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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수 폭포(아르헨티나 푸에르토 이과수와 브라질 포스 두 이구아수)
[연재] 임영태의 남미 여행기 (13)
파라과이 영토였던 이과수 폭포가 아르헨티나 소유가 된 사정
1월 10일, 수요일 밤 10시 반경 카타라타스 이과수(Cataratas of Iguazu)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카타리타스 공항은 아르헨티나 이과수 지역의 공항이다. 제트스마트 항공 여객기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공항에 1시간 반 정도 연착하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어졌다. 공항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조금 전까지 세찬 빗줄기가 쏟아진 듯 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었지만 우리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빗줄기는 가늘었다. 기온이 그다지 높지는 않은 것 같은데 습도가 많아 후텁지근하게 느껴졌다. 우림 지역의 여름 날씨다.
공항에서 잠시 줄을 서서 기다려 택시를 탔다. 공항에서 우리의 숙소가 있는 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zu) 시내까지는 30분 남짓한 거리다. 밤이어서 주변 풍경을 볼 수 없었지만 도로 옆이 밀림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스페인어로 푸에르트(puerto)는 항구, 항만이란 뜻이다. 지금은 이과수를 찾는 세계의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관광도시지만, 과거에는 이곳이 브라질에서 파라과이, 아르헨티나를 가로질러 흐르는 파라나 강변에 위치한 항구였다. 사람과 물산의 집산지였던 것이다.
브라질 남부 대서양 연안 마르 산맥에서 발원한 파라나 강은 브라질 동부에서 서부를 가로질러 밀림 지대를 흘러,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3개국의 국경 지대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하류에서 라플라타 강과 만나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총 길이 2,570km에 달하는 파라나 강은 남미대륙에서 아마존 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남미대륙 남부지역을 관통하다시피 하는 이 강은 사람과 물산의 중요한 이동통로였다.
밀림과 산악으로 이뤄진 남미 대륙에 도로 교통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강은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는 통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 강의 주요지점마다 내륙의 사람과 물산이 모이는 항구가 만들어졌다. 푸에르토 이과수는 그와 같은 항구, 포구의 하나였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쌀 등의 곡물, 해산물, 조세미의 집산지였던 강경포구(논산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과수 폭포를 만들어낸 이과수강이 파라나강과 합류하는 트라이앵글 지점이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삼국의 국경이 교차하는 곳이다.
이과수 폭포는 이과수강이 파라나강과 합류하는 곳에서 상류 쪽으로 약 23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과수 폭포는 원래는 파라과이 것이었으나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의 3국동맹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아르헨티나에 넘겨주고 말았다. 내륙국가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파라과이는 1864년부터 1870년까지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등과 충돌해 전쟁까지 벌였다. 초기 파라과이는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듭했으나 결국 3국 동맹(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의 물량 공세와 장기전에 패배했다. 전쟁 뒤 파라과이는 많은 영토를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넘겨주고 인구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과수 폭포 주변 지도(구글 지도 캡처)
남미 대륙에서 아마존 강 다음으로 긴 파라나강. 파라나강의 발원지는 브라질 동부 마르산맥이다. 이 강의 곳곳에 사람과 물산이 모이는 항구가 만들어져 있다. 아르헨티나의 푸에르토 이과수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삼국동맹 전쟁의 최대 전투인 투유티 전투 장면(위키백과)
3국동맹 전쟁의 결과 파라과이 영토의 분할 상황(위키백과)
3국동맹 전쟁 후 파라과이 영토의 분할. 녹색 빗금 부분이 전쟁으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빼앗긴 영토(위키백과)
3국동맹 전쟁(또는 파라과이 전쟁)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손꼽힌다. 파라과이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도 많은 인명 손실을 입었고 가옥과 자산이 대량 파괴됐다. 특히 패전국 파라과이는 6년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군정통치를 받아야 했고, 인구도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영토도 대거 빼앗겼다. 전쟁 과정에서 남성들이 대량 사망하고 심각한 인구 정체와 노동력 손실이 발생, 경제가 피폐해지고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3국동맹 전쟁에서 패배한 파라과이는 나중에 볼리비아와의 차코전쟁에서 승리해 실추된 위신을 약간이나마 회복하게 된다.
