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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하나의 독특한 신념, 아마 독자 여러분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신념을 발견했다.
그 신념인즉슨, 표트르대제는 그야말로 러시아 사람이라는 것, 특히 온갖 개혁을 단행한 방식에서도 러시아 사람다웠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강인함을 뼛속 깊이 믿기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으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대담하게 앞날을 내다본다.
러시아 사람은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고 이치에 맞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러시아 사람의 건전한 분별력은 독일 사람의 말라빠진 이성을 얼마든지 조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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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째 되던 날 저녁, 폴루티킨 씨가 자기 집으로 오라고 내게 사람을 보냈다.
나는 호리 노인과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칼리니치와 함께 달구지에 올랐다.
“그럼, 잘 지내게, 호리, 건강하시고," 내가 말했다… "페다도 잘 있어라.”
"살펴 가세요, 나리, 잘 지내시고 저희를 잊지 마세요."
우리는 출발했다. 노을이 막 타올랐다.
"내일은 날씨가 참 좋겠군." 밝은 하늘을 보며 내가 말했다.
"웬걸요, 비가 올 겁니다." 칼리니치가 말했다.
"저기 오리들이 푸드덕거리고 풀냄새가 진동하니까요."
우리는 덤불이 무성한 곳에 이르렀다.
칼리니치는 마부석에서 털썩거리며 가만히 노래를 불렀고 하염없이 노을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다음날 나는 폴루티킨 씨의 환대를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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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릅니다. 저 여잔 글을 알거든요. 이런 장사엔…글을 아는 게…도움이 되니까요.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됐나?"
"오래됐습죠. 예전에 저 여자 주인댁에 일하러 다녔으니까요.
그 댁 저택이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하인 페트루시카도 알고?"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말씀인가요? 그럼요, 알다마다요."
"그 사람은 지금 어딨지?"
"군대에 갔습니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저 여자는 건강이 안 좋은 건가?" 내가 침묵 끝에 예르몰라이에게 물었다.
"건강이고 뭐고!…아무튼 내일은 탸가가 참 잘되겠습니다. 푹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들오리떼가 휘파람소리를 내며 우리 머리 위로 빠르게 날아갔고, 멀지 않은 강가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사위(四圍)가 어두워지자 한기가 느껴졌다.
숲에서 꾀꼬리가 낭랑하게 노래했다.
우리는 건초 더미로 기어들었고 이내 곯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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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그가 말을 이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순 없는 법이지요.
종국에는…지상 모든 것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겁니다, 거 누굽니까, 볼테르가 말했듯이 말입니다." 그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럼요," 내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게다가 어떤 불행도 견딜 수 있을 만한 정도로 일어나는 법이며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고약한 상황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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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 날씨가 변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될 때만 만날 수 있는 멋진 날이었다.
그런 날에는 이른아침부터 하늘이 맑고, 아침놀은 불난 것처럼 붉게 타오르지 않고 수줍은 홍조만 띤다.
해는 폭염에 가뭄이 겹칠 때처럼 활활 타오르지도 않고, 시뻘겋게 달궈지지도 않고, 폭풍 전야 때처럼 탁하게 검붉지도 않다.
밝게 빛나며 상냥한 볕을 내려주는 해는 좁다랗고 긴 먹구름 위를 평화로이 떠가며 싱싱하게 반짝이고, 연보랏빛 안개 속으로 곧장 뛰어들 것 같다.
길게 잡아 늘인 듯한 구름의 얇은 위쪽 윤곽은 작은 뱀처럼 빛나며, 그 광채는 단조한 은의 광채와 유사하다.
그러나 다시 유희하는 광선들이 흘러들면, 기세등등한 천체는 쾌활하고도 장엄한 모습으로 솟아오른다.
한낮이 가까워지면 둥글고 높다란 구름, 금빛에 잿빛을 띤 구름이 하얗고 부드러운 띠를 두른 채 몰려든다.
끝없이 사방으로 흐르는 강 여기저기에 흩어져 고르게 푸르면서도 깊은 곳까지 투명한 소맷자락에 휘감긴 작은 섬들처럼 구름들은 제자리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구름들이 저멀리 지평선에서 서로 몸을 딱 붙이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들 사이를 흐르던 푸름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름들은 하늘과 마찬가지로 이미 그 자체로 쪽빛을 띤다.
빛과 온기에 흠뻑 물든 까닭이다.
지평선 부근의 경쾌하고 옅은 연보랏빛은 온종일 변할 줄 모르고 어디나 고르다.
어두워지는 곳도 없고 뇌우로 짙어지는 곳도 없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푸르스름한 선들이 어디에선가 뻗쳐 있다면, 그것은 거의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가는 빗줄기가 틀림없다.
저녁 무렵에는 이 구름들도 점점 사라지고, 그 가운데 거무스름한 빛깔에 연기처럼 알 수 없는 형태의 구름들만 남아 저물어가는 해의 반대편에서 장밋빛 덩어리가 되어 드러눕는다.
해가 떠오를 때만큼이나 고요하게 넘어가는 곳에는 어두워진 대지 위로 붉은 광휘가 잠깐 머물고, 그 광휘 위에는 조심스레 옮기는 촛불처럼 저녁별이 조용히 눈을 깜박이며 희미하게 타오를 것이다.
그런 날이면 모든 색채가 부드러워진다. 밝으나 선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떤 감격스러운 온화함의 흔적이 만물에 깃든다.
그런 날이면 가끔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아니 모든 들판의 경사면을 증기로 '쪄낸다'.
그러나 바람은 켜켜이 쌓인 열기를 흐트러뜨리고 회오리바람은 - 날씨가 며칠씩 지속되리라는 확실한 징후다 - 높고 흰 기둥이 되어 경작지 너머 길에까지 나가 거닌다.
