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6-14 믿음과 영접
(요 1:6-14)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문은 어떤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가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고 있어서 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성경을 아는 자들에게는 알게 되어 있는 것이고, 모르는 자들에게는 절대 모르게 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말하고 있지만 알고서 성경을 말하는 사람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을 말하는 사람은 엄연히 분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라고 해서 모르면서 무조건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있거나, 교인에게 알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면 이는 비극일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아는 자들은 성경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한다는 그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 용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그렇게 마구 떠들어 대지를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을 모르는 사람같이 되어버리고 오히려 모르는 사람들이 담대하게 성경은 이렇다 라고 강조하다 보니까 자연히 그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어서 많이 아는 사람 같이 되고 또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몇 가지 주제로 생각을 해 볼 수 있는데......
주제는 사람들이 왜 빛을 모르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우리가 많은 갈등을 하고 괴로움을 겪습니다마는 빛을 모른다는 말은 빛을 모른다고 하기 이전에 어두움을 모른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두움의 실체를 깨닫는 사람만이 빛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의 실체와 상황을 깨닫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빛의 필요성도 역시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두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빛의 입장에서 쓰는 단어지 어두움 자체 속에서는 어두움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빛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두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만이 어두움을 말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성경의 빛을 아는 자들만이 어두움을 논할 수가 있는 것이지, 어두움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왜 너희들은 빛에 대해서 관심이 없느냐 라고 말한다면 마치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너희들이 왜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느냐고 하는 말과 똑같은 겁니다. 공기 속에 사는 새들이 왜 공기의 필요성을 느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세계로 인정을 해 주어야 합니다. 또 어두움의 세계도 그들 나름 대로의 고향이고 안식처고 그들을 충족시켜주는 행복의 요람이라고 봐줘야 한다는 겁니다.
단지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서 빛을 맛본 다음에 어두움을 생각할 때 빛의 입장에서 어두움이 안타까운 것이지 어두움 자체 속에서는 결코 안타까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두움 그 자체가 만족인데 무슨 안타까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 내용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빛의 입장에서 어두움에서 빛으로이지, 어두움의 입장에서 빛으로 가자! 가 구원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오늘날 멧세지가 잘못된 것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이 다시 말하면 빛을 모르는 자들이 배운 어두움을 말하면서 이 어두움 가운데서 벗어나야 된다. 라고 말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공기 속에서 사는 새들에게 너희들은 상층권 밖에 공기가 없는 세계로 가야 된다는 얘기 하고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먼저 어두움의 세계를 알고 어두움의 세계를 인정을 해 줘야 합니다. 우리도 어두움의 세계에 있을 때 그것이 어두움이라고 생각을 못했거든요. 우리가 알지 못한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라 라고 강요 하는 것은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얘깁니다.
단지 빛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빛의 상태 가운데 사는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줄 때에 그 사람들이 상황적으로 빛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 내용적으로 빛을 좋아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빛이라고 하는 것을 알리고 전도하는 것은 강요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단지 우리의 삶이 빛 속에서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요1:1절부터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런 것들을 우리들은 부정적으로 봅니다. 에이! 어두움이 빛을 왜 모르는가? 그럽니다.
야! 어두움들아 빛을 좀 알아라!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알지만 깨닫(카타람바노)지 못하더라 가 당연한 얘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들의 세계를 이해해주지 못하면 그들도 우리들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자기의 세계를 고집하고 주장하다가 끝난단 얘깁니다. 설득이나 감화라든지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 세계 속에서 그들의 세계가 그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에 그들 세계와 우리들의 세계를 비교해 가지고 너희들이 볼 때 이런 세계도 있는데 어떠냐 라고 말할 때 그들이 빛에 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을 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당연한 애깁니다.
그 다음에 10절의 말씀인데,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이 말씀 또한 우리가 부정적으로 보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무지한 백성들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피조물은 창조주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칙입니다.
다시 말하면 엄마 뱃속에서 나온 어린아이는 엄마를 몰라봅니다.
자기는 이제 나온 겁니다. 피조물은 이제 지음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은 창조주를 모르는 것이 원칙입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이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치고 태어나자마자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아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태어나는 상태 그대로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이것은 피조물이 피조 되기 이전의 존재 상태죠?