차코전쟁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가 그란 차코(Gran Chaco) 지역 영유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다. 그란 차코는 아르헨티나 북부, 브라질 중남부, 볼리비아 중부와 동부, 파라과이 서부까지 4개국에 걸쳐 있는 광활한 사바나 평원지역을 말한다. 파라과이와 볼리비아가 국경 차코지역을 두고 분쟁 끝에 전쟁까지 벌였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게 패배해 바다로 나가는 통로가 막힌 볼리비아는 라플라타 강을 통해 대서양으로 나아가는 길목을 확보하고자 했고, 취약한 파라과이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다. 차코전쟁의 발단이 된 것은 1879년부터 1983년까지 약 4년간에 걸쳐 볼리비아‧페루 연합군과 칠레가 싸운 태평양 전쟁이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지금의 국가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분쟁과 전쟁을 벌였고, 각각의 국가로 분리된 뒤에는 영토 경계를 두고 분쟁을 이어갔으며 이는 또 전쟁으로까지 발전하곤 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독립 후 분리 과정, 그리고 그 후의 국가 간의 영토분쟁과 전쟁, 국내의 계급투쟁‧정치투쟁‧혁명내전 등을 통해 각각의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빼앗긴 볼리비아
19세기 초 유럽에서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 뒤 국내 정치적인 위기에 빠진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 지역 식민지 통치에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제히 독립투쟁을 시작해 독립 국가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남미지역의 경우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의 지도 아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해 그란 콜롬비아(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라플라타 연합주(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로 분리), 페루, 볼리비아, 칠레 등의 나라들이 세워졌지만 또 다시 분리 독립을 위해 전쟁을 치렀다. 분리 독립 후에도 국가 간에 명확한 국경선이 그어져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 간의 영토 분쟁이 빈발하게 벌어졌다. 그런 과정에서 볼리비아와 칠레는 볼리비아가 차지하고 있던 태평양 연안 지역인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를 두고 분쟁을 벌였다. 이곳은 1866년 남위 24도선을 양국 간의 경계로 한다는 합의에 따라 볼리비아의 영토가 된 곳으로 구리와 초석, 은 등 중요 자원들이 매장돼 있었고 볼리비아로서는 태평양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당시 인구가 부족했던 볼리비아가 이 지역의 개발을 위해 칠레를 끌어들였고, 볼리비아와 칠레는 1874년 이 지역에 사는 칠레인과 칠레기업에 대해 25년간 무과세 혜택을 주기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1876년 볼리비아 내부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 정치적 혼란과 함께 경제적 위기가 닥치자 볼리비아는 1878년 안토파가스타 주의 칠레인과 칠레기업에 대해 수출세를 부과하는 폭주를 감행했다. 이는 명백한 조약 위반이었으나 칠레인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하자 볼리비아 정부는 이들의 자산을 압류하는 강압조치를 취했다. 나아가 볼리비아 정부는 안토파가스타와 수도 라파스를 잇는 철도를 개통하여 안토파카스타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공고히 하려 했다. 법적으로는 볼리비아 영토였으나 칠레인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이곳을 볼리비아가 털도 안 뽑은 채 날로 먹으려 한다며 반발했다.