메마르고 깨끗한 공기에서는 쑥이며 베어낸 호밀이며 메밀 냄새가 난다.
한 시간만 지나면 밤이 되는 데도 습기를 느낄 수 없다.
땅을 일구는 사람은 곡식을 거두는 철에 바로 그런 날씨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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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은 한바탕 웃어댔고 다시 잠시 아무 말도 없었는데, 이건 사람들이 야외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종종 있는 일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은 제왕과도 같이 장엄했다.
늦저녁의 신선하고 축축한 공기가 지나가고 한 밤의 메마른 온기가 찾아왔다.
이 온기는 잠든 들판 위로 부드러운 휘장처럼 드리워져 오래 머물 참이었다.
아침의 첫 지저귐, 첫 살랑임, 첫 바스락 거림이 들리기까지는, 아침놀의 첫 이슬이 맺히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금빛 별들이 서로 질세라 반짝거리며 은하수를 향해 조용히 흘러갔고, 누구라도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대지의 멈출 줄 모르는 정력적인 질주를 어렴풋이나마 느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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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빛줄기가 내 얼굴을 스쳤다.
나는 눈을 떴다.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연지를 바른 듯한 아침놀은 온데간데없고 동쪽이 벌써 하얬다.
흐릿하긴 해도 주변의 모든 것이 보였다.
창백한 잿빛 하늘은 밝아지면서 차가워지고 푸르러졌다.
별들은 희미한 빛을 깜빡이고는 하나둘 사라져갔다.
땅이 축축한 만큼 잎사귀들은 땀을 흘렸고, 생기 있는 소리들과 목소리들이 어디선가 울렸으며, 이른아침의 산들바람은 벌써 땅 위를 돌아다니며 파닥였다.
내 몸은 가볍고 즐거운 떨림으로 산들바람에 응답했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소년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사그라져가는 모닥불 주위에서 여전히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파벨 혼자만 반쯤 몸을 일으켜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개가 피어오르는 강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2베르스타쯤 갔을까, 나를 둘러싸고 펼쳐진 넓고 축축한 초지를 따라, 앞에 우뚝 선 채 녹음이 짙어지던 언덕을 따라, 이 숲에서 저 숲으로, 내가 지나온 먼지 풀풀 날리는 기나긴 길을 따라, 반짝이며 붉어진 덤불마다, 그리고 흩어져가는 안개 아래 부끄러운 듯 새파랗게 흐르는 강물을 따라 처음에는 발그레하더니, 나중에는 붉어지고 마침내 금빛을 두른, 어리고 뜨거운 빛의 흐름이 갑자기 흘러넘쳤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깨어나고 노래하고 웅성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매달린 커다란 이슬방울들이 번쩍이는 다이아몬드처럼 붉었다.
순수하고 선명한, 마치 아침의 서늘한 공기에 깨끗이 씻긴 듯한 종소리가 나를 맞이하며 울렸고, 익숙한 얼굴의 소년들이 몰아대는, 실컷 휴식을 취한 말들이 갑자기 나를 지나쳐 달려갔다…
유감스럽게도, 바로 그해에 파벨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덧붙여야겠다.
그는 물에 빠져 죽은 것이 아니라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안됐다, 정말 멋진 녀석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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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째서 그 작은 새를 죽였나?" 그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어째서라니? 뜸부기는 사냥감이고, 먹을 수 있으니 그랬네."
"먹으려고 죽인 게 아니잖아! 당신은 그냥 재미로 새를 죽였어."
"그러는 영감은 거위나 닭을 먹지 않는가?"
"그런 새들이야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정해주신 것이고, 뜸부기는 숲에 사는 자유로운 새란 말이야.
뜸부기뿐만이 아니야.
숲에 사는 모든 짐승, 들에, 강에, 늪에, 풀밭에, 높은 곳에, 낮은 곳에 사는 모든 짐승을 죽이는 건 죄라고.
그것들이 제 명대로 땅에서 살 수 있게 놔둬야 해…
사람의 양식은 따로 정해져 있어.
사람은 다른 걸 먹고 마셔야 하는 법이야.
하늘이 은총으로 내려주신 곡식이 있고, 역시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이 있고, 조상 대대로 키운 짐승들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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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있나?"
"없어, 아무도 없어."
"어째서 그렇지?… 다들 세상을 떠난 건가?”
"아니, 그렇지 않아. 그저 가족은 세상에서 내가 받을 몫이 아닌 게지.
모든 건 하느님에게 달린 법이야,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보살피셔서 이렇게 걸어 다닌다고.
사람은 자고로 의로워야 해, 암!
그러니까 하느님이 보시기에 마땅해야 한다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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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괴롭나니, 나 괴롭나니." 옆방에서 조카가 한창 절창중이었다.
"그만하려무나, 안드류샤."
"그대와 헤어져 애끓는 이 영혼." 명가수는 지칠 줄 몰랐다.
타티야나 보리소브나가 고개를 저었다.
"오, 이놈의 예술가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벨롭조로프는 지금껏 고모집에 살며 언제라도 페테르부르크로 가겠다며 벼르고 있다.
시골에서 그는 더 뚱뚱해졌다.
고모는 - 누가 생각할 수나 있었겠으랴 - 여전히 그를 끔찍이 사랑하고, 동네 처녀들은 그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 많던 지인은 타티야나 보리소브나를 더이상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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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저는 죽을 겁니다.
저기, 저기 오고 있습니다, 저기, 저기요…친구들,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해주게…”
"하느님이 용서하실 거야, 막심 안드레이치,"
농부들이 한목소리로 침울하게 말했고 모자를 벗었다.
"자네도 우리를 용서해주게."
그는 갑자기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고 답답한지 가슴을 한 번 내밀고는 다시 늘어졌다.
"어찌됐든 여기서 이대로 죽게 해선 안 돼," 아르달리온 미하일리치가 외쳤다.
