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요일 아침 9시 20분 서울 수서역에서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SRT에 몸을 싣고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대구로 향하는 것일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타임머신을 타고 떠난 시간여행 때문이란 걸 새삼 느꼈다.
내가 기계유문에 대한 관심의 발로로 시작한 시조부군 유삼재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한 날이 정확히 4년전 2020년 5월 2일이었다. 시조 묘를 아내와 함께 참배하고 묘비문을 읽어내려가면서 유척기 할아버지 함자를 익혔다. 기계유문에서 유일하게 영의정에 오르신 문익공 지수재 유척기 할아버지 초상화가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에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 웨이퍼마스터스 (WaferMasters Inc)사 대표 유우식 박사가 오랜 지인이신 덴리대학 오까야마 젠이치로 명예교수와 수 차례 연락을 취하여 긴밀한 도움을 받아 후손들이 선현 초상화를 실견할 수 있었다.
두 분의 아낌없는 협조와 배려로 덴리대학 도서관 관계자를 설득하여 영인본을 제작할 수 있었으며 나의 연구실인 단국대학교 소재 귀휴당(歸休堂)에 문익공 지수재 할아버지와 충문공 즉지헌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모실수 있게 되었다.
오늘이 바로 일본 덴리대학 명예교수이신 오까야마 젠이치로 교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개최되는 '디지털 시대의 한국학 : 연구자원, 도구, 방법론'을 주제로 하는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 차 방한하셨다. 기계유문 선현들의 초상화를 친견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은 물론 영인본도 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분에 대해 예의를 표하고자 설레는 마음으로 나의 몸을 대구행 기차에 실었다.
드디어 고대한 오까야마 명예교수님과의 반가운 상봉에 이어 학술발표를 듣고 다음 일정 때문에 일찍 자리를 나섰다.
오늘 대구 일정 동행에는 유병도 포럼운영위원장이 수고를 해주고 있어서 마음 편하게 다음 행선지인 대구 상덕사와 경북대학교 박물관 야외 비석군 탐방 일정을 시작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구경북의 자존심 명문 국립경북대학교 캠퍼스에 들어섰다. 교내 박물관과 본관 사이의 드넓은 잔디정원에 전시된 문화재들이 즐비했다.
석불, 석탑, 석조부도, 고인돌, 문인석 등을 비롯하여 그 유명한 척화비가 눈에 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찾는 석빙고비와 기계유문 선현의 비석은 보이지 않았다. 척화비를 끼고 박물관 정면에서 우측으로 시선을 돌리자 문화재 구역이라는 팻말과 함께 석빙고비, 비석군 그리고 석불, 문인석들이 우리를 반기듯 도열해 있었다.
먼저 조선시대 비석군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9기의 비석 가운데 5개가 기계유문 선현을 기리기 위한 것이 었다.
조선시대 비석군
朝鮮時代碑石群 Stele of the Joseon Dynasty
대구 시내 각 곳에 흩어져 있던 조선시대의 비석들이다. 각 비석은 주로 대구지역의 관리들이 못池이나 석빙고 등을 세우는 등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며 선정善政을 베푼 것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으로 신정비, 불망비 등으로 표현된다. 비석을 세운 연대와 장소가 기록된 경우도 있고, 세부 경위를 기록하기도 한다.
이 외에 입마시 정전방금 절목비의 경우 불망비 뒷면을 재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역마제도驛馬制度 시행과정에서 뇌물을 주고 새치기하는 것을 금하여 무질서를 바로잡는 내용이다.
1.판관유후명악청덕선정비 判官兪候命岳清德善政碑 1716년(숙종42) 3월 수남면에 새움
2. 판관유후명악거사비 判官兪候命岳去思碑 1716년(숙종42) 8월 수(성)현에 세움
3. 판관유후명악영세불망비 判官兪候命岳永世不忘碑 1715년(숙종41)
4. 판관유추청덕애민선정비 判官兪候清德愛民善政碑 1716년(숙종42) 3월 수북(면)에 세움
5. 관찰사유상국척기영세불망비 觀察使兪相國拓基永世不忘碑 1730년(영조6) 4월 수성현 6면에 세움
6. 대구석빙고비 大邱石冰庫碑 1713년~1716년(숙종39-42)
7. 입마시 정전방금 절목비 立馬時情的禁節目碑 이방정건학불망비 吏房鄭建鶴不忘碑
8. 우복정선생 영세불망비 愚先生永世不忘碑 1670년(현종 11) 10월
9. 판관김후휘기현 선정비 判官金兪諱箕絢善政神
*1:5는 수성초등학교(1994), 6은 축우소한 기상대공원, 1973), 7은 대구여고(1970), 8은 지산못(현 녹원맨션, 1985), 9는 파동스포츠센터(1980)에서 각각 옮겨 왔다.
