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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1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영국에서 몸무게가 6.78㎏에 달하는 초우량아가 탄생
2021년 G20정상회담 차 이탈리아 방문중인 문재인대통령 독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
2020년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역 영국 배우 숀 코너리 세상 떠남(90세)
2019년 일본 오키나와의 슈리성(류큐 왕국의 왕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불 탐
2019년 독도 인근 헬기 추락
2019년10월31일11시 20분쯤, 독도 인근 해상에서 응급환자와 구급대원 등 7명이 탑승한 소방헬기가 추락했다.
이 헬기는 손가락이 절단된 환자 수송을 위해 출동하였다가 이륙 후 2분 이내에 해상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2016년 검찰 독일에서 전날 귀국한 최순실 체포
2015년 한국 첫 여성 해부학자 나복영 교수 별세
한국 최초 여성 해부학자인 나복영(91)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가 지난 31일 별세했다.
나 교수는 1947년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여자의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여의사로서는 선택하기 어려운 해부학을 전공, 이 분야 첫 여성의학자의 길을 걸었다.
고인은 대한여자의사회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1960년부터 제3대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을 지냈다. 고인은 박경아 세계여자의사회장(연세대 의대 해부학 교수)의 모친으로, 모녀 해부학자로 이름났다.
2015년 러시아 코갈림아비아 항공 에어버스 A-321, IS가 설치한 캔 폭탄 터져 이집트 시나이 반도 상공에서 추락 승객 217명(어린이 17명) 승무원 7명 등 탑승객 224명 모두 사망
2011년 세계인구 70억 돌파. 70억째 인류(여자아이)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 주에서 태어남
2010년 브라질 첫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당선
2010년 10월 31일 실시된 제40대 브라질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집권 노동자당(PT)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62) 후보가 56.05%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지우마 호세프의 브라질 대통령 공식 취임날짜는 2011년 1월 1일이다.
1960년대 말 반정부 게릴라 활동에 투신했던 정통 좌파 출신의 호세프는 2003년 룰라 정부 출범과 함께 에너지부 장관에 기용됐고, 2005년부터 지난 3월까지는 총리격인 수석장관을 지냈다. 출마 당시 두 차례 이혼 경력과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이미지가 좋지 않았으나, 브라질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어 지지율 80%로 퇴임하게 되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현 브라질 대통령의 정책 계승자라는 인식과 연방 에너지 장관 시절의 업적을 평가 받으면서 지지율이 급등하였다.
지우마 호세프의 브라질 대통령 당선에 대해 세계 언론들은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미국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에 못지않은 여성지도자로 주목받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2010년 '구석기 연구의 개척자' 원로 고고학자 손보기 교수 별세
원로 고고학자 손보기(孫寶基·88) 전 연세대 교수가 2010년 11월 31일 별세했다. 한반도 구석기 연구를 개척한 손 교수는 1922년 서울생으로 연희전문 문과,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와 대학원을 거쳐 미국 버클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손 교수는 1964년 공주 석장리 유적지를 발굴해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있었음을 증명하며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을 뒤집었다. 또 우리의 금속인쇄술이 서양에 비해 200년 앞섰음을 성분분석 등 과학적 기법을 통해 증명했다. 지난해에는 손 교수가 발굴을 진행했던 공주 석장리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파른 손보기 기념관'이 건립됐다. 파른은 고인의 아호다.
외솔상 문화부문 학술상(1976), 세종문화상(1987), 옥관문화훈장(199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성왕상(2000), 위암 장지연상(2003)을 받았으며, '한국구석기학 연구 길잡이'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경' 등 저서를 남겼다.
2009년 이후락 전(前) 중앙정보부장 별세
이후락(李厚洛·85) 전 중앙정보부장이 10월 31일 오전 11시45분 별세했다. 지난 5월부터 노환과 지병으로 서울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최근 병세가 나빠졌다.
이 전 부장은 ‘제갈조조’라고 불릴 정도로 전략과 술책에 뛰어난 박정희 정권의 책사였다. 한때 유신정권의 2인자로 불렸지만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됐고,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린 뒤 별세할 때까지 30년간 칩거해왔다.
