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는 당시에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우리민족의 자주정신을 드러내야 겠다’ 는 반성을 가지고 중국의 위서(魏書)를 인용하고
그 당시 내려오던 정통사서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우리 역사의 뿌리를 전하고 있다. 그게 바로 <삼국유사> ‘고조선기’다.
魏書에 云 乃往二千載에
有壇君王儉이 立都阿斯達하시고
開國하사 號朝鮮하시니 與高同時니라.
<위서魏書>라는 책은 삼국시대 조조의 위나라의 왕침王沈이 쓴 책인데, 그책을 인용을 해서 우리 민족의 고대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삼국유사를 쓰신 일연스님의 높은 뜻을 잘 봐야 하는데, 결론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나라에는
“乃往二千載에 有壇君王儉이”,
단군왕검이 계셨다는 것이다.
“立都阿斯達하시고 開國하사 號朝鮮하시니 與高同時니라”
이 말씀의 결론은 누가 어디에 어떤 나라를 세웠느냐는 역사의 구체적인 건국의 주체와 나라의 수도에 대해서 선언을 하고 있다. 여기에 핵심이 다 들어 있다.
단군왕검이 계셨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했고, 그리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다.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때다 말이다.
古記에 云 昔에 有桓國하니(謂帝釋也)
庶子桓雄이 數意天下하야 貪求人世어늘
父知子意하시고 下視三危太伯하시니
可以弘益人間이라
乃授天符印三箇하사
遣往理之하시니라
古記에 云 昔에 有桓國하니
왜 일연스님이 다시 <고기古記>를 인용하냐면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한 것이다.
일연스님이 말했던 <고기古記>가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바로 신라의 선덕여왕 9년 안함로(安含老, 579-640)가 쓴 『삼성기(三聖紀) 上』과 세조실록에 금서로 기록된 원동중(元董仲)이 쓴 『삼성기(三聖紀) 下』 와
고려 말 수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역임한 행촌 이암(李嵒1297~1364)이 쓴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두문동(杜門洞) 72현 중 한 사람인 고려 말의 학자 범세동(范世東, ~ 1397)의 『북부여기(北夫餘紀)』와
중종中宗 15년 1520년 임금의 역사를 기록하는 찬수관(纂修官)이었던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太白逸史)』등의
다섯권의 책이 한권으로 묶인 『환단고기桓檀古記』책을 보면 이<고기古記>에 대한 모든 전적(前績)을 만날 수가 있다.
<고기古記>는, 옛날의 기록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조작했다고 하는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나왔던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일본이 환국을 뿌리 뽑아서 우리민족의 환국과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시켜버린 것을 보면 『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그들이 분명히 본 것이다. 1910년과 신해년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李沂,1848~1909)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유립 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1960년대 전후로 해서 “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이유립 선생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청주에 살았었다.
양종현씨는 19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 『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19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 『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환단고기』 원본 분실에 대해 제자 양종현씨는 "이유립 선생이 1976년 의정부에 거주할 당시 박창암 장군의 배려로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 군산에 사는 종친인 이공빈이 운영하는 병원(공안과)에 5일간 머무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세를 5개월 정도 밀린 상태에서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 알고서 책을 모두 팔아 버려 이때 초간본도 함께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립 선생이 초간본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조병윤이 1979년 이유립의 허락 없이 교정이 안 된 오형기 필사본을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하여 광오이해사에서 100부를 출간하였다. 이로 인해 조병윤은 파문당하고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가 이미 세상에 나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며 그해 10월 광오이해사본을 교정한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미루다가 1983년도에 배달의숙본을 발간하게 된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들을 돌이켜 보라.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지 않았는가. 주역(周易)은 태호 복희씨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덕경은 왕필이 덕경과 도경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동양의학의 성서인 황제내경은 황제 헌원을 가탁하여 전국시대를 거쳐 한 대에 성립되었고, 불교의 화엄경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합쳐진 것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다섯 권의 역사서가 천 년에 걸쳐 쓰인 사실과 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태백일사가 나온 지 400년이 지나 환단고기가 묶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다.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선생의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李陌(1455~1528)선생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가 있다.
식민사관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된 <다물(多勿)> 147∼152 쪽입니다.
박기자 : 좋습니다. 그럼, 식민사관의 정의부터 말씀해 주세요.
