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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대림 제2주간 수요일(2009-12-09) |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에게 당신께 와서 안식을 누리라고 초대하십니다. 또한 루치아 성녀처럼 현실에서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에 그 십자가를 가볍게 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가 삶의 무게에 힘들어할 때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안식처이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한 디다코(후안 디에고) 쿠아우틀라토아친 기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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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추천성가] : 시작성가 : 88번 임하소서 구세주여 봉헌성가 : 213번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215번 영원하신 성부 217번 정성어린 우리 제물 성체성가 : 158번 구세주예수 그리스도 500번 평화의 하느님 502번 주의 빵을 서로 나누세 파견성가 : 92번 구세주 내 주 천주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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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대림 제2주간 수요일(2009-12-09) | 미사 전례 † |
■ [입당송] : 하바 2,3; 1코린 4,5 참조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오시어, 어둠 속에 숨은 것을 밝히시고, 모든 민족들 앞에 당신을 드러내시리라.
■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라 하셨으니, 나약한 저희가 천상의 영약으로 힘을 얻어, 구원의 길을 닦아 나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위대한 분이시다. 하늘의 별들을 창조하셨고, 땅 위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께는 피곤함도, 지치심도 없다. 오히려 힘겨운 이를 위로하시고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는다(제1독서). 예수님의 멍에는 그분의 가르침이다. 서로 사랑하며 용서를 베풀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기에 멍에라고 하셨다. 힘들지만 지고 가야 한다는 암시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삶의 멍에가 무거울 때는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복음).
■ 제1독서 :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25-31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화답송 : 시편 103(102),1-2.3-4.8과 10(◎ 1ㄱ)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 복음 환호송 : -
◎ 알렐루야. ○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 ◎ 알렐루야.
■ 복 음 :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 예물기도
주님, 이 예물을 정성껏 봉헌하며 비오니, 주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신비를 거행하여 저희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대림 감사송 1: 194면 참조>
■ 영성체송 : 이사 40,10; 35,5 참조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 영성체 후 묵상 :
삶은 누구에게나 힘겹습니다. 쉽고 편한 인생은 없습니다. 곁에서 볼 때 아무런 고생 없이 사는 듯해도 그 나름대로 어려움은 있습니다. 돈과 재물이 넘치는 사람일지라도 자신만이 느끼는 공허가 있는 법입니다. 아픔과 기쁨이 ‘함께 얽혀 있어야’ 건강한 인생이 됩니다. 너무 풍족하기만 해도 행복한 삶은 아닌 것입니다. 많은 경우 신앙인은 착각합니다. 올바르게 살면 인생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 인생의 문제점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이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시련이 왔을 때’ 자신을 희생자라고 단정하게 됩니다. 바르게 잘 살아왔는데 왜 고통을 주시느냐며 원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삶의 ‘멍에’가 있습니다. 인생을 엉뚱하게 살지 말라고 주님께서 주시는 ‘제동 장치’입니다.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성격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자라난 환경이나 가족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선택한 직장이나 직업이 멍에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사는 것이 힘들고 관계가 고통스러울 때, 이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인자하시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
■ [파견] : |
[다해] 대림 제2주간 수요일(2009-12-09) | 복음 강론 [Lectio Divina & Comtemplation] * 독서 : 이사 4,25-31 / 복음 : 마태 11,28-30 * |
<독서강론-1> :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
오늘 독서에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다.
다시말하면 그분에게서 주 하느님의 구원, 하느님의 구원의 실재가 나타났다. 주 하느님의 구원 성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성업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랑여주고 있다. 더 깊이 해석하면 주 하느님의 구원보다 훨씬 더 전진된 완전한 구원인 것이다. 그것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사야 40장 28-31절에는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라고 하였다. 그런즉 그분을 누구와 비교하겠는가!