"여보게들, 수레에서 멍석이라도 내오게,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세." 두어 사람이 수레로 뛰어갔다.
"예핌한테서…그 시카에 사는…” 죽어가는 이가 더듬거렸다.
“어제 말을 샀어. 선금을 줬으니.... 내 말이야…마누라에게 그 말…역시......"
그를 멍석에 눕히려 했다…그는 총 맞은 새처럼 바들바들 떨다가 몸을 쭉 폈다.
"죽었군” 농부들이 웅얼거렸다.
우리는 말없이 말에 올라 그곳을 떠났다.
불쌍한 막심의 죽음을 본 나는 생각에 잠겼다.
러시아의 농부가 죽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다!
삶의 마지막을 앞둔 그의 태도는 무심한 것도, 우둔한 것도 아니다.
그는 의식을 치르듯 죽는다.
차갑고 단순하게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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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여지주의 임종을 지킨 적이 있다.
신부는 그녀에게 임종 기도를 읊어주었고, 그러던 중 갑자기 병자가 정말로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고 알리더니 서둘러 그녀에게 십자가를 주었다.
여지주는 불쾌하다는 듯 뒤로 물러 났다.
"뭘 그렇게 서두르세요, 신부님," 그녀가 굳어가는 혀로 말했다.
"안 늦어요…”
그녀는 다시 자리에 누워 한 손을 베개 밑으로 집어넣더니 마지막 날숨을 내쉬었다.
베개 밑에는 1루블짜리 동전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임종 기도를 해준 신부에게 사례비를 주려던 것이다…
그렇다, 러시아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모습은 신기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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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코프를 한번 더 바라보고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받은 인상을 해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더위는 여전히 견디기 어려웠다.
더위는 땅 위에 두껍고 무거운 막처럼 걸려 있었다.
짙푸른 하늘에 아주 엷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먼지 사이로 밝은 잔불이 맴도는 듯했다.
모든 것이 말이 없었다.
무력한 자연의 깊은 침묵 속에는 무언가 가망 없고 짓눌린 것이 있었다.
나는 건초를 쌓아둔 헛간에 이르러 막 베었으나 벌써 말라버린 풀 위에 누웠다.
한참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매혹적인 야코프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귓가에 울렸다…
마침내 열기와 피곤이 제 목적을 달성했고 나는 죽은 사람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내가 깨었을 때는 이미 어두웠다.
주변에 널브러진 풀은 강한 냄새를 풍겼고 아주 조금 누긋해졌다.
이엉이 절반쯤 날아간 지붕의 가느다란 뼈대 사이로 창백한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노을은 빛을 잃은 지 이미 오래고 지평선에 그 마지막 흔적이 보일락 말락 했다.
얼마 전까지 데워졌던 대기의 온기가 신선한 밤공기의 틈새에서 느껴졌고, 가슴은 여전히 차가운 바람을 갈망했다.
바람은 없었고, 먹구름도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투명하고 어두웠으며, 수없이 많은, 그러나 거의 보이지는 않는 별들로 조용히 반짝였다.
마을에는 불빛이 번쩍였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환히 불 밝힌 주막에서 막연한 불협화음이 시끄럽게 들렸고, 그 속에서 야코프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때때로 터져나왔다.
나는 들창에 다가가 유리에 얼굴을 갖다댔다.
화려하고 생기 넘치나 유쾌하지 않은 광경이 보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취해 있었다.
야코프부터 시작해 하나도 빠짐없이.
그는 가슴팍을 드러낸 채 긴 의자에 앉아 목쉰 소리로 거리의 춤곡을 흥얼대면서 기타줄을 느릿느릿 뚱기고 있었다. 젖어서 뭉쳐진 머리칼이 무서울 정도로 창백해진 얼굴에 흘러내렸다.
주막 한가운데에서는 완전히 '나사가 풀려버린' 오발두이가 카프탄도 벗어던진 채 회색 아르마크를 입은 농부 앞에서 풀쩍대며 춤을 췄다.
몸집이 작은 농부도 지친 두 발을 힘겹게 구르고 비비면서 엉킨 턱수염 사이로 멍하게 웃었고 이따금 한 손을 휘젓는 모습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될 대로 되라지!"
세상 무엇도 그의 얼굴보다 우스울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애써 눈썹을 들어올리려 해도 무거워진 눈꺼풀은 어디 있는지 알아챌 수 없는, 흐리멍덩하지만 지극히 달콤한 두 눈 위에 얹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한바탕 마시고 취한 사람이 종국에 이르는 사랑스러운 상태가 될 것이고 그를 지나치는 누구라도 얼굴을 들여 다보며 한마디씩 할 것이다.
"멋지군, 친구, 아주 멋져!"
가재처럼 얼굴이 새 빨개진 모르가치는 콧구멍을 벌룩거리며 한구석에서 독살스럽게 웃어댔다.
진정한 주막 주인답게 니콜라이 이바니치 홀로 예의 그 냉정을 잃지 않았다.
주막 안에는 새로운 얼굴들도 많이 모여 있었으나 들짐승 나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발길을 돌려 콜로톱카가 위치한 언덕을 빠르게 내려갔다.
언덕 밑자락에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저녁 안개의 몽롱한 파도에 잠긴 평원은 더욱 아득했고 어두워진 하늘과 하나가 된 듯했다.
골짜기로 난 길을 큰 보폭으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평원 어디선가 소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트롭 카! 안트롭카-아-아…”
그는 마지막 음절을 아주 오랫동안 길게 늘이며 끈질기게, 눈물날 정도로 절박하게 외쳤다.
그는 잠시 잠잠하더니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움직임 없는, 얕게 잠든 대기를 타고 울려퍼졌다.
그가 안트롭카라는 이름을 최소 서른 번 외쳤을 때였을까, 갑자기 들판 반대편에서, 마치 세상 반대편에서 외치는 것 같은 대답이 간신히 들려왔다.