남미 태평양 전쟁에서 페루 군함을 공격하는 칠레 해군
남미 태평양 전쟁으로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칠레에 빼앗긴 볼리비아
남미 태평양 전쟁 결과 원수지간이 된 볼리비아와 칠레
1879년 2월 칠레군이 볼리비아를 선제공격해 안토파가스타 주를 강제 점령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볼리비아의 형제국이나 다름없었던 페루가 칠레 편을 들면서 전쟁은 칠레 대 볼리비아‧페루 동맹 사이의 전쟁으로 진행됐다. 별다른 해군력이 없었던 볼리비아를 대신해 페루 해군이 칠레와 해전을 벌였으나 그동안 해군력을 강화해온 칠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제해권을 장악한 칠레군은 태평양 연안을 따라 북진을 개시해 안토파카스타 주 전역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안데스 산맥을 넘어 페루의 일부 영토를 점령하고 1881년 1월에는 페루 수도 리마까지 함락했다. 페루와 볼리비아는 게릴라전을 펼치는 등 저항을 계속했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패배, 1883년 종전에 합의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칠레는 볼리비아로부터 지하자원의 보고 아타카마 사막 등이 있는 안토파가스타 주를, 페루로부터 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 지역을 병합해 태평양 연안을 장악하고 구리, 은, 초석 등 엄청난 광산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1929년 칠레는 타크나 지역을 페루에 돌려주고 페루는 칠레인들이 다수 정착한 타라파카와 아리카 지역을 칠레 영토로 인정해 분쟁을 종식시켰다. 잉카제국의 종주국이자 스페인 식민지의 중심무대였던 페루에 대해서는 칠레도 계속 싸우기가 껄끄러웠던 모양인지 일부 점령지만이라도 돌려주었다. 그러나 칠레는 힘이 없었던 볼리비아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토 반환도 하지 않았다. 태평양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였던 안토파가스타 주를 빼앗은 칠레는 볼리비아의 숨통을 조였다.
칠레에 영토를 빼앗겨 해양으로 나가는 출구를 봉쇄당하고 풍부한 광산자원을 잃어버린 볼리비아는 결국 남미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볼리비아는 아직도 칠레를 상대로 영토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칠레가 그에 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태평양 전쟁으로 페루와 볼리비아 영토를 탈취해 남미의 최부국이 된 칠레는 최빈국 볼리비아를 깔보고 그 요구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볼리비아는 칠레와 아직도 국교를 수립하지 않았을 정도로 원수지간으로 적대시하고 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페루와 칠레도 사이가 안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국교관계는 수립돼 있다. 하지만 볼리비아와 칠레는 국교조차 맺지 않았을 정도로 적대적이며, 두 나라 국민들은 서로 여행도 잘 안 갈 정도로 사이가 나쁘다.
바다로 나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차코전쟁을 벌인 볼리비아
볼리비아와 칠레의 관계를 두고 볼 때, 볼리비아가 일방적으로 영토를 빼앗긴 처지이기 때문에 피해자인 것이 분명하다. 적지 않은 영토를 빼앗긴 페루도 칠레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리마에 살고 있는 박우물 선생은 페루인들이 칠레를 많이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 속에 칠레에 대한 반감이 묻어났다. 일반국민들의 감정이 어떤 상태일지 짐작이 갔다. 나는 박 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연상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 간에 사이가 좋은 경우는 드물다. 역사적으로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 피해자, 가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일 관계는 일본이 일방적인 가해자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몰상식한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의 일반적인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도 몰역사적인 윤석열 정부는 일본에 대해 과거사를 묻어버리고 잘 해 보자고 말한다. 이는 친선이 아니라 굴종이다.
과거에 있었던 한 번의 전쟁으로 나라의 현재가 모두 결정됐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경우, 태평양 전쟁의 패배가 큰 충격을 안긴 것은 분명하다. 태평양 전쟁으로 바다로의 출구가 막히고 엄청난 광산을 빼앗긴 볼리비아는 오늘날 남미 최빈국으로 남아 있다. 볼리비아의 태평양 연안 안토파카스타를 탈취,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 자원부국이 되고, 남미 태평양 연안을 대거 차지해 해양강국이 된 칠레는 오늘날 남미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됐다. 볼리비아와 칠레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칠레의 반성적 성찰과 그에 상응하는 태도 전환이 필요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 인간사도 그렇지만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더욱 더 힘을 가진 국가가 약소국을 무시하고 뭉개려 한다. 언제쯤이면 ‘뺀질이 칠레’가 볼리비아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일 수 있을까?
