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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8일 오늘의 역사
2019년 IS(이슬람국가)지도자 알 바그다디 자폭 사망
IS(이슬람국가)지도자 알 바그다디가 미국의 is지도자의 은신처를 급습하여 자폭 사망 했다
시리아 북부 이들립에 머물던 알 바그다디는 현지 시간 26일 밤, 미군 특수부대가 급습하자 도주 중 폭탄 조끼를 터뜨려 폭사했다고 전했다.
미군 급습 작전명은 '케일라 뮬러'.
IS에 납치됐다가 희생된 미국 여성 인권 운동가 이름을 땄다.
알 바그다디 도주 과정에 그의 자녀로 추정되는 어린이 3명도 폭발로 숨졌다고 말했다.
미국대통령은 “그는(알 바그다디) 막힌 터널로 도망가다 죽었습니다. 훌쩍이고 우는 소리, 비명 소리가 가득했습니다."라고 발표했다
숨진 알 바그다디의 신원은 현장 DNA 검사를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에스퍼 국방장관은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알 바그다디를 생포하려 했으나 항복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2018년 차준환 시니어 그랑프리서 남자 피겨사상 첫 동메달
2015년 서울 성북구에 한‧중 평화의 소녀상 세움
2010년 경부고속철도(KTX) 2단계 구간(부산~대구) 개통식
동대구와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철도(KTX) 2단계 개통식이 2010년 10월28일 부산역에서 열렸다.
다음 달인 11월 1일 본격적인 운행을 앞두고 열린 이날 행사는 오송역과 김천(구미)역, 신경주역, 울산역에서도 동시에 진행됐다.
2단계 개통은 지난 2004년 4월 서울~동대구 1단계 개통 이후 6년 7개월 만에 이뤄졌다. 이로써 경부고속철도는 1992년 처음 공사를 시작한 후 19년 만에 모든 공사를 마무리 짓게 됐다. 투입된 사업비는 20조7282억 원에 이른다.
이번 개통으로 서울~부산 간 운행시간은 2시간 18분으로 1단계 때보다 22분 단축됐다. 또 오송역 등 4개 역이 새로 만들어져 이 지역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개선될 전망이다. 국토해양부는 2단계 개통으로 현재 10만6000명인 고속철도 1일 이용객이 13만5000명까지 늘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010년 중국 환경운동의 대부 량충제 회장 별세
중국 환경운동의 대부(代父)인 량충제(梁從誡·78) '자연의 벗(自然之友)' 회장이 2010년 10월 28일 별세했다.
양 회장은 베이징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윈난(雲南)대 역사학과 교수, 중국 외교부 국제관계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일하다가 1994년 중국 최초의 민간 환경단체인 '자연의 벗'을 만들어 환경운동에 투신했다. 이 공로로 1995년 조선일보와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제정한 한·일 국제환경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됐었다.
그는 청 말기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계몽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의 손자이기도 하다.
중국정치협상회의(한국의 국정자문회의 격) 위원인 그는 회의가 열릴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등 생활 속 환경운동 실천으로 유명하다.
항상 재생용지로 만든 명함을 사용했고 외출 때 수저를 갖고 다니며 일회용은 절대 사용하지 않은 그는 "환경을 파괴해 가며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은 자연에 대한 범죄"라고 역설해왔다.
2009년 파키스탄, 최악의 폭탄테러 발생
2009년 10월 28일 파키스탄 북서변경주에서 최대 도시에서 최악의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101명이 사망했다.
처음으로 파키스탄을 방문하는 힐러리 클린턴(Clinton) 미국 국무장관이 파키스탄에 도착한 지 3시간 만이었다.
이날 북서변경주 주도 페샤와르의 가장 번화한 시장 마에나 바자르(시장)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101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다쳤다.
사람들로 붐비는 좁은 시장 골목에서 0.3t이 넘는 고성능 폭탄이 터지면서 건물이 무너지고 불이 번져 시장통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피해자 구출 과정에서 건물이 추가로 붕괴하며 사상자가 더 늘어났다.
인명 피해 규모로만 보면 지난 2007년 10월 고(故) 베나지르 부토(Bhutto) 귀국 행렬에서 폭탄이 터져 140여명이 사망한 이후 파키스탄에서 발생한 테러 중 최대다.
이날 폭발이 일어난 곳은 탈레반과 알 카에다가 종종 공격 대상으로 삼는 시아파 무슬림 집단 거주지역과 인접해 있다.