그야말로 경북대학 야외 박물관은 기계유문의 자긍심 제고를 위한 체험 전시장 같았다고나 할까.
나도~ '기계유씨' 라니까요.
뻐기기는 이 정도로 하고 더운 날씨 탓에 데미소다 음료를 게눈 감추듯 들이키고 병도 일가와 함께 대구 근대화 거리 투어 코스에 있는 문우관과 상덕사 비각을 찾아나섰다.
대구 구도심에 위치한 상덕사 비각과 문우관은 명성과는 달리 관리가 허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굳건히 잠긴문 덕분에 낮은 담장 너머 비각, 문우관과 내정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상덕사 방문 전에 미리 자료 사진을 본터라 비석을 보지 못했지만 아쉬움은 덜했다.
상덕사비
尙德祠碑 Sang-deok-sa monument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있는 조선 후기 경상도관찰사 이숙과 유척기를 제향하려고 건립한 묘정비.
[개설] 상덕사비(尙德祠碑)는 조선 후기 백성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던 경상도관찰사 이숙(李䎘)[1626~1688]과 경상도관찰사 유척기(兪拓基)[1691~1767]의 업적을 기리고자 1826년(순조 26)에 상덕사(尙德祠)에 세운 묘정비(廟庭碑)를 말한다. ‘상덕사 묘정비(尙德祠 廟庭碑)’라고도 한다. 옛 기록을 따르면, 경상감영의 성(城) 동쪽 1리[0.4㎞] 되는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건립 경위] 상덕사비는 상덕사의 묘정비(廟庭碑)로 건립하였다. 상덕사는 경상도관찰사 이숙과 경상도관찰사 유척기를 제향하는 곳이다. 원래는 사당, 비, 비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비와 비각만 남아 있어, 상덕사 비각 또는 상덕비각이라고도 부른다. ‘상덕사’라는 명칭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명명하였고 편액(扁額)은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가 글씨를 썼다. 이숙은 1671년(현종 12)에 경상도 전역에 기근이 들었을 때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며, 학교를 열어 공부할 수 있게 하였다. 유척기는 유학을 장려하고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기금을 마련하여 군역과 부역을 경감할 수 있게 하였다. 1826년(순조 26)에 두 사람의 업적을 기리고자 묘정비로서 상덕사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은 경상도관찰사 조인영(趙寅永)이 지었다.
[위치] 원래 상덕사비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1가에 있었다. 1910년에 이전하여 현재는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570-1에 있는 문우관(文友觀) 내 상덕사 비각에 있다.
문우관
文友觀 Mun-woo-gwan
이 학당(學堂)은 한일합방 후 대구의 낙육재(樂育齋)와 양사재(養士)가 폐허가 되어 선비들이 돌아가 의지할 장소가 없는 상황에서 채현식(蔡憲植, 1855~1933)이 1914년 상덕각(尙德閣)에서 선비들을 모아 강학할 장소를 삼고 해마다 봄, 가을로 선비들이 모여서 강론하는 규례를 정하여 시행하고, 1918년 구달서(具送書, 1850~1925)와 함께 선현을 높이고 유학을 보위하며 윤리를 밝히고 학문을 진흥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설립하였다. 문우관의 명칭은 '논어의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인을 돕는다. [君子 以文會友以友輔仁]"는 말에서 취하였다.
[형태] 상덕사비는 대석(臺石), 비신(碑身), 개석(蓋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비신은 높이 144㎝, 너비 59.5㎝, 두께 29.5㎝의 크기이다.
