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교의 복지역사 이야기 3 ‘자휼전칙’-아동복지의 원형
이용교/ 광주대학교 교수, 복지평론가
우리나라 사회서비스의 원형은 ‘아동복지’에서 찾을 수 있고, 아동복지의 ‘원형’은 자휼전칙에 집대성되어 있다. 1961년에 제정된 아동복리법 상 아동복리시설에는 “보육시설, 조산시설, 정신박약아보호시설, 맹농아아양호시설, 신체허약아보호시설, 지체부자유아보호시설, 모자보호시설, 탁아시설, 교호시설 또는 부랑아보호시설” 등이 포함되었다. 아동복리시설에는 오늘날 기준으로 아동복지시설뿐만 아니라, 장애인복지시설, 한부모가족지원시설, 영유아보육시설, 노숙인시설, 조사원 등이 포함되었다. 심신장애자복지법, 모자복지법, 영유아보육법 등이 제정되기 이전에 다양한 사회복지시설들은 아동복지시설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아동복지가 언제부터 체계적으로 시행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 등을 보면, 각 나라의 왕들은 항상 환과고독(鰥寡孤獨)과 같은 사궁(四窮)을 챙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사회에서 가장 궁박한 사람들의 상징인 늙은 홀아비, 늙은 과부, 고아, 늙고 자식이 없는 독거노인은 구휼의 최우선 대상자이었다.
고려시대에 고아들을 일정한 장소에 모아 양육하거나 수양(收養)했다는 기록이 있다.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거나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면 특히 아동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굶어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정부는 고아를 양육할 경우에는 10세까지 관청에서 양식을 지급하고 10세가 넘는 자는 자기 뜻에 따라 거처를 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충목왕 3년(1347년)에는 해아도감(孩兒都監)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아동양육시설로 보이나 기구의 크기나 실적, 존속기간 등을 확인하기 어렵다. 봄부터 가뭄이 계속되어 왕이 기우제를 지냈고, 10월에 해아도감을 설치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겨울동안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돌보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통치규범인 ‘경국대전’의 예전, 혜택을 베푸는 규례(惠恤)에 따르면 아동복지의 근간을 볼 수 있다. 즉, “집을 잃어버린 어린아이는 한성부 또는 그 당해 고을에서 양육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맡기되 관청에서 옷과 먹을 것을 보내준다. 10살이 넘도록 돌려 달라고 신고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양육한 사람이 부리는 것을 허락한다”.
오늘날 아동복지에 큰 영향력을 미친 제도는 조선 정조 7년(1783년)에 제정된 자휼전칙(字恤典則)이다. 정조 6년과 7년에 발생된 전국적인 대흉년으로 농촌은 물론이고 국가경제는 피폐되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극심한 흉년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읍)이 전국의 72.3%나 되었다.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이 노동능력이 없는 아동이었기에 정조는 11월 3일 버려진 아동을 구제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지시하였다. 그 내용은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해에 가장 불쌍한 것은 어린애들이다. 길가에 버려져 있는 무리들과 흉년이 들어 걸인행각을 하는 아이들을 조정에서 구제하여 살리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가서 호소하겠는가?... 담당관리들로 하여금 충분히 상의해서 절목을 만들어 전국에 반포하여 각기 영구히 규정을 지키어 행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자휼전칙은 보호가 필요한 아동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조하고, 해당 관리가 체계적으로 지원할 것을 규정하였다.
자휼전칙은 9개조로 이루어졌는데, 구호대상자인 ‘행걸아(行乞兒)’는 부모와 친척이나 상전(上典)이 없어 의탁할 수 없는 4세부터 10세까지의 아동이며, ‘유기아(遺棄兒)’는 3세 이하의 유아이다. 이 시기에는 아동이 10세가 되면 가사나 농사 등으로 밥벌이를 할 것으로 간주하였다. 보호대상의 연령은 1944년 조선구호령에서 13세 이하, 1961년 아동복리법에서 18세 미만으로 상향되었다.
자휼전칙은 걸식하는 아동은 보리를 추수할 때까지 일시보호를 하고, 버려진 아동은 풍년이나 흉년에 상관없이 보호하도록 하였다. 얻어먹을 힘이라도 있는 아동은 추운 겨울에서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만 보호하고, 그럴 힘이 없는 아동은 연중 보호하였다. 오늘날 아동복지시설은 일시보호 혹은 중장기보호를 하는데, 당시에는 일시보호가 중심이었다.
행걸아는 일시보호(유양)는 진휼청 밖 공한지에 ‘흙담집’을 설치하여 거처하도록 하고, 나이에 따라 규정된 양식 등을 받도록 하였다. 양식은 진휼청의 식례(式禮)를 참조하여 7세에서 10세까지는 1일에 1인당 쌀 7홉, 장 2홉, 미역 1잎씩 주고, 4세에서 6세까지는 쌀 5홉, 장 1홉, 미역 1잎씩 주며, 진휼청의 창고를 지키는 사람이 주관하여 먹이게 하였다. 기아는 유리걸식하는 여인(乳女) 중에서 젖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유녀 1인에게 2명까지 나누어 주었다. 유녀에게는 쌀, 장, 미역 등을 제공하고, 만약 가난한 여인이 유아를 돌본다면 양식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자휼전칙은 행걸아와 유기아가 발생되면 지방관은 먼저 부모나 친척이 있는지를 찾고, 연고자가 없으면 민간에서 수양할 사람을 찾으며, 여의치 않으면 관에서 보호하도록 하였다. 이는 오늘날도 보호가 필요한 아동이 발생되면 아동일시보호시설에서 보호하고, 부모나 보호자를 찾아주며, 보호자가 입양을 의뢰할 경우에는 입양하고, 나머지 아동을 가정위탁을 하거나 공동생활가정이나 아동양육시설에 입소시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휼전칙’에서 우리나라 아동복지의 원형을 볼 수 있다.
** 자휼전칙의 책 표지를 잡지에 ‘수록’하기 바랍니다. 출처를 밝혀주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wlsvna1071/10608716
참고서적과 자료
조성린, 우리나라 복지 발달사, 조은출판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