耳溪 洪良浩 서예론의 철학적 탐구
장 지 훈
(경기대학교 서예과 교수)
1. 序論
2. 서예본질의 宇宙論的 이해
3. 陰陽方圓의 字畫美 구현
4. 無爲自得의 變化美 추구
5. 結論
< 논 문 요 약 >
조선은 兩亂 이후 경제와 문예가 부흥함에 따라 문예전반에서는 관념적 擬古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일어나면서 변화와 自得의 정신이 요구되었다. 서예방면에서는
기존의 書風이 규범화․형식화된 한계를 직시하고 원형의 회복과 創新을 도모하면서
이론적 탐구가 심화되었다.
조선후기 성리학은 주자학적 理氣觀의 二元的인 것에서 실학적 理氣觀의 一元的
인 것으로 그 주도적 흐름이 점차 변화되어 갔다. 이러한 理氣의 인식 변화는 조선
조후기 문인학자들의 外物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물론 문예전반에서의 美에 대한
인식변화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서예는 사상과 문예의 변화흐름과 직결되
어 있었다. 즉 문학과 회화가 道心을 구현하는 수양의 도구에서 점차 독자적 장르
로 인식되었던 것처럼 서예 또한 文以載道的 사유에서 보다 진일보하여 전문분야
로서의 담론과 창작이 제기되었다.
또한 觀念主義․擬古主義를 止揚하고 現實主義․眞情主義로 관심이 옮겨졌던 문예
성향과 마찬가지로 擬古的 外樣模寫를 止揚하고 본질에 대한 탐구와 개성의 발현
이라는 측면으로 점차 전환되고 있었다. 그러한 정황 하에서 형이상학적 서예 담론
은 조선후기 서예의 근원적 결함을 개혁하고, 그들이 처한 시대에 참된 서예를 구
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특히 洪良浩(1724-1802)는 조선중기 이후 外樣模寫에
치닫던 조선 서예의 폐단을 직시하고, 서예본질을 易理(=역철학)에 근거하여 탐구
함으로써 서예의 원형 회복과 변화의 정신을 궁구하였다.
홍양호가 서예본질을 易理로 이해한 것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여 합일되
듯 자연의 운동변화가 표현해낸 규율 또한 서예의 창작원리에도 적용된다는 인식
하에서 비롯되었다. 즉, 끊임없이 생성 ․ 변화 ․ 발전하는 易의 변화 원리를 서예의
字畫으로 구현한다면 生動不息하는 생명력 있는 서예로 거듭날 수 있다고 이해한
것이었다.
홍양호의 서예론은 서예 본질이 퇴색했던 조선 서예에 대한 비판정신의 발로였
다. 따라서 易理에 근거한 홍양호의 서예론은 변화지향적인 無爲의 自得美學으로
점철되며, 시대비판정신을 통해 서예의 원형 회복과 조선의 진정한 서예를 촉구했
耳溪 洪良浩 서예론의 철학적 탐구 103
던 東國眞體의 정신과도 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주제어 : 洪良浩, 無爲自得, 變化美學, 字畫陰陽方圓論
1. 緖論
조선조 18세기는 學藝 전반의 형식과 내용이 구체적으로 전환되는 변화의 시기
이다. 학문과 사상에서 기존의 朱子學的 性理學의 바탕 위에 實學과 陽明學․西學이
대두되었고, 문학에서는 기존의 擬古主義에 반하여 性情의 眞과 天機를 강조하는
眞詩운동과 神韻論․性靈論 등이 제창되었으며, 회화에서는 實得․眞景 등을 중시하는
眞景山水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음악에서는 판소리 이후 雜歌․散調 등의 장르가 탄
생․독립하여 서민대중의 생활과 의식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면서 감성중심의 미학으
로 이동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조 18세기는 雅의 미학에서 俗의 미학으로, 古의 미
학에서 今의 미학으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1)
서예 역시 문예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壬亂 이후 松雪體․石峯體 등의 서
예로는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의식이 일어났고, 새로운 서풍의 요청
이 고조되었다. 즉 석봉체는 송설체의 화려하고 섬세한 것을 극복하여 단엄하고 질
박한 것이 특징이었지만, 이후 그 아류들이 글자의 외형을 본뜨는 데 급급하고 擬
古에 치우치게 되면서 석봉체의 한계와 폐단이 노정되었다. 그 대안으로 서예의 전
범이라 할 수 있는 王羲之의 서풍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했던 것이
당시 서예계의 동향이었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書論家였던 玉洞 李漵(1662-1723)
에서 출발하여 恭齋 尹斗緖(1668-1715), 白下 尹淳(1680-1741)을 거쳐 양명학
적 書論家였던 圓嶠 李匡師(1705-1777)에 이르러 ‘東國眞體’라는 한국적 서예풍
을 확립하였다.