사건의 배후를 자처한 단체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외신들은 이날 테러 공격의 배후로 '파키스탄 탈레반(TTP)'을 지목했다.
2009년 진종오, 한국 최초 사격 월드컵파이널 2관왕
진종오(30·KT)가 한국 사격의 역사를 새로 썼다. 진종오는 2009년 10월 28일 중국 우시에서 막을 내린 2009 국제사격연맹(ISSF) 월드컵파이널 대회 최종일 10m공기권총 결선에서 중국의 팡웨이(23)에게 691대690(본선·결선 합계 점수), 1점차 짜릿한 승리를 거두며 지난 26일 50m권총 금메달에 이어 월드컵파이널 2관왕을 달성했다.
이로써 진종오는 한국선수 최초로, 전 세계 통틀어서는 역대 10번째로 월드컵파이널 2관왕에 올랐다. 현재 진종오는 50m와 10m 두 종목 모두 세계랭킹 1위다. 월드컵파이널은 매년 세계 상위 랭커 10명에게만 출전권이 주어지는 '왕중왕'대회로 올해 대회에는 ISSF 월드컵 성적 상위 8명과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 2008년 대회 우승자 등 10명이 출전했다.
진종오는 뒤이어 열린 이벤트성 대회 10m공기권총 '챔피언 트로피'에서도 우승하며 상금 5000유로(약 880만원)의 보너스도 챙겼다.
진종오의 이번 금메달은 한국 사격 사상 첫 5개 국제대회 연속 우승이었다.
진종오는 지난해 8월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50m권총)을 따낸 뒤 방콕월드컵파이널(50m권총·11월), 창원월드컵(50m권총·5월), 뮌헨월드컵(10m공기권총·5월)에서 우승 행진을 이어왔다.
한편, 한국은 이번 대회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로 중국(금3, 은4, 동2)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미국(금1 은1 동1)은 3위에 올랐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용산에 개관
민족 문화의 전당인 새 국립중앙박물관이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에 28일 개관했다. 1997년 공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오전 10시 개관식을 갖고 오후 2시부터 일반 관람객을 맞이했다.
중앙박물관은 부지 9만2900여 평, 건물 연면적 1만4000여 평, 전시 면적 8100여 평으로 건물 연면적 기준으로 세계에서 6번째 큰 박물관이다. 새 박물관엔 국보와 보물 150여 점 등 총 1만1000여 점의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2004년 미국 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
2004년 10월28일 세인트루이스 부시스타디움에서 열린 2004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7전4선승제) 4차전서 보스턴 레드삭스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3대0으로 꺾고 4전 전승으로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1918년 이후 한 번도 월드시리즈를 제패 못한 것이 베이브 루스를 1920년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시켰기 때문이라며 가슴을 쳤던 레드삭스 팬들의 안타까움은 이 우승으로 한꺼번에 풀렸다. 하늘의 뜻이었을까. ‘밤비노의 저주’가 풀리는 순간, 밤하늘의 달빛도 잠시 빛을 잃었다. 신묘하게도 달이 지구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졌다 다시 나타나는 개기월식 현상이 일어난 것.
레드삭스는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으로 3연패 뒤 4연승을 일궈내며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선수들은 ‘왜 우리라고 안 되겠냐(Why not us)’며 포기하지 않는 투혼을 불살랐다.
최종일 승리의 전주곡은 1회 선두타자 조니 데이먼의 우월 솔로 홈런으로부터 시작됐다. 3회 2사 만루에서는 트롯 닉슨이 중월 2타점 2루타를 뽑아내 3―0으로 달아났다. 레드삭스 선발 데릭 로우는 7이닝 동안 삼진 4개를 잡아내며 3안타 무실점으로 호투, 승리투수가 됐고 키스 폴크는 1이닝을 무실점으로 잘 막아내 승리를 지켰다. 월드시리즈 MVP는 17타수7안타(0.412) 4타점을 기록한 매니 라미레스에게 돌아갔다. 라미레스는 “나는 밤비노의 저주를 믿지 않았다.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가 바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레드삭스의 우승으로 3년 연속 와일드 카드 팀이 월드시리즈 패권을 차지하게 됐다.
2004년 법원 항소심서 조선일보의 ‘이승복군 사건 보도’ 사실로 판결
이승복군이 북한 무장공비들에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가 입이 찢겨 죽는 참변을 당한 사실과 조선일보 기자들의 현장 취재 사실이 법원 판결로 다시 확인됐다. 그동안 김주언·김종배씨가 ‘소설’ ‘허구’ ‘신화’ ‘조작’이라고 매도했던 내용이 전부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재판부가 “이승복이 공비들에게 공산당이 싫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판단내린 결정적 물증(物證)은 ‘대한뉴스’에 실린 이승복의 시신 모습이다.