코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하느님을 누구와 비기겠는가! 그 백성이 그렇게 해방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코레스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의 왕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감동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켰고 그들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성전을 건축하게 하였는가! 그는 방백들에게 이스라엘을 도우라고 하였고 물질적으로도 성을 재건하도록 도와주었다. 놀라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누구를 이런 하느님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이분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창조하신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다고 하였다. 창조 안에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신다. 무엇을 만드는 데는 피곤함이 있지만 창조 안에는 피곤함이 전혀 없다. 창조 안에는 슬기가 한이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를 헤아릴 수 없다. 얼마나 크고 높고 깊은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창조하신 하느님은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주 하느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독수리가 늙어서 힘이 없으면 높은 산에 올라 반석 위에 날개를 때려서 깃털을 다 빼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벌거벗게 되면 새 깃털이 나오고 새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허물을 벗고 다시 새 힘을 얻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항상 그 안에 창조가 있으니까 달음박질하여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다.
바오로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그 안에 창조하신 하느님, 영원하신 하느님이 있었기에 가능한 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한정된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신 이가 있으면 한정이 없다. 이분이 비길 데 없는 그리스도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을 비길 데 없는 그리스도에게서 실제로 보았다.
그분의 오심을 보면 인생의 모든 길을 통과해서 오셨다. 전 인생의 길을 통과해서 우리의 운명으로 오셨다. 그분은 다말을 통해서 후사의 길로 오셨다. 영원한 후사, 하느님의 후사로 오셨다. 라합을 통해서는 생명의 길로 오셨다. 라합은 살기 위해서 민족을 버리고 왔던 사람이다. 룻을 통해서는 은총의 길로 오셨다. 그는 보아스의 은총을 입고 다윗왕의 할머니가 되었다. 그분은 우레아의 아내의 길로 오셨다. 그 길은 배필의 길이다. 우레아의 아내는 자기 힘으로가 아니라 다윗이 부르니까 그의 아내가 되었던 사람이다. 마리아의 길은 운명의 길이다. 그는 자기와 관계없이 성령이 그녀에게 임해서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그 길은 운명의 길이었다. 이런 길을 통해서 그분은 오셨다. 그분이 이렇게 오셨다는 것을 증거한 이유는 그분이 모든 인생을 다 통과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분은 전 인생을 통과하셨다.
그분은 가심에서 의인으로서 악인을 대신하셨고 순종으로 우리의 운명을 폭로하셨다. 그래서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하셨고 사람을 사람 되게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새 생명의 조상, 새 인류의 조상이 되셨다. 그는 오고 가심에서 인생을 완전하게 하셨다. 그런즉 이런 분을 누구와 비교하겠는가! 비길 데 없는 분은 그리스도뿐이다. 비길 데 없는 하느님은 야훼였듯이 비길 데 없는 사람, 비길 데 없는 인격은 그리스도다. 비길 데 없으신 야훼의 실재이신 것이다.
사도들의 소망은 그분의 다시 오심이다. 이렇게 완전하신 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나심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져왔고 다시 오심에서 연합의 실체로서 교회를 가져 오실 것이다. 그분은 신부를 맞이하러, 신부를 대동하고 오신다. 처음 오실 때는 혼자 오셨지만 두 번째 오실 때는 신부를 대동하고 오신다. 그런즉 더욱 영광스럽게 오실 것이다. 처음에는 백성이 없이 오셨지만 두 번째 오실 때는 백성과 함께 오신다. 우리는 백성과 함께 오시는 왕, 신부와 함께 오는 신랑이신 그분을 기다린다.
그분이 오시면 구원이 시작된다. 내 인생에 그분이 오시면 새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에게 예수가 오신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시작된 것이다. 육신으로 태어난 내 인생, 아담 안에 있는 한 인생이 실제의 사람으로, 새 생명의 사람으로, 새 인류로 거듭나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다. 하느님의 목적이 없다면 동물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목적이 있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하느님의 목적은 성취되었다. 구약은 하느님의 목적이 예언된 것이고 신약은 하느님의 목적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오심은 내 인생의 완성인 것이다.