2) 특히 이서는 당시를 書道가 무너진 시대로 인식하고, 正道의 회
복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이른바「筆訣」이라는 서예이론을 저술하였다. 이서의
「필결」은 전문적인 서예이론서로서 서예를『周易』과 관련지어 이해했다는 점이
특징이며, 서예본질을 易理的 차원에서 연구한 한국 書論의 전형이라 하겠다. 따라
서 동국진체를 중심으로 한 18세기 서예를 개괄하자면, 여타의 예술분야와 마찬가
지로 法古에서 創新으로, 擬古에서 自得으로, 一元에서 多元으로 이행되는 과정이
1) 宋河璟,『서예미학과 신서예정신』, 다운샘, 2003, pp.92-94 參照.
2) 許傳,『性齋集』卷29,「弘道先生玉洞李公行狀」, 民族文化推進會 發刊, 『韓國文集叢刊』308,
p.572. “東國眞體, 實自玉洞始, 而尹恭齋斗緖, 尹白下淳, 李圓嶠匡師, 皆其緖餘.”
耳溪 洪良浩 서예론의 철학적 탐구 105
었다.
본 논문에서 대상으로 삼은 耳溪 洪良浩(1724-1802) 또한 形態美에 경도되었
던 당시의 서예문화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서예를 學藝一致的 차원에서 논의함으
로써 진정한 서예정신을 구현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동국진체라는 큰 맥
락에서 그를 동국진체 書派에 포함시키기도 한다.3) 특히 서예의 본질을 易理에 기
인하여 철학적이면서도 실천론적으로 궁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서예미학은 남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다만 그가 체계적인 전문 書論을 남기지 않았을 뿐만 아
니라 서예가이기 이전에 문학가․실학자로서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의
서예미학은 별반 주목받지 못하였다.4) 따라서 본 논문은 단편적이나마 홍양호가
언급한 편린의 書論을 통해 그의 서예미학을 易理論的 측면에서 규명해보고자 한
다. 이러한 연구는 비록 한 書家에 한정된 협의적 논의에 불과하겠지만, 한국서예
사의 이론적 가치를 提高하는 데 미력이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2. 서예본질의 宇宙論的 이해
耳溪 洪良浩(1724-1802)는 조선조후기의 문인학자이자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이
다. 본관은 豊山, 초명은 良漢, 자는 漢師, 호는 耳溪, 시호는 文獻이며, 議政府 左
贊成을 追贈받은 洪鎭輔(1698-1736)와 領議政을 지낸 沈壽賢(1663-1736)의 딸
淸松沈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漢城府判尹 ․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
學 ․ 吏曹判書․工曹判書 ․ 禮曹判書․議政府左贊成 ․ 判中樞府事 등을 지냈다. 서울 薰
陶坊의 泥峴(지금의 충무로)에서 태어났으며, 만년에 牛耳洞에서 생활하였고, 우이
동의 九曲을 근거로 하여 호를 ‘耳溪’라 하였다.
홍양호는 少論系 명문집안 출신이었으며, 그의 祖父인 洪重聖(1668-1735)은
3) 이민식은 조윤형, 남유용, 강세황, 김상숙, 홍양호 등을 동국진체 서파로 규정하고 있다. 이민식,
「동국진체의 형성과 전개과정」,『영 ․ 정조대 동국진체 특별전』, 한신대학교박물관․한신대학교국
사학과, 1998, p.15.