태평양 전쟁의 전과 후 영토
볼리비아,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주변 지도(위키백과)
차코전쟁 분쟁지역(나무위키)
태평양 전쟁의 배배 이후 바다를 잃어버린 볼리비아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안토파가스타를 돌려받지 못한 볼리비아는 태평양을 접한 페루로부터 리마항을, 대서양을 접한 아르헨티나로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항을 빌려 사용했지만 이 항구들과 워낙 거리가 멀어서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볼리비아는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흘러가는 파라나강과 라플라타강을 통해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길을 개척하려 했는데, 그러려면 그란차코 지방을 확보해야 했다.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땅이라는 걸 인정했음에도 이 지역을 넘보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양국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1928년 12월 파라과이 기병대의 공격에 볼리비아군이 보복 공격하는 분쟁을 시작으로 소규모 분쟁이 이어졌고, 마침내 1932년 6월부터는 양국 간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전쟁은 1935년 6월 초 볼리비아 군이 패배하며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1938년 7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돼, 그란차코 지역의 3/4은 파라과이 영토로 인정됐다. 대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강과 파라나강의 항행권과 파라과이 영토 내의 파라과이 강변에 위치한 푸레르토 카사도 항구의 사용권을 얻었다. 카사도 항은 볼리비아가 바다로 나가는 관문으로 우리나라의 인천항이나 부산항과 같은 위치인 셈이다.
차코 전쟁은 파라과이의 승리로 끝났지만 두 나라는 상처만 남겼다. 두 나라는 많은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파라과이는 이 전쟁을 통해 3국동맹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전쟁 후 쿠데타가 발생, 대통령이 축출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볼리비아는 대서양으로 나아가는 항행권을 얻었으나 자신보다 훨씬 작은 나라와의 전쟁 패배하는 수모를 당했다.
물산이 모이는 항구에서 관광지로 변신한 푸에르토 이과수
아르헨티나쪽 이과수를 구경하기 위해 우리가 숙소를 잡은 푸에르토 이과수는 파라나 강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바다도 아닌데 무슨 항구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설명이 됐다. 2천km가 넘은 파라나 강 주변에는 바다의 항만과는 규모가 다르지만 항구도시가 곳곳에 형성돼 있다. 초기에는 항구라기보다는 나루터 정도였을 것이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배를 이용한 내륙지역의 인구와 물자의 이동이 늘어나면서 강의 주요 지점마다 이 같은 거점이 만들어진 것이다. 인구 3만2천명의 작은 소도시지만 푸에르토(항구) 이과수로 불리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브라질에서 발원한 파라나강은 상류에서 중류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국경을 이루며 흐르다가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국경을 이루며 흘러간다. 남미대륙을 관통하는 도로가 제대로 건설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강은 인구와 물자 이동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고 강변에 형성된 주요 거점 도시가 항구 역할을 한 것이다. 이과수 폭포에서 멀지 않은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3국의 접경지역에 있는 세 도시가 대표적이다. 이과수강이 파라나강으로 흘러드는 합수지를 중심으로 북서쪽에는 30만 명 규모의 브라질 도시 포스두 이구아수(Foz do Iguaçu) 시가, 그 남쪽에는 인구 3만2천명 규모의 아르헨티나 도시 푸에르토 이과수 시가, 서쪽에는 32만여 명 규모의 파라과이 제2도시 사우다드 델 에스테(Ciudad del Este)가 자리하고 있다.