우리 인생은 예수께서 오셔야지만 성취되고 완성된다. 그런즉 그분은 참 구원자, 완전한 구원자시다.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는 해도, 달도,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야훼(주님)까지도 포함하신다. 그래서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만유가 다 포함되고 만유가 다 예수를 표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대로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있다. 그리고 주 하느님까지도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오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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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강론-1> :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방법
‘비오는 날이면 가끔 비를 그냥 맞으며 걷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럴 때면 '과연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우산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산을 깜빡 잊고 가져 오지 않아서 뛰어다니는 사람에게는 우산이 필요할테지만, 애처롭게 비를 맞으면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우산보다는 함께 걸어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울고 있는 사람 중에 어디가 아파서 우는 사람이면 약이 필요하겠지만 서럽게 우는 사람에게는 약보다는 기대어 울 수 있는 가슴 하나가 없어서 일테지요. 술집 앞에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서성거리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이겠지만 술상 앞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술이 아니라, 앞에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눌 사람이 아닐런지요.
누군가 당신의 마음 씀씀이, 당신의 행동을 지켜보고 한번쯤 되돌아 흐뭇한 미소 한 번 지을 수 있다면 당신은 그 몫을 해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계십니다. 글자 속에 파묻혀 죽은 하느님을 찾으며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을 노예처럼 만들어 버렸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하느님을 우리에게 아빠, 아버지로 소개해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벗이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시고 계십니다.
많이 안다는 것에 머물러버리지 않고 먼저 실행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느님 가까이 가는 방법임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많을 것을 해내려다 보니 너무도 많은 것을 잊고 살게 됩니다. 일이 많을수록 살아계신 하느님께 더욱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모든 일은 하느님의 것이니 그분 안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더더욱 일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는 것... 등...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신세 망친 이유, 나약하게 죽은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제서품을 받기 전 신학을 공부하고 사목일선에 주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지 8년째가 되었지만 그런 마음을 나는 아직도 품고 사는지 하고 반성해보면 마음이 아파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졸아만 들고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자꾸 힘들 적에 사랑하며 용서하고 보듬어 주셨던 그 분의 따스한 온기를 잊어가니.. 이제 다시 마음을 바로 세워야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내쳐 버리고 냉정해져 버리면 누가 나의 마음을 보고서 주님의 행복한 미소로 답해줄 수 있겠습니까!
느리게 오더라도, 아름다운 몸짓이 아니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주는 진한 여운으로 남는 주님의 미소로 다시 나야겠습니다.
주님, 항상 새 날이게 하소서..... 기대어 울 수 있는, 따스한 온기의 가슴이게 하소서............◆
[말씀자료 : 강병규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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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강론-2> :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어느 미사에서 영성체가 끝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습관대로 잠깐 묵상시간을 가졌습니다. 영성체의 순간, 너무나 은혜로운 감사의 순간이기에 그냥 후다닥 일어날 수가 없지요. 꽤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신자석을 한번 둘러보았는데, 제 눈에 ‘확’ 띄는 자매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다른 신자들에 비해 표정이나 자세가 너무나 달랐습니다. 다른 분들의 모습은 천태만상이었습니다. 꽤 긴 침묵시간을 못 견뎌 몸을 뒤채는 사람, 심심하다보니 주보를 뒤척이는 사람, ‘빨리 집에 가야 하는데’ 하는 얼굴로 자꾸 시계를 보는 사람, 기다리다 못해 먼저 일어서는 사람...
그러나 그 자매님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했습니다. 그 얼굴은 기쁨의 빛으로 가득 차서 광채까지 났습니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미소 짓는 듯 했습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위로, 참된 평화, 참된 휴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우리가 행복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 다니지만 미사참례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그 무엇을 찾아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지만 성체성사보다 더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찾아 정처 없는 순례를 거듭하지만 성체성사야말로 기적입니다.
매일의 미사 중에 우리는 기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에로, 슬픔에서 환희로, 좌절에서 희망으로, 죄의 종살이에서 자유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가는 은총의 파스카 축제, 기적 중의 기적이 바로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입니다. 매일 기적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데, 또 다른 기적을 찾아 헤매 다니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이른 아침, 일출 무렵, 풀잎 끝에 맺혀진 이슬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참으로 영롱합니다. 정말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잠시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즉시 말라버립니다. 이른 아침, 강가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단합니다. 정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찰나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눈앞에서 그 자취를 감춥니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인간적인 위로가 그렇습니다. 여기 저기 위안거리를 찾아 숱하게도 헤매 다녀보지만 대체로 다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부초 같은 것들입니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것들입니다.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가치 있는 대상, 보다 오래 가는 대상을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자취 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인연들도, 우리가 목숨처럼 놓기 싫어하는 물건들도 덧없이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오직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영원하십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영원히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위로자이십니다. 주님만이 영원한 안식처이십니다.