"왜-애-애-애-애?"
소년이 반가우면서도 성이 난 목소리로 곧장 외쳤다.
"이리 와, 이 레시 같은 놈아-아-아!"
"왜 그러는 데-에-에-에?" 그가 한참 후에 대답했다.
"아버지가 너 혼 좀 나야겠다고 하셔-어-어-어."
첫번째 목소리가 서둘러 외쳤다.
두번째 목소리는 응답하지 않았고, 소년은 다시 안트롭카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외침은 점점 드물어지고 희미해졌으나 날이 아주 어두워지고 내가 숲의 끝자락에 이를 때까지 들렸다.
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그 숲은 콜로톱카에서 4베르스타나 떨어져 있었다…
"안트롭카-아-아!"
밤의 그림자로 가득찬 대기 속에 여전히 그의 외침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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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가 견디겠는가, 시대의 채찍과 조롱을,
법의 무력함과 압제자의 억압을,
오만한 자의 모욕과 버림받은 사랑을,
경멸받아 마땅한 자들이 공덕에 보이는 경멸을,
단도의 일격 하나면 우리에게 평안을
선사할 수 있는데… 오, 기억해다오,
너의 성스러운 기도 가운데 나의 모든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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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샴페인 잔을 입술에 갖다댔으나 들이켜지는 않고 계속 말했다.
‘헤카베를 위해서라고?
그가 헤카베에게 무엇이고, 그녀는 그에게 무엇이기에
그가 그녀를 위해 울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비천하고 소심한 노예다,
나는 겁쟁이다! 누가 나를 악당이라고 부를 텐가?
누가 내게, 너는 거짓말하고 있어, 라고 말할 텐가?
나는 모욕을 기꺼이 견디겠다… 그렇다!
나는 배짱이 비둘기만하다, 나는 쓸개도 없다,
굴욕도 내게는 쓰지 않다…’
카라타예프는 잔을 떨어뜨리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음, 그렇습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옛일을 떠올리는 자는 눈 한 쪽을…
정말 안 그렇습니까? (그가 히죽히죽 웃었다.)
당신의 건강을 위하여!"
"모스크바에 계속 계실 겁니까?" 내가 물었다.
"모스크바에서 죽을 겁니다!”
"카라타예프!" 옆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카라타예프, 어디 있나? 이리 좀 와봐, 이 사람아!"
"저를 부르는군요,” 그가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며 말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짬이 나면 저에게 들러주시고요, 저는 *** 골목에 삽니다."
그러나 다음날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나는 모스크바를 떠나야 했고 표트르 페트로비치 카라타예프를 다시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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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녀가 떨리는 손을 선뜻 그에게 내밀지 못하는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저 작별인사로 한마디만 해 주면......”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하, 또 울고 난리네," 빅토르가 눈까지 내려오게 모자 뒤를 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나는 바라는 거 없어요."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며 계속 말했다.
"근데 식구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어요? 가련한 내 처지는 어떻게 되겠어요?
이 불쌍한 고아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시집보내겠죠…불쌍한 내 신세!"
"아주 노래를 해라, 노래를 해," 제자리에서 뭉그적거리며 빅토르가 낮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한마디만 해준다면, 한마디만…그래, 아쿨리나, 나 는......"
애끓는 울음이 터져나오는 바람에 그녀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그녀는 풀밭에 고개를 박고 서럽게, 아주 서럽게 울었다…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고, 뒤통수가 들썩였다…
오랫동안 꾹 누르고 있던 슬픔이 마침내 급류처럼 터져나온 것이다.
빅토르는 팔짱을 낀 채 그녀 옆에 잠시 서 있다가 몸을 홱 돌려 성큼성큼 어디론가 가버렸다.
얼마쯤 지났을까…잠잠해진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고 손을 탈탈 털었다. 그를 좇아 뛰어가려 했지만 다리가 휘청거려 계속 주저앉고 말았다…
보다못한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돌아보기도 전에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가냘픈 고함을 지르더니 벌떡 일어나 나무를 뒤로 사라졌다, 땅에 흩어진 꽃들을 남겨두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수레국화 다발을 챙겼고 그길로 숲에서 들판으로 나왔다.
생기 없이 맑기만 한 하늘에 해가 낮게 떠 있었고, 빛줄기 역시 창백하고 차가웠다.
햇빛은 밝지 않았고, 묽어진 채 사방에 고르게 흐를 뿐이었다.
저녁이 오기까지는 반시간도 남지 않았고 노을은 간신히 타올랐다.
이따금 바람이 수확을 마친 메마르고 누런 밭을 지나 내가 있는 쪽으로 홱홱 불어 왔다.
으스러진 작은 잎사귀들은 메마른 밭 앞에서 부리나케 솟아오르더니 길을 지나, 또 길을 건너 숲 가장자리를 따라 질주했다.
들판을 바라보며 벽처럼 서 있는 숲은 온몸을 떨며 자잘한 광채들로 또렷이 반짝였지만 이미 밝은 빛은 없었다.
불그스름한 풀밭에도, 들풀의 가느다란 줄기에도, 널브러진 지푸라기에도 가을날답게 수많은 거미줄이 번쩍이고 요동쳤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마음이 슬퍼졌다.
여전히 생기 있지만 기쁨은 없는, 시들어가는 자연의 미소 사이로 머지않아 찾아올 겨울의 스산한 공포가 언뜻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머리 위 높은 곳에는 조심성 많은 큰까마귀가 육중한 몸으로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며 날아다녔고 고개를 돌려 나를 곁눈질하더니 다시 솟아올라 띄엄띄엄 울며 숲으로 날아 사라졌다.
엄청난 수의 비둘기떼가 건조장에서 몰려와 돌연 기둥을 이루며 뱅뱅 돌더니 부산스레 들판으로 흩어졌다.