또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지은 바 된 것은 지은 자의 주체적 행동이지 피조물의 합의적 사항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이 창조주가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될 의무는 없다는 얘깁니다. 왜? 피조 된 목적 자체는 창조주의 의지지 피조물의 요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이 말씀이 필요하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된다는 사실을 율법적으로 의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모르는 것을 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천진난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서 전도자를 만나면 하나님을 믿어라, 하나님을 알아라 그럽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아야 될 필요성이 뭐가 있습니까?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아야 된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피조물인데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아야 되지 않겠느냐, 마치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를 섬겨줘야 되지 않느냐 라는 것과 똑같은 얘깁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를 섬겨야 됩니까? 그렇다면 의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율법이라는 겁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들은 피조물, 즉 창조주의 은총을 입고 살고 있는 존재들이니까 우리는 그 창조주에 대해서 감사하고 영광 돌려야 된다?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피조물은 창조주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 된 겁니다.
부모가 자식이 좋아서 자식을 낳았지 자식이 부모 좋아서 낳았습니까?
우리가 자랐다고 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랐다고 하는 것은 컸다고 하는 것이고, 컸다는 것은 넓고 깊어졌다는 얘깁니다. 넓고 깊어졌다고 하는 것은 자기 속에 무엇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 속에 공간이 넓어졌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들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거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아버지 집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간다” 그랬을 때 우리는 꼭 공간적이고 환경적인 의미에서만 자꾸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크다는 얘기는 그만큼 많은 대상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많은 내용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선악이나 죄나 의의 개념이 아닌 그런 것들을 떠나서 무엇이든지 와서 거할 수 있는 그런 안식처와 보금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천국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비유를 했습니까?
겨자씨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자라 가지고 큰 나무가 되어 거기에 뭣들이 깃든다고 했습니까? 새들이 깃든다고 했습니다. 큰 나무일수록 가지가 많으니까 새들이 와서 깃들 수 있는 안식처가 그만큼 많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크다는 얘기는 뭡니까? 천국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품이 그만큼 넓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자랐다는 증거는 그것을 인식을 하는 겁니까, 실감을 하는 겁니까?
무엇이든지 내가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냐 아니면 이상이고 바램이냐 하는 겁니다.
저의 지난날을 가만히 생각을 해봐도 초창기 일수록 이 말씀이 비판적이고 날카롭고 공격적이였던 그런 상태가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의 세계를 이해를 하고 수용하고 오히려 지금의 나 상태보다도 그들이 훨씬 원시적이면서 천진 난만성이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무속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인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가 아니면 죽는 줄 아는 그런 절대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우리들 보다는 천진난만 합니다.
오늘 제목을 믿음과 영접으로 잡았는데.....이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은 어떤 관계성에 시작입니다.
그래서 관계성이 맺어지면 처음으로 우리에게 부딪치는 사건이 믿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왜 나왔느냐, 지금 요한복음 1:1절 이하의 분위기로 봐서는 세례요한이 나오면 안되는 구절입니다.
세례 요한 같은 사람들이 이런데 등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차원 높은 얘기를 쭉 끌고 갔어야 했는데, 세례 요한이 중간에 등장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두움에게 빛과의 관계성을 맺어주기 위한 시작이라 그런 얘깁니다. 세례요한이 그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6절 이하를 보시면.....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그러니까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까 하나님의 정권대사 라는 얘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한을 세상에 보내실 때 정권대사로서 무엇을 주어서 보냈겠느냐 하는 겁니다. 빛을 주어서 보냈을 것이라는 하는 얘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빛을 가지고 와서 저가 빛에 대하여 증거를 하러 왔습니다. 빛에 대하여 증거를 하는데 그 증거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자기(빛)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관계성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악수를 했다 그런 얘깁니다.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는 것, 빛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는 사실에 굉장한 가치성을 부여하고 있는 현실이 그만큼 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세 대가 믿음 믿음을 강조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그만큼 멀었다는 얘깁니다.
지금 12절 말씀을 한번 바꾸어서 해 봅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를 영접하는 자다...그렇게 한 번 바꾸어 보자는 얘깁니다.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그렇게 해도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가진 자들은 그를 영접한다.....그렇게 해도 됩니다.
우리가 또 영접한다고 하는 것을 오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을 내가 수용할 수 없는데 수용한다는 개념이 됩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인정의 개념이고, 너는 너고 나는 나의 상태에서 인정의 개념이고, 영접이라는 것은 받아드린다는 개념이거든요.