[금석문] 상덕사비의 전면에는 ‘상덕사비(尚德祠碑)’라는 비제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덕사(尙德祠)는 감영(監營)의 성(城) 동쪽 1리쯤에 있으며, 그 이름은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지었고, 현판은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의 글씨이다. 이곳은 예전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한 이숙(李䎘)과 유척기(兪拓基)를 함께 제향하는 곳이다. 현종 신해년(1671)에 경상도 전역에 기근이 들었을 때, 이공(李公)이 명을 받아 와서 절제(節制)로서 다스렸다. 공은 이때 창고를 열어 보태어 주고, 부세(賦稅)를 깎아 주면서 직접 나가서 구휼 활동을 하였으며, 흩어져 떠돌던 자들이 돌아온 후에는, 양로 잔치를 열고 향사례(鄕射禮)를 베풀면서, 학교에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러자 온 도에서 크게 경사스러워하며 살아 있는 공의 형상을 그려 놓고 제사지내다가 후에 여론에 따라 모든 의식을 서원과 같이하였다./ 유공(兪公)의 관찰사 재임 기간은 영조 병오년(1726)에서 정미년(1727)까지이다. 유학을 흥기시켜서 교화를 펼쳤으며, 백성들의 민생고를 척결하면서 구휼하고 어루만지는 정치로, 이공(李公)과 함께 짝을 이루어 찬미(贊美)되었다. 예전부터 사냥꾼들에게 꿩을 잡아서 영부(營府)에 바치게 하던 것을 모두 없애 주고, 만금(萬金)의 돈을 출연하여 전지를 마련하여 농사를 짓게 하여 군역(軍役)이나 부역(賦役)에 대응하게 하였으니,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입지 않음이 없었다. 11년이 지난 뒤 다시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기뻐하면서 정치를 펼침에 번거롭지 않게 하여 주었으니, 고금의 정치 행적들을 되짚어 보더라도 공(公)보다 먼저 꼽을 자가 없었다. 정조 무술년(1778)에 공을 추가로 봉사(奉祀)하며 그 덕(德)을 영남에서 첫째로 꼽았다./ 삼가 상고하여 보면, 이공(李公)의 아버지 유겸(有謙)이 이곳에서 부사(府使)를 지냈고, 유공(兪公)의 할아버지 철(㯙)이 이곳에서 관찰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명악(命岳)이 이곳에서 판관(判官)을 지냈는데, 모두들 뛰어난 공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공(二公)은 이들 선공들의 덕행을 본받아서 미루어 넓혀 나갔던 것이며, 백성들은 이들을 보고 배운 것을 익혀 그 덕(德) 또한 깊어진 것이다. 『시경(詩經)』에서는, ‘대대로 덕을 지어 구원한다[世德作求]’라고 하였고, 그 전(傳)에는,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인이 행하여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믿을 만하도다./ 한편, 이 감영의 영주(營主) 제명기(題名記)를 살펴보면 고려(高麗) 문종(文宗) 33년부터 도부서사(都部署使) 이제원(李齊元)을 시작으로 고려조에서 516명, 본조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400여 명이 재임하였으니, 그 가운데에는 직무를 잘 처리하여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한 자 역시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독 이 두 분에게만 제사지내면서 그 유풍(遺風)과 여운이 성대하여 차마 잊지를 못하였으니, 어찌 그 지모(智謀)와 공력(功力)을 계승하여 취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반드시 진실되고 거짓이 없을 것이다. 아! 백세(百世) 전의 일이 천세(千世) 후에도 있으리니, 이후에 지방관을 맡게 되는 자는 이 상덕사(尙德祠)를 보고 스스로를 면려(勉勵)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유공의 증손 장주(長柱)는 지금 안의현감(安義縣監)이고, 개령현감(開寧縣監) 홍치규(洪穉圭) 군이 외현손(外玄孫)이며, 나 또한 분에 넘치게 외외증손이다. 