68년 12월 13일 제작된 대한뉴스 ‘남침 공비를 무찌른다-제3신’에는 ‘어머니 주대하, 남동생 이승수 승복 여동생 승자’ 순서로 일가족 시신 사진 3장이 등장한다. 이 사진들은 대한뉴스 인터넷 홈페이지에 동영상과 정지 화면 형태로 공개돼 있다.
이승복의 시신 사진에는 ‘입이 찢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가 보이고, 오른쪽 뺨 중간에는 크고 작은 ‘+형태’의 연속된 상처 2개가 선명하다.
이 상처는 이승복의 형 학관씨가 설명한 공비들의 살해방법과 일치한다. 학관씨는 “승복이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자 공비가 승복의 입에 칼을 넣고 휘저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학관씨가 일관되게 이승복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고 진술했고, 이웃 주민인 서옥자, 최순옥, 최순녀, 유경상씨 등도 사건 직후 이학관으로부터 그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며 “당시 15세 나이로 중상을 입은 이학관이 거짓말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이웃 주민들도 거짓말하고 있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현장에 기자를 보낸 서울신문도 이승복군이 “공산당에 속지 않아요”라고 말했다고 보도한 사실도 근거로 들었다.
재판부는 “당시 조선일보 기자 강인원, 노형옥은 68년 12월 10일 이 사건 현장에 가서 직접 취재한 것”이라는 판단의 근거로 조선일보가 현장에서 촬영, 보관하고 있는 원본 필름 15장을 들었다.
필름 15장은 이승복 생가 초입 시신이 놓인 장소를 가리키는 주민들 이승복 생가 원경 이승복 생가 내부 순서로 촬영돼 그 자체로 완벽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고, 5장 단위로 잘려 중간에 다른 사진을 이어 붙인 흔적이 없다. 재판부는 또한 이 필름내용이 사건 다음날인 68년 12월 10일 현장 모습을 담은 경향신문 사진 속의 등장인물과 행동, 그림자 길이, 각도 등과 유사한 만큼 조선일보 필름 역시 비슷한 시간대에 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피고인들은 “제3자가 찍어서 조선일보에 주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현장을 취재한 경향신문 기자들이 조선일보 필름 속에 찍혀 있고 다른 언론사나 국가기관에 같은 내용의 사진이 보도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일보 사진기자 노형옥씨가 직접 촬영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특종이 되는 정도의 필름 원본을 통째로 다른 신문사에 빌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현장 취재 경위와 기사 송고 과정 등에 대한 조선일보 기자들의 구체적인 진술, 조선일보의 기사 내용이 현장 상황과 일치하는 점 등을 들어 조선일보 기자들이 그 당시 현장을 취재했음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2000년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강원랜드 ‘스몰’ 카지노 개장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강원랜드 ‘스몰’ 카지노가 2000년 10월 28일 국내 처음으로 강원도 정선 폐광촌에서 개장했다. 오후 3시 카지노가 개장하자마자 슬롯머신 480대와 바카라, 다이사이, 블랙잭, 룰렛, 빅휠 등을 즐길 수 있는 1500여평 규모의 카지노 플로어에는 1000여명의 손님들로 가득찼다.
첫날 카지노에서 게임을 즐긴 입장객은 3400명, 나머지 1600여명이 대기자였다. 스몰 카지노 건물 안에 지어진 호텔 객실 199개가 일찌감치 동이 났고, 500대 수용 능력의 주차장은 개장한지 1시간 만에 ‘만차’가 됐다.
그러나 개장 이후 하룻밤 사이에 수백만-수천만원을 잃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등 ‘한탕주의’가 만연하고 전국의 도박꾼들과 조직폭력배, 사채꾼 들이 몰려들어 과열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강원도 폐광지역 이외의 다른 지역에 내국인 출입 카지노 설립을 불허하겠다고 밝혔다.
2000년 국내 민간항공 사상 최초인 대한항공 조종사 파업
1999년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 자수
12년째 도피 중이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 전 경기경찰청 공안분실장이 1999년 10월 28일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자수했다. 쑥색 점퍼, 감색 신사복 바지차림의 이씨는 검찰 당직실로 불쑥 들어가 당직계장인 김명진씨에게 주민등록증을 내밀며 “내가 이근안입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1988년 12월 잠적한 지 꼭 11년 만이었다. 이근안씨는 김근태 전 민청련의장을 전기 고문한 혐의로 지난 1988년 12월 24일부터 수배를 받아왔다.