그래서 믿음에서 조금 발전을 하면 영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그것을 말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시작이고 영접은 결과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믿음으로 시작했으면 영접이 나타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가 과연 결과적인 사실 즉, 영접을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증거가 오늘 14절의 말씀입니다.
지금 12절에서 누구를 영접하느냐 하면? 원문을 보면 ‘그를’영접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영접하라고 하느냐 하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 보다 크시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해야 됩니다. 그 영접에 우리가 감동감화가 되가지고 우리도 그분을 영접하게 그렇게 된단 말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뭘로 나타났느냐? 빛으로 나타났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하신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자기 것을 주신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주신다는 것으로 표현을 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영접의 개념을 좀 바꾸자는 얘깁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를 영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품으신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를 못 품으시는가 하면, 우리가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어두움이라는 사실 자체를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에게 있어서 자신이 품게 하려면 그 어두움을 뭘로 바꾸는 역사를 먼저 해야 합니까? 빛으로 바꾸는 역사를 먼저 해놓고 그 다음에 영접을 해야 합니다.
왜죠?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빛이 어두움과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빛을 영접하는 것이지 어두움을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두움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영접을 하기는 하는데 그건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빛을 주는 것이다 그런 얘깁니다.
그러면 우리가 빛을 받았을 때에 빛의 자녀가 되죠? 빛의 자녀가 되면 그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얘깁니다. 이 원리입니다.
천하없어도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빛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이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 빛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님께 속한 것들은 빛입니다. 어두움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겁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할 때에 흔히 내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냐 하는 겁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자식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식들은 벌써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아! 나는 죽도록 너를 사랑한다....그러면서도 저녁밥을 해 주지 않다면 결국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의 수고라고 그런 겁니다.
소망의 인내고, 믿음의 역사고, 사랑의 수고라고 그럽니다. 왜 그래요.....? 자신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수용해야 되겠다, 어떤 사람을 영접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사랑하죠?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겁니다.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느냐 그겁니다.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내게 오시요? 아닙니다.
나 자신이 그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셨는데 그 빛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겁니다. 사랑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 이것은 심판을 아니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어떤 조건에 대한 도전이라면 하나님은 절대로 심판을 하시지 않습니다. 왜.....?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셨다 그런 얘깁니다. 자신을 주셨는데 자신을 배척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빛을 배척했다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하나님 자신을 배척했다는 겁니다. 문전박대를 했다는 얘깁니다.
요한계시록 3장20절 이하에 나오는....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세상에 계셨던 육신의 예수가 문에 가신게 아닙니다. 빛으로 오신 것이고 사랑으로 오신 것이고, 생명으로 오신 것이란 얘깁니다.
그런데 어두움 속에 있기 때문에 빛이나 생명이나 사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왜.....?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 하나님의 자녀, 영접하는자....뭘 영접합니까? 하나님을 영접하죠,
우리가 빛을 영접한다, 빛은 영접했는데 하나님은 아직 영접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다는 얘깁니까. 작아져 있는 그 상태로 있다는 얘깁니까, 커졌다는 얘깁니까? 커졌다가 아니라 커져 간다는 얘깁니다.
그 이름을 믿는 것, 영접하는 것....이거 다 현재 분사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12절을 요절로 볼 것이냐, 아니면 원리 강론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으려고 그럽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멘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어떤 문제가 되느냐 하면, 14절의 문제를 불러 일으킵니다. 영접을 하게 되면 말씀이 육신(화)이 된다는 얘기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육신화 되어진다는 것은 어두움까지도 수용을 한다는 겁니다. 어두움 속에 말씀이 침투된다는 얘깁니다.
왜? 어두움을 사로 잡으려고.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로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그러니까 처음에는 절대로 말씀에 사로 잡힌바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생명이든 빛이든 그것이 없이는 절대로 살 수 없다.라고 하는 사로 잡힌 바 된 사건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것이 영접입니다.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질 것이 없습니다. 그냥 좋은 겁니다. 그것이 사로잡힌 바입니다.
사로잡힌 바가 되면 자기 자신이 그 사로잡은 존재에게 먹혀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먹혀 들어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겁니다. 놀라운 사건입니다.