임성국 : 1981년 <다물>지 12월호에 최만주 선생이 손수 쓰신 '식민 사관이란 무엇인가'하는 권두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정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기자 : 임 선생님, 그런데 저희 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해방된 지 40(현재 약 80년)년이나 되도록 그야말로 식민사학자들이 사권(史權)을 휘어잡고 독립된 대한민국 땅 안에서 그처럼 활개를 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성국 :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민족 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박은식, 신채호 같은 분은 이미 일제의 탄압으로 타계한 뒤였고 그 뒤를 이은 사학도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이러한 독립 투사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 사학계에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나 일제가 정책적으로 식민사관의 나팔수 즉, 일제의 주구로 길러낸 친일 사학자들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족 사학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중국 북경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정인보 선생이었습니다.
이병도 따위는 정인보 선생 앞에서는 인격에 눌려 제대로 氣도 못 펴고 쩔쩔매는 판이었습니다.
정인보 선생과 이병도씨는 말하자면 해방된 한국의 사학계의 양 거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총독부의 조선사 날조에 적극 가담했던 친일 사학자요, 또 한 사람은 독립투사요 철두철미한 민족 사학자였으니 두 사람의 학설은 사사건건이 대립할 수 밖에 없었죠.
이 팽팽한 대립이 그대로 어느 정도 계속되었더라면 이병도가 서울대학에서 양성한 제자들과 정인보 선생이 연세대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거의 비등한 숫자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정인보 선생은 6·25때 괴뢰군에게 납북되어 가시는 바람에 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당 최남선씨가 있었지만 그분은 일제 때 일본에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에 걸려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죠.
그러니까 대항할 만한 적수가 없어지자 이병도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서울대라는 명문 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내게 되었고 그 제자들로 구성된 학회의 회장과 한림원 원장까지 맡게 되자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병도씨는 그 때까지도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계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그의 승락이 없이는 대학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임 강사 자리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한국을 일제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한국 역사를 위조했습니다. 그 위조한 역사를 한국민들에게 강제로 반복 교육함으로써 일제의 침략 정책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여 한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성을 완전 거세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어지도록 획책한 것이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시키는데는 꼭 필요한 구성요건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상고사(上古史)와 국조(國祖)의 부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만주를 지배했던 상고시대의 역사를 아예 쏙 빼버리고 국조인 단군과 그 윗대의 환웅과 환인 시대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시작을 '위만 조선'과 거짓으로 꾸며낸 '한사군'에 맞춤으로써 '고조선의 건국 이념'도 '국조'도 '장구한 역사'도 없애 버릴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소위 한사군 즉 중국 한족(漢族)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대에 역시 거짓으로 꾸며낸 일본 통치부(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상륙했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는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운 일도 없었고, 고유문화도 없었고, 한반도는 주인없는 미개지였던 것처럼 조작하여 침략자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압축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발해와 통일 신라가 양립했던 우리 민족의 남북조 시대를 대동강 이남으로만 줄여버리고,
대륙에서 흥망했던 고구려와 대진(大震,발해)의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사에서 아예 없애 버리고,
고구려와 대진(발해)의 뒤를 이은 대금, 대청을 말갈 또는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아닌 것처럼 꾸며내어 대금, 대청과 그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의 활동사에서 제거하려는 논리로, 우리 민족사를 대륙에 기반을 둔 강대국이 아닌 대동강 이남만의 반도내의 소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음모입니다.
셋째로 우리 민족은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병도의 전국유이민(戰國流移民)설)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예컨대 삼국사는 민족 분열, 동족 상잔의 역사이고, 고려사는 기강없는 음탕한 역사이고, 조선사는 탐관오리, 사색당쟁으로 일관한 망국의 역사로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뿌리도 임자도 없었던 근본부터가 중국, 한(漢)의 식민지였던 나라,
둘째, 반도 안에 움추린 채 기를 못폈던 약소국,
셋째, 예로부터 피정복민인 무능하고, 부패하고, 분열하고, 민족 상잔의 망국 근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스스로는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정체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미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할 능력도 없는 한갓 고깃덩어리가 열강의 침략 야욕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동양 평화를 유지할 사명을 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거나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이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행복도 증진시킬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일제 식민사관의 골자입니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은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첫단계로 역사 정복(식민사관), 둘째로 종교 정복(민족종교 탄압 신사참배 강요), 셋째로 국어와 한글 정복(일어를 강제로 사용케하고 한글을 못 쓰게 함), 넷째로 전통 정복(창씨 개명)을 총독부의 정책으로 강행했습니다.
