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8일 수요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창세 15,1-12.17-18
복 음 : 마태 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지금 직접 하느님 아버지를 보지 못합니다.
또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기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연 하느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면서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십니다.
혹시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말씀드려 봅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안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알았을까요? 볼 수 없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성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하느님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으니 하느님을 볼 수 없고 하느님을 직접 느끼기도 힘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 하느님을 보고 느낄 수 있을까요?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가 될 것입니다.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는 어느 정도의 성장을 이루고 나서입니다.
비록 걷지도 또 말하지도 못하지만,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때 어머니 배에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 것을,
사랑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야 함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을 마치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직접 뵐 그날을 기대하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스스로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많은 이가 나쁜 나무를 바라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거둘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그 나쁜 나무에서 포도나 무화과가 나오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실제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의 거짓된 말과 행동에 빠져듭니다.
좋은 나무가 아닌 나쁜 나무를 바라보면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분명히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쁜 나무의 모습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크게 후회할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알맞은 햇빛과 비, 풍부한 거름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열매를 보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구슬땀을 흘리며 나무에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농부이신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이 좋은 환경에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전에 사목국에 있을 때입니다.
11월에는 교구장님의 ‘사목교서’ 설명회가 있었습니다.
본당의 사목회장님, 기획분과장님, 총무님이 주로 오셨습니다.
교구장님의 사목교서를 발표한 후에 교구의 각 부서의 다음 연도 행사의 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사목국의 교육담당 신부였기 때문에 주로 교육 일정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총구역장 피정, 구역장, 반장 교육, 사목위원 교육, 지구연수와 같은 일정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냥 이야기만 하면 지루하기때문에 가끔 양념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당시에 기억나는 이야기 중에 ‘성직자와 조폭의 닮은 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검은 옷을 주로 입고 다닌다. 자기 지갑을 열어 돈을 내는 법이 없다.
서열이 확실하다. 남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조직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일면 비슷한 점이 있기에 당시에 ‘소화제’처럼 웃음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꾸르실료 간부들과 식사를 하면서 제가 지갑을 열어 계산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제님 한 분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이 계산한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성직자가 가난하기 때문에 계산을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만큼 대접받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터키 순례 중에 ‘카파도키아’의 오래된 동굴 성당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동굴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세상의 것들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 깊이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은수자들은 동굴에서 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
이런 은수자들의 삶이 수도원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수도원과 교도소의 공통점을 생각해 봅니다.
“세상과 고립되어 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음식이 거칠고 부족합니다. 잠자리가 불편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도원과 교도소는 차이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수도원은 자발적으로 들어갑니다. 교도소는 강제로 들어갑니다.
수도원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습니다.
교도소의 문은 닫혀있습니다. 형기를 마쳐야만 나갈 수 있습니다.
수도원과 교도소의 결정적인 차이는 ‘감사와 불평’입니다.
수도원은 모든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교도소는 불평과 불만이 넘쳐납니다.
스스로 원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수도원처럼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찾아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봉사와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버스를 타면 으레 뒷자리를 찾아갑니다.
뒷자리는, 때로 멀미를 하고, 내릴 때도 늦게 내리지만,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짐을 내릴 때도 버스 트렁크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 이웃의 짐을 내려 줍니다.
허리가 아프지만 그것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본인의 간식은 물론 이웃의 간식까지 챙겨서 나누어줍니다.
그분들은 나눔의 기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교도소처럼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편하고 쉬운 일만 찾아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지 못하고
늘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제삿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순례를 여행처럼 생각합니다.
이웃의 순례와 묵상을 방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을 수도원처럼 살고 있는지, 교도소처럼 살고 있는지
내가 지나온 삶의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미,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바로 수도원입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인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좁은 길과 널찍한 길’을 대조시키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
사실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들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했을 때,
그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하느님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앞에 바로 서도록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예보나 윤리 생활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렸고,
진리에 대한 설명이나 지식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양’과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면서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십니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양과 이리’,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의 표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 줍니다.
당신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고,
또한 ‘구원의 열매’라는 좋은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참 예언자”로 제시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라는 말씀은
곧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 당신을 따르라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곧 저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지,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실 저는 거짓 예언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거짓 예언자처럼 겉모양을 꾸미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참된 예언자는 아니지만, 참된 예언자 행세는 곧잘 합니다.
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의 화려함을 버릴 때 열매는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마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맺는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진리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7)
주님!
잘려 불태워지기 전에, 가지를 자를 줄 알게 하소서!