이씨는 공군헌병 출신으로, 지난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1972년부터 대공업무에 근무하게 된 그는 매번 특진으로 승진을 거듭해 1984년 경감이 됐다. 고문 혐의를 받고 잠적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 대공분야에만 몸담은 공안통이었다. 대공-공안분야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는 경찰 재직모기간 중 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다. 이중에는 ‘간첩검거 유공’이 4회나 포함돼 있고, 지난 1979년 청룡봉사상,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1982년에는 ‘국가안보기여’로 9사단장 표창, 1986년에는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말 김근태 전 민청련의장으로부터 음지의 고문기술자인 ‘반달곰’ ‘박중령’ 등으로 지목되면서 쫓기게 됐다.
1998년 영국 시인 테드 휴즈 세상 떠남
1995년 수출 1,000억달러 돌파
1993년 한국 월드컵 축구대회 3회 연속 출전권 따냄
1993년 미국 LA와 인근 15개 지역에 큰 불, 멕시코국경에서 LA까지 88,000 에이커 산림피해 부상 30여명
1992년 주한미군 기지촌에서 윤금이 씨 살인사건 일어남
윤금이 피살 사건은 1992년 10월 28일 경기도 동두천시 기지촌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윤금이(尹今伊,당시 26세)가 주한 미군 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당시 이정희는 이 사건에 큰 관심을 보이며 가해자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 하였다. 사망 원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얼굴의 함몰 및 그로 인한 과다 출혈이다. 발견 당시 시신의 직장에는 우산이 27cm 가량 박혀 있었고, 자궁 내부에는 두 개의 맥주병이 들어 있었고 음부에는 콜라병이 절반쯤 꽂혀 있었으며, 입에는 부러진 성냥이 물려져 있었고 전신에는 세탁세제 분말이 뿌려져 있었다.
이로 인해 주한 미군의 범죄가 사회 문제로 제기되었고,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대한 개정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범인인 케네스 마클 이병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94년 5월 17일 천안교도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2006년 8월 14일 가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했다. 케네스 마클 이병은 복역중 2000년 8월 21일 《코리아타임스》 지방판과 인터넷 독자 투고에 SOFA 개정 움직임을 비판하는 글을 투고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1991년 한국-루마니아, 문화협정 체결
1986년 10.28 건대 점거농성 시위
1986년 10월 28일부터 3일간 27개대 1천5백여 학생들이 건국대 건물을 점거, `반공분쇄` 등 좌경구호를 내걸고 철야로 농성을 벌인 건국대사태는 결국 1천2백88명이 구속됨으로써 사상 최대의 구속자수를 기록했다. 구속자 중 8백90명이 기소유예로 석방되고 3백95명이 기소됐다. 1986년들어 색채가 점차 뚜렷해진 반미구호, 분신 그리고 북괴기관지 `민주조선` 전재벽보 등 학원가의 충격적이던 사건들이 꼬리를 물던 끝에 결국 건국대사태로 이어졌다. 학생들의 유인물이나 구호에 나타난 `용공 좌경 성향` 등이 문제되기도 했다.
1982년 스페인 총선에서 사회노동당 승리
1982년 10월 28일에 실시된 스페인 총선에서 펠리페 곤살레스가 이끄는 사회노동당(PSOE)이 과반수를 얻어 압승, 스페인 최초의 좌파정권이 탄생되었다. 프랑코 사후 세 번째로 실시된 이 총선에서 사회노동당은 전체의석수 3백50석중 201석, 국민동맹 106석, 민주중도연합 12석, 카탈리아동맹 12석, 바스크국민당 8석, 공산당 5석, 중도사회민주당 2석, 기타 4석을 차지했다.