대략 위와 같은 식민 통치 각본의 원전이 바로 다름아닌 식민사관으로 위조된 조선사입니다.
이 가짜 조선사는 모두 6편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하고 신라통일 시대를 제2편, 고려 시대를 제3편,
조선 시대를 제4, 5, 6편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 역사의 역점이 안팎으로 교묘한 짜임새를 보여 주고 있는데에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근세와 근대사의 중요성이라는 미명으로 조선 왕조사에 역점을 둔 것은 실상 반도 속에 움추려 기를 못 폈던 반도속방사관(半島屬邦史觀)을 주입시키려는 음모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병도씨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서 이러한 고대사 날조 작업의 주역으로 관여했던 사실은 우리 사학계가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사학계 현역 교수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하생들로 단단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 정예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일제의 식민 사관을 철저히 답습하였는데, 이병도의 진두 지휘하에 식민사관에 중독된 사람들을 하루 빨리 재교육시켜 진정한 민족 사학자로 재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최만주 선생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든 초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삼국유사> ‘고조선기’ 를 번역본으로 실어놓고서 다 부정하는 것이다.
將風伯 雨師 雲師하시고
而主穀 主命 主病 主刑 主善惡하시며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하사
在世理化하시니라
時에 有一熊一虎가 同穴而居러니
常祈于神雄하야 願化爲人이어늘
時에 神遺靈艾一炷와 蒜二十枚하시고...
여기에 보면 “時에 有一熊一虎가 ... 願化爲人이어늘”, ,
우리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이 ‘일웅일호一熊一虎’인데. 최면이 걸려서 그렇게 해석을 하는지.
저 시베리아, 북만주, 남북 아메리카 땅, 그리고 일본 북해도에 가보면 아이누 민속촌이 있다. 거길 가보면 곰토템을 섬기는 그런 문화가 있다. 그런데 지구촌 그 어떤 사람도, 한국인 이외에는 일웅일호(一熊一虎)를 한 마리 곰과 호랭이로 해석을 하는 사람이 없다.
맹호부대가 월남에 파병 갔다면 그사람들은 호랑이가 파병간 것으로 해석할 사람들이다. 그들 말대로 진짜 동물로서의 호랑이와 곰이라면 백두산 호랭일 것이다. 마늘 쑥을 주면서 백일 동안 태양빛을 보지 말고 수행을 해라.
동물이 사람이 된다는 것도 그렇지만 호랭이가 소처럼 풀뜯어 먹는다는 소리는 이건 애초부터 그렇게 해석을 하면 신화로도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구조가.
이 내용이 원동중의 <삼성기> 下 에 “웅호이족(熊虎二族)” 이렇게 나와 있다.
일웅일호(一熊一虎)라고 하는 이 대목의 글자는 똑같은데 구체적으로 “웅호이족(熊虎二族)”, 웅족과 호족이라는 것이다. 이 웅족과 호족중에 한사람씩 와서 저희도 천지의 광명을 체험한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서원을 한 것이다. 한마리 곰과 호랭이가 사람이 되겠다고 서원한 것이 아니라, 곰(熊)과 호랑이(虎)를 토템으로 하는 웅족과 호족이었다. 진짜 동물이 아니다.
한국의 신선 사상은 신라의 화랑도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도 그 명맥이 살아 있었지만 고려에 들어서는 크게 쇠퇴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에 와서는 조선 단학파로 이어져 많은 신선들을 배출하였다. 고운 최치원(857-?)은 이러한 한국의 신선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로도 유명한데 고려 이전까지 가장 많은 글을 남겨놓은 사람이다.
신라에 돌아와 왕명으로 편찬한 네 신선들의 전기를 기록한 《사산비명四山碑銘》, 그리고 기타 다양한 여러 글들을 모은 《고운문집孤雲文集》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학자이자 관료, 정치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명성은 중국 사서인 《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 그의 저서가 소개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에 의하면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 20권이 있다고 하였다. 《사륙집》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니 유교경전을 통달했던 것은 물론이고 불교에 대해서도 무척 해박하였는데 《四山碑銘》을 비롯하여 그가 쓴 여러 고승들의 전기에서 잘 드러난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16년을 살다가 28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그는 신라에 온 후 그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옛적부터 있었고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면서 유불선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 하였다. 당시 《선사仙史》라는 책이 있었는데 거기에 풍류의 원천에 대한 서술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청학집》에는 우리나라의 신선도는 환인(桓仁)으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환웅과 단군을 거쳐 후대에 전해졌다고 한다.
