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창세 18,1-15
복 음 : 마태 8,5-17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12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15 예수님께서 당신 손을 그 부인의 손에 대시니 열이 가셨다.
그래서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청년이 “이제 졸업인데 과연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라는 말을 합니다.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다면야 쉽게 일을 배우고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어서 좋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잘하는 전공을 살려야 할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이과 쪽이 제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학이나 과학이 훨씬 재미있었고, 또 다른 과목에 비해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서 글을 쓰고 남 앞에 말하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고
그래서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문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었습니다.
신부가 된 지 25년째의 삶을 사는 지금, 그래도 잘한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그토록 싫어했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던 글쓰기와 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 ‘인생의 단계마다 나만의 특기를 발굴하라.’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고 전공도 아닌 것이 나만의 특기도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것을 행하며 그 안에서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모든 배움이 다 쓸모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떤 배움이든 나를 성장시키고 기쁘게 잘 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뒤에 두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만큼 이 세상 안에서 할 일은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그만큼 내가 할 일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우리에게 원하실까요?
이 세상 안에 사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새로움을 간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며 도움을 청합니다.
종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주인이 있을까요?
주인은 종을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이 주인을 위해 무엇을 할 뿐입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주인의 모습을 버리고, 오히려 종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고쳐 주시겠다고 했을 때,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면서 굳은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 역시 로마의 백인대장이라는 지휘 아래에서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와서라도 기적을 행하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갔던 것입니다.
한 명의 종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겸손하게 나아가는 모습.
이전까지의 자기 모습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었기에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지순례 중에 ‘에게 海’ 연안에서 며칠 머물렀습니다.
잔잔한 바다와 빨간 지붕의 집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제게 ‘에게 海’는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했던 ‘에게 해의 진주’로 친숙했습니다.
순례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에게 해의 진주’는 원래 노래 제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제목은 ‘페넬로페(Penelope)’라고 합니다.
가이드는 페넬로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스파르타 지방의 왕이었던 이카리오스는 딸 페넬로페를 아주 사랑해서
딸이 오디세이와 결혼해서 떠나려 하자 같이 살자고 설득합니다.
남편 오디세이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베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남편을 따라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이에 아빠 이카리오스는 딸과 사위를 보냈습니다.
오디세이가 전장으로 떠나면서 페넬로페에게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하라고 했는데
그녀는 20년이 지나도 재혼하지 않고 오디세이를 기다렸습니다.
오디세이가 없는 사이 구혼자들의 청혼이 밀려오자
시아버지에게 드릴 수의가 완성되면 결혼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낮에는 옷을 만들고 밤에는 풀어버리는 식으로 시간을 벌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페넬로페의 베 짜기’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쉴 새 없이 하는데도 끝나지 않는 일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후에 오디세이가 돌아오자 페넬로페는 침대를 옮기라고 합니다.
오디세이가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이냐며, ‘이 침대는 옮길 수 없지 않소?’라고 말하자
진짜 신랑이 돌아온 것이 맞는다고 부부는 감격의 해후를 합니다.
오디세이와 페넬로페의 신혼 침대는 성안을 뚫고 자란 단단한 올리브 나무를 베지 않고
그 나무 중심으로 침실을 만든 둘만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에게 해의 바다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오늘은 며칠 전에 읽은 책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공이 커지고, 목이 아픈 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병원에 갔지만 의사들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더 큰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신장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해서 약을 먹었습니다.
치아가 안 좋은 것 같다고 해서 잇몸 치료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몸은 더욱 나빠지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망이 커진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려고 하였습니다.
여행을 위해서 새로이 옷을 맞추려고 양복점엘 갔습니다.
옷을 재단하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 치수는 22인치로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랫동안 19인치로 옷을 입었습니다. 22인치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재단사의 말을 듣고 22인치로 옷을 맞춰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눈도 좋아졌고, 목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신장 때문도 아니었고, 치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목에 꽉 끼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山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야 믿습니까!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 주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런 모든 표징은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와 같은 믿음을 아름답게 노래하셨습니다.
“그분이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음이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하리니,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음이네.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 편하고 쉬운 승리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희생과 봉사의 길이었습니다. 나눔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신앙은 희생과 고난 속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나병환자 치유에 이어,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야기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야기,
그리고 악령 들린 이들과 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은 백인대장의 한마디의 말만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오늘날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영성체 때에 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주님, 제 안에 당신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접하게 될 때 취하게 되는 두 가지 태도를 보게 됩니다.
