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물줄기가 이스라엘을 왕정시대로 접어들게 하는 때가 구약성경 사무엘上의 배경이 된다. 대하드라마 같은 민족적인 역사의 서술에서도 한 사람이 중요하다. 무명의 한 사람, 초라한 여인에 불과하지만 한나의 간절한 서원기도는 영도자 사무엘을 낳게 만들었다. 그 사무엘의 시대에 나라의 기반은 약하지만 영적인 전성기를 이루고, 민족중흥을 이끌었다. 그때 백성들은 주변 인접국가의 부흥성장과 비약적인 경제발전은 왕정 정치에 있다고 굳게 믿고 사무엘에게 줄기차게 “우리도 왕을 모시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나님은 왕으로서의 하나님 자신을 버리는 일이라고 서운해 하시지만 사무엘을 통해 ‘왕의 제도’를 알려주시고 백성들에게 그들의 왕을 허락하셨다. 그래도 어린아이처럼 좋다고 환호성을 지르는 백성들은 사울을 왕으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길르앗에 살고 있는 야베스 사람들 앞에 어느 날 암몬 왕 나하스가 맞서 진을 쳤다. 야베스 사람들은 “약조를 맺으면 시키는 대로 하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하스는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전갈을 보내온다.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약조하리라. 내가 이스라엘을 이렇게 모욕할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야베스 지도자들은 “일주일만 말미를 달라. 이스라엘에 구원요청을 보내보고 답이 없으면 왕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밭에서 소를 몰고 오던 사울은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크게 분노했고, 이스라엘 전 지역에 전령을 보냈다.
전령들의 손에는 소를 잡아 각을 뜬 고깃덩어리를 보내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이 모양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 30만 명, 유다 사람이 3만 명이 소집됐다. 이튿날 사울은 군사를 3대로 나누어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쳐들어가며 기습공격을 펼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암몬사람들은 혼비백산 꽁무니를 내빼기에 바빴다. 둘도 함께하지 못했다고 하니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게 됐다. 사울 왕이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승전보를 전하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한 것이 왕으로서의 첫출발이었다.(삼무엘上11:11~15) 이 전투로 목숨을 건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 왕을 ‘은인 중의 은인’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전투의 대승으로 사울 왕은 멋진 대관식을 치르고, 백성들 가운데 명성이 자자하게 됐다. 이렇게 사울 왕의 첫출발은 순탄했으나 갈수록 그의 왕권은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이 인기가 올라가자 사위를 삼는다는 명분으로 그를 죽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또 정예부대 3천 명의 특수부대를 거느리고 다윗의 은신처를 추격하면서 시간을 낭비했다. 안으로는 백성에게 명망 있는 다윗을 죽이려고 힘을 쏟고, 밖으로는 적국들과 전투를 벌여야하니 내우외환이라는 말이 사울 왕에게 딱 맞는 옷이었다. 내우외환의 의복을 입고 어찌 잘 될 것인가. 결국 블레셋과 벌어진 길보아 산의 전투에서 사울 왕이 패전했다.
사울 왕과 왕자들의 시신은 옷이 벗겨지고 참수됐다. 사울 왕의 머리는 잘린 채 블레셋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웃음거리가 됐다. 사울 왕과 왕자들의 시신은 벧산 성벽에 못 박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 중 힘센 장정들이 밤새 달려가서 사울 왕과 왕자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가지고 메고 돌아왔다. 그리고 화장한 뒤 그 뼈를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한 뒤 7일을 금식하며 애곡했다. 이처럼 은혜를 입고 되갚을 줄 알았던 야베스 사람들은 이해타산을 철저히 따지고 계산기를 굴리는 현대인들에게 말없는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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