파라나강과 이과수강이 합수하는 지역 주변 지도
파라과이 사우다드 델 에스테 시 위치
푸에르토 이과수 시 위치(위키백과)
푸에르토 이과수 시내 모습. [사진-임영태]
이 도시들은 물자와 인구가 모이는 항구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 파라과이 제2의 도시 사우다드 델 에스테는 파라나강-라플라타강을 통해 대서양으로 빠지는 관문항구나 다름없다. 내륙국가인 볼리비아가 파라과이와 전쟁까지 벌이면서 바다로 가는 길을 확보하려 했던 것처럼 역시 내륙국가인 파라과이도 항구가 필요한 것이다. 파라과이의 사우다드 델 에스테나 볼리비아가 파라과이로부터 얻어낸 푸레르토 카사도는 한국의 부산항이나 인천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지금은 이 도시들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이과수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위한 광광도시로 탈바꿈했지만 본래 이 도시는 항구로서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파라과이의 사우다드 델 에스테의 경우는 그 점이 더욱 분명하다.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게 전쟁으로 영토를 빼앗기기 전에는 이과수 폭포가 파라과이 것이었지만 지금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나누어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세 나라 국경이 접한 트라이앵글 지역에서 파라과이의 사우다드 델 에스테 시가 가장 큰 도시지만 이과수를 보러 몰려드는 관광객들은 모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숙소를 정하게 되고 입장료도 두 나라 것이 되고 있다. 멕시코의 독재자 포르피디아스가 ‘미국 옆에 있어서 불쌍한 멕시코’라고 했던 것처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옆에 있어서 불쌍한 파라과이’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과 이과수 폭포
쓸데없는 사설이 길어졌다. 여행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자. 우리는 밤늦게 카타라타스 이과수 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에 도착한 뒤 다음날 이과수 폭포 관광을 위해 우리를 태워다 준 택시 기사에게 비용에 대해 물어보았다. 영어도 잘 하고 매너 좋고 약간 대머리지만 잘 생긴 이 택시 기사는 우리가 거절할 수 없는, 매우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한다. 우리의 이동경로가 복잡해 사실상 하루 종일 택시가 우리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아침 일찍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 투어를 위해 이과수 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가 구경이 끝나면 우리를 태워서 숙소 호텔로 데려와야 하고, 점심 식사 후에는 짐을 모두 챙겨서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어서 브라질 포스두 이구아수로 이동해 그곳 구경이 끝나면 브라질의 포스두 이구아수 국제공항까지 태워다 주어야 하는 것이다. 대기시간까지 감안하면 아침부터 하루종일, 아마도 거의 12시간 정도를 소모해야 한다.
택시기사는 각 구간(숙소-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 왕복, 아르헨티나 숙소-브라질 이과수 폭포, 브라질 이과수 폭포-포스두 이과수 국제공항)의 요금을 말하며 총 5만2천 페소를 요구했다. 한화로 약 7만8천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 아르헨티나 물가가 엄청 싸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흔쾌히 동의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5만2천 페소에 팁으로 10달러(약 1만페소)를 지불했다. 이 친절하고 진지한 택시기사 덕분에 사실 아르헨티나에 대한 내 호감도가 상당히 상승했다.
밤늦게 아르헨티나 푸에르토 이과수 시내에 있는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 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밤이 깊어서인지 관광객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영업을 하는 식당이 더러 눈에 띄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말라서 피자, 감자튀김, 소시지 등의 안주를 삼아 식사와 함께 맥주를 한잔 하고 나니 밤 12시 반이 넘었다. 숙소로 돌아와 하루 일정을 간단히 정리, 메모하고 나니 새벽 1시 반이 넘었다. 다음 일정을 위해 잠을 청했다.