첫 번째 태도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저의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비참한 실존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곧 자신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라는 것이요,
백인대장의 신분이지만 하인의 병을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이요,
종일 뿐이지 결코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종인 자신이 감히 주님이신 예수님을 제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의 병행 구문에서는
‘주님 앞에 나서기에도 합당치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제 자신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제대 앞에 설 때마다 합당치 못한 제 자신의 모습이 몹시 두렵고 떨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태도는 “주님,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라는
의탁과 신앙고백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빵이심을 깨달았을 때,
“주님, 당신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셨는데,
제가 당신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믿고 의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그분이 주님이심에 대한 깨달음과 그분의 권능에 대한 의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이렇게 하라’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 하면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낮이건 밤이건 구름만 걷혀 올라가면 길을 떠났고,
구름이 이틀이고 한 달이고 한 해이고 머물러 있으면
떠나지 않았던 것’(민수 9,21-22)처럼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 저도 백인대장처럼,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하고 믿음의 간청을 드립니다.
주님의 권능뿐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특별히 사랑을 성취시키시는 ‘말씀의 권능’을 믿습니다.
저를 ‘먼저’ 믿어주시는 당신의 믿음에 의탁하여,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저도 ‘먼저’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오니, 주님!
저도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듣고,
청하기 전에 ‘먼저’ 믿고 청하게 해 주십시오.
오늘 제가 당신의 거룩함 앞에서 제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고,
광야에서 당신 백성이 그러했듯이
오로지 당신 말씀에 의탁하여 가능해 보일지라도
‘돌아서 가라’ 하면 돌아서 가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곧바로 가라’ 하면 곧바로 가게 하소서.
거룩하신 당신이 진정 저의 주님이시오니, 저를 인도하시나이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만을 제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시니,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백인대장의 종, 베드로 장모의 치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주신다.
우리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7절)
예수님은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백인대장의 훌륭한 믿음을 알게 된다.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대답하였다.
이러한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하게 했고 한 인간에 대한 백인대장의 관심과 사랑이
예수님이 그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시도록 하였다.
백인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으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임을 보여 준다.
그가 그의 집에 들어오신 분을 마음으로도 이미 맞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 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 가시겠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집이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시겠다는 뜻이다.
백인대장은 상관이 있고 부하들이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분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모습에 감탄하신다.
종에 대한 백인대장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
특히 병자들과 죄인들에 대해 가지신 사랑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가지고 자기 종을 위하여
이방인인 예수님을 찾아온 그에게 그의 믿음을 보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백인대장과 같은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날 것이라고 하신다.
바로 백인대장을 칭찬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는 백인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3절)
또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 주시고 다른 많은 병자도 치유해 주셨다.
많은 일 속에서 피곤하셨겠지만,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 한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쉴 틈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여야 하며, 그분께 은총을 받았으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15절) 라고 하고 있다.
사랑과 봉사의 가르침을 따르자.
깊은 신앙과 지극한 겸손, 따뜻한 인간미의 소유자, 백인대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 탄 인간, 접촉하거나 상종하거나 말을 섞지 말아야 할 존재로
완전 개무시하면서, 마주치면 재수 옴 붙었다며 욕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나병 환자들, 세리와 죄인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선민의식이 유달리 강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혈주의를 고수하면서
다른 민족들과 피가 섞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으며,
이방인들을 개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으며,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중죄로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물 한잔 달라는 예수님의 청을 의아하게 여긴 사마리아 여인의 태도라든지,
딸의 치유를 청하는 이방인 여인을 향해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예수님의 의아한 발언 등이 그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세상 착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굳이 이방인인 자신의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겠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백인대장의 깍듯한 예의와 배려심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백인대장의 넘치는 인간미는 놀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치유, 아니면 부인이나 아들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종의 치유를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태오 복음 8장 6절)
당시 종이나 노예는 정식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주인의 소유물로서 가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값도 나가고, 좋은 가격에 매매도 할 수 있었지만,
늙고 병든 노예는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보통 주인들은 노예가 병들면 병들었는가보다, 죽으면 죽는가 보다 하고 그냥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자신의 아들보다 더 끔찍이 여겼습니다.
중풍으로 고생하는 종의 치유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백인대장의 예수님을 향한 깊은 믿음과 한없는 겸손을 보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메시아성, 전지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굳이 현장에 가시지 않더라도
원거리에서 치유할 수 있는 원격 치유 능력 지니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깊은 신앙과 지극한 겸손, 따뜻한 인간미에
감동받으신 예수님께서 아주 흡족해하시며 그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세례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수도 생활이나 사제생활의 연륜이 길다고 뻐길 거 하나도 없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순교자 집안, 구교우 집안 출신이라고 어깨에 힘줄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입니다.
잔뜩 어깨에 힘준 사람들,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크게 뒤통수를 치시고, 그를 곤두박질치게 만드십니다.
깊은 바닥 체험을 통해 거듭나게 하십니다.