《삼국사기》 물계자勿稽子전)에 의하면 진평왕 때의 선인인 대세와 구칠, 그리고 후대의 불교승려 도선과 원효, 그리고 최치원 역시 물계자 유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고려 중기의 시인 이규보는 우리나라의 선풍仙風은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고유의 것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학자 이규경에 의하면 최치원은 중국에서 귀국해서 그의 외삼촌인 현준으로부터 수련법을 배웠다고 한다.(《五洲衍文長箋散稿》 2권 경사편, 도장류) 그 수련법을 ‘가야보인법伽倻步引法’이라 하였다.
‘성통광명性通光明’을 향한 수련과정은, 전통적인 선가仙家에서 전하는 개념으로 말하면, 소주천小周天과 대주천大周天이 핵심이다. 여기에서 주천周天이란 축자적逐字的으로 궤도를 따라 한 바퀴 돈다는 의미다. 몸에서 궤도는 바로 맥脈을 일컫는데, 소주천은 생명의 진기眞氣를 몸 안에서 맥을 따라 한 바퀴 돌린다는 뜻이고, 대주천은 몸 안의 진기를 우주자연의 기운과 소통하여 한 바퀴 돌린다는 뜻이다.
소주천의 맥은 크게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으로 구분되고, 대주천의 맥은 충맥衝脈이다. 소주천의 수련은 몸 안의 ‘임맥’과 ‘독맥’을 뚫어 생명의 원동력인 진기, 즉 양陽의 기운과 음陰의 기운을 끌어 모아 반복적으로 순환시키는 것이다. 그 목적은 생명의 진기眞氣를 하단전下丹田에 축적하여 정단精丹을 형성하고, 이로부터 광명한 ‘도의 성태’, 즉 ‘도태道胎(나의 분신체, 또다른 나)’를 만드는 것이다.
반면에 대주천의 수련은 ‘충맥衝脈’을 뚫어 정단에서 생겨난 ‘도태(道胎,나의 분신)’를 위로 끌어 올리면서 중단전과 상단전을 열고, 백회를 열어 몸 안의 생명의 진기와 천지기운을 소통시키는 것이다.
소주천이든 대주천이든 수련의 근본은 호흡이다. 왜냐하면 호흡은 생명의 진기를 끌고 다니는 결정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즉 삼신의 경계에서 나오는 순수의식은 호흡을 통해 몸을 감싸고 있는 생명의 음양기운, 즉 들숨으로 양의 기운을, 날숨으로 음의 기운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호흡의 방식은 의식적인 상태에서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의식의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하는 진식호흡眞息呼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호흡을 통해 이동하는 음양기운의 부조화不調和로 우주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가장 정밀하고도 민감하게 작동하는 자율적인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몸에서 ‘임맥’과 ‘독맥’을 뚫어서 생명의 진기를 반복적으로 순환시킴으로써 하단전에 정단을 쌓고, ‘도태(나의 분신체)’를 만드는 소주천의 수련에 대해 알아보자.
소주천에서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은 생명의 진기가 위와 아래로 흐르는 통로이다. 즉 임맥은 땅의 기운이 모이는 음맥陰脈이지만, 양의 기운이 위에서 배꼽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다.
이는 머리 정수리 부분의 백회百會를 기준으로 몸의 앞쪽에서부터 배꼽 아래의 하단전을 지나 회음會陰에까지 이른다. 반면에 독맥은 하늘의 기운이 모이는 양맥陽脈이지만, 음의 기운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통로다.
이는 회음에서부터 몸의 등 뒤쪽을 타고 머리의 백회에까지 이른다. 소주천의 수련과정은 우선 임맥과 독맥을 ‘뚫어내는 것’이 관건關鍵이다. 수련방식은 순수의식에서 따스한 느낌이 드는 양의 기운을 회음會陰으로 향하게 하여 아래의 하단전에 밀어 넣는다고 생각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차가운 느낌이 드는 음의 기운을 백회로 향하게 하여 머리의 상단전에 밀어 넣는다고 생각하면서 숨을 내쉬는 것이다.