위선의 껍데기 옷을 벗고, 기만의 숨겨둔 살을 도려내게 하소서!
치장하여 꽃을 피우기보다,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그럴싸하게 때깔을 꾸미기보다,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늘 당신께 붙어 양분을 얻고, 당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15절)
우리 신앙인은 일반 대중의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닌,
그 반대로 세상을 거슬러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신앙인은 돼지와 개로부터 만이 아니라, 이리로부터도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리는 개나 돼지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개와 돼지는 잘 보인다. 그러나 이리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낸다.
이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고 하신다. 이리의 공격은 그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시나무에서는 포도를 거두지 못한다.
거짓 예언자들은 덕의 가면을 쓰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기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20절) 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힘들고 고생스러운 길이다.
위선자는 수고하려 하지 않고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가면을 보지 말고 좁은 길을 따라가는 이들의 행실이 맺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1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악인은 변화할 수 없다거나
선인은 결코 나쁜 길로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사람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악하게 살았더라도 선으로 돌아설 수 있지만,
악하게 사는 동안에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19절)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가시를 맺는 나무에서 포도나 무화과를 거둘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은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한다.
훌륭한 교사가 나쁜 것을 가르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나쁜 것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을 막기도 하신다.
자신의 입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모든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하느님 안에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우리의 삶도 참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는 생활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브라함에서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거대하고 풍성한 "좋은 나무"를 관상하게 해줍니다.
제1독서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시는 대목입니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5-6)
아브람을 칼데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신 주님께서
늙은 나이에도 아직 자손이 없는 아브람에게 무수한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얼핏 들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요.
실제로 주님의 아들 약속에 아브람이 웃었고(창세 17,17 참조),
18장에서는 사라가 웃었다고(창세 18,12) 성경 저자는 가감 없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당신 백성에게 땅을 베풀어 주시고 그 땅을 돌볼 무수한 후손까지 마련해 주시려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었던 것이지요. 아브람의 믿음이 그 자신을 의롭게 합니다.
어떤 행위나 지향 이전에 믿음으로 의로움을 획득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이 세상에 믿음을 뿌리로 한 튼실하고 풍성한, 좋은 나무를 심으십니다.
아브람에서 시작된 이 나무는 처음에는 혈연과 민족을 통해
무성히 가지를 내고 잎을 드리우며 열매를 맺다가,
"때가 차자"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접목된(로마 11,17-24 참조) 거대한 나무로 성장할 것입니다.
복음은 나무와 열매 이야기입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태 7,17)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민중을 현혹하고 착취하는 일이 횡행했기 때문이지요.
아버지 하느님의 믿음의 자녀라면 같은 나무의 가지인 형제와 이웃을
위험에 빠트릴 리 없으니, 열매를 잘 보라는 뜻입니다.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2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비롯된 나무는 좋은 나무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좋은 나무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지요.
충실히 믿음을 견지하며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의롭게 되어 좋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겁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복음 환호송)
좋은 열매를 맺는 또 다른 조건은 주님께 "머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담화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라고 하시며
포도나무와 가지의 표상으로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설정해 주셨지요.
우리는 좋은 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들입니다.
그분에게서 양분과 수분과 사랑의 DNA를 공급받아
우리 존재의 자취와 행위를 통해 열매를 맺는 가지들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 "믿음"과 "머무름"으로 좋은 나무이신 주님께 꼭 붙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거룩하고 선한 양분이 우리를 거쳐 좋은 열매로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열매가 이 세상을 조금 더 밝게, 조금 더 선하게, 조금 더 진실 되게,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그 좋은 열매가,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소박하고 사려 깊은 걸음걸음마다 좋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먼저 자신의 열매를 보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복음에서 산상설교의 결론이자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황금률이 선포되었다.
사실 황금률은 행동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규범이다.
사실상 요구되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래서 義人의 길은 외롭다고 했던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옳게 산다는 것,
나아가 남보다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은 좁고 외롭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바로 이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삶의 지침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행동의 지침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행동이란 경우에 따라 많은 변수를 가져오기 때문에
행동지침에 대한 늘 새로운 해석과 응용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고,
그들을 참 예언자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가르치시는 대목이다.
속에는 사나운 이리를 품은 거짓 예언자가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겉포장이 화려하고 요란할수록 내용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겉모양이 양처럼 부드럽고 고울수록 그 마음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만약에 그러한 겉과 속이 다르다면 실망 또한 클 것인즉,
그것이 거짓 예언자라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참 예언자가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거짓 예언자가 가져오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거짓 예언자에 대한 구별은 참으로 중요한 사안이다.