자기 의지대로 무엇을 하지 못하고 자기를 사로잡은 그 존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죽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왜 이 죽음이 영원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느냐? 생명이라는 것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기 때문에 생명에 의해서 삼킨바 된 것은 생명에 의해서 반드시 부활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이 되고 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사로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의지가 생깁니다. 그것이 부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그것에 사로잡힌바 되었는데 이제부터는 능동적으로 그것을 사로잡으려고 좇아간다는 얘깁니다. 이게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차츰차츰 말씀이 육신화 되어 갑니다. 그래서 성육신이 되어가는 겁니다. 거룩해져 간다는 얘깁니다. 놀라운 사건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 신앙의 정도를 일찍 깨달았다면 훨씬 이 사회는 밝고 행복하고 좋았을 겁니다. 이게 신앙의 정도인데 그 정도를 모릅니다.
왜?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흔히 어떤 말씀을 내가 인정하고 믿어지고 좋아져서 받아드렸다는 사실을 우리 안에 거하신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이전에는 최전방에서부터 접전을 통해서 먹어 들어와야 합니다. 이는 어두움에 익숙해 있던 우리 육신이 말씀의 빛으로 점령 당해져서 점차, 점차 빛의 나라, 점차, 점차 자유의 나라가 되어져서, 최후의 마지막까지 빛의 나라가 되고 자유의 나라가 되었을 때, 드디어 그 나라 속에 누가 왕으로 좌정하시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왕으로 좌정을 하신다는 겁니다.
지금 14절은 기나긴 전투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을 한 겁니다.
육신이 말씀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화 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점령하시면서 우리에게 간곡히 부탁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네가 싸우고 싶겠지만 제발 좀 가만히 있어 달라는 겁니다.
네가 싸워야 할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네가 제발 가만히 있어 주어야만이 행복한 사람이 된다. 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처음 들을 때 잘 받아드려야 된다는 것과 말씀 듣는 자세가 좋아야 된다는 것은 싸우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논리적으로 따지고.....물론 그것을 자기가 수용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분위기 속에 사로잡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요6:67절에서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그럴 때도 여기서 영생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내용을 들어가지고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과연 영생의 말씀이라고 시인을 했느냐 그겁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베드로가 변질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이하에서 강론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때 그만 베드로가 거기에 사로잡혀 버린 겁니다.
왠지 그냥 끌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고 뭔지 모르는 황홀경 속에 빠져가지고 나온 신앙고백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입니다.
그러나 그 환상이 깨졌을 때는 ‘고기나 잡으러 가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 속에 사로잡혀 들어간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그 행복이 완전히 우리를 점령을 해 가지고 난 그 행복 속에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행복자입니다.
시편1편이 그겁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꽤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 그렇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별로 의미가 없는 겁니다.
죄라고 하는 것, 그게 별로 의미가 재미가 없어서 안 지어야 원칙이지, 죄이고 좋은데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안 지어야 되겠다.....그 사람은 죄 짓고 있는 겁니다. 다만 행동을 했느냐 안 했느냐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죄는 짓고 죄인 되는 것이 낫지, 아니 이왕 할 바에는 주범이 되어야지 공범으로 같이 따라 들어갑니까? 바보 같이....
떳떳하게 해 버리고 나서 그 다음에 가서 회개를 하든지 심판을 받든지, 남자답게 강건 하라는 얘기는 죄 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빨리 돌아옵니다.
말씀이 육신화 되어 우리 안에 좌정하시면 그 다음에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본다..... 그럽니다.
그런데 영광이라는 것이 뭡니까? 여기서 보는 영광을 설명할 수 있는 겁니까? 시편1편의 저자가 그것을 잘 표현 했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라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런데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게 되는 것은.....이것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아니고서는 그것을 이해를 못합니다. 설명을 해서 이해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특별히 표현할 말이 없어서‘영광’이라고 그랬지 이것은 환희도 되고 만족도 되고 기쁨도 되고 평안도 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요1:13절에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이게 뭐냐면 육신입니다.
육신은 혈육이고 의지입니다. 혈기 욕심 의지입니다. 욕심이 혈기와 짬뽕이 되가지고 거기에 의지가 가속도가 붙으면 멸망의 길로 치닫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어지지 않았단 얘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진 사람들은 어떤 혈기나 육욕이나 어떤 의지가 작동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작동시키면 시킬수록 실패를 합니다.
