어나오곤 했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 특징이 유난히 두드러져 서사구조 자체가 미술로 시작해 철학으로 끝나고 있다. 프루스트는 유년시절 불로뉴 숲 근처에서 살았고 그 숲의 기억은 평생의 문학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곳에는 우연히도 지금 루이뷔통이 서 있다. 어쩌면 그 옛날 이 숲에서 머나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소년의 갈망이 형상화되기라도 한 듯 미술관은 마치 강 위에 떠 있는 돛단배 한 척을 연상시킨다. 그에게 문학이 업보 같은 것이었다면 미술은 늘 갈증과 그리움의 그 무엇이곤 했는데, 기이한 인연이라 할 만하다.
어렸을 적 그는 가끔 그 울창한 숲길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숲에서의 아름답고 두려우며, 그러면서도 가슴 두근거렸던 의도적 길 잃기가 그로 하여금 시간과 기억의 미궁을 찾아가는 대작을 낳게 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스완네 집 쪽으로’(1913년 출간), 2부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1919년 출간, 공쿠르상 수상작)는 거의 어릴 적에 들었던 이야기와 장소에 상상력을 섞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3부 ‘게르망트 쪽’부터 4부 ‘소돔과 고모라’, 5부 ‘갇힌 여인’, 6부 ‘사라진 알베르틴’ 그리고 마지막 7부 ‘되찾은 시간’은 결국 1부와 2부의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뫼비우스의 띠를 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년 남자가 나른한 오후에 홍차와 함께 마들렌 한 조각을 베어 문다. 시간의 과거와 현재는 그 차 한 잔과 과자 한 쪽의 미각과 섞이면서 바람처럼 풀려나간다. 회상의 실타래인 이 대작은 처음 1권을 내려 했을 때 모든 출판사가 퇴짜를 놓는 바람에 그는 깊이 실망하게 된다. 당시엔 앙드레 지드의 추천을 받으면 최고의 출판사 갈리마르에서도 책을 낼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지곤 했는데 지드도 처음에 이 골치 아프게 길고 난삽하고, 게다가 일종의 글로 그린 풍경화에 철학책 같은 무명작가의 작품에 대해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추천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1편은 자비로 출간되다가 프루스트가 공쿠르상을 받으면서 지드는 작품을 다시 읽게 되고, 그제야 재평가하게 된다. 이때부터 프루스트는 그야말로 ‘자고 나니’ 유명해진 인사가 된다. 이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소설 속에 미술과 음악과 철학을 망라한 지식인의 책으로 자리 잡게 되고 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한 별도의 텍스트 북이 나올 정도로 고급 독자들을 사로잡게 된 것이다.
예컨대 소설이란 한 사람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 일종의 거짓말 지어내기라고 폄훼했던 사람들도 이 인문학적이고 현학적이며 예술사적인 소설을 두고서는 상찬해 마지않았다. 심지어 버지니아 울프는 “내가 다시 뭔가를 더 써야 할까 회의가 든다. 프루스트가 이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써버렸지 않은가”라고 했고, 문학의 철인이자 계관시인이었던 T S 엘리엇마저도 “금세기의 책으로 두 가지를 꼽겠다. 하나는 율리시스고 다른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데다가 감성이 풍부했던 그는 성인이 돼서도 그 상태 그대로였다. 강한 자외선과 거리의 소음, 심지어 진한 향수 냄새에까지 민감한 반응을 보여 급기야는 코르크나무 벽으로 밀폐된 방에서 침대에 누운 채 몇천 쪽에 이르는 그 방대한 양을 썼다고 하니 사지가 부자유했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수십 년을 의자에서 먹고 자며 우주이론의 새로운 저서들을 낸 것만큼이나 대단한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미술, 음악, 연극, 철학, 그리고 오페라 같은 공연예술에 대해서까지 전문적이고 해박한 지식을 끝없이 늘어놓아 쓰는 쪽에서나 읽는 쪽에서나 그의 글은 일종의 고행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소년 시절 이래 병약한 육체 때문에 움츠러들었던 자아를 그 소설로 활짝 펴며 세상에 대한 일종의 도전과 승리를 함께 선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불로뉴 숲에 갈 때마다 나는 파리를 만든 이들의 지혜에 내심 감탄하게 된다. 이 도시에 불로뉴라는 허파가 없었다면 파리는 자칫 메마른 건물들의 도시가 될뻔했다고 생각한다. 