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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 시 모음> 조찬용의 '비빔밥에 대한 명상' 외
== 비빔밥에 대한 명상 ==
식당에 앉아
비빔밥을 비빈다
비비다
참기름을 넣을까 망설이다
넣지 않기로 했다
덤덤한 하루
젊은 날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조찬용·시인, 1953-)
== 비빔밥 ==
질그릇에
돈과 명예 비굴과 애증 넣고
용서와 화해의 양념장 넣고
쓱쓱 비벼
세월을 먹는다
(최대희·시인, 1958-)
== 비빔밥 ==
혼자일 때 먹을거리치고 비빔밥만한 게 없다
여러 동무들 이다지 다정히도 모였을까
함께 섞여 고추장에 적절히 버물려져
기꺼이 한 사람의 양식이 되러 간다
허기 아닌 외로움을 달래는 비빔밥 한 그릇
적막한 시간의 식사
나 또한 어느 큰 대접 속 비빔밥 재료인 줄 안다
나를 잡수실 세월이여, 그대도 혼자인가
그대도 내가 반가운가.
(고운기·시인, 1961-)
== 산채비빔밥 ==
시장기가 돌 무렵
한 상 가득한 갖가지 산나물을
큰 대접에 담겨 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위에
척척 올려놓고
고추장과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고
숟갈로 쓱쓱 비벼
한 숟갈 크게 떠서
우적우적 씹어먹는 맛이란 일품이다
산채비빔밥을 다 먹은 후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을 마시면
이 세상 어느 부자의 밥상이 안 부럽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비빔밥 ==
밥과 열무김치, 부추가 모여
나는 나야 너와 달라
너와 나는 같을 수 없어
서로 잘 났다 뽐을 냈어요
한 식구를 만들기 위해서
보다 못한 고추장이 꾀를 부려
놋그릇 안으로 다 모이라 했지요
몸을 섞고 비비면서
서로 터지고 부대끼며
그릇 속은 아우성
그러다가 살이 짓무르고
서로의 아픔을 알게 되었어요
서로의 말에 귀 기울기 시작했지요
내 몸이 네 몸, 서로 뭉치게 되었고
시선도 따뜻해지기 시작했어요
어느덧 한 가족이 되었어요
저를 다 버리는 고추장이 가끔은
큰 양푼에 몸을 던져
우애 많은 가족들에게
붉은 사랑의 꽃을 피워낸다네요
(정아지·시인)
== 비빔밥 ==
나는 어릴 때부터 비빔밥을 싫어했다
식구들이 모두 비빔밥을 먹을 때에도
난 찬도 없는 맨밥을 먹었었다
모나고 까칠한 성격은
비비는 것을 싫어했고
난 비빌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입사 후 수년이면
동료의 지문은 다 닳아 없어지는 데
내 지문은 그대로였다
내 인생의 고난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개밥에 도토리였다
좀 더 잘 비볐더라면
내 인생도 달라졌을 텐데
오늘도 비빔밥 앞에 놓고
목하 고민 중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문조·시인)
== 비빔밥 ==
육수에 갓 지은 모락모락 따끈한 밥
다소곳이 방짜유기에 담고
콩나물 쑥갓 시금치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당근 표고버섯 올리고
그 위에 육회 올리고 그 위에 달걀노른자 올리고
고추장 한 술
붉은 꽃 피어나니 붉은 꽃 아래 무지개
침 한 번 꼴깍 삼키고
비벼라 비벼 쓱쓱 싹싹 비벼라
골고루 비벼라 잘 섞이게 비벼라
고추장이 뭉치면 짜다 짜 짜면 목 탄다
비벼라, 세상아
비벼라, 사람아
비벼라, 하나야
비벼라, 아흔아홉아
비벼라 비벼 우리 모두 모두 모아 비벼라
꽃을 비벼라 무지개를 비벼라
고루고루 잘 섞어 골고루 잘 비벼
한 술 크게 떠
아
대한민국
(강효수·시인, 전북 남원 출생)
== 전주에 와 ==
밥맛 없어 밥상에서
마누라와 싸운 날은
시외버스를 타고 전주에 와
콩나물 국밥이나 콩나물 비빔밥을 찾을 일이요,
세상이 하 답답하기만 하여
살맛 나지 않는 날은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에 와
풍남문 근처 태산목을 우러러 볼 일이요,
사람들한테 실망해
난초 향내 그리운 날은
기차를 타고 전주에 와
가람 선생이나 석정 선생이 남긴 난초 향내를 맡을 일이다.
그러노라면,
세상은 조금씩 밝아오리니
세상 살맛은 조금씩 되돌아오고
눈길과 손길은 조금씩 부드러워지리니…
(나태주·시인, 194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