1924년 울산에서 태어난 이 전(前) 부장은 46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임관한 뒤 61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군(軍) 생활을 했다. 군에서 미 CIA와의 연락업무에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전(前) 대통령과도 육군본부 정보국 과장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인연이 맺어졌다고 한다.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공보실장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섰으며 63년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고, 박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맞붙었던 71년 대선 땐 중앙정보부장이었다. 72년 5월엔 밀사(密使)로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7·4 남북공동성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후 1973년, 중정부장으로서 10월 유신과 남북비밀접촉 등을 ‘성공’시켰으나, 그해 4월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전격 구속되는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터지자 그는 권력의 눈 밖에 났다. 그 직후인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을 중정(中情)이 주도한 것도 ‘정치적 생존’을 위한 이 전 부장의 무리수였다는 분석과 증언이 있다.
1979년 민주공화당의 유정회 의원이 돼 재기했으나 곧이어 터진 ‘10·26 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암살되자 정계를 떠나 칩거했다.
칩거 생활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거의 끊은 채 서울 용산구 자택에 유치원을 만든 뒤 경기도 광주의 대지 1500평 규모 본인 소유 도요(陶窯)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중국 우주개발의 아버지’ 첸쉐썬 박사 사망
2009년 10월 31일 ‘중국 우주개발의 아버지’, ‘로켓 왕’으로 불려온 중국의 원로 과학자 첸쉐썬(錢學森·98) 박사가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1911년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서 출생한 첸 박사는 1934년 상하이 자오퉁(交通)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해 MIT와 캘리포니아공대에서 항공공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1939년 캘리포니아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딴 첸 박사는 2차 대전 당시에는 제트추진연구소(JPL), 미국 국방과학위원회 등에서 미사일 분야 핵심 연구인력으로 일하며 미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1950년 중국 귀국길에 나섰다가 스파이로 몰리기도 했던 그는 5년간에 걸친 미·중 양국 간 협상을 거쳐 1955년 미국에서 추방되는 형태로 중국에 돌아갔다. 첸 박사는 귀국 후 중국과학원 역학연구소장, 국방부 제5연구원장을 맡아 중국의 핵미사일 개발을 이끌었으며, 1970년 인공위성 발사 당시에도 위성과 로켓 개발을 책임졌다. 현재 중국의 우주 항공 분야에서 일하는 상당수 인재가 그의 제자이다.
2007년 육군 9군단, 11군단 해체
2006년 보타 남아공 前대통령 사망
1970~80년대 남아공의 악명높은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밀어붙였던 P W 보타(90)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31일 오후 노환으로 숨졌다. 부인 바바라 여사는 “남편은 저녁 8시쯤 남부 케이프 해안 윌더니스의 집 침실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보타가 백인 소수정권을 이끈 1978~1989년은 최악의 유혈사태와 인권유린으로 얼룩졌다. 그가 아파르트헤이트의 틀을 고집하며 넬슨 만델라의 석방을 거부하는 동안 남아공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됐고, 미국·유럽 등의 경제 제재를 초래했다. 정치범 3만명이 감옥에 갇혔고, 정보기관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다혈질과 무자비한 성격 탓에 얻은 별명이 ‘늙은 악어(Old Crocodile)’였다.
2003년 경의선 도로공사 완료(DMG 1.8km)
2002년 여군학교 52년 만에 폐교. 3사관학교(장교)-부사관학교(부사관)에 통합
여군 양성의 산실 역할을 해 온 여군학교가 2002년 10월 31일 오후 2시 서울 용산동 교내 강당에서 해단식을 갖고 52년 역사를 마감했다.
반세기 동안 여군 장교와 부사관 양성을 전담해 온 이 학교가 폐지된 것은 시대 변화에 따른 것이다. 1989년 폐교 논의가 처음 거론되면서 1998년 폐지를 최종 결정했다. 여군학교는 이제까지 장교 1550명과 부사관 6300명 등 7850명을 배출했다.
여군학교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밀려와 있던 1950년 9월 4일 부산에서 여자의용군교육대로 출발했다. 1기 생도는 491명. 1955년 서울 서빙고에서 여군훈련소로 재창설됐다가 1990년 여군학교로 승격돼 국방부 내로 옮겨졌다. 폐교 후 여군 지망생은 장교는 제3사관학교에서, 부사관은 육군 부사관학교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2001년 미륵사 석탑, 보수를 위해 1400년 만에 해체 시작
백제 전통 복장을 한 40년 경력의 베테랑 드잡이공(건축물 등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기능을 보유한 장인) 홍정수(64)씨는 신부의 옷을 조심스레 벗기듯, 도드레에 매단 줄을 조심스레 잡아 당겨 미륵사터 석탑의 지붕돌(옥개석)을 들어 내렸다. 가느다란 탄성에 이어 박수가 터졌다.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이 1400여년 만에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31일 오후 3시 익산 미륵사터에서 미륵사터 석탑 보수 고유제(어떤 일이 시작함을 종묘에 알리는 제사)가 열렸다.