가을의 징후였다!
누군가 말을 타고 헐벗은 언덕 너머로 달려간다, 빈 수레를 우당탕 울리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불쌍한 아쿨리나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한 참이나 떠나지 않았고 이미 시든지 오래인 그녀의 수레국화는 아직 내가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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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하나만 알려주시죠," 내가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그가 세차게 고개를 들었다.
"제발 부탁이니," 그가 내 말을 끊었다.
"누구에게도 제 이름은 묻지 말아주 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그저 이름 모를 존재, 운명에 의해 불구가 된 바실리 바실리예비치로 남겠습니다. 게다가 전 독특한 기인도 아니니 따로 이름을 가질 자격도 없지요…
그래도 굳이 제게 어떤 별명을 붙이셔야겠다면, 이렇게 부르십시오…
시그롭스키군의 햄릿이라고.
군 전체에 저 같은 햄릿들이 수두룩할 겁니다.
아직 다른 햄릿들을 보지 못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이만."
그는 다시 깃털 이불에 몸을 파묻었고, 다음날 아침 하인이 와서 나를 깨웠을 때, 그는 이미 없었다.
동트기 전에 떠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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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 판텔레이 체르톱하노프가 죽어가고 있는데, 누가 그를 방해할쏘냐?
그는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그는 아무것도 요구 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아, 그를 가만 놔두어라! 가거라!"
채찍을 쥔 손이 위로 올라가려 했으나…헛수고였다!
입술이 다시 달라붙고 눈이 닫혔다.
그리고 체르톱하노프는 장화 밑창을 한데로 모으고는 딱딱한 침대 위에 몸을 쭉 펴고 누워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시면 알려주게." 경찰서장이 방을 나서면서 페르피시카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지금이라도 신부님을 모셔오는 게 좋겠어.
그래도 격식을 갖춰서 도유식을 해야 하니까."
페르피시카는 바로 그날 신부를 데려왔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경찰서장에게 소식을 전해야 했다.
판텔레이 예레메이치가 그날 밤 세상을 떠났다고.
그를 묻던 날에는 두 사람이 그의 관을 배웅했다.
심부름꾼 페르피시카와 모셸 레이바였다.
체르톱하노프 사망 소식이 모종의 경로를 통해 유대인에게도 전해졌고, 그는 은인에 대한 마지막 도리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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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저를 위해 그러신다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나리, 누가 남을 도울 수 있을까요?
누가 남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나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도울 수밖에 없어요!
나리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혼자 누워 있을 때면 가끔….세상에 저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직 나 홀로 살아 있다는 기분요!
그리고 어떤 생각이 번뜩 떠오르는데…그것도 아주 놀라운 생각이에요."
"어떤 생각인데, 루케리야?"
"나리, 뭔가 말로 할 수 없는 생각이에요. 뭐라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잊어버리게 되구요.
생각이 먹구름처럼 와서 비를 흠씬 뿌리고 나면 아주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지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옆에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고, 제 불행 말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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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와 작별인사를 나누며 꼭 약을 구해 보내주겠다고 거듭 약속했고, 필요한 게 없는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서 말해보라고 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이대로 만족해요, 하느님에게 감사해요."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간신히, 그러나 감동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건강하시길 빌게요! 나리, 혹시 나리 어머님에게 말씀드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곳 농민들이 너무 가난하다구요, 그래서 소작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신다면 좋겠다구요!
땅이 넉넉하지 않아 거두는 게 적거든요…
그렇게 해주시면 다들 마님과 나리를 위해 기도할 거예요…
저는 정말 바라는 게 없어요. 이대로 만족합니다."
나는 루케리야에게 부탁을 꼭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벌써 문가에 이르던 참이었다…
그녀가 나를 다시 불렀다.
"기억하시죠, 나리," 그녀가 이렇게 말했고, 그녀의 눈과 입술에는 신비로운 무언가가 반짝였다.
"제 땋은 머리가 어땠는지 기억하시죠? 무릎에 닿을 만큼 길었죠!
오랫동안 선뜻 맘을 못 먹겠더라고요…참 예쁜 머리였는데!…
하지만 빗지도 못하는 걸 어쩌겠어요? 이런 몸으로!…
그래서 그냥 잘라버렸어요…네…어머나, 죄송해요, 나리! 이제 더는 안 되겠어요….."
그날 나는 사냥을 나가기 전 마을 순경과 루케리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게서 나는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산송장'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 때문에 불편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또 그녀도 한탄이나 불평을 늘어놓지 않
는다고 말했다.
"딱히 원하는 것도 없고, 그저 모든 걸 감사하게 생각하죠.
아주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이에요. 다만 죗값으로 하느님이 큰 벌을 내리셨을 뿐."
순경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래도 저희는 그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죄를 따지다니요, 아닙니다, 저희는 그러지 못합니다.
그저 그녀를 가만 놔둘 뿐입니다!"
몇 주 뒤 나는 루케리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음은 결국 그녀에게 오고 말았다…
'페트롭키가 지나고.'
그녀는 세상을 떠나던 날 내내 종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알렉세옙카에서 교회까지는 5베르스타가 넘었고 그날은 일요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루케리야는 종소리가 교회가 아니라 '저 위에서' 들려온다고 말했다 한다.
차마 하늘에서 내려온다고는 말할 수 없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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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잠들지 못했는데 - 사냥으로 지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겪은 불안이 잠을 내쫓아서가 아니라 우리 앞에 참으로 아름다운 장소들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작은 웅덩이, 호수, 개울, 버드나무가 무성한 기슭이 여기저기 들어찬 광활하고 탁 트인 초원, 눈 녹은 물이 흐르고 풀이 훤칠하게 자란 초원, 그야말로 러시아다운 이 초원은 러시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 하는 곳이었고, 우리 고대의 빌리나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이 하얀 백조와 잿빛 오리를 잡으러 다니던 그런 곳과 닮았다.
