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4 성공과 회복원칙(14)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져라 [고후4:7-11]24.4.7 주일1부-3부설교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말은 '천편일률 (千篇一律)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그것은 ‘예수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에도 똑같이 예수를 말하였고, 한 달 전에도 예수를 말하고, 일 년 전에도 예수만 말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좀 더 다양한 콘텐츠로, 획기적이고, 고 퀄리티의 정보와 지식을 듣고 싶은데 매번 목사의 설교는 고리타분하게도 ‘예수 이야기’만 전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정치적인 현안, 새로운 과학의 발전정보, 돈이 되는 이야기 등등 귀가 자극을 받을만한 들을 만한 이야기를 해 주면 얼마나 좋으련만 목사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항상 ‘예수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너무 퇴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계두 목사가 왜 줄기차게 ‘예수 이야기’만 하는 이유를 사도행전을 근거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운명하실 때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너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예수를 보면서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난 3년간 예수를 쫒아다닌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과학으로도 상식으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가 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을 이론에서 체험으로 변화시키게 됩니다.
수많은 이론과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한 번 하나님을 체험한 것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다시 충만함을 얻고 보니 더욱 확실시하게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부터 5장 사이에서 제자들은 자신이 체험한 예수를 말합니다.
1)사도행전 2장 32절-33절에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2)사도행전 2장 36절에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사도행전 2장 38절에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4)사도행전 3장 6절에서 – 성전 미문가의 나면서 못 걷는 사람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5)사도행전 4장 17절-20절에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제사장들이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협박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담대하게 예수를 전합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6)사도행전 5장 28절-33절에 사도들과 제자들이 예수를 전함을 박해하고 옥에 가둡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7)사도행전 5장 40절-42절에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예수를 체험한 사람 시몬이 변하여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는 것입니다.
맛있는 요리를 앞에 두고 그 맛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먹어보지 않고는 그 맛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멋진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와도 실제로 가서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이론적인 설명을 아무리 듣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막힌 신앙의 이야기를 한다 해도 체험해보는 것보다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일 때 주동자였습니다. 그가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불빛 중에 임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가?’ ‘뉘십니이까?’ ‘내가 너를 나를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님의 환상을 직접 보고 거꾸러져서 기독교 역사상에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새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을 체험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깊은 체험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1.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져라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면 살아있는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까? 예수를 죽인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악입니다.
또 우리 삶 속에 있는 정신적인 불안, 공포, 절망, 미움, 파탄, 답답한 마음입니다. 폐병, 심장병, 신장병, 암 등도 포함됩니다. 나아가 우리 인생에 헐벗고 굶주리고 괴로운 삶을 사는 고통스러운 삶 등이었습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없었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람을 멸망시킬 죄가 횡행하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을 건지러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부정적인 것하고 싸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것을 대적해서 싸워야 우리를 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인 것을 우리가 알고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나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산 생명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깨닫는 것이 참 힘듭니다.
내가 예수 죽인 것을 같이 짊어지면 예수 살린 것이 내 몸에 역사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못 되는 것을 예수님이 짊어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끌어안으면 영혼이 잘못되게 하는 것을 끓어안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와 일체 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은 것을 우리가 그대로 다 짊어짐은 예수와 똑같이 죽음에 동참하게 되고 예수 동참하게 된 그 속에서 똑같이 예수 부활하는데 같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절대로 체험할 수 없습니다.
삶의 위기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문제와 싸워보기도 전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골리앗을 보고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4절에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이 마음을 사로잡자 싸워보기도 전에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목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사무엘상 17장 37절)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침략해 올 때 다른 사람들은 다 기절초풍을 했는데도 다윗은 “무슨 소리 하는거냐? 곰과 사자도 내가 잡았는데 무얼 두려워하겠어!”라는 체험적인 신앙으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7장 21절에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체험하면 두려움을 이기고 믿음이 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개 힘이 없고 약하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로마제국이 거꾸러졌습니다.