고유제 식순은 ‘화성성역의궤’(수원 화성의 건축에 대해 기록한 책)를, 제수는 ‘국조오례의’를 참고해 장중하게 진행됐다. 청주에 쌀과 떡, 소고기, 닭, 조기 등 13가지 음식이 마련된 상이었다.
김동현 김병모 김일진 정영호(이상 문화재위원) 이협 의원(민주당), 노태섭 문화재청장, 채규정 전북 행정부지사 등 3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축문 낭독 등에 이어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미륵사터 석탑 6층 지붕돌을 들어 내리는 행사로 막을 내렸다.
백제 무왕(7세기 전반) 때 세운 미륵사터 석탑은 동쪽과 북쪽면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붕괴된 채 방치되다가 1915년 일본인들이 보수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소재’였던 시멘트로 외벽을 싸바른 것이었다. 경주 석굴암 역시 이 시기에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시멘트를 본존불 주변 불상들 뒤편에 발랐다. 문화재청은 그러나 시멘트가 노화되면서 강도가 약화되고 물이 새 붕괴 우려가 생기자 이번에 해체 보수를 하게 된 것이다.
문영빈 문화재청 전문위원은 “발굴을 하듯 돌을 하나 하나 조심스레 들어 올려 해체할 것”이라며 “해체에만 최소한 4년이 필요하다”고 전망했다.
2000년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상주할 우주인 태운 `소유즈 TM-31` 발사
미국, 러시아 등 16개국이 건설중인 국제 우주정거장(ISS)에 상주할 3명의 우주인이 2000년 10월 31일 러시아 로켓 `소유즈 TM-31`을 타고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를 출발했다.
미국인 선장 윌리엄 셰퍼드와 러시아인인 유리 기젠코,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등 3명은 11월 2일 지상 368km 궤도에서 ISS와 도킹, 2001년 2월까지 ISS에 117일간 머물면서 임무를 수행한 뒤 후임자들을 싣고 오는 미국의 우주왕복선 편으로 지구에 귀환하기로 했다. 현재 길이 48m, 무게 60t인 ISS가 2005년 완공되면 길이 108m, 무게 450t 규모로 확대될 예정이다.
ISS는 2001년 2월 폐기된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를 대체해 2013년까지 우주인들이 교대로 파견돼 다양한 실험을 벌일 예정이다. ISS 건설계획은 지난 1988년 미국과 유럽 우주청 참여국, 일본, 캐나다 간에 합의됐으며 1993년 뒤늦게 러시아 참여가 합의됐다. 완공까지 총 600억 달러가 투입될 예정이다.
2000년 대만 중정 공항에서 싱가포르항공 여객기 추락, 78명 사망
대만 수도 타이베이 외곽 중정 공항에서 2000년 10월 31일 싱가포르항공 소속 여객기가 추락, 78명이 사망했다. 승객 159명과 승무원 20명 등 179명을 태우고 이날 밤 중정 공항을 이륙하던 SQ 006편 보잉 747-400기는 공중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불과 몇 초 만에 활주로로 추락, 세 동강이 났다.
이 사고로 78명이 죽고 85명이 부상했다. 중정 공항은 사고 직후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을 금지시켰다. 사고기는 싱가포르를 떠나 중정공항에 중간 기착한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출발하던 중이었다. 승객 159명의 국적은 대만 55명, 미국 47명, 싱가포르-인도 각 11명 등이었다.
싱가포르 항공(SIA)은 28년이란 짧은 연조에도 불구하고 세계 톱클라스에 끼어든 아시아 최고의 항공사다. 여행전문지 `트래블 & 레저` 등에 의해 세계 1위 항공사로 선정될 정도며 단 한 건의 추락사고도 일으키지 않아 아시아에서 가장 안전한 항공사로도 주가를 높여왔다.
1999년 이집트항공 소속 보잉767기 미 동부해안 추락. 탑승자 17명 몰사
1997년 국민회의-자민련, 김대중씨를 단일후보로 결정
1996년 우편 업무 전산망 구성 완료
1996년 삼성 전자 세계 최초로 1G D램 개발
1993년 이탈리아 영화감독 펠리니 사망
1992년 로마교황청 350년 만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복권
지동설을 주장해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됐던 17세기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3백50년 만인 1992년 10월 31일 공식 복권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13년전 자신이 발족시킨 특별위원회의 최종보고를 청취한 교황청과학원 공식회의에서 갈릴레오에 대한 교적회복을 공식선언했다.