4) 洪良浩의 서예에 관한 선행연구는 다음과 같다.
신영주,「18․9세기 홍양호가의 예술 향유와 서예 비평」,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장지훈,「이계 홍양호의 서예관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조선조후기 서예미학사상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洪世泰(1653-1725), 정선, 이하곤, 윤순 등과 교유하면서 당시 문예방면에 명성
이 높았던 인물이었다.5) 그러나 일찍이 부친이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하자 가
세가 잠시 기울었고, 그 이후에는 外叔인 沈錥에게 훈육되었다. 심육은 정제두의
수제자였고 홍양호는 심육의 학문과 삶의 자세를 배웠기 그 역시 양명학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지방관을 두루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古碑를 수집하여
탁본하는 등 考證學에도 조예가 깊었고, 牧民官 시절에는 實事와 實用에 관심을 두
면서 實學에도 밝았으며, 燕行 이후에는 正祖에게 改革案을 올리는 등 北學에도 적
극적이었다.6) 그러므로 홍양호는 유가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양명학․실학
등 시대사상의 조류를 다양하게 받아들였던 개방성적 인물이었다.
홍양호는 유년시절 홍중성의 고을살이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조부의 영향에 의해
일찍이 문예에 관심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養子인 洪羲俊(1761-1841)에 의
하면 “부군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글씨를 즐겨 쓰셨는데 일찍이 고법을 임서함에
만년에 이르도록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7)라고 하여 특히 서예에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평생을 학습한 古法의 대상은 왕희지, 왕헌지였다. 그의 孫子인 洪敬謨
(1774-1851)에 의하면 “「淳化帖」에 가장 공을 들였는데 특히 二王의 글씨에
오로지 정진했으며, 또한「聖敎序」․「黃庭經」등 여러 法書에 힘을 기울였다.”8)고
한다. 그 결과 “결코 조맹부, 한호, 미불, 동기창의 法을 추종하지 않아서 溫厚典雅
하고 天然活動하다.”9)고 한다. 즉 일세를 풍미했던 書風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고
전적인 二王 중심의 서예를 탐구하여 溫柔敦厚하면서도 천연의 생기가 활발한 묘
5) 洪敬謨가 말하기를, “芸窩 선생은 詩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이미 名公 魁士들과 詩社를 결성하여
매번 花月이 되면 琴樽과 술을 장만하고, 모임을 약속하여 唱予和汝 했는데, 筆翰의 묘한 것은 대
부분 白下의 손에서 나왔다[芸窩先生, 以詩名于世. 旣與名公魁士, 結爲詩社, 每於花月, 琴樽縱酒約
會, 唱予和汝, 而筆翰之妙, 多出於白下之手].”라고 하여 홍중성의 문예활동을 구체적으로 술회하였
다. 洪敬謨,『耘石外史』後篇,「藝苑珍蹟」.
6) 洪良浩의 고증학과 관련해서는 辛泳周,「18․9세기 홍양호家의 예술 향유와 서예 비평」, 成均館大
學校 碩士學位論文, 2001 參照. 홍양호의 실학과 관련해서는 金英珠,「耳溪 洪良浩의 牧民思想」,
淑明女子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82 參照. 홍양호의 북학사상과 관련해서는 徐仁源,「耳溪 洪良浩
의 北學思想硏究」, 東國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85 參照.
7) 洪敬謨,『耘石外史』後編,「文獻公臨書淳化帖二帖」, 서울大學校 奎章閣 所藏, 筆寫本,
M/F78-103-210-G. “我文獻公府君, 自少時游藝翰墨, 嘗臨書古法, 至晩暮不倦.”
8) 上同. “於淳化帖, 用功最多, 而尤專精於二王之書, 又肆力於聖敎黃庭諸法書.”
9) 洪敬謨,『耘石外史』後編,「淸秋戱墨」. “我文獻公書法, 本之晉唐, 精學與篤功相兼, 絶不蹈蜀韓米董
之法, 而溫厚典雅, 天然活動.”