이로써 1936~1939년 스페인내전 이래 계속되어온 프랑코 시대는 사실상 완전히 청산됐다. 이 선거는 43년간 지속된 극우 보수세력의 종언과 스페인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1982년 충남 청양에서 450여 년 전의 원형 미라 발견
1982년 포르투갈,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
1982년 이스라엘,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서 축출
1980년 고고학회, 경남 욕지군도서 중석기 문화유적발굴, 한국고고학 전국대회서 보고
1980년 전두환대통령,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 임명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 대(對)리비아 단교 선언
1977년 자연보호협의회 발족
1976년 울릉도 근해서 폭풍으로 어선 전복 사망 실종 408명
1976년의 동해 어선 조난 사고는 197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동해에 불어닥친 폭풍으로 10여 척의 대한민국의 어선들이 침몰하거나 실종된 사고이다. 이 사고로 모두 327명의 사망 또는 실종자가 발생하였고, 대한민국 최대의 어선 해난사고로 보도되었다
1976년 10월 29일 4시, 묵호무전국에서는 독도 동북 해상에서 24명을 태우고 오징어잡이를 하던 제12어성호의 긴급 구조 신호가 접수되었다. 같은 날, 오징어잡이를 하던 제5삼광호, 베델호, 신영호도 각각 구조를 요청한 뒤 연락이 끊겼다. 이들 어선에는 모두 66명이 승선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락이 끊긴 어선들이 늘어났다. 11월 3일까지 어선 6척이 침몰하고 13척이 실종, 사망하거나 실종한 희생자가 모두 408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974년 서독-소련 정상회담
1973년 이집트 작가 타하 후세인 사망
20세기 아랍 문학을 대표하는 깨어있는 지성인으로 평가받았던 타하 후세인이 1973년 10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이집트의 중하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3세 때 안질에 걸린 후 80년 이상의 세월을 실명으로 살아가야하는 비운에 처하게 된다. 이 일로 그는 무지와 가난을 혐오하게 됐고, 훗날 교육부 장관이 되어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에 힘썼다. ‘맹인’이라는 핸디캡은 그에게 있어 오히려 글을 창작케 하는 거름과도 같았다.
1914년 타하 후세인은 자신과 같은 맹인이자 아바스왕조의 시인인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에 관한 논문으로 첫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카이로의 알아즈하르대학에서 아랍 문학 공부를 마친 뒤 라틴어와 그리스어 공부차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때 일생의 반려자가 될 프랑스인 쉬잔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그녀를 ‘달콤한 목소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그에게 눈이 되어주었다.
1921년 이집트로 귀국하자마자 카이로대학에서 고대사 및 고대 아랍 문학 담당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아랍 고전시를 종교적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한다는 이유로 곧 보수파들의 반감을 샀고, 이내 대학에서 쫓겨났다. 타하 후세인은 그 뒤 이집트 최초의 근대적 민족주의 정당인 와프트당에 가입해 국왕 세력과 영국 식민주의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1950년 교육부 장관이 되어 초등 교육의 의무화·무료화를 이뤄냈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그의 성장 과정을 자서전적인 형식으로 표현한 ‘알아이얌(‘Ayyamㆍ나날들)’이 단연 으뜸이다. 기존의 아랍 사상에 새로운 진보적 정신을 불러일으키며 이집트 문학 비평에 탁월한 역할을 담당했던 그는 유엔 인권상 수상소식을 들은 다음날 눈을 감았다.
1963년 북한, 노동신문을 통해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판
1962년 소련, 미국에 굴복하고 쿠바기지 철수를 명령
1958년 요한 23세, 제262대 로마 교황에 선출
1955년 마이크로소프트사 사장 게이츠 출생, 흔히 빌게이츠라고 불림
1951년 육군대학 창설
1947년 공창(公娼)폐지령 공포
1940년 이탈리아군, 그리스 침공
1937년 몽고 자치정부 수립
1933 브라질 축구영웅 가린샤(불쌍한 새라는 뜻) 태어남
소아마비로 두 발 길이가 다르지만 아직도 그를 넘을 사람이 없다고 하는 환상의 드리블로 17세에 국가대표, 두 차례 브라질을 월드컵 정상으로 이끎, 1958년 지능지수 33(4세 수준)으로 투쟁심과 책임감 가질 수 없다며 의사가 대표팀 제외 권유했지만 동료들 반대로 제외되지 않음 1962 칠레월드컵 득점상
1927년 대하소설 `토지`를 펴낸 소설가 박경리 출생
1922년 무솔리니, 로마 진군
1922년 10월 28일 아침 이탈리아 파스타 임시 수상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의용군인 `검은 셔츠단` 4만명이 로마로 진군했다는 긴급보고가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 분쇄` `위대한 이탈리아`를 외치며 퀴리날궁을 향해 행진하는 이들을 제지하는 군경은 보이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전부터 파스타 내각에 자신을 포함한 자파 간부들의 입각을 요구해 왔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로마 무력점령을 강행했다. 이날의 긴급회의에서는 계엄령을 내려 무솔리니군을 저지하기로 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국왕이 계엄령에 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파스타는 사임했다.
