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꼰대와 싸가지 이야기
1986년도 가을이었던 것 같다.
국립광주박물관에 근무하는 후배를 찾아갔는데
저녁엔 허름한 식당엘 찾아들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구석 벽에 액자가 하나 걸려있었다.
耕雲釣月(경운조월)
구름을 갈아 달을 낚는다는 건데
아, 바로 이거다!!
그래서 아무소리 안 하고
빈대떡에 막걸리에 저녁을 거나하게 마시고 먹고 나오다가
주인장에게 물었다.
"저거 저에게 주실 수 있나요?"
"아이구, 집 팔아도 안 됩니다."
잘 쓴 글씨인지, 누가 쓴 건지는 잘 모르지만
마음에 딱 드는 액자였는데...
구름은 갈아도 거두는 게 없고, 달은 낚아도 들어 올리는 게 없다.
이런 뜻도 되지만...
구름 낀 들판에서 밭을 갈고, 달빛 아래 낚시를 한다.
뭐 이런 뜻도 있지 아니한가.
세상사람들은 밭을 갈지만 신선은 구름을 갈고
세상사람들은 물고기를 낚지만 신선은 달을 낚는다.
이런 뜻도 있을 테고...
그래서 나오면서 입맛만 다셨더니
그러지 말고 호남에서 서예의 대부라는 분을 만나뵈러 가자는 거였다.
그분은 바로 장전 하남호 선생이었는데
이튿날 뵙고 글을 하나 받아왔으니 그게 바로
扶植綱常(부식강상)
즉 삼강오상, 바로 삼강오륜을 잘 지키라는 글이었다.
장전선생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89년도 겨울
진도에 장전미술관을 세워 널리 알려졌고
나는 네 글자를 받아와 거실 벽면에 걸어놓고 가훈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원래 시골집에 걸어둔 액자는 慈眼視衆(자안시중) 이었는데
그건 어느 스님이 써준 불교의 분위기가 나는 액자였다.
그 뒤에 서울에 살림을 차렸을 땐
아이들 보라고 敬天愛人(경천애인)을 걸어뒀으니
이건 단군사상과 맞아 떨어졌기고 했지만
유교사상이 배인 장전선생의 글 아래에서
두 아이 키워 결혼시키고, 부모님도 돌아가셨다.
허나 지금은 그저 형식적으로 위에 걸려있을 뿐이요
그 아래 작은 글자로 된 己所不欲 勿施於人
즉 내가 싫어하는 건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품고 살아가지만
그래도 그냥 걸어 놓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이나 하고 있으면 꼰대라 하지 않을까?
요즘엔 애나 어른이나 싸가지가 없다고 한다.
그건 호남지방의 사투리인데, 싹수가 없다는 뜻이란다.
내가 나쁘면 재수가 없는 거고
사람들이 나쁘면 파란 싹, 싹수가 없는 거란다.
그런데 이건 민초들이 하는 말이고
적어도 사대문 안 사대부들이나 양반들은
4가지가 없다고 했으니
그게 仁 義 禮 智 네 가지인데
그걸 민초들은 사가지 사가지 하더니, 싸가지로 전음되었다한다.
이건 또 맹자의 사단설(四端說)에 닿는데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그것이다.
그래서 조선 건국시 사대문을 만들면서
흥仁지문, 숭禮문, 돈義문, 홍智문을 세우고
4가지 덕목, 인 의 예 지를 숭상하라 했는데
그 중앙에 보信각을 세워 오상, 오륜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또 꼰대 이야기가 되었는데
나는 어제 어느 번개를 쳤더니 4사람이 왔더라.
이걸 4가지라 할 순 없고 4사람이라 해야겠다.
네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최근에 탈퇴한 회원을 아쉬워하며 위로한 게 仁이요
그 잘잘못을 분별한게 智요
맛있는 걸 상대방에게 권한 게 禮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한게 義였으니
우리는 그래도 싸가지가 있었던 거다.
주인장이 지난해 전국장단콩음식경연에서 銅償을 받은 터라
음식맛이 참 좋았는데
남은 음식을 싸가지고 오려다 말아, 아쉬웠지만
어느 회원이 행운의 2달러씩 나눠줘서 위안이 되더라.
첫댓글 내가 나쁘면 ‘재수없음’, 사람들이 나쁘면 ‘싸가지’…라고 하시니, 오늘 배웠습니다.
내가 나빠도 ‘싸가지’ 인줄알았습니다.
그게 뭐 내로남불의 다른 말이겠지요.
구름을 걸어 달을 낚는다는
경운조월 참 멋진 4자성어입니다
좋은글 잘봤으며 행복한 일요일 되시기
바랍니다
네에, 고맙습니다.
분당 100평에 사는 언니들
꼭 남은 음식
싸 가져 가고 빽 속에는
비닐 봉지가 있어요.
없어서가 아니고
굶주리는 사람도 있는데
음식물 쓰레기로 나가는 것이 싫다고 해요.
일본서 사시던 분들도...
저도 어제 가져 가라 한다고 공기 밥을 싸 오면서
내가 이 짓을 왜 하지?
쌀은 20키로씩
여기 저기 돌려 주면서?
버려 질 수 있는 밥은
싸 오고
좋은 쌀은 필요한 분에게 나누는게 좋은 것 같아요. ㅎ
음식도 그렇지만 쓰다 남는 일이 없게 해야겠고
남은 건 다시 쓰거나 돌려쓰도록 해야겠지요.
좋은 말씀이에요.
@석촌 울 딸과 수녀님께서
먹던 음식을 버리니까
고매한 인품을 가지신분이
6 25를 안 겪어 봐서 그렇다고...
그 후론 딸도
꼭 포장 해서
가져 온데요.
@별이님 그런때 꼰대소리를 듣는답니다.
그러니까 꼰대란 말이 그렇기도 해요.
@석촌 인 의 예 지는 알고 있었지만
맹자의 사단설까지 있어서
일부분만 복사 해서 가족 방에 올리려 했더니 복사가 안 되네요. ㅎ
경운조월이라는 글이 너무 좋아 마음에 담아 갑니다.
후배들에게 이렇게 좋은 글을 펼쳐 가르쳐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게 사실 바람잡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현실은 참 어렵기도 하죠.
耕雲釣月, 도교의 철학이 담긴 듯도 하고,
석촌님이 쓰신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니
참 뜻 깊고 풍류가 느껴지는 좋은 글을 오늘 배웁니다.
네 분이 좋은 음식을 드시며 식사를 하신 일도 인의예지의 보기가 되니
석촌님의 지혜와 재치에 읽는 이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갑니다. ^^
네에, 고마워요..
네 오늘도 음식. 예절 배웁니다.
고마워요..
'구름을 걸어가 달을 낚는다.' - 이건 완전 詩선의 경지구요
'구름사이로 삐죽 나오는 달을 마중 나간다.' - 이건 시인이라고 까부는 박통의 경지입니다.
박통의 경지가 더 나은걸요...ㅎ
모르는 걸 감사히 배웠습니다
요즘 이런 걸 가르쳐 주는 곳이 없습니다
카페가 좋은 것이 바로 이런 배움입니다
언제 번개를 다 치시고 ㅎㅎ
음식이 요즘 트랜드에 맞게 아주 간소화 합니다
달러도 받으시고 양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번개팅이 였나 봅니다
4가지 사가지 싸가지...
발음이 점점 격음화되는 건 시대를 닮아서일까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