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풍경, 48×60㎝ , 종이에 채색, 2020
■ 파리 데사우
현실의 결정적 순간 포착
연출한 듯 비현실적 느낌
2차 세계대전때 포로 수감
수용소서 3번 시도끝 탈출
나치 부역 여인의 재판 등
사진으로 불편한 질문 던져
마흔살엔 MoMA서 회고전
굴곡진 삶에 대한 ‘오마주’
나치의 포로수용소 데사우에 갔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을씨년스러운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고 철조망 저편의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음침한 제3국의 수용소를 바라보고 있자니 가느다란 비명과 아우성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철조망 아래로는 한가하게 들꽃들이 피어 있는데 그 위로는 울부짖는 소리들이 퍼져 나간다.
그날, 그 죽음의 시간에 하나님은 저곳에 계셨을까. 선한 자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그분은 어디에 계셨을까. 현대인의 또 하나의 바이블이라는 ‘기적 수업’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도 하나님은 저 안에 계셨다.” 심지어 이렇게도, “네 눈은 오직 순간만을 볼 뿐 영속하는 흐름은 보지 못한다. 따라서 네가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닐 수도 있다.” 발길을 돌리면서 나는 그때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주님 저것이 실재가 아니라면, 도대체 이 세상 무엇이 실재일까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라는 사진가가 있었다. 잔혹한 실재마저도 마치 허상처럼 찍어 무심히 흘러가는 흑백영화의 한 장면같이 보여준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서 있었던 그 철조망 저편에서 세 번의 탈출시도 끝에 마침내 도망쳐 나온 사람이기도 했다. 전쟁포로로 잡히기 전 자신의 카메라를 재빨리 땅에 묻었고, 스스로 겪었던 모든 실재를 렌즈가 아닌 망막에 담아 철조망을 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쏟아지는 빛과 인생의 발랄한 계절들을 찍을 때 그는 고통과 비명, 눈물과 한숨의 방향을 향해 묻어뒀던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망막에 담아왔던 기억들을 렌즈 쪽으로 가져갔다. 그런 면에서 수용소는 그에게 고통의 ‘사진 학교’였던 셈이다.
그의 사진이 가끔은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도 어쩌면 ‘눈과 렌즈’의 시간을 오가는 ‘래그타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치 연출한 듯싶은 비극적인 한 토막이 희극과 겹쳐 보이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에서 속 깊은 울음 같은 것이 들려오는 듯한 것일 터였다. 포악성과 분노가 오히려 연약과 연민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역설. 그렇게 이 사진가는 현실과 초현실, 비현실과 환상 사이에 엉거주춤 서 있곤 했다.
사진가가 되기 전 그는 화가였다. 그의 붓은 현실과 초현실, 실재와 환상 사이를 오갔다. 사진가가 되고 나서는 영화를 만드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제는 현실의 한 단면이 아니라 연속적 흐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조각난 필름을 이어붙인 것 같은 형국이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세잔이 사물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만들고자 하는 것과 비슷했다.
사진에서 그는 끊임없이 불편한 질문들을 한다. 당신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며 무엇이라고 판단하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데사우, 독일 1945년 5∼6월’ 연작이다. 1944년 8월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건너던 그는 한 여인이 군중 속 어디론가로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나치스에 부역했던 여자가 재판장으로 끌려가는 광경이었다. 그는 그 무리를 따라갔고, 생생하게 벌어지는 군중 재판의 상황을 카메라에 담았다.
조사관 앞에서 고개 숙인 여인과 그 여인을 향해 야유하고 분노하는 군중, 복수심에 찬 그 얼굴들을 뒤집어보면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들이 치를 떨었던 바로 그 모습이기도 했다.
광기의 시대가 가고 전쟁이 끝났을 때 모마(MoMA·뉴욕현대미술관)는 1947년 그의 회고전을 연다. 통상 ‘회고전’이란 생애를 되돌아보는 시점에서 열리게 되는데 갓 마흔을 넘긴 그에게 그런 이름의 전시를 열어준 것이다.
생물학적 연륜이 문제가 아니라 굴곡진 고난의 생애에 대한 오마주인 셈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말하지 않았는가. “전쟁을 겪은 자, 그는 이미 젊지 않다”고. 그 ‘엄혹한 이 시대의 눈’은 그러나 인생 후반에 이르러서는 고요, 침잠, 안식, 평화의 사제로 바뀌게 된다. 그 옛날의 어둠의 기록자는 천천히 그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빛의 사제가 돼 자신과 함께 늙어 덜그럭거리는 사진기를 들어 올려 눈물 없는 세상을 찾아 셔터를 눌렀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 1908∼2004)
바칼로레아(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에서 세 번이나 연거푸 낙방한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예술가가 되기로 작정, 주로 초현실 경향의 작품을 하는 화가들과 교류한다. 그림을 그리다가 1931년 아프리카 여행 후 사진 쪽으로 방향을 틀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는다.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조감독이 돼 주로 다큐 영화를 만들었다. 나치 군대에 저항군이 됐다가 1940년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수년간의 포로 생활 중 세 번째 탈출에 성공한 후 도피 생활에 들어간다.
1946년 모마(MoMA·뉴욕현대미술관)는 그의 회고전을 여는데, 이는 그가 전사한 것으로 잘못 알고 유고전으로 기획됐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1952년 유명한 사진집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을 출간, 전 세계 사진계를 ‘결정적 사진’ 신드롬에 빠뜨렸다.
브레송(사진)의 ‘결정적 순간’은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하나의 사진예술의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삶의 한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결정적 순간’이란 사진가와 대상이 찰나적으로 하나가 되는 생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