耳溪 洪良浩 서예론의 철학적 탐구 107
를 구현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道에 들어가는 문을 일찍이 깨달아 마침내 세상
에 이름을 드러냈는데, 우리나라의 속되고 偏枯한 陋習이 없었고, 晉唐의 오묘함을
깊이 터득했다.”10)고 한다.
이로써 본다면 홍양호는 왕희지, 왕헌지를 중심으로 한 晉唐의 서예에 근본하여
精一하게 배우고 독실한 功力을 쌓아 당시 조선 서예의 편벽되고 고루한 습성을
벗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가 50세가 넘도록 배움에 게을리 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기를 “근래에 배우는 사람들이 끝내 크게 이루지 못
하는 것은 배우려 하지 않는 데 병이 있으며, 배우더라도 공교히 하지 않는 데 병이
있다. 池水盡墨하는 功을 들이지 않고, 번번이 재주에 한계가 있어 배워도 더 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에 스스로 포기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나의 문장과 필법
은 50세 이후에 얻은 것이다. 지금 비록 늙기는 했으나 만약 글 하나를 읽고 한 줄
을 쓸 때면 매번 進益이 있음을 느낀다. 이는 오로지 古道에 정진하여 마음과 생각에
손이 따라가는 것이 젊었을 때보다 낫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11)
손자인 홍경모에게 이르기를, 上達에 뜻을 두면서 노력이 부족한 당시 문인 서
예가들의 태도를 경계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평생을 문장과 필법에 정진하다
가 겨우 50세가 넘어서야 진일보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50세에 이
르러 得力하고 진일보할 수 있었던 것은 재주에 빠지지 않고 평생을 專精古道에
힘써서 본연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홍양호는 조선조후기 서가들과 마찬가지로 二王을 전범으로 삼아 서예에
대한 진지한 학습태도와 탐구자세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왕희지, 왕헌
지와 逼眞한 데 머무르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가 추구하는 서예의 궁극적 지향은
形態美를 탐닉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서예 본질에 대한 철학적 구현이었다. 다음의
편지글은 서예란 무엇인가에 대한 홍양호의 견해가 담겨 있다.
10) 洪敬謨,『耘石外史』後編,「文獻公臨書淳化帖二帖」, “早悟入道之門, 而終底名世, 無東俗偏枯習,
深得晉唐之奧.”
11) 洪敬謨,『耘石外史』後編,「翰墨淸玩」, “嘗敎小子曰, 近之學者, 終無大成, 患在不學也, 患在學而不
工也 不下池水盡墨之功, 輒謂以才有其限, 學不加進, 乃自抛棄, 豈不歎哉. 吾之文章筆法, 五十以後
之所得者. 今雖老矣, 若讀一書, 書一行, 每覺進益. 蓋專精古道, 心思手追, 勝於年少之時故也.”
보내신 편지에서 “詩道는 性情을 귀하게 여기고 성정은 無爲에서 묘한 것이니, 무
위는 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청컨대 詩道를 가지고 筆道로 옮겨 보십시
오.”라고 말했습니다. 깊도다 말이여! 서예의 묘를 다할 만합니다. 그러나 無爲라는
것은 공자와 노자가 모두 말한 것이어서 참으로 말하기가 난해합니다. 저는 일찍이
노자의 무위는 天機를 감추고서 홀로 운용하는 것이고, 공자의 무위는 理를 따라서
情이 없는 것으로 실로 公과 私의 나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
이 그 말을 뒤집어 표현하기를, 노자는 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고[不爲而無不
爲], 성인은 하지 않음이 없어도 함이 없다[無不爲而無爲]고 했습니다. 대저 성인이
만사에 응함에 한결같이 자연의 이치를 따르고, 함에 뜻을 두지 않아도 스스로 하지
않음이 없으며, 하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 일찍이 함이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
은 서예에서도 그러합니다. 서예란 무엇입니까? 조화의 자취입니다. 象形에서 시작할
때부터 역시 그 자연의 이치를 따랐을 뿐입니다.12)
이 글은 詩社를 통해 교유했던 宋載道(1727-1793)와 주고받은 편지글로서,
앞서 송재도에게 詩道를 논하여 보낸 글을 송재도가 읽고서, 다시 송재도가 홍양호
에게 답변하면서 書道를 논해달라는 요청에 답한 글이다. 전문적인 書論은 아니지
만 홍양호의 書藝觀을 일면 파악할 수 있는 주요한 자료이다.