말발굽과 수로 잘 다져진 길은 노르스름한 리본처럼 휘어졌고, 말들은 사뿐히 달렸으며, 나는 황홀경에 빠져 눈도 감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다정한 달빛 아래 부드럽고 가지런히 흘러갔다.
필로페이, 그마저 감동한 모양이었다.
"이 초원은 우리 고장에서 스뱌토예고리옙스키예초원이라고 불립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벨리코크냐제스키예초원이 이어지지요.
온 라세야를 뒤져도 이런 초원들은 없을 겁니다…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주마가 콧김을 내뿜고 부르르 떨었다…
"주님이 함께하시길!…”
필로페이가 소리 낮춰 점잖게 말했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그가 되풀이하고는 한숨을 내쉬었고, 길게 소리를 끌며 목을 가다듬었다.
"곧 풀베기가 시작될 텐데, 이 많은 풀을 다 베려면 일이 크겠습니다!
강기슭 바로 밑에 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만한 잉어들이요!"
그가 노래를 부르듯이 덧붙였다.
"한마디로 살맛난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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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십니까, 나리, 제가 이렇게 말했었지요. 덜거덕…덜거덕, 덜거덕!"
그는 몇 번 세차게 손을 휘저었다…
그는 이 말이 퍽 재밌는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그의 마을로 돌아왔다.
나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예르몰라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아선지 아무런 공감도 보이지 않고 동의하거나 힐난하는 듯 흠흠 할 뿐이었고, 내 생각에는 그 자신도 흠흠 하는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틀이 지났을까, 그는 나와 필로페이가 툴라로 가고 있던 바로 그날 밤, 바로 그 길에서, 한 상인이 도적들에게 털리고 죽임까지 당했다는 소식을 만족스러운 낯빛으로 내게 전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수사 현장으로 말을 달리던 경찰 서장이 내게 이 소식이 사실이라고 확인해준 것이다.
우리의 그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진짜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던 길이었을까?
또 거구의 광대가 말했듯 그들이 잠자리까지 봐줬다는 '친구 녀석'은 사실 그 상인이 아니었을까?
나는 필로페이의 마을에서 닷새 정도 더 머물렀다.
그리고 그를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응? 덜거덕덜거덕?"
"재밌는 사람이었습죠."
그는 매번 이렇게 대답하고는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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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그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정겨운 시골, 어두운 정원으로,
커다란 보리수 아래 그늘이 짙고
은방울꽃 처녀처럼 향기로운 곳,
둥근 버드나무들 강둑에 줄지어
물위로 휘영청 몸을 수그리는 곳,
실팍한 참나무가 기름진 밭 굽어보며 자라고,
삼이며 엉겅퀴 내음 진동하는 그곳…
그곳, 그곳으로, 광활한 들판으로,
대지가 벨벳처럼 검게 빛나는 곳,
눈을 두는 곳마다 호밀밭이
부드러운 파도처럼 고요히 넘실대는 곳.
무겁고 노란 햇빛이 떨어진다,
투명하고 하얗고 둥근 구름에서.
그곳은 정말 좋다…
(소각해버린 서사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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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당신은 봄날 동이 트기 전에 길을 떠나는 기쁨을 아는가?
현관 층계참으로 나간다…
어두운 잿빛 하늘에는 별들이 눈을 깜박인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이따금 가벼운 파도처럼 불어온다.
새침한,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밤의 속삭임이 들린다.
그늘에 잠긴 나무들이 희미하게 웅성인다.
수레에 양탄자를 깔고 두 다리는 사모바르를 담은 상자 속에 넣는다.
곁마들은 몸을 웅크리고 투레질하고 멋을 부리듯 또각또각 발을 바꿔 디딘다.
막 잠에서 깬 하얀 거위 한 쌍이 말없이 느릿느릿 길을 건넌다.
바자울 뒤 정원에서는 파수꾼이 태평스레 코를 골고 있다.
소리 하나하나가 굳은 공기 속에 멈춰 선 듯, 제자리에 서서는 흘러갈 줄 모른다.
당신은 수레에 자리를 잡고, 말들은 일제히 앞으로 나아가고, 수레가 육중한 소리를 낸다…
그렇게 떠난다.
교회를 지나, 언덕에서 오른쪽으로, 강둑을 건너 계속 간다…
연못은 이제야 간신히 김을 뿜으려 한다.
날은 약간 차고, 얼굴을 외투 깃에 파묻게 된다.
졸음이 쏟아진다.
말들이 웅덩이를 밟고 지나며 철벅 철벅 명랑한 소리를 내고, 마부는 휘파람을 분다.
그렇게 4베르스타쯤 간다….
하늘 끄트머리가 붉어진다.
갈까마귀가 자작나무에서 깨어나 거북살스럽게 날아다닌다.
참새는 시커먼 낟가리 주변에서 지저귄다.
대기가 밝아지고 길은 더 잘 보인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희고 들판은 푸르다.
오두막마다 관솔이 빨갛게 타오르고 대문 저편에서 잠에 취한 목소리들이 들린다.
그러는 사이 새벽놀이 타오른다.
벌써 황금빛 선 여러 개가 하늘을 가로질러 뻗어 있고 골짜기에는 김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종달새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첫새벽의 바람이 분다.
그리고 적자색 태양이 가만히 떠오른다.
빛이 물줄기처럼 쏟아져 흐르고, 당신의 심장은 새처럼 푸드덕 날갯짓한다.
상쾌하고, 기쁘고, 사랑스럽다!
먼 곳까지 사방이 보인다.
저기 숲 뒤로 마을이 하나 나오고, 더 가면 하얀 교회가 있는 마을이 하나 더 나오고, 언덕 위에는 자그마한 자작나무숲이 있다.