함께 모여 사당(祠堂)을 살펴보고 알현한 후에, 그 사실들을 기록하여 남기기로 하였다. 그래서 내가 비문을 짓도록 추천되었고, 글씨와 새기는 일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분담시키기로 한 백성들의 뜻을 따랐다. 이공의 자는 중우(仲羽), 호는 일휴당(逸休堂), 시호는 충헌(忠憲)이고,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유공의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시호는 문익(文翼)이고,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두 공(公)은 모두 태사(台司, 政丞)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그 공적이야 왕실에 남아있을 것이고, 여기에서 약술(略述)한 것은 본 감영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문익공(文翼公)의 외외증손(外外曾孫) 관찰사(觀察使) 조인영(趙寅永)이 짓고, 외현손(外玄孫) 개령현감(開寧縣監) 홍치규(洪穉圭)가 쓰고, 증손(曾孫) 안의현감(安義縣監) 장주(長柱)가 새겨, 병술년(1826)에 세우다
[尙德祠在營城東里許 其號尤菴宋先生時烈命也 其額竹泉金公鎭圭書也 其祀故觀察使李公諱䎘 故觀察使俞公諱拓基 並享之所也 始 顯廟辛亥 全嶺饑 命李公 以節治之 廩補稅蠲 躬莅賑事 流散者旣集 然後設養老之讌 肄鄕射之禮 申之以詩書學校 使一路丕變 民爲圖形而生祀之 後因輿論凡儀式如書院焉 兪公之按節當 英廟丙午丁未之間 興儒化剔 民瘼賙恤撫摩之政 與李公匹美 而舊以佃夫 歛雉雞供營府者 悉除之 捐萬金置田 應其役 民到今 莫不被賜 越十一年 復膺前 命 髫白胥悅 不煩施爲歴數 近古治行 指無先公屈者 及 正廟戊戌 以公像追奉之 爲其德於嶺一也 謹按李公之先公諱有謙 嘗爲知府 兪公之先大公諱㯙 先公諱命岳 亦嘗爲道伯與府判 咸有異績於此 而二公式克承之 又從而推廣之故 而民習焉德之也深 詩曰世德作求 傳曰必世而後仁 信哉 且是營有營主題名記 自麗文宗三十三年 都部署使李齊元 始可考而在麗得五百一十有六人 入 本朝今爲四百有餘人 此其中能善其職 惠澤加於民者 亦多矣 獨於二公 俎豆之 其遺風餘韻 藹然 有不忍忘者 豈智力襲而取之哉 其必有眞實 無僞之所孚感也 嗚呼 百世在前 千世在後 後之任藩宣者 觀於此尙德之祠 亦足以自勵矣 兪公曾孫長柱 方宰安義 開寧宰洪君穉圭 爲外玄孫而寅永亦忝彌甥 適聚同省 謁于祠 謀所以紀其實 推寅永文之書與篆分屬之兩使君 從民志也 李公 字仲羽 號逸休堂 諡忠憲 牛峰人 兪公 字展甫 號知守齋 諡文翼 杞溪人 二公並位台司 功業在 王室而此畧之者 以嶺績爲重云/ 兪文翼公外外曾孫 通政大夫 守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大邱都護府使 趙寅永撰 外玄孫 通訓大夫 行開寧縣監 兼尙州鎭管兵馬節制都尉 洪穉圭書 曾孫 通訓大夫 行安義縣監 兼 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 長柱篆 上之二十六年丙戌十二月 立].”
[현황] 상덕사비는 대구광역시에서 지정한 문화유적으로서 상덕사 비각 내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대구광역시 중구에서 진행하는 ‘근대골목투어’ 프로그램의 5코스 남산100년 향수길에 포함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경상도관찰사였던 이숙·유척기의 업적을 기리고자 세워진 상덕사비는 조선시대에 백성을 구휼하고 선정을 베푼 목민관(牧民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4代 걸쳐 대구서 선정 펼친 유명악
대구에는 역대 경상도관찰사나 대구부사의 선정비가 여러 개 있다. 이 중 유명악의 선정비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무려 13개다. 경상감영공원에는 경상도관찰사를 2번이나 역임했던 아들 유척기의 선정비와 나란히 서 있고, 경북대 야외박물관에도 4개의 송덕비가 있다.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화원성명교회 인근 유명악 화원비각에는 선정비가 8개 있다. 1993년 달성군이 화원읍과 달서구 일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데 모은 것이다.