송재도가 요청대로 ‘詩道’를 ‘筆道’로 바꾸어 말하면 “서예는 性情을 귀하게 여기
고, 性情은 無爲에서 妙한 것이니, 無爲는 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홍양호는 이 한 문장으로 서예의 묘를 다 드러낼 만큼 심오한 글이라
고 찬탄을 보냈다. 송재도가 화두를 던진 이 문장은 곧 ‘작가가 성정을 발현하는
데 성정이 無爲한 경지에서 그 묘를 다할 수 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해 먼저 홍양호는 송재도가 해석한 無爲의 개념을 자신의 견해로써 재정
리하였다. 그리고는 “서예란 조화의 자취이며, 象形에서 시작할 때부터 역시 자연
의 이치를 따랐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다만 문제는 송재도가 보내온 ‘無爲’의
개념과 홍양호의 관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송재도는 無爲에 대하여 “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다[無爲而無不爲]”라고 했
12) 洪良浩,『耳溪集』卷15,「答宋德文論書書」, p.262. “來諭曰, 詩道貴於性情, 性情妙於無爲, 無爲者,
無爲而無不爲也. 請以詩道, 移之筆道. 深哉言乎. 可以盡書之妙矣. 然無爲者, 孔與老俱言之, 誠難言
也. 僕嘗謂老氏之無爲, 藏機而獨運, 孔氏之無爲, 循理而無情, 寔有公與私之分焉. 故余嘗反其言曰,
老氏無爲而無不爲, 聖人無不爲而無爲. 夫聖人之應萬事也, 一循自然之理, 無意於爲而自無不爲, 無所
不爲而未嘗有爲也. 其於書亦然. 書者何. 造化之跡也. 始起於象形, 亦循其自然之理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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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에 홍양호는 공자와 노자가 모두 無爲를 말했는데 어느 쪽을 이해하는가의
문제를 거론했다. 그래서 無爲의 두 가지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즉, ①노자의 無
爲는 ‘天機를 감추고서 홀로 운용하는 것’, ‘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는 것[無爲
而無不爲]’이다. ②공자의 無爲는 ‘理를 따르고 사사로운 情이 없으며 公私의 분별
이 있는 것’, ‘하지 않음이 없어도 함이 없는 것[無不爲而無爲]’이다.
그러므로 송재도가 보내온 無爲의 해석은 홍양호가 보았을 때 노자의 無爲를 논
했던 것이다. 이에 노자와 공자의 無爲를 분별하여 이해하라는 뜻에서 홍양호는 과
거에 자신이 했던 말을 再言하여 설명하였다. 결론적으로 홍양호는 공자의 無爲를
따르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성인(공자)이 만사에 응함에 한결같이 자연의 이치를
따르고, 함에 뜻을 두지 않아도 하지 않음이 없다”라는 공자의 입장을 취했다. 뒤
집어 말하면 “하지 않음이 없어도 함에 뜻을 두지 않은 것[無不爲而無爲]”이 된다.