대개 이 단계에 와서 실패하는 사람들이 옛날에 저쪽에서 신앙생활 하던 그런 것들을 자꾸 작동을 시키려고 하니까 실패를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치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 마시듯이 계속 더 힘든 겁니다.
문제는 더 많아지고.....뭐요.....? 그냥 나아지는 겁니다.
나아진다는 것은 생성되어진다는 겁니다.
원리적으로 봅시다.
한쪽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한쪽은 살아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음과 부활을 분리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연속적 사건입니다.
우리 몸도 7년마다 세포가 완전히 한 번씩 바뀐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한쪽은 죽어지면서 한 쪽은 생성되는 겁니다. 영적 원리도 그겁니다.
분명히 우리가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되어서 점령당해오기 시작하면 점령당한 육의 부분은 죽은 겁니다. 그러나 점령당한 영의 부분은 산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사로잡힌바만 되면 반드시 변화가 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보다 더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른 비결 없습니다. 사로잡힌바 되기만 하면 됩니다. 왜....? 그 다음에는 말씀이 하시니까요. 방어선 쳐놓고 여기까지는 내가 실패를 했지만 2차 방어선부터는 절대 내가 실패하지 않겠다. 배수진을 치고 완전하게 반대만 하지 않는 한은 점령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1차 방어선에서 무너졌으니까 2차 방어선은 안 무너지겠다고 그럽니다. 내가 여기서는 기어코 이겨봐야지, 사람들은 이기는 것이 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이게 혈육 의지입니다.
사람들이 다 지금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해서 정복을 당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그냥 돈으로 녹이고 열심히 녹여가지고 그래서 나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그래서 얍복강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이겨가지고 축복을 받았습니까?
오늘날 신앙인들이 기도를 하는데 야곱의 씨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일찌감치 무릎을 꿇었으면 일찌감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겁니다. 그런데 환도뼈가 부러져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싸울 수가 없으니까 그제서야 항복을 합니다. 오죽이나 붙잡고 씨름을 했으면.....이게 전부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그 영광을 보니”.....영광을 봅니다.
영광을 본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많이 하고 있는데, 아담의 비극이 생명과의 맛을 몰랐다는데 있습니다.
생명과의 맛을 봤다면 선악과를 따먹었다 해도 그와 같이 저주받은 인생은 안되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어봐야 생명과의 역사와 능력이 선악과의 능력을 지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먼저 아담에게 생명 과와 동산 나무의 각종 실과를 먹으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선악과를 먼저 맛보게 된 것이 비극의 시작이 되었는데, 우리 입장에서도 가만이 보면, 우리가 죄를 지울 수 있는 단계가 있고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을 수 있는 단계에서 그것을 논하지 않는 복음이 먼저 왔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율법이 먼저 왔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알기 이전에 죄를 지으면 죄의 맛만 압니다.
그런데 생명을 알고 난 다음에는 그것이 죄냐 의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삶에 있어서 가치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죄밖에 모르는 사람이 죄짓는 것을 정죄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락실밖에 모르는 아이가 돈 주면 오락실 가서 오락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왜 공부의 맛보다는 훨씬 오락의 맛이 재미있으니까 공부의 맛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런 애를 책망만 하면서 공부를 하라고 하면 공부가 더 하기 싫어지고 그럴수록이 더 오락이 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죄인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면 더 죄를 짓고 싶어지는 겁니다. 왜 죄인은 죄짓고 사는 것이 죄인인데 그 짓을 하지 말라고 그러니, 그래서 율법이 나를 죽인다(속인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죄인이 죄를 안 지으면 살 줄 알았는데 안 지으려고 하니까 죄가 나를 더 엄습합니다.
율법을 재평가해야 합니다.
하지 말라, 하라, 그것이 율법이 아니라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죄는 어떻게 할 것이냐, 안 지어야 되느냐? 지어버리라 그런 얘깁니다. 왜? 율법의 목적 자체가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죄는 공부해서 깨달아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 경험을 통해서 깨달아지는 겁니다.
아마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유대인들에 의해서 끌려오지 않았다면 예수를 만날 수도 없었고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계명을 들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은 겁니다. 그 여자는 평생 예수를 떠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왜 그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사람이 죄 맛만 알다가 말씀의 맛을 알게 된 겁니다.
“영광을 보니”.....