연인들에게 있어 가장 달콤한 휴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겠지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가장 달콤한 휴식은 그분 앞에 자리 잡고 앉는 것입니다. 그분의 좋으심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일입니다.............◆
[말씀자료 : 양승국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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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강론-3> : 근심 걱정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어려움과 근심, 걱정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이 제일 어렵고 자기 혼자만 힘든 것 같지만, 사실은 각자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모두가 나름대로 살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 때뿐이지만 삶의 걱정을 잊어보려고 술을 많이 마시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각박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괴상한 종교에 심취하기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삶의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스스로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고 어려운 현실은 그대로이고 오히려 더 큰 실망과 좌절을 겪게 될 뿐이다. 잘못된 길로 계속 가게 되면 더 큰 수렁에 빠지게 된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도 마찬가지로 삶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신앙인이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지만 가야 하는 그 길로 가야 한다. 현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삶의 현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마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 또 신앙인은 허상을 쫓아 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 좌절과 실패도 겪게 되지만 그런 것까지도 이겨내고 매일 매일을 힘차게 살아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이다.
신앙인이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멍에’를 메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랑의 멍에를 지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의 어려움과 근심,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을 통해서, 당신의 온 삶을 통해서 삶을 무게를 덜고 좀더 가볍고 기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삶의 어려움,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지워주시는 사랑의 멍에를 지고 살면 나도 모르게 훨씬 편안해 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말씀자료 : 손현기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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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강론-4> : 평화와 안식을 주는 사랑의 멍에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예루살렘이 로마에 점령당하여 로마의 지배 아래서 억압을 당해야 했고, 경제적으로는 주둔군 로마 군인들에게 결코 만만치 않은 세금을 바쳐야 했으며, 백성들도 여러 파당으로 갈려서 불목이 심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 안에서라도 위로를 찾고자 했지만, 율법과 이를 지키기 위해 마련된 세칙들은 오히려 백성에게 부담을 주고 죄인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백성은 종교 안에서도 안식을 찾기 어려웠다.
이처럼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백성을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이 백성을 부르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이실 정도로 넓은 사랑을 가지고 인생고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모두 당신께서 주시는 구원과 안식에 초대하신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마지막 날에 누릴 영원한 안식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모든 갈등을 해소한 후에 누리는 평화와 안식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죄에서 해방되고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불안과 염려, 고통 등 우리를 괴롭히는 악의 세력에서 해방된다.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우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들과는 대조적으로 절대적인 평화와 안식을 약속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주신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며 당신의 평화를 주신다(요한 14,27).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 그 멍에는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율법의 멍에(집회 51,26)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랑의 멍에이다. 주님의 멍에인 사랑의 멍에를 메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안식을 누린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멍에를 메는 것만이 인생의 질고를 극복하고 안식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다.
참된 안식은 이미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멍에는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1요한 5,3). 그것은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그 어떤 가르침보다 더 숭고하다. 또한 예수님의 짐은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고 선하며, 바르고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벼운 까닭은 나 혼자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메기 때문에 가볍고 편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우리 혼자서만 메도록 하지는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메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힘과 용기를 갖고 그 멍에를 함께 멜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멀리 계시며, 무관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인생길을 걷고 계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얻으며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다면, 인생고로 인하여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지 못하고 있다면, 죽지 못해 살고, 마지못해 살면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평화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여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다면,
당신 앞에 나와 당신과 함께 당신의 멍에 - 사랑의 멍에를 메고 살라고 초대하신다. 그 멍에는 당신과 함께 메는 멍에이며, 사랑의 멍에이기 때문에, 편하고 가벼우며, 나아가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하는 멍에이다. 바로 그 멍에를 주님과 함께 메도록 오늘 우리를 초대하신다..............◆
[말씀자료 : 경규봉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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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강론-5> :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
사랑하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울산 복산성당의 김 현 안셀모 신부입니다.