1월 11일, 목요일, 새벽 일찍 일어났다. 밤에는 몰랐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밀림 속에 숙소가 자리 잡고 있다. 자연이 주는 편안함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어디서 새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해뜨기 직전 붉은 기운이 퍼지고 있다. 창문을 여고 밖으로 나가니 후텁지근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다. 조금만 움직이면 금방 땀이 날 것 같다. 베란다에 나가 바깥 풍경을 잠시동안 바라보다가 바로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닫는다. 에어컨 바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새벽부터 땀을 흘리기는 싫다.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 전체 지도. [사진-임영태]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 초입에 걸린 표범 사진이 인상적이다. [사진-임영태]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 내부를 오가는 미니열차. [사진-임영태]
아침 식사를 간단히 했다. 이 대표가 맨 가방에 꼭 필요한 짐 몇 가지만 간단히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전날 밤에 예약한 택시가 금방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시내 도로는 한산했고 길도 안 막혔다. 하지만 이과수 국립공원에 가까워지자 차 속도가 줄어들더니 정체되기 시작한다. 그래도 얼마 기다리지 않고 우리를 태운 택시는 금방 주차장에 들어섰다. 택시기사가 친절하게 입장 티켓을 끊고 관람하는 코스를 설명해준다. 11시 반에 주차장에서 기사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우리는 입장 티켓을 끊어서 바로 이과수 국립공원으로 입장했다. 평일이고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입장객은 많지 않았다. 단체 관광객을 중간 중간 만나기는 했지만 대규모 관광객은 아니어서 관람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줄을 설 필요도 없이 티켓을 끊어서 바로 들어갔다. 사진 찍는 주요 포인트마다 사람들이 모여 있기는 했어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파타고니아 모데나 빙하 조망대보다는 훨씬 사람이 적었다. 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고 하지만 중국처럼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드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과수 국립공원은 이과수 폭포뿐만 아니라 수려한 자연경관과 다양한 생태환경을 보존하고 있어서 198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국립공원 입장 후에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관람대까지 가는 길은 걸어서도 갈 수 있고, 내부를 운행하는 미니열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걷기로 했다.
폭포에 접근하는 산책로는 낮은 코스와 높은 코스, 그리고 악마의 목구멍 코스가 있다. 멀리서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낮은 코스가 좋고, 높은 코스는 가까이서 폭포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악마의 목구멍은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접근이 불가했다. 지난해 폭우로 가는 길이 무너지면서 보수, 수리 중이라고 하는데 벌써 6개월째 접근 금지라는 것이다. 칠레-아르헨티나 국경의 아르헨티나 쪽 도로가 비포장 상태인 것이나 이과수의 핵심 포인트인 악마의 목구멍의 수리가 지연되는 것을 보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국가 시스템에도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임영태]
아르헨티나에서 본 이과수 폭포. [사진-임영태]
하이라이트 ‘악마의 목구멍’을 보지 못한 아쉬움
이과수는 과라니 원주민 언어로 큰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인터넷이나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이과수가 안데스 산맥에서 발원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이는 잘못이다. 하류에 이과수 폭포가 있는 이과수 강은 브라질 동부에서 발원해 브라질 밀림지대를 가로질러 브라질-아르헨티나 국경을 지나서 파라나 강과 합류하며 끝난다. 파라나강의 지류인 파라과이강이나 파라과이강의 지류인 필코마요강, 베르메호강, 살라도강 등의 발원지는 안데스 산맥이 맞다. 