이로써 신앙과 과학 사이에 벌어졌던 역사적 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단자 심문소로 널리 알려진 교황청 검사성성(檢邪聖省)이 지동설을 지지한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파문키로 결정한 것은 심문에 들어간지 17년 만인 1633년의 일이었다.
당시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며 자전한다는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지지했으나 교황청은 결국 그를 파문했다. 69세의 쇠약한 노인이었던 그는 교황청 심문관들의 기세에 눌려 재판정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과오를 시인했으나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혼자 중얼거린 것으로 전해졌다.
1990년 정부, 새 민방간 TV방송 지배주주로 (주)태영 선정
1989년 오잘 터키 총리, 국회에서 대통령에 선출
1983년부터 6년간 터키 총리로 재직해 왔던 투르구트 오잘 총리가 1989년 10월 31일 터키 국회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재적의원(4백50명) 과반수를 넘는 2백63표를 얻어 제8대 터키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0년 9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케난 에브렌 현 대통령의 뒤를 이어 1989년 11월 9일 대통령에 취임한 오잘은 터키 말라타 출생으로 이스탄블공과대 전기과를 졸업한 기사 출신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1983년 총리에 취임한 후 전통적 고립노선에서 탈피, 유럽공동체 참여의사를 표명하는 등 적극적인 경제개방과 외자도입 정책으로 터키에 경제붐을 조성했으나 매년 40~60%가 넘는 고인플레로 국민들의 불만을 사왔다. 그래서 그의 대통령 당선을 행운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1986년 건국대학에 전경 8,000명 투입 농성학생 1,219명 전원 연행
1986년 AIDS 병원체 국내 첫 검출
1986년 미국의 물리학자 멀리컨 사망 - 1966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1984년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 피살
인디라 간디 인도 수상이 1984년 10월 31일 9시30분경 수상실로 출근하기 위해 뉴델리 관저를 나서던 중 자신의 시크교도 경호원 3명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오후 6시경 심한 출혈로 사망했다. 66세였다. 범인 중 2명은 현장에서 사살됐고 1명은 생포됐다.
1917년 인도 독립의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 초대 인도 수상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간디여사는 `리틀 인두(작은 인도인)`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당찬 소녀였다. 인도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뒤 스위스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하고 귀국, 21세때인 1938년 아버지 네루를 따라 반영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64년 네루수상 사망에 따라 집권한 샤스트리 내각에서 공보장관을 지낸 후 1966년 제3대 수상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남인도 지방의 종파 및 인종분리소요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철권정치인으로 이미지가 굳어져 갔고 정권유지를 위한 야당 탄압으로 독재자라는 비판까지 받게 됐다. 장기집권에 싫증을 느낀 인도국민의 反간디 무드로 1977년 총선에서 참패, 권좌에서 물러났다가 1980년 재집권했다.
1983년 로마교황청 350년 만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복권
1983년 알폰신,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
1980년 지하철 2호선 (잠실~신설동 14.31km) 준공
1980년 중국, 사회주의경제와 자유주의경제 혼합
1978년 인천 화력발전소 제4호기 준공
1970년 국토종합개발 10개년계획 확정
1968년 쌍용시멘트 동해공장 준공
1967년 월남 군사정권, 선거 통해 형식상 민정으로. 티우 대통령(중장) 취임
1966년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이 1966년 10월 31일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방한했다. 동남아6개국 순방을 마치고 말레이시아에서 전용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존슨 대통령은 공항에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영접을 받고 3군 및 해병대의장대를 사열했다.
부인 버드여사와 러스크 국무장관을 비롯한 81명의 공식 수행원을 대동하고 방한한 존슨 대통령은 시청앞 광장에서 벌어진 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숙소인 워커힐로 향했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2일 박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은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이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담은 약3천자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2개항으로 된 이 공동성명은 한국의 경제, 사회 및 과학분야발전을 위해 미국이 계속 지원할 것과 주한미군을 현재선 이하로 줄이지 않으며 한국에 대한 무력공격이 있을 때는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원조를 하겠다는 미국의 결의를 천명했다. 이번 방한을 통해 한미관계의 전통적인 우호를 재확인했다.