철부지 아이 같은 나의 투정을/ 언제나 말없이 받아 넘기고/ 부드러운 미소로 날 반기는/ 그대는 내 인생의 동반자/ 그대 따스한 눈길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내 마음의 샘터엔/ 행복이 가득/ 목마른 꽃잎 위에 촉촉한 이슬/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
가수 엄선영씨가 부른 ‘내 인생의 동반자’란 대중가요의 노랫말입니다. 우리들은 이 노랫말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아름다운 인연의 끈을 맺기 위한, 평생의 동반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인생의 동반자를 찾기 위한 힘겨운 여정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바로 우리들이 힘들고 지칠 때, 기대어 위로를 받고 편안한 쉼을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인생의 동반자를 곁에 두고도 찾지 못하고, 멀리서만 찾아 헤매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시며, 바로 당신 자신이 우리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반자는 곁에 있는 사람과 보폭을 맞추며, 같은 곳을 향해 서로 의지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헤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힘겨워하는 우리들에게 먼저 손 내밀며 우리들의 동반자가 되어주시겠다고 다가오신 예수님과 우리들이 언제나 함께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은 어떠한 삶이겠습니까?
제가 얼마 전 한 요양병원에 병자 방문을 갔다가 그 곳에 쓰인 글귀가 너무 좋아서 메모해서 온 것이 있는데, 바로 이 글귀 속에 들어있는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이 아닐까 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마음씨 따뜻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가슴이 넉넉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은 먼저 남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용기있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삶을 성실히 가꾸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언제나 손 내밀며 다가오시는, 우리들의 동반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아름다운 동행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말씀자료 : 김 현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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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강론-6> :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들, 병들고 탄식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편히 쉬게 하리라)”.....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짐이 무엇이고 내 멍에가 무엇인지 오늘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져 보려고 항상 그분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찾아 나서셨으며, 식사를 함께하던 냉대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당신께로 부르시며, 그들을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흩어져 있고 지쳐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며 멍에를 메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짐과 멍에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억눌리고 고된 그들의 생활의 짐이며, 특히 율법의 해석으로 인해 생겨난 견딜 수 없는 규정들의 짐입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짐 때문에 그들은 지쳐 있고 억눌려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농부가 가축에게 짐을 지우듯이 율법의 규정이라는 힘들고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지워주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을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으로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규정들을 다 지킬 수는 없었으며 율법학자들 자신들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쉬게 한다”란 그리이스 말로 노동을 쉬게 하고 힘을 다시 돌이켜 준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게 해 주실 힘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보다도 더 철저하게 율법을 가르치셨고, 그것을 지키도록 요구하셨지만 예수님의 이러한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거나 피곤하게 하기 위해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안에 모든 계명의 핵심을 넣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은 멍에와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배워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따른다면 그러한 멍에와 짐은 가볍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멍에와 짐까지도 다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온유는 폭력에 대립하고, 겸손은 오만에 대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인간이 되셨고, 당신 스스로를 낮추시어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바로 자신을 낮추는 헌신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는 예수님! 이보다 더 고마운 스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멍에를 메고 ”란 말은 제자가 되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가벼운 짐도 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이와 일은 구분이 됩니다. 어느 날 대장이 자신의 부하 장병을 데리고 골프 연습장을 갔습니다. 그날따라 공이 잘 맞지를 않았습니다. 화가 난 대장은 부하 장병에게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김대위! 이게 일인가? 놀이인가?”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장님! 그게 일이었다면 대장님께서 하셨겠습니까? 저를 시키셨겠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놀이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문제인 듯 합니다. 예수님의 가벼운 멍에와 짐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과 불편한 멍에가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참된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얻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이 아닐까요? 받아들이기만 한다면야 얼마나 매력적인 삶이 나를 기다리겠습니까?
오늘복음의 묵상 마무리를 함께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와 짐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우리가 지어야 할 십자가가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께 순명하는 자세, 그것이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요 멍에입니다. 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짐과 멍에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2). 혹시 나도 행하지 못하면서 가정 안에서 남편이나 아내, 아이들에게 떠 넘겨버리는 것들이 있습니까? 직장이나 성당활동 안에서 남에게 떠 넘겨 버리는 것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말씀자료 : --- 수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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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믿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