한밤중 숲에서 불빛이 은성하게 펼쳐진 파리 시내를 바라볼라치면 묘한 안도감 같은 것이 든다. 알 수 없는 크고 부드러운 힘 속에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마 오래된 숲의 기운 때문이리라. 어쩌면 소년 프루스트도 이런 기이한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소설에 나오는 화가 엘스타드, 음악가 ?테이유, 작가 베르고트 등은 한결같이 병약한 몸으로 근근이 삶을 유지해나가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다. 그 주인공들은 어쩌면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작가 자신의 분열된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문학적 감수성이 유난히 풍부했던 소년이었지만 그는 또래들과 함께 뛰어놀기보다는 숲에서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어쩌면 나뭇잎이 햇빛에 반짝이는 정오 무렵부터 어스름 저녁이 오는 시간까지 숲에 머물면서 아주 희미하게나마 시간에 대한 특별한 의식 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자라난 그는 청년이 돼 위로를 주던 적막한 숲 대신에 글쓰기라는 새로운 안식처를 알게 된다. 푸른 청춘의 20세 무렵에 “우리를 둘러싸 집어삼키려 하는 거대한 현실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은 예술로 가상현실을 만들어내 그 세계에 가는 것”이라는 논조의 글을 발표하는데 예술의 초월적 세계가 확대되고 강해지는 한 우리가 마주한 실제 현실은 그 힘이 약화될 것이라는 이원론적 이론을 편다. 예술이 도피처가 되고 방어벽이 된 것이다.
그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다분히 지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었고 맏아들인 그에게 특별한 사랑과 정성을 쏟았다. 10여 세 무렵 소년 프루스트에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엄마와 헤어지는 것”이라고 할 만큼 모자간에는 강한 애착이 있었는데, 안전하고 따뜻한 어머니라는 세계로부터 분리돼 나와 맞닥뜨린 세계는 춥고 위험하고 폭력적인 그 무엇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숲을 넘어 어머니라는 근원을 찾아 헤매는 한 유약한 어른 아이의 몽상일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파리서 천식에 시달리며 12년간 집필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탄생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와 함께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세 거장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과 의식의 흐름을 서사구조로 한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사진)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더불어 ‘세기의 고전’으로 꼽힌다. 총 7부작으로, 출판사에 따라 12권·13권·15권으로 출판됐다. 작가는 이 작품을 39세인 1910년에 쓰기 시작해 51세였던 1922년 죽기 바로 며칠 전인 11월 18일에 탈고한다. 9세 무렵부터 앓기 시작한 고질병인 천식에 시달리며 파리 오스망 거리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12년 동안 쓴 것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거리에서 풍겨오는 냄새에 천식이 발작할까 봐 밀폐된 곳에 몸을 숨긴 채 소음 차단을 위한 코르크 벽의 공간에서 글을 쓰면서 밤에만 가끔 외출했던 세월이었다. 그는 1권을 지드가 편집책임자로 있던 저명한 NRF출판사에서 내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는데, 지드는 이를 나중에 사과하기도 했다. 후에 유럽에 이름을 떨치게 되면서 문인들의 꿈이었던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40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전작이 출판됐다. 작가 자신이 이 책을 ‘시간과 무의식의 심리학’이라고 정의했는데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은 그의 소설 속에 무려 100여 명이 넘는 화가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한때 귀스타브 모로나 모네, 렘브란트 등의 작가론을 쓴 화가였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