그러면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빛을 소개할 때에, 너는 어두움 속에 있다 빛으로 나아와라, 너는 죽었다 그러니 살아라, 너는 중생해야 된다.....말이 됩니까? 안됩니다.
전도라는 뭐냐? 삶의 전도를 보여주라는 겁니다. 삶의 전도가 뭐냐? 영광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을 설명할 수 있느냐 그겁니다. 영광이 설명되어진다면 그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광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들을 형용사를 썼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입니다.
어떤 존재가 아니라 상황이고 형태라는 겁니다.
영광은 다만 형용할 뿐이지 어떤 경우에도 이것이 영광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영광을 설명하고 전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나의 삶 자체가 영광적 삶이 돼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게 영광을 전하는 겁니다.
자! 하나님의 영광....., 그러면 우리는 흔히.....
하! 천국 보좌에 열 두 지파들이 있고, 24장로가 있고, 네 생물이 서 있고, 거기에 빛난 면류관을 쓰고 흰옷을 입고 있고...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은 이럴 것이라고 그리는 것이고 바라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영광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존재)를 무엇으로 형용사로 보여줬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예를 들면, 해고 달이고 별이고 공기고 자연이고 이 모든 만물입니다.
자!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을 할 겁니까?
좋다 라고 설명을 할 겁니까? 기쁘고 만족하다고 설명을 할 겁니까? 황홀하다고 생각합니까? 그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아! 하고 다만 감탄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아! 라는 감탄사가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이 찬송입니다. 곡조가 붙고 내용이 붙은 찬송은 그것을 표현하려는 몸부림이지 영광도 아니고 찬양도 아닙니다. 몸부림일 뿐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라 표현은 해야 되겠는데 그것에 우리 인간의 어눌한 언어로 곡을 붙인 것 뿐이라는 얘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감탄사 뿐입니다.
우리가 금강산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합니까?
아! 금강산 그냥 금강산 그러지 않습니다. 아! 금강산 그러지.....
그러면 금강산이기 때문에 금강산이 아니라 아! 이기 때문에 금강산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 냐 그런 말입니다. 말씀이 아냐 그런 말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논리가 붙고, 교리가 붙고, 내용이 붙고, 이유가 붙고,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느냐 그겁니다.
욥의 항의 한 것 같이 왜 하나님 이렇습니까, 저렇습니까 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냐 하는 겁니다. 벌써 그런 것 자체를 따지고 있다는 것은 빛을 모르고 어두움 속에 있다는 겁니다. 빛은 그냥 아! 뿐입니다.
동해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면 뭐라고 합니까? 아!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말이 없다는 겁니다.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와서는 사람의 말로써 가히 이를 수 없는 말을 들었다 하지 않습니까? 이를 수 없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감탄사 밖에는 말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을 보면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이렇게 나왔습니다. 왜 아버지의 영광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느냐?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영광은 독생자의 영광뿐입니다. 아버지 자신의 영광을 우리가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자신의 영광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없느냐,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어느 수준까지 올라가면 되느냐 하면, 독생자의 수준까지 올라가면 독생자의 수준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적외선이나 자외선에 노출이 되면 우리는 사라져버립니다. 마치 원자탄 광선에 노출이 되면 우리 존재가 먼지가 되는 것처럼, 아버지의 영광에 우리가 맞다버리면 우리 존재가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 번 거르게 해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독생자의 영광, 다시 말하면 말씀이 육신을 입을 수 있는, 말씀이 육신 속에 들어와도 육신이 망가지지 않는 영광,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셨다는 얘깁니다.
그게 세례 요한이 증거 했던 빛이고 이 땅에 친히 강림하신 빛(그리스도)이라는 얘깁니다. 그것밖에는 우리가 못 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라게 되고 그 빛의 강도가 차츰차츰 강해져도 우리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저항력이 생기는 겁니다. 항체가 생깁니다. 그래서 나중에 아주 강한 아버지의 영광에 접해도 우리는 그것에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감탄만 더 커질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러는 겁니다. 나중에 계시록을 가보면 누구에게만 영광을 돌립니까? 아버지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광의 (면역성)광도를 길러가는 겁니다. 그 좋은 예가 기존의 교회를 열심히 충성 봉사 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여기와서 말씀의 공격을 받으면 집에 가서 어떻게 합니까?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혼란을 일으킵니다.