바로 그 뒤에 당신이 가고자 하는 늪이 있다…
가자, 말들아, 어서 가자! 성큼성큼 속보로 가자!….
이제 3베르스타밖에 남지 않았다.
해가 빠르게 떠오르고 하늘은 맑다….
아주 멋진 날씨다.
마을을 떠난 가축떼가 죽 늘어서서 당신을 맞이한다.
당신은 언덕을 오른다…
얼마나 멋진 풍경인가!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푸른 강은 10베르스타 정도 굽이쳐 흐른다.
강 뒤로 물이 풍부한 푸른 초지가 펼쳐져 있고, 초지 뒤로는 완만한 언덕이 나온다.
저멀리 댕기물떼새들이 깩깩 소리지르며 늪 위를 날아다닌다.
대기 속에 쏟아진 촉촉한 섬광 사이로 먼 곳이 선명히 드러난다…
여름이 아닌 까닭이다.
가슴은 얼마나 거리낌 없이 숨을 내쉬는가, 팔다리는 얼마나 기운차게 움직이는가, 봄의 신선한 숨결에 휩싸인 인간은 얼마나 단단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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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여름날의 아침은 또 어떠한지!
사냥꾼이 아니라면 그 누가 새벽녘 덤불 사이를 헤매는 기쁨을 맛보겠는가?
이슬을 머금어 새하얘진 풀밭 위에 당신의 발자국이 푸른 윤곽으로 누워 있다.
젖은 덤불을 헤치면 한껏 쌓인 밤의 열띤 냄새가 훅 풍긴다.
공기는 쑥의 신선한 쓴맛과 메밀꽃, '토끼풀'의 꿀을 잔뜩 머금고 있다.
저멀리 참나무숲이 벽처럼 우뚝 서 있고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난다.
아직은 상쾌하지만 조금씩 밀려드는 열기가 벌써 느껴진다.
바람이 온갖 향기를 넘칠 정도로 몰고 와 머리가 다 어지럽다.
수풀은 끝없이 이어진다…
멀리 어디선가 호밀은 노랗게 익어가고 메밀은 좁다란 띠 모양으로 붉어져간다.
우지끈 수레 소리가 들린다.
농부가 걷는 속도로 마차를 몰고 와 미리 말을 그늘에 매둔다…
당신은 그와 인사를 나누고 길을 계속 간다.
당신 뒤에서 서걱서걱 낫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린다.
해는 점점 더 높이 떠오르고 풀이 빠르게 마른다.
벌써 날이 더워졌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흐른다…
하늘의 가장자리가 어두워진다.
미동도 없는 공기는 따끔따끔한 더위에 불타오른다.
"여보시오, 여기 물 좀 마실 곳이 있겠소?" 당신은 풀을 베는 이에게 묻는다.
"저기 골짜기에 샘이 있습니다."
끈질긴 풀들과 뒤엉킨 호두나무의 무성한 가지를 헤치며 당신은 골짜기 아래로 내려간다.
절벽 바로 밑에 정말로 샘이 숨어 있다.
참나무는 물갈퀴 모양의 가지를 탐욕스레 물위로 뻗었다.
커다란 은빛 거품이 얄팍하고 벨벳 같은 이끼로 덮인 바닥에서 꿀렁거리며 솟아오른다.
당신은 당장 땅에 엎드려 물을 실컷 마신다.
게으름이 덮쳐 꼼짝도 하기 싫다.
그늘 밑에서 당신은 강렬한 향의 습기를 들이마신다.
기분이 참 좋다.
맞은편에는 관목들이 누렇게 시들기라도 할 듯 태양에 달궈지고 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느닷없이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주변의 공기가 부들부들 떤다.
천둥이 치려나? 당신은 골짜기에서 나온다…
저기 지평선 위에 그어진 납빛 띠는 대체 무엇일까?
더위가 더 기승을 부리려나?
아니면 먹구름이 몰려오려나?…
그때 갑자기 번개가 희미하게 번쩍인다…
어허, 뇌우로군! 햇빛은 아직 밝다. 사냥을 좀더 할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먹구름은 계속 자라나고, 구름의 앞쪽 끄트머리는 소매처럼 뻗어나와 아치 모양으로 구부러진다.
풀이며 관목이며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서두르자! 저기 건초를 쌓아둔 헛간이 보이는 것 같다…
어서! 당신은 간신히 뛰어가 안으로 들어선다…
비가 다 무엇이냐? 번개가 다 무엇이란 말이냐?
짚을 이은 지붕의 틈새에서 물 몇 방울이 향긋한 건초 더미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해가 다시 노닐기 시작한다.
뇌우는 지나갔고, 당신은 밖으로 나온다.
세상에, 어찌나 모든 것이 즐겁게 반짝이는지.
공기는 어찌나 신선하고 촉촉하며, 또 어찌나 향긋한 딸기와 버섯 내음이 나는지!…
그러나 이제 저녁이 찾아온다.
노을은 불이라도 난 듯 활활 타올라 하늘의 절반을 덮었다.
해가 저문다. 가까운 곳의 공기는 어째선지 유리처럼 유난히 투명하다.
저멀리 따스해 보이는 부드러운 열기가 가라앉는다.
붉은빛이 이슬과 함께 숲의 빈터에 떨어지는데, 빈터는 묽은 황금의 흐름에 적셔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무들, 덤불들, 높다란 건초 더미에서 기다란 그림자가 달려나온다…
해가 넘어간다.
별 하나가 불을 켜고 화염이 남실대는 일몰의 바다 한복판에서 파르르 떤다…
해는 창백하고 하늘은 푸르러진다.
그림자는 하나둘씩 사라지고 대기에 어둠이 차오른다.
집으로 향할 때다, 마을로, 당신이 밤을 보낼 오두막으로 돌아갈 때다.