힘이 없어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까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의 권력자들 앞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사도행전 4장20절)라고 전합니다. 사도들이 그처럼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보고 들었기 때문에, 즉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면서 교회 왔다 갔다 하더라도 체험하지 못하면 하루에도 열두 번 믿었다가 안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예수님 흔적을 만나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예수님 믿는데 대해서 조롱을 하더라도 그 조롱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화]
미국 모자이크교회를 담임하는 어윈 맥매너스 목사님은 자기 교회에 관한 책을 썼는데 제목이 ‘멈출 수 없는 힘’입니다. 책 제목이 말해 주듯이 초대교회는 수많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물고기 잡는 사람, 세금 징수원 등 사회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거의 전부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수많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는가? 하면 그들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떻게 체험했느냐? 예수님 세상 뜨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할 때 오순절 날에 하늘에서 성령이 임하여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모두 다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서 온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을 뿐 아니라 성령이 오신 증거로써 자기가 배우지 않은 방언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하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상상 생각 속에서만 믿은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말로 목욕하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들 입으로 그들은 죽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 일천만 성도들이 모두다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한국이 바짝 뒤집혀질 것입니다.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하니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같이 하심을 전할 수 있어서 한국교회가 달라지고 한국사회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지식으로만 알았던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피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을 가질 때 고난과 괴로움을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깊은 체험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2.오중복음을 적용하라
우리는 예수님이 짊어진 우리의 짐을 보고 예수님을 더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5장 21절)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짊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부정적인 세력은 예수님이 다 짊어졌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우리가 끌어안으면 생명이 예수님으로부터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짐을 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생활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전부 다 우리 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짐을 지셨기에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면 끝까지 잘 달려서 마침내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위기를 당할 때 부정적인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자서전을 보면 그의 선교 사역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부정적인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모든 상황이 내게는 불리하고 부정적인 것이라고 투정했던 생각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내버려두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됩니다.
그러다 결국 ‘할 수 없다, 안 된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이기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자기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기 자신에게 말을 겁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편 5절)
자기 스스로를 향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격려를 한 것입니다.
저는 자기가 자기를 보고 격려하는 말을 대단히 많이 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몸이 건강이 좋지 못하면 늘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전목사야!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음을 입었다. 너는 건강하다. 예수님 채찍에 맞음으로 너는 나았다. 두려워말라.’ 라며 날 보고서 하나님 말씀으로 나에게 격려를 하고 나면 온 몸이 후끈해지면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믿음의 힘을 얻어 건강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낙심하는 것입니다.
낙심하면 기도조차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향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한일서 4장 4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장 57절)
자기 자신을 격려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깊은 체험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3.나는 질그릇이지만,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심을 믿자.
성경은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흙에서 빚어진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를 담아 놓은 질그릇입니다. 예수님은 보배중의 보배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담고 있는 질그릇이므로 얼마나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질그릇이 귀중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예수님이 보배이기 때문에 질그릇을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때문에 우리를 멸하려고 하는 여러 가지 험한 일들이 다가와도 종국적으로 우리를 멸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한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무엇도 그분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조차도 멸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누가 예수그리스도를 이기고 그리스도 품에 안겨있는 우리들을 흔들거나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험하고 심한 광풍이 아무리 불어와도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예수님은 광풍을 피하는 안식처가 되십니다. 폭우가 내려와서 온 도시가 물에 잠길지라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면 폭우를 가리 우는 자가 될 것이고, 메마른 땅에서 의지할 곳이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메마른 땅에 냇물이 되어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고달픈 곳에서 유일한 바위 그늘이 돼 주셔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성경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성경에는 “두려워 말라”는 말이 365번이나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365일 매일 한 번씩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질그릇이지만,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니 죄가 와도 두렵지 않고, 허물이 와도 두렵지 않고, 병이 와도 두렵지 않고, 저주가 와도 두렵지 않고, 죽음이 와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형식적으로 종교인으로써 의무만 하지 말고 참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죄와 허물, 질병과 저주 그리고 죽음으로 우리를 우겨싸서 위협하고 있으나,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을 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모든 것들을 다 청산해 버리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죄와 허물의 종, 질병과 가난의 종, 낭패와 실망의 종, 고통과 죽음의 종이 되어 끌려다니는 마귀의 종노릇은 이제 끝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를 붙들고 마음에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악착같이 붙드십시오! 피 흘리신 공로를 악착같이 붙드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항상 승리자로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장 8절-10절을 다시 읽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다같이 찬양 –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마가엘165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