왜.....? 이제까지 캄캄한 어두움 속에 있었는데 갑자기 빛이 확 들어가 보세요. 사정없이 혼란이 일어납니다. 이게 도대체 왠 날벼락이야...!
마음의 문제니까요, 우리가 우리 신경을 자극 안하려면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불을 갑자기 키면 안 됩니다. 조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하면 좋습니다. 어두움 속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빛이 들어오면 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워집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자다가도 화장실에 갈 일이 있으면 될 수 있으면 그대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더듬어 가도 충분히 갑니다. 빛을 갑자기 보면, 그다음부터 잠자리에 들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빛, 나라, 영광 좋아하지 마세요.
다매섹의 사울이 어땠습니까? 빛을 쬐이고는 소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비늘이 떨어졌다는 얘기는 막이 상해버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흘 만에 회복이 돼서 떨어지고 나니까 보이기 시작을 했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체적 생리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쬐인 사람들은 다 그런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들어갔다가 그 광채 때문에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정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영광을 구태여 표현하자면 은혜와 진리인 겁니다. 그런데 옳기 때문에 진리이고 거져주기 때문에 은혜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은혜와 진리를 오역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 의식과 이성에서 옳기 때문에 진리가 아닙니다. 정작 진리가 우리에게 진리로 나타날 때는 진리가 아닙니다. 아! 뿐이지.
우리가 아직도 성경이 진리다 라고 말한다면 성경을 모독하는 겁니다.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거져 얻어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고 비방하는 겁니다. 얻어 쓰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은혜이십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미워하고 자연을 파괴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안되는 얘깁니다. 우리는 자연에게 석고대제 해야 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카타람바노 하지 못하더라.....이건 잘한 겁니다. 카타람바노 했다가는 어두움이 박살이 납니다. 당연한 얘깁니다.
우리가 그동안 이것을 비판적으로 봤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비판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옳게 보여져야 합니다.
왜.....? 왜냐하면 빛을 아는 사람들은 그래야 된다라고 말합니다.
설령 어두움이 야! 빛이 왔구나 하고 튀어 나간다고 할지라도 뒤에서 잡아줘야 합니다. 너 지금 나가면 죽어! 못 나가게 막아야 합니다.
어느정도 빛이 약해져서 네가 수용할 수 있을 때 나가라, 그렇지 않으면 눈이 멀어버리든가 너는 죽는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섬기면 안 됩니다.
도저히 섬기지 않을 수가 없어서 섬겨야 됩니다. 경배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경배를 해야 됩니다. 교회 갈까 말까, 말씀을 들으면 좋기는 좋은데.....그런 식으로 하나님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받아야 되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존경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산상보훈에서도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시기를 원하는 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대로 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떡쪼가리나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떡쪼가리나 주시고, 내 병이나 고쳐주시는 하나님이라면 내 병이나 고쳐주실 것이고 말 겁니다.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바로 영광 체가 되고 그 영광으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겁니다.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겁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앞에 떨어진 문제만 문제인 줄 압니다. 그 문제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미는 그 문제를 해결해 줄 때 하나님의 의미를 갖지 그 외에서의 하나님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게 사람들을 비극으로 가는 원인인 것입니다.
문제는 문제로 떨쳐버리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크신 하나님을 발견할 때 이 문제는 눈꼼 만큼 적어진다는 얘깁니다.
우리 눈앞에 새끼손가락이 딱 가리고 있으면 그 새끼손가락이 나의 우주가 됩니다. 내 눈에는 새끼 손가락 밖에는 안 보이니까요. 다른 게 안보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자기 앞에 닥친 문제만 바라보다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요21장에서.... 주님 이 사람은 어찌 되겠습니까?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를 나를 따르라.
이 사람이 어찌 되는 것 하고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건 그것대로 내버려두고 너는 나만 따르면 된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세상에 머물러 두게 하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너하고 상관이 없다는 얘깁니다.
너는 지금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냥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오늘 믿음과 영접.....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많은 것들이 거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 내가 더 많은 내용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 자녀가 되면 어떻고 안되면 어떻습니까? 자녀 되는 것은 내 맘대로 됩니까? 그것은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다만 이미 된 자들은 어떻게 하면 열심히 잘할까 하는 것만 생각을 합니다. 그가 자녀 된 증거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