따라서 이과수의 발원지가 안데스라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이과수 강 하류에 만들어진 이과수 폭포는 폭 4.2km, 평균 낙차 70m(아파트 20층 높이)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북미 미국‧캐나다의 나이아가라 폭포와 아프리카 잠비아‧짐바브웨의 빅토리아 폭포를 합친 것보다 더 크다고 하니 그 압도적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모두 275개의 크고 작은 규모의 폭포가 있는데 이중 대부분은 아르헨티나 쪽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폭포를 한눈에 보기에는 브라질 쪽이 훨씬 좋다. 브라질 쪽에서는 수십 개의 폭포 아래쪽까지 관광객의 접근이 가능하게 데크가 설치돼 있다. 사람들은 물 세례를 직접 받으면서 폭포의 규모와 위력에 압도당하는 체험을 브라질 쪽에서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국립공원의 이과수 폭포. [사진-임영태]
아르헨티나 쪽에서 바라본 이과수 폭포. [사진-임영태]
아르헨티나 쪽에서 바라본 이과수 폭포. [사진-임영태]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 폭포. [사진-임영태]
반면,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은 전체적으로 잘 만들어진 환경 생태 공원 느낌이 나게 설계돼 있다. 폭포를 관람하러 다니는 코스는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어서 트레킹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폭포가 갖는 압도적인 수량을 느끼기 위해서는 브라질 쪽을 반드시 가보아야 한다.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은 폭포의 풍광을 조금은 멀리 떨어져 관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공원에 나 있는 길을 걸으면서 숲과 숲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보는 즐거움도 가질 수 없다. 아르헨티나 쪽이 관찰을 요구한다면 브라질 이구아수 공원은 최대한 관광객들의 눈에 잘 띄게 설계돼 있다. 아르헨티나 이과수 공원은 가급적 자연의 원형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계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르헨티나 이과수 국립공원을 돌아보는 동안 속으로 살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계 최대의 폭포라는 게 이 정도 수준이야?’ 분명 내가 본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테마 세계 기행> 등 유명한 여행 프로그램에서는 이과수 폭포의 엄청난 힘을 보았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아르헨티나 쪽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악마의 목구명’에 접근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아르헨티나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빨리 악마의 목구멍 수리하라’ ‘이렇게 가면 관광객들 브라질에 다 빼앗긴다’고 말했던 것은 그런 아쉬움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비가 내린 뒤여서 데크 길이 미끄러워 조심해야 했다. 3시간 남짓 돌면서 공원과 폭포를 구경한 뒤 나와야 했다. 하루종일 천천히 음미하면서 구경하고 공원 안에서 식사도 하고 곡차도 한잔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일정이 빠듯했다. 들어갈 때는 걸어서 갔지만 나올 때는 공원 내 열차를 탔다. 열차는 느린 속도로 공원을 가로 질렀다. 창문도 없는 열차여서 바람이 바로 들어와 시원했다. 걸으면서는 조망할 수 없던 풍경도 여유롭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공원 밖으로 나와서 보니 주차장이 만차 상태가 돼 있다. 그 사이 관광객이 많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래도 공원에서 그다지 사람들이 복작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악마의 목구멍 개보수가 늦어서 사람들이 덜 찾는 때문인지 아니면 공원이 워낙 넓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 이과수 공원을 관람하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식당에서 빠르게 점심 식사를 끝내고 짐을 챙겨서 호텔을 나왔다. 이제 택시를 타고 아르헨티나-브라질 국경을 넘어야 한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국경은 이과수 강으로 이뤄져 있다. 두 나라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를 건너면 된다. 먼저 아르헨티나 쪽에서 출국 심사를 받은 뒤, 브라질 쪽에서 입국 심사를 받는다. 우리는 양쪽을 매일 왔다갔다하는 택시기사 덕분에 모든 절차를 쉽게 끝냈다. 많은 차량들이 출국심사와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 대기했으나 우리가 탄 택시는 사람들이 없는 다른 줄에서 간단히 심사를 받았다. 아르헨티나 쪽에서는 아예 택시에서 내리지도 않고 여권을 보여주는 것으로 통과했다.