10월 29일 국왕은 허약한 민주주의 정부 대신 `볼셰비즘으로부터 이탈리아를 구원`할 것처럼 보였던 무솔리니에 내각구성지시를 내렸고 무솔리니는 31일 수상이 되어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1924년의 총선에서 파시스트당은 65%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했고,1933년 무솔리니는 선거법을 개정, 독재로의 행진을 준비했다.
1919년 미국의회, 금주법 가결
1914년 종이 크로마토그래피를 개발한 영국의 싱 출생. 1952년 노벨화학상 수상
1913년 독일-터키 군사협정 체결
1912년 동경에서 유학생학우회 창립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발족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정동유니온클럽에서 창립 총회를 열었다. 꼭 100년 전 오늘, 참석자들이 헌장 초안에 만장일치로 서명함으로써 서울 YMCA가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창립 첫 회원은 미국·영국 등 6개국 37명으로 구성했다. 청년회 설립은 1899년 기독청년 150여명의 서명을 받아 언더우드·아펜젤러가 한국 YMCA 창설을 촉구하는 서한을 북미 YMCA 국제위원회에 제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설립 초기, 고종은 청년회를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와 유사한 정치단체로 생각해 내심 불안하게 생각했으나 곧 오해가 풀려 1908년 종로의 현 위치에 회관이 개관될 때는 황태자를 보내 축하해 주었다.
한국 사회에서 ‘청년’이란 말은 ‘청년회’가 처음 사용한 말이었는데 다른 단체가 너도나도 자기 명칭으로 삼으려 하자 청년회가 그 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정부에 진정서를 내는 해프닝도 있었다.
청년회는 선교활동에 힘을 쏟고 농구·스케이팅·배구 등 근대 스포츠를 도입하는 것 못지않게 민족 독립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06년 도쿄에 설립된 한국 YMCA는 2·8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됐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9명이 YMCA와 관계 있는 인물이었다.
1886년 ‘자유의 여신상’ 제막
‘자유의 여신상’ 제막 미국으로 옮기기 전 프랑스에 보관돼있는 ‘자유의 여신상’ 머리 부분.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때 영국을 미국 땅에서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나라다.
이 때문에 미국이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선물을 준비했다.
원래 이름은 ‘세계를 밝히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였으나 나중에 이름을 바꿔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이 됐다.
기금은 복권과 디너파티를 통해 모금됐고 젊은 조각가 바르톨디가 제작을 맡았다.
얇게 두드려 편 구리판을 철골 구조 위에 씌우는 방법을 채택했기 때문에 철골구조 설계는 이 분야에서 널리 알려진 에펠이 맡았다.
제작 10년 만인 1885년에 철골과 구리판을 분리해 뉴욕으로 옮겼으나 미국은 그때까지 받침대 공사를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받침대를 세우기 위해 벌인 모금운동이 제대로 성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받침대는 미국의 모리스 헌트가 설계했고 에마 나자루스의 14행 시 ‘새로운 거상’이 새겨졌다.
1886년 10월 28일, 1년간의 조립 끝에 46m 높이의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항 초입 리버티 섬에 제막됐다.
오른손에는 횃불을 치켜들고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의 날짜가 적힌 독립선언서 석판이 들려있었다.
1884년 YMCA 창립
기독교청년연합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YMCA는 구한말 개화파 청년들과 미국 선교사들이 주축이 돼 1903년 10월 28일 설립한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모태다. 초창기부터 YMCA의 멤버들은 근대적 사회개혁 의식에 고취돼 있었기 때문에 직업교육, 농촌운동, 기독교 민권운동에 정열을 쏟았다. YMCA는 체육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여 1905년 야구를 처음으로 보급했다. 이어 농구(1907년), 스케이트(1908년) 등을 이 땅에 도입했다. 1912년부터 일제가 ‘105인 사건’ 등으로 탄압을 시작했지만 1919년 2 · 8독립선언과 3 · 1운동을 선도했고 1922년부터 물산장려운동, 농촌강습소개소운동 등으로 자립 경제 운동을 펼치고, YWCA 및 보이스카우트, 신간회 등의 단체도 지원, 창설했다. 현재 서울YMCA는 회원 5만 명에 지회 15곳, 상근 직원 250명에 달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1837년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幕府)의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출생
1824(조선 순조 24)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태어남
1794년 프랑스 혁명가 당통(1759-1794) 세상 떠남
1707년 일본, 호에이(寶永) 대지진
1704년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 사망
1492년 콜럼버스 쿠바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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