그리고는 “하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 일찍이 함이 있어 본적이 없다”라고 하여 노
자의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는 바가 없다[無爲而無不爲]”라는 논리를 반박하였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바탕이 有에 있는 유가와 無에 있는 노장을 구분함으로써 無
에서 有로 나아가는 노장사상을 부정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그가「萬物原始」에
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노자는 하늘을 사사로이 여긴[竊天] 자이고, 장자는 하늘을 업신여긴[侮天] 자이
며, 석가는 하늘을 버린[逃天] 자이고, 성인은 하늘에 순응[順天]하는 자이며, 군자는
하늘을 배우는[學天] 자이다. 竊天한 자는 제 멋대로 하고 侮天한 자는 자만하며 逃
天한 자는 사사로이 하고 順天한 자는 無爲하며 學天한 자는 쉬지 않는다. 하늘은 無
爲하고 성인 또한 無爲하다. 그러므로 공자와 노자는 모두 無爲를 말했다. 그러나 노
자의 ‘無爲而無不爲’는 天機를 감추고서는 홀로 운용하는 것이고, 공자의 ‘無不爲而無
爲’는 理를 따르면서 情이 없어서 公私를 나누는 것이다.13)
이처럼 홍양호는 노자의 無爲는 사사로움이 내재되어 있어서 제멋대로 하는 것
이라 하고 공자의 無爲는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여 公私가 엄연하게 구분되는 것이
13) 洪良浩,『耳溪集』外集 卷9,「萬物原始․撰德篇」, 韓國文集叢刊242, p.313. “老氏, 竊天者也, 莊氏,
侮天者也, 佛氏, 逃天者也, 聖人, 順天者也, 君子, 學天者也. 竊天者, 自用, 侮天者, 自大, 逃天者,
自私, 順天者, 無爲, 學天者, 不息. 天無爲, 聖人亦無爲. 故孔與老 俱言無爲. 然老氏無爲而無不爲,
藏機而獨運, 孔氏無不爲而無爲, 循理而無情, 公私之分也.”
라 했다. 따라서 “서예란 조화의 자취이며, 象形에서부터 자연의 이치를 따랐을 뿐
이다”는 결론적 함의는 “서예란 無爲의 발현으로, 無爲는 作爲에 뜻을 두지 않더라
도 점․획․글자에 자연의 이치가 하나하나 담겨져 있어서 天機의 조화가 구현되는
것”을 의미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天機는 일반적인 도가적 사유의 天機가 아닌
유가적 사유의 ‘天理’란 의미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14) 왜냐하면 서예가 象形에
서부터 자연의 이치를 따랐다는 것은 곧 성인이 天理에 의거하여 象形을 만들어냈
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造化는 조선조후기 일반적인 문예론에서 거론되는
‘창작주체자의 능력과 순수성이 확보된 天機의 發顯體’라기 보다는 天地에 대한 理
法的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서예가 ‘자연의 이치를 따를 뿐’이
라는 것은 성인이 문자를 창제했을 때처럼 ‘천지의 마음을 글씨로 담아내야 한다’
는 의미이다.
천지의 마음이란『주역』에서 “모든 사물이 극에 도달하면 되돌아온다는 것이
바로 천지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15)라고 했듯이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天地生
物之心]’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陽과 陰이 動靜하는 가운데 만물이 부단히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천지의 마음을 서예로 담는다는 것은 모든 만물은
음양이 動靜無斷하는 변화 가운데 존재할 뿐만 아니라 서예의 이념 역시 그와 같
은 것에 있다는 뜻이다.16) 그러므로 서예가『주역』에서 말하는 천지자연의 이법
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이해한 것은 서예의 미가 乾坤陰陽의 운동변화와 불가분
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字畫의 음양원리를 통해 더
욱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3. 陰陽方圓의 字畫美 구현
『주역』은 중국 문자의 창조를 언급하였기 때문에 후대 書論의 바탕을 이루는
경전으로 인식되었고,『주역』에 내재된 미학사상은 그대로 서예에 응용되었다.
17)
14) 天機는 근본적으로 道家流의 자연주의에서 발상했으나, 天理를 중핵으로 하는 유가적 자연주의도
여기에 포섭되어 있다. 이동환,「조선후기의 미학사유 ‘천기론’과 그 문예․사상사적 함의」,『한국
한문학과 미학』, 태학사, 2003, p.57, 주6) 參照.
15)『周易』,「復卦․彖傳」, 4冊, p.394. “復, 其見天地之心乎."
16) 曺玟煥,『중국철학과 예술정신』, 예문서원, 1997, p.426.
耳溪 洪良浩 서예론의 철학적 탐구 111
홍양호 또한 易에 바탕하여 서예의 근본원리를 이해하였다. 다만 그는 서예의 기본
적인 字畫을 陰陽과 形氣, 方圓과 動靜으로 나누어 이해함으로써 자기만의 서예미
학 세계를 구축하였다.