반면에 한사코 낮은 곳을 찾는 겸손한 사람들,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
나는 큰 죄인이라고 가슴 치는 사람은 가엾이 보시고, 총애하시고
위로, 위로 높이 끌어올려 주십니다.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백인대장의 아름다운 고백
박상대 마르코 신부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8절)
이 기도문은 온 세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중 영성체 예식 직전에
사제가 축성된 성체를 높이 들고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하는
외침에 응답하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에서 유래된다.
마태오가 모아 놓은 10가지 이적 사화 집성문(8-9장)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적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보도된다.
두 번째 기적은 백인대장의 하인을 遠隔 치유한 기적이고,
세 번째의 기적은 베드로 제자의 장모를 열병에서 치유한 기적이다.
물론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집단 치유와 구마기적은
구체적인 기적사화의 범주에 들기보다는
예수님의 치유활동에 대한 서술적인 보도에 속한다고 하겠다.
우선 열병을 앓고 있었던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기적을 보자.
이는 마르코 복음(1,29-31)과 루카복음(4,38-39)에도 똑같이 보도되는데
사건의 맥락을 살펴보면 차이점이 많이 발견된다.
우선 치유의 장소는 다 같은 갈릴래아 지방의 가파르나움이다.
그런데 마르코와 루카는 마태오복음과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 부분에 이 기적을 배치하고 있다.
마르코는 첫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에 배치하여
이미 제자가 된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루카는 베드로가 제자의 소명을 받기 전의 시점으로 당겨 놓았다.
마태오는 이적사화 집성문을 따로 편집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기 위해 가파르나움에 오신 김에
장모의 치유도 함께 엮어 보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태오는 자신의 고유한 편집 방법을 따라 기적들을 보도하고,
마르코는 베드로 장모의 치유를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에 가깝게 서술하고 있으며,
루카는 이 치유 사건이 예수께서 첫 제자 4명을 얻는 動機로 소개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한 기적은
루카복음(7,1-10)과 요한복음(4,46-54)에도 똑같이 보도된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마태오와 요한은
백인대장이 직접 예수를 찾아와 자비를 청한다는 점이다.
반면, 루카는 백인대장이 먼저 유다인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간청하게 한다.
유다인 원로들은 백인대장이 회당까지 지어 줄 만큼 유다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소개한다.
이에 도와 줄 마음을 먹은 예수께서 길을 가시는 도중에,
이번에는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시켜 예수님의 직접 枉臨의 수고로움을 사양하고
그저 한 말씀만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루카가 늘 강조하는 기도의 다양함을 엿 볼 수 있다.
즉, 기도란 하느님께 직접 드릴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 또는 성인이나 천사들을 통하여 轉求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우리 또한 고통받고, 역경에 처해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백인대장이라 함은 통상 로마제국의 군사편제에 따라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임무와 역할을 행사하는 백부장을 뜻한다.
원문에는 서민 출신이 아닌 “왕궁의 관리”로 표기되어 있다.
당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AD. 37-100)는
“백부장이란 명령을 내리는 자로서, 지나치게 위험을 자처해서는 안 되고,
행동에 있어서 침착하고, 믿음직한 인물이어야 하며,
성급하게 전투에 뛰어들어서도 안 되고, 절박한 상황에 처 했을 때는
자신의 위치를 사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자격을 서술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은 게다가 자기 종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이 백인대장을 로마군대의 고위 관리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헤로데 안티파스 군대의 이방인 백부장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이 기적사화를 행하신 예수님의 활동장소가
갈릴래아 지방의 가파르나움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방인으로서 백인대장의 자기 종에 대한 자비심과
예수께 대한 놀라운 믿음과 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은
우리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어떤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고야 믿으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와 절대적인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그렇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보다 다른 곳에서 더 아름답고 위대한 믿음을 보았어야 되겠는가?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이 예레미야 수녀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상설교(5-7장) 다음에
열 가지 기적사화(8-9장)를 한데 모아 놓았다.
산상설교 다음에 기적사화를 배치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가르침)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은 병자를 치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악의 세력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는 권위로써 악을 쳐부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사화를 보면,
이스라엘의 생활권에서 소외된 이들의 치유 이야기가 많다.
오늘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는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이교인을 만나지 말라는 유다인들의 세칙을 배척하시고,
성전으로부터 소외된 이교인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구원은 모든 이에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하느님 나라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교인인 백인대장은 유다인들이 이교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사항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은 없다고 말한다.
비록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은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백인대장은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면서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교인 백인대장을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그의 깊은 믿음을 칭찬하신다.
성전에서 완전히 소외된 사람이
성전 한가운데에서 생활하는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깊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 하늘 성전에 먼저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이야기는 신앙의 척도는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하느님을 향해
나아갔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앙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격뿐 아니라
구원을 결정하는 기본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 안에서
내 마음이 얼마나 하느님을 향해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타성에 젖어 살아가지 말고
매 순간 하느님을 향해 달려 나가자.
[출처] 마태 8,5-1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