1964년 국군파월에 관한 한월(韓越)협정 체결
1962년 인도-중국군 아샘지역에서 접전
1962년 천연기념물 1백4종 지정
1961년 한국-호주 국교 수립
1959년 한국-브라질, 국교 수립
1958년 미국-소련, 과학교류협정에 조인
1958년 미국-영국-소련 제네바 핵실험 정지회담 개최
1956년 미국 해군기 처음으로 남극 극점 착륙 성공
1956년 영국-프랑스군, 이집트 폭격 개시
1954년 육군 2군사령부 대구 대신동에서 창설
1953년 대한상공회의소 개편 발족
1939년 친일문학단체 조선문인협회 결성
1929년 조선어연구회, 조선어사전 편찬회 조직
1927년 광통신 기술 개척한 인도 출신 미국 과학자 나린더 싱 카파니 출생
1922년 무솔리니,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 수립
1920년 전인도 노동조합회의, 봄베이에 사무국 설치
1919년 중국 남북평화통일 선언
1918년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쉴레 스페인독감으로 세상 떠남(28세)
1908년 한일 어업협정 조인
1906년 토지건물증명규칙 반포
1903년 미국 북장로회선교사 모펫, 평양에 숭의여학교 설립
1887년 중국정치가 장개석 출생
1883년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발간
1882년 수신사자격으로 일본 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박영효가 고종에게 국민계몽을 위한 신문발간을 진언하면서 조선에도 비로소 신문발간 바람이 불었다.
고종이 발간을 허락하자 박영효는 실무를 유길준에 맡겼다. 유길준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천거한 3명의 일본인과 함께 귀국, 신문발간을 준비했으나 곧 박영효와 그 자신이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발간작업은 자연스럽게 연기됐다. 얼마후 김윤식ㆍ김만식 등 온건 개화파가 바통을 이어받았고 집권층 역시 자신들의 홍보수단으로 신문발간을 지원했다. 8월에는 신문을 발간할 박문국이 설치됐다.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첫 호를 냈다. 관보(官報)와 신문이 혼합된 형태였다. 한성순보가 일본과의 긴밀한 유대속에 발행되자 청나라로부터 견제가 들어왔다. 이때문에 혼자 조선에 남아 발간을 도왔던 이노우에는 결국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순한문이었던 탓에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이듬해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에 탈때까지 열흘에 한번씩 꾸준히 발간됐다.
1876년 인도에 태풍 사망 21만5천명, 캘커타에 지진 사망 13만명
1874년 청, 타이완 출병을 둘러싼 베이징조약 체결
1870년 파리 대폭동
1846년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아미치스 출생
1795년 `희랍의 옛 항아리`의 저자, 영국 시인 존 키츠 출생
1517년 루터, 면죄부 비판… 종교개혁 점화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붙였다. 돈에 대한 교회의 무절제와 면죄부 판매행위를 격렬히 비난하는 공개 반박문이었다. 인쇄업자 손에 들어간 반박문이 단 2주 만에 독일 구석구석까지 퍼지면서 루터는 당대 최고의 종교개혁가로 부상했다.
1521년 4월 21일 그의 죄를 신문하기 위해 보름스 독일 의회가 열린 이날,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5세가 물었다.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겠느냐?” 이튿날 루터가 “저는 제가 인용해 온 성서와 제 양심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며 황제의 요구를 거부하자 일부 광신도들이 그를 “불속에 넣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카를5세는 루터의 후원자인 프리드리히 선제후(選帝侯)와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그를 화형에 처할 수 없었다.
며칠후 루터가 보름스를 벗어났을 때 갑자기 복면의 한 무리가 그를 낚아채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도착한 곳은 선제후의 성이었고 그는 그곳에서 1년을 지내며 성서 번역에 매달렸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일어 성서야말로 진정한 종교개혁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구원은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했고 권위는 ‘오직 성서’에만 주어질 뿐이었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사용하는 라틴어 성서에 의존하지 않고 성서의 원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어 원전으로 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옮겼고, 구약성서도 히브리어 원전에서 독일어로 번역했다. 비록 오류는 많았지만 토착어로 번역된 세계 최초의 성서였다. 교황의 '무오류성'을 지적한 루터였지만 그 자신도 오류가 적지않았다. 1520년대 일어난 농민봉기가 폭동으로 발전하자 무력진압을 주장하며 농민봉기를 참혹하게 진압하는 데 관여했고, 자신과 종교적으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거부반응을 보인 열렬한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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