우선 홍양호의 字畫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畫과 字는 形이 있고 氣가 있으므
로 이른바 陰陽이다.”18)라고 하여 畫과 字를 有形․有氣의 陰陽으로 파악하는 데 있
다. 그리고 “무릇 字는 形이고 陰이며, 畫은 氣이고 陽이다.”19)라고 하여 字는 形․
陰에 해당하고 畫은 氣․陽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앞서 이서가 획 자체를 음획과 양
획으로 나누는 것과 달리 홍양호는 字―形―陰, 畫―氣―陽이라는 字畫의 陰陽二分
的 관점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무릇 有形의 物은 陽의 氣를 받아서 하늘의 形을 닮지 않은 것이 없
다.”20)라고 하였다. 즉, 형체가 있는 것은 모두 하늘의 氣를 받아서 이루어지며,
이루어진 形은 하늘을 닮는다는 것이다. 서예로 비유하면 陽의 氣를 받은 畫 또한
유형의 物이며 이러한 획의 형체는 곧 하늘을 닮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홍양호는 字畫을 陰陽과 形氣로 兩分한 다음, “陰은 方하고 形은 靜하며,
陽은 圓하고 氣는 動한다.”21)라고 하여 陰陽을 方圓으로, 形氣을 動靜으로 세분하
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字는 방정하면서 정적인 것이 귀하고, 畫은 원만하면서 동적인 것이 귀하
다. 靜하므로 바꿀 수 없고, 動하므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
다.22)
지금까지를 종합하면 字―形―陰―方―靜, 畫―氣―陽―圓―動으로 대별된다. 즉
陽氣를 받은 畫은 원만하고 동적이어야 하며, 획이 모여서 형성된 字는 陰形으로서
방정하고 정적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畫은 원만하고 생동하기 때문에 막을 수 없게
되고, 字는 방정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음양의 조화에
17) 李澤厚, 劉綱紀 主編, 權德周, 金勝心 共譯,『中國美學史』,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2, p.754.
18) 洪良浩,『耳溪集』卷15,「答宋德文論書書」, p.262. “劃與字者, 有形而有氣, 卽所謂陰陽也.”
19) 上同. “夫字者, 形也陰也, 畫者, 氣也陽也.”
20) 上同. “凡有形之物, 無不受陽之氣, 而肖天之形.”
21) 上同. “陰者方, 形者靜, 陽者圓, 氣者動.”
22) 上同. “故字貴方而靜, 畫貴圓而動. 靜故不可易, 動故不可遏, 此自然之理也.”
의해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주역』에서 말하는 “하늘에서는 象을 이루고 땅에서는 形을 이루어 변화
가 나타난다. …(중략)… 乾은 위대한 창조를 주관하고 坤은 만물을 완성시키는 일
을 한다.”23)라는 의미와 상통한다. 즉 象은 하늘이 만물을 생성할 때 구체적인 형
태로 만들기 전 단계에 보이는 이미지로서, 字의 온전한 형체를 갖추기 이전인 畫
의 주재성에 비유된다. 또한 形은 이미지에 의해 땅에서 실물로 구체화된 것으로,
획이 결합하여 완성된 형체를 갖춘 字에 비유된다. 그래서 象과 形을 통해 변화가
나타나듯이 획과 자를 통해 변화무쌍한 서예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주역』
에서 말하는 象과 形은 홍양호가 말하고자 하는 획과 자의 원리적 측면에서 일맥
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획은 원만하고 생동하기 때문에 막을 수 없게 되고, 자는 방정하고 고요
하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성리학의 體用論과도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즉 자는 방정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體가 되어 획의 바탕이자 본체가
되며, 획은 원만하면서 생동하기 때문에 막을 수 없는 用이 되어 창조를 주관하는
유동성을 갖는다. 이러한 體用의 구조는 理를 통해서 관철할 수 있듯이 서예에서도
하나의 理로써 관철할 수 있는 것이다.