몸 안에서 생명의 진기를 내리고 올린다는 생각으로 진식호흡을 반복적으로 수련하게 되면 임맥과 독맥이 자연히 뚫리게 된다. 임맥과 독맥이 뚫리면 음양의 생명기운은 몸의 위아래로 한 바퀴 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들숨과 날숨을 통해 음양의 생명기운이 독맥을 타고 백회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임맥을 타고 내려와 회음으로 되돌리는 것이 소주천의 수련이다.
소주천의 수련을 집중적으로 거듭하게 되면, 하단전이 어느 순간에 열리게 된다. 하단전이 열리게 되면, 들숨을 통해 회음으로 향하는 양의 기운이 하단전에 점진적으로 쌓이게 되는데, 이것이 쌓여 강하게 뭉치게 되면 하단전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순양지기純陽之氣라 한다. 반면에 날숨을 통해 음의 기운이 회음을 거쳐 독맥을 타고 위로 올라가 백회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점차 쌓여 강해지면 머리가 시원해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순음지기純陰之氣라 한다. 이 과정을 선가에서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고 하는데, 이는 임맥을 통해 양의 기운인 뜨거운 불[火] 기운을 아래로 내리고, 독맥을 통해 음의 기운인 차가운 물[水] 기운을 위로 올리는 수련이다.
소주천의 수련을 더욱 집중하여 그 과정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열려 있는 하단전에 자연적으로 생명의 진기가 점차 모이게 된다. 왜냐하면 날숨과 들숨을 통해 하늘의 양陽 기운과 땅의 음陰 기운이 하단전에서 만나 음양의 생명기운이 쌓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점차 뭉치게 되면 바로 정단精丹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정단精丹이 형성되어 굳건하게 쌓이고 커지게 되면, 거기에서 ‘도태道胎’가 성태成胎하여 점차 자라나기 시작한다. 소주천의 수련 중에 오묘하고 야릇한 기운이 하단전에 꾸물거리는 느낌은 바로 이를 말해주고 있다.
다음으로 충맥衝脈을 뚫어 하단전에 형성된 ‘도태’를 위로 끌어 올리면서 중단전과 상단전을 열고, 백회를 열어 몸에서 생명의 진기와 천지기운이 상호 소통하도록 하는 대주천大周天에 대해 알아보자. 몸에서 천지기운과 상통하는 생명의 중심축은 충맥이다. 충맥은 머리 부분의 백회에서 척추 안쪽에 회음에까지 수직으로 연결된 통로이다. 충맥을 뚫어야 생명의 진기가 몸 밖의 천지기운과 상통할 수 있다.
충맥을 뚫는 수련방식은 순수의식에서 정수리 부분의 백회에서부터 하단의 회음에까지 하늘 기운을 내 몸의 중심을 통해 수직으로 쭉 내린다고 생각하면서 숨을 빨리 들이마시고, 반대로 숨을 내쉴 때에는 하단전에서 회음을 거쳐 백회에까지 수직으로 쭉 끌어 올린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내쉬는 것이다.
대주천의 수련 중에 시천주侍天主 주문과 태을주太乙呪를 송주誦呪하면서 집중하여 반복적으로 수련하게 되면, 절정의 순간에 순수의식은 광명으로 이루어진 빛줄기가 하늘에서 번개처럼 내려와 머리를 강타하여 백회를 뚫고 들어오고,
충맥을 따라 회음에까지 쭉 내려감을 직감하게 된다. 이것이 천지기운의 문을 열고 충맥이 뚫리게 되는 과정의 표징表徵이다.
충맥이 뚫리면, 정단에서 성태成胎하여 자라난 ‘도태’는 하단전을 열고 나와서 충맥을 통해 충천衝天하여 중단전과 상단전을 열게 되고, 백회를 뚫고 나와 지나 머리 위에 있게 된다. 이로써 음양의 천지기운과 몸 안의 생명기운이 상호 소통하는 주천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대주천이다.