예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통하여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원리를 구별의 기준으로 내세우신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보다 행위의 과정과 결과가 구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는 언제나 함께 있어 왔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고, 마태오 공동체 안에서도 그랬다.
구약시대에 예레미야 예언자도 일생동안 전문적인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였다.
예레미야는 야훼께서 보여주시는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구별을 통하여
자신을 참 예언자(예레 26,1-24)로
거짓 예언자(예레 23,9-40; 특히 거짓 예언자 하나니야: 28,1-17)와 구별하였고,
거짓 예언자와 섞은 사제들이 한 통이 되어, 이스라엘 전체를 그릇 인도하고 있음을 통탄하였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참 예언자는 백성을 일깨워 회개하도록 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이익을 좇아 권력에 아부하느라 정신을 빼앗긴다고 하였다.
아모스 예언자도 거짓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꾸짖지 않고
오히려 원수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그들의 멸망을 예언하지만,
참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신의 죄를 고발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다고 하였다.(아모 1,3-2,16)
신약성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결성된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자료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은 100년 이후에 집필된 ‘디다케’로 손꼽힌다.
《12사도의 교훈》으로 통용되는 디다케는 총 16장으로 구성된
초대교회 규율에 관한 지도서로서 新約外經에 속한다.
예언과 복음의 수용 자세를 다루고 있는 11장에
다음과 같은 거짓 사도와 예언자의 식별기준이 들어있다.
“사도는 하루 동안만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된다.
그러나 사흘이나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머물 곳을 찾을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더 가지지 말아야 한다.
만약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靈으로 말한다고 모두가 다 예언자인 것은 아니다.
오직 주님의 생활태도를 지녀야만 예언자이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그 생활 태도로써 밝혀진다.
진리를 가르치는 예언자라도 가르치는 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짓 예엊나이다.
누구든지 영으로 말한다면서 돈이나 다른 어떤 것을 달라고 한다면 그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빈궁한 이들을 위해서 달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를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디다케 11)
예언서와 디다케를 근거로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방법을 요약한다면,
참 예언자는 주님의 양 떼를 위하여 자기 묵숨까지 바치지만
거짓 예언자는 생명은커녕 자신에게 손해될 일은 하지 않는다.
참 예언자는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끊임없는 쇄신과 회개를 촉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필요하다면 쓰레기로 여기지만,(필립 3,8)
거짓 예언자는 되도록 남의 잘못을 꾸짖고 남의 불행을 축복하면서 개인의 이익과 명성을 도모하고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학식과 견해에 더 의존한다.
이러한 기준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행실을 보고 아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공존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통하여 얻은 식별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야 한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공도체의 사랑과 일치를 쉽게 깨뜨릴 수 있다.
따라서 남보다는 우선 내가 스스로 맺는 열매에 따라
주님의 ‘참 제자요, 참 목자’인지를 물어보고 점검하여야 할 것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오틸리아 수녀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오늘 말씀은 마치 운명론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나무에 따른 열매는 이미 정해져 있는 느낌??
하지만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강조점은 열매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매를 보아야지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과일나무를 보고 단번에 알아맞히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달린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무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시고자 한 것은
거짓 예언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겉으로 봐서는 쉽게 알 수 없으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 『어린왕자』, 생텍쥐페리
다시 나무로 돌아가 생각해보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이 뭘까?
‘아, 어쩌면 나무에게 중요한 것은 땅속 뿌리일지도...!’
우리가 과일나무를 키울 때 농부가 애쓰는 것(=가꿀 수 있는 것)은
땅의 조건입니다. ―물론 일조량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땅이 마르지 않도록 낙엽으로 덮어주기도 합니다.
불필요한 가지도 쳐주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돌보죠.
그중에 무엇보다도 뿌리가 땅에서 수분과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해야
나무가 성장하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나의 믿음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 나무의 뿌리가 ‘하느님 말씀, 주님 현존’이라는 땅에서,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이라는 뿌리를 통해,
‘기도와 애덕 실천(희생과 봉사)’이라는 흡수 작용으로,
나의 믿음(나무)은 키도 크고, 줄기도 굵어지고,
열매도 알차고 맛있게 맺을 수 있을 거예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사랑)를 많이 나누는 내가 되리라 다짐해봅니다^^
[출처] 마태 7,15-20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