유명악은 숙종 39년(1713) 대구부사로 와 3년간 재임했다. 부임하던 해 가뭄이 극심했는데 그가 부임하자마자 큰 비가 내려 ‘하늘이 보낸 사또’라고 칭송을 받은 설화가 전해온다. 그리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자 창고를 열어 굶주림을 면하게 했고, 조세와 부역을 감해 명판관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에 대구지역 33개 마을의 주민이 각각 송덕비를 세웠다. 판관 유명악은 기계유씨로, 5대조 유강과 부친 유철이 경상도관찰사를 했고 아들 유척기는 2번이나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유척기의 선정비는 달성군 다사읍 매곡정수장 맞은편 도로변과 경북대 야외박물관, 경상감영공원 등지에 있다.
유척기 역시 아버지처럼 학문을 장려하고 민생을 보듬은 명판관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영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대구시 중구 남산동 상덕사 비각에는 유척기에 대한 비문이 남아있다.
유명악은 재임 중 현 중구 남산교회 북편에 석빙고를 건축했다. 그 전까지는 두꺼운 초가로 지하창고를 덮고 3년마다 부민들로부터 짚을 거두어 교체하던 것을 돌을 이용해 높이 3칸 길이 10칸이나 되는 규모로 개축했다.
그는 석빙고를 건립하면서 부민에게 일절 경비를 부담시키지 않고 경상감영의 지원을 받았다. 경북대 야외박물관에 있는 석빙고비문에 따르면 반월형 무지개 형식으로 9단이라고 나와 있다. 현재 청도에 있는 석빙고와 같은 모습이다. 석빙고는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같이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가와이 아사오가 쓴 ‘대구이야기’에 석빙고를 없앤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내용이 나온다. 석빙고는 사라지고 비석은 옛 대구측후소(중구 남산동)에 보관되다 1973년 경북대로 옮겨졌다. 유명악의 선정비가 많은 것에 대해 아들이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해 그랬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후손들은 ‘선정비가 유명악 판관 이임 후 2년 안에 모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한다(2014.1.10.자 영남일보 기사 아래 링크 기사 인용).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40110.010340752350001
4대에 걸쳐 대구에서 선정을 펼쳐 추앙받는 선현들에 대해 기계유씨의 후손들은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아마도 이런 표현이 맞지 않을까 싶다.
들어봤나? 마~ 대구 경북에서는 '척'하면 '기'라!
명악 할아버지와 척기 할아버지는 우리의 자랑인기라~
난 여기저기에 힘 빡주며 엄청 자랑하며 다닌다 아이가~
기계유씨포럼과 대구경북종친회 일가님들과 가진 번개모임에서 유명악 할아버지와 유척기 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만큼는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덴리대학 소장 초상화 영인 제작본 가운데 문익공 지수재 유척기 할아버지 초상화 영인본 1점을 향후 기계유씨포럼 명의로 대구경북종친회에 기증하여 기념관 또는 적절한 장소에 모실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지역 종친회와 함께하는 기계유씨포럼은 새로운 문중문화를 선도합니다.
귀휴당(歸休堂)에서 소강(紹崗) 유영식
2024.5.9.(목)
첫댓글 일가님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경북대학교 야외 박물관에 설치되어 있는 공덕비 여러번 보았습니다. 좋은 역사 공부 시간이었습니다.
기계유씨포럼의
좋은글 (4대에 걸쳐 대구 경북에베푼 기계유씨 선현들의 선정비를 찾아서)을 읽고
현장견학의 감회와 함께
많은 자긍심을 느낍니다.
기계유씨의 독립적 조직이 아니라
경상도의 백성들과 함께한 기계유씨라는 생각을 하니 또다른 생각이 듭니다.
기계유씨포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낍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대구 내려가는 길에 선조 유적을 살펴 보셨군요
대구 경북지역은 본향지답게
유서 깊은 선조유적이 많이 있습니다.
어디 그뿐이리오?
'빨간마후라의 사나이'를 아시나요?
비슬산에는 유치곤장군 호국기념관도 있지요
대구에서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이 계기로 더욱더 열심히 옛 선현들을 찾아뵙고 그 뜻을 기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일가님들 수고하셨습니다 행복한하루되세요
한글자도 빼먹지않고 모두 읽었네요 공부도많이되고 자부심도 충만하고 우리교수님 감사합니다...
유익한 내용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진작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글입니다.
언제 시간 내어 경북대학교(대구)에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