대주천에서 중요한 것은 충맥을 통해 올라가는 ‘도태’가 중단전과 상단전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태’가 올라가면서 가슴 부분의 중단전을 열게 되면 진명眞命이 기화氣化하게 되고, 머리 부분의 상단전을 열게 되면 진성眞性이 신화神化하게 된다. 상단전의 ‘진성’이 신화하면 ‘신이 통하게[神通]’ 되고, 중단전의 ‘진명’이 기화하면 ‘기가 통하게[氣通]’ 된다. 한마디로 ‘신통’과 ‘기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의 생명으로 태어날 때 몸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었던, 그래서 서로 만날 수 없었던, ‘원신’과 ‘원기’가 서로 만나게 된다. 내 몸에서 ‘원신’과 ‘원기’가 온전하게 서로 만나게 되면, 이는 몸을 구성하는 ‘성명정’ 삼진이 소통하여 생명의 본원本源인 ‘하나’로 만들어질 수 있음을 함축한다.
몸에서 ‘원신’과 ‘원기’가 만나면 ‘성명정性命精 삼진三眞’은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지는가?
이는 ‘삼신三神’이 내려와 ‘성명정’의 세 손길로 변전變轉하여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에 자리를 잡았던 것을 상기想起하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의 본원은 안으로는 ‘원신元神’이요 밖으로는 ‘원기’로 표현되지만 사실 ‘하나’의 동체同體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생명의 본원은 내면적인 ‘형形’으로 말하면 광명光明으로 불리는 ‘원신元神’이고, 외면적인 ‘질質’로 말하면 살아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불리는 ‘원기元氣’로 분석되지만, 양자는 사실 우주생명의 본원으로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은 “일기一氣란 안으로 삼신三神이 있고, 삼신이란 밖으로 일기一氣가 싸고 있다(一氣者內有三神 三神者外包一氣)”고 정의한 까닭이다. 그런데 우주생명의 본원은 하나의 동체로 ‘영원히 살아 있는 광명한 신’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귀리發貴理는 “송가頌歌”에서 “대허에 광명이 있음은 신의 형상이요, 대기가 오래도록 살아 있음은 신의 변화이다(大虛有光 是神之像 大氣長存 是神之化)”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광명한 신’은 본연의 하느님 마음[性]을 상징하는 표현이고, ‘영원히 살아 있음’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命]을 상징하는 표징이다. 그래서 몸에서 ‘원신元神’과 ‘원기’의 만남은 곧 ‘성명정’ 삼진이 통일하여 ‘하나’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히 살아 있는 광명한 신’으로의 복귀復歸라는 의미에서 ‘성통광명性通光明’의 경계이다.
대주천의 수련은 곧 몸에서 ‘충맥’을 뚫어 ‘성통광명性通光明’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통광명’이 돼야 우주와 자신이 하나 되는 진정한 의미의 대아大我, 진아眞我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 도교의 전진도全眞道에서 소위 ‘성性’과 ‘명命’을 동시에 진정으로 닦는다[성명쌍수性命雙修]는 슬로건은 결국 삼진을 ‘하나’로 만들어 ‘성통광명性通光明’이 됨을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과 ‘명’을 동시에 닦는 수련은 몸에서 ‘원신’과 ‘원기’를 온전하게 보존하여 본연의 생명으로 돌아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불선삼교합일儒佛仙三敎合一의 내단설內丹說을 주창한 도교의 이도순(李道純, 1219~1296)은 “이른바 전진이라는 것은 본래의 참됨을 온전히 하는 것이다.
정精을 온전히 하고 기氣를 온전히 하며 신神을 온전히 하는 것을 모름지기 전진全眞이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곧 온전함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오염이 있으면 곧 참됨이 아니다(所謂全眞者 全其本眞也. 全精 全氣 全神 方謂之全眞 才有欠缺 便不全也. 才有點汚 便不眞也)”(李道純, 『中和集』 권3 『全眞活法』)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정기신精氣神’을 온전히 하는 수련 또한 결국 ‘성통광명’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대주천의 수련으로 ‘성통광명性通光明’이 되면 삼신三神이 작동하는 무궁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즉 중단전이 열려 ‘명命’이 기화되면, 기화된 생명의 진기가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 밝은 기운이 열리면서 우주에 꽉 들어차 있는 지기至氣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고, 우주의 바탕인 ‘무궁한 조화성령의 바다에 함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상단전을 열려 ‘성性’이 신화되면, 신단神丹이 열리고 모든 잡념이 끊어지면서 우주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순수의식경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곧 밝은 신도차원의 영적靈的인 의식, 즉 순수의식은 대광명의 신도에 들어가 만물의 순수감성과 신성을 보고 들어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소위 총명도통聰明道通이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