氣는 理에 근본하고, 形은 氣에서 형성되며, 象은 形에서 생겨나니, 理는 거슬러
象에 깃든다. …(중략)… 象이 있으면서 理가 없는 것은 또한 있지 않다.24)
홍양호의 이 말은 理←氣←形←象←理의 순환논리로, 理에 근원한 氣가 모여서
形을 이루고, 그러한 形에는 象이 깃들어 있으며, 그러한 象에는 모두 理가 존재한
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서예의 모든 획과 글자 하나하나에는 이치[理]가 내재되
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서예의 理는 무엇인가?
서예란 무엇인가? 造化의 자취이다. 象形에서 시작할 때부터 또한 그 자연의 이치
[理]를 따랐을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이치라는 것은 塊然한 一圈物일 뿐이 아니라
23)『周易』,「繫辭傳․上」第1章, 4冊, p.203.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 …(中略)… 乾道成男,
坤道成女, 乾知大始, 坤作成物.”
24) 洪良浩,『耳溪集』卷18,「原象」, p.329. “氣本於理, 形成於氣, 象生於形, 而理反寓於象. …(中
略)… 有其象, 而無其理者, 亦未之有也.”
耳溪 洪良浩 서예론의 철학적 탐구 113
대개 條理文理의 찬연함이 있는 것이 陰陽形氣의 가운데를 行하는 것이다.
25)
홍양호가 인식한 서예란 ‘조화의 자취’이며, 조화의 자치는 곧 ‘자연의 이치[理]’
를 따라서 구현된 것이다. 그러한 이치는 하나의 한정된 物이 아니라 陰陽과 形氣
의 가운데를 流行하는 條理나 文理와 같이 찬연한 것이다. 즉 條理는 만물의 질서
를 주관하는 것이라면 文理는 天文과 地理로서 천지만물의 모든 이치를 망라한 것
이다.
그러므로 홍양호가 언급한 서예가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스
럽게 쓴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예의 획과 글자 가운데 條理나 文理와 같은 찬연한
것이 유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천지만물에는 규범과 질서를 주관하는
원리를 글씨로 담아내야만 진정한 서예가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字畫의 음양방원에 대한 홍양호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天圓地方의 사유로
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머리가 圓인 것은 하늘의 형상이고, 발이 方한 것은 땅의
형상이다.”
26)라고 하여 만물의 생성원리를 天圓地方의 기본 구조로 파악한다. 그
래서 “日․月․星은 하늘에 가깝라고 하여 그 형상이 圓이고, 土․石은 땅에 가깝라고
하여 그 형상이 方이다.”
27), “雨露는 陽氣이라고 하여 形이 모두 圓이고, 霜雪은
陰氣이라고 하여 모두 廣하다.”
28)라고 하여 자연사물에 대한 모두를 天에 가까운
것은 陽氣이자 圓으로, 地에 가까운 것은 陰氣이자 方으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有形의 物은 陽의 氣를 받아서 하늘의 形을 닮지 않은 것이 없다고 언
급한 것처럼 글씨의 획 또한 하늘의 氣를 받은 것이므로 하늘의 형상인 圓이 되어
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古文으로부터 畫의 圓한 성질이 아닌 것이 없다고 보
았다.
古文篆籒로부터 ‘畫圓而字方’하지 않은 것이 없다가 예서와 해서가 흥기하면서 비
로소 戈勒波趯의 法이 있게 되었으나, 대저 모두 圓鋒을 사용하여 轉折起伏의 勢를
25) 洪良浩,『耳溪集』卷15,「答宋德文論書書」, p.262. “書者何. 造化之跡也. 始起於象形, 亦循其自然
之理耳. 然所謂理者, 非塊然一圈物而已, 蓋有條理文理之粲然者, 行乎陰陽形氣之中.”
26) 洪良浩,『耳溪集』卷18,「原象」, p.329. “頭圓象天, 足方象地”
27) 洪良浩,『耳溪集』外集 卷9,「萬物原始․仰觀篇」, p.291. “日月星附於天, 故其形圓, 土石附於地, 故
其形方.”
28) 上揭書, p.292. “雨露者, 陽氣, 故形皆圓, 霜雪者, 陰氣, 故形皆廣.”
만들었으므로 剛하면서 드러나지 않고, 생기가 있으면서 막히지 않으니 이른바 ‘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