압도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브라질 쪽에서 바라본 이과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국경 다리를 건넜다. 다리 중간에서 두 나라를 상징하는 무늬와 색깔이 바뀐다.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하늘색이 다리 중간부터 브라질을 상징하는 노란색과 녹색으로 바뀐다. 다리를 건너니 토양도 바뀌었다. 붉은 황토가 나왔다. 이상하다. 왜 다리 하나 건넜는데 이렇게 토양이 다른 느낌일까 하고 생각했다. 브라질 입국 절차도 간단히 끝났다. 물론 입국 심사는 택시에서 내려서 받았지만 간단했다. 우리는 건물 안에도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 차례가 되면 여권을 제시하고 실내에 있는 직원은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지고 바로 도장을 찍어주었다. 입국 절차가 끝난 뒤 택시는 15분 정도를 달려 우리를 브라질 포드수 이구아수 국립공원 앞에 내려준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국경을 가르는 다리. [사진-임영태]
애초 일정이 너무 빡빡해 우리는 브라질 이구아수는 건너뛰려고 했었다. ‘아르헨티나든 브라질이든 거기가 거기일 터 하나만 보면 되지 꼭 둘 다 봐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하지만 둘 다 보기로 결정했다. 이 먼 길을 두 번 다시 오기 힘들 텐데, 브라질 쪽을 못 봤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브라질 쪽을 가보니 과연 이과수가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폭포 아래까지 접근해 그 압도적 위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좋았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쉬임없이 쏟아지는 물 폭탄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질 쪽이 아르헨티나보다 공원도 잘 정비돼 있고 관리도 잘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브라질 이구아수 공원은 일단 입장하면 걸어서 폭로까지 접근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버스가 이동하는 도로 주변이 아주 말끔하게 정비돼 있다. 도로 옆 잔디들도 깔끔하게 손질이 돼 있다. 폭포의 대부분은 아르헨티나 쪽에 있지만 그 폭포는 건너편 브라질 쪽에서 더 잘 보인다. 브라질 쪽은 이과수 강을 따라서 아래쪽에서부터 위 폭포가 있는 곳까지 도로가 나 있다. 도로를 따라서 위로 올라가면서 중요 포인트마다 관람대를 적절히 설치해 각기 다른 위치에서 건너편 아르헨티나의 폭포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웅장한 폭포의 모습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브라질 쪽 이구아수 폭포. [사진-임영태]
브라질 쪽에 본 이과수 폭포. [사진-임영태]
브라질 쪽에서 바라본 폭포. [사진-임영태]
브라질 쪽에서 본 이구아수 폭포. [사진-임영태]
브라질 쪽에서 바라본 풍광. [사진-임영태]
브라질쪽 이구아수 폭포. [사진-임영태]
우리가 공원에 입장하기 전 택시기사 아저씨가 너무 일찍 내리지 말고 마지막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위에서부터 폭포를 감상하면서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일러주었다. 우리는 그 조언대로 제일 마지막 위쪽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보면서 내려왔으나 아래쪽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나중에 했다.
위에서 바라본 폭포, 계단을 내려가 바로 아래에서 본 폭포는 같은 폭포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다. 우리는 정신없이 폭포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고 멀리서 보고, 위에서 보고 아래쪽에서 보고, 보고 또 보았다. 물을 흠뻑 맞으며 폭포의 한 부분이 됐으며, 한발 떨어져 관조하면서 보았다. 그냥 폭포의 물길만 보다가 왔다. 브라질 이구아수 국립공원 안에는 조류공원도 있고 다른 볼거리도 있지만 우리는 폭포만 바라보다 돌아왔다. 한나절 동안에 다른 무엇을 보겠다고 욕심낼 것인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사진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고 가슴에 담자고 생각했지만 지금 내 기억을 벌써 흐릿해지고 있다. 그래도 이 글을 쓰면서 사진을 돌아보니 그때의 감동이 다시 밀려든다.
그러나 악마의 목구멍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이과수를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아르헨티나 쪽과 브라질 쪽을 모두 가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 덧붙여 공원에서 바라보는 관람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에서 악마의 목구멍 아래쪽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보트투어도 권하고 싶다.
오후 3시경 우리는 공원 관람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3시 10분경 공원을 떠나 포스 두 이구아수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이제 공항에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가서 과테말라시티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 타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앞길에는 큰 장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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