당신은 기진맥진했으나 어깨에 총을 둘러메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다…
그러는 사이 밤이 된다.
스무 걸음 밖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개들은 하얀 윤곽으로만 겨우 보인다.
저기 시커먼 덤불 위로 하늘의 가장자리가 어렴풋이 밝다…
무슨 일이지? 불이 났나?….아니, 달이 떠오르는 중이다.
저 아래 오른쪽에 마을의 불빛 여러 개가 깜박인다…
마침내 오두막이 나타난다.
들창 너머로 새하얀 식탁보를 깐 탁자, 타오르는 촛불, 저녁식사가 보인다…
==
아니면 경주용 드로시키에 말을 매라 이르고 들을 잡으러 숲으로 떠나보자.
키 큰 호밀이 이루는 벽을 양쪽에 두고 좁은 오솔길을 따라 달릴 때면 참으로 즐겁다.
이삭들이 슬그머니 당신의 얼굴을 때리고, 수레국화는 바짓 가랑이에 매달린다.
사방에서 메추라기들이 울어대고 게으른 말은 속보로 달린다.
이제 숲이다.
그늘과 정적. 늘씬한 사시나무가 당신을 굽어보며 높은 곳에서 재잘거린다.
기다랗게 늘어진 자작나무 가지는 살랑대지도 않는다.
힘센 참나무는 아름다운 보리수 곁에 전사처럼 서 있다.
당신은 그림자가 어룽거리는 푸른 오솔길을 따라 말을 달린다.
커다랗고 누런 파리들이 꼼짝하지 않고 금빛 공중에 매달려 있다가 갑자기 흩어져 날아간다.
먹파리들은 그늘에서는 빛나고 햇볕에서는 시커메지면서 기둥 모양으로 뱅글뱅글 돈다.
새들이 평화로이 노래한다.
꼬까울새의 금빛 목소리가 천진난만하고 수다스럽다.
이 목소리는 은방울꽃 향기와 무척이나 어울린다.
더 깊이, 더 깊숙이 숲으로 들어가보자…
숲의 모든 소리가 잦아든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정적이 마음에 새겨진다.
주변 모든 것이 잠들어 고요하다.
그러나 바람이 한번 불면 내리치며 부서지는 파도처럼 나무들의 우듬지가 요동친다.
작년에 시들지 않았던 적갈색 이파리 사이로 키 큰 풀들이 자란다.
버섯들은 저마다 모자를 눌러쓰고 띄엄띄엄 서 있다.
그 순간 산토끼가 달려가고 개는 쩌렁쩌렁하게 짖으며 그 뒤를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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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도요들이 날아드는 늦가을의 숲도 얼마나 훌륭한지 모른다!
멧도요들은 깊은 숲속에 머물지 않기에 숲의 가장자리를 따라 찾아야 한다.
바람이 없다, 해도, 빛도, 그림자도, 움직임도, 소리도 없다.
부드러운 대기에는 포도주 향기와 유사한 가을의 내음이 흘러넘친다.
헐벗은 적갈색 나뭇가지 사이로 움직임 없는 하늘이 평온하게 빛난다.
발밑 축축한 땅은 탄력 있고, 웃자라 메마른 풀은 흔들림이 없다.
창백한 풀밭 위로 기다란 실들이 번쩍인다.
가슴은 편안히 숨을 내쉬나 마음에는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숲의 가장 자리를 걸으며 개가 가는 쪽을 눈으로 좇는데, 사랑스러운 모습들, 죽은 자와 산 자의 사랑스러운 얼굴들이 떠오르고, 아주 오래전 망각 속에 잠들었던 인상들이 느닷없이 깨어난다.
상상력이 활개를 치며 새처럼 유유히 날아간다.
모든 것이 눈앞에 나타나 선명히 움직인다.
심장은 돌연 파르르 떨다가 요동치며 세차게 앞으로 달려나가기도 하고, 돌아올 길 없이 추억에 잠길 것이다.
삶 전체가 족자처럼 가볍고 빠르게 펼쳐진다.
사람은 나름의 과거, 나름의 감정과 힘, 나름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아무것도 그를 방해하지 못한다, 태양도, 바람도, 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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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쌀쌀한 듯한, 그러나 아침이면 쨍하고 추운 맑은 가을날, 동화 속 나무처럼 온통 금빛인 자작나무가 창백하고 푸른 하늘에 아름답게 그려지는 날, 낮게 뜬 해가 무언가를 데우지는 못해도 여름의 태양보다 더 선명하게 빛나는 날, 벌거벗은 채 서 있는 것이 오히려 즐겁고 가뿐하다는 듯 작은 사시나 무숲이 나뭇가지마다 빛나는 날, 서리가 골짜기의 밑바닥에서 하얗게 반짝이지만 여전히 상쾌한 바람이 뒹구는 낙엽들을 가만히 흔들고 몰아대는 날.
푸른 물결이 강을 따라 기쁘게 흐르고 여기저기 흩어진 거위들과 오리들을 박자감 있게 물살 위로 끌어올리는 날.
저멀리 버드나무에 반쯤 가려진 물레방아가 덜커덩거리고 밝은 대기 속에서 알록달록한 비둘기들이 그 위를 빠른 속도로 맴돈다……
==
사냥꾼들은 좋아하지 않으나 안개 낀 여름날도 좋다.
그런 날에는 총을 쏘아서는 안 된다.
당신의 발치에서 파드닥 날아오른 새가 꿈쩍도 않는 희끄무레한 안개 속으로 곧장 사라지는 탓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고요한가, 말할 수 없이 얼마나 고요한가!
만물은 잠에서 깨어나도 침묵한다.
당신이 나무를 스쳐지나가도 나무는 움직임이 없고 여전히 정적 속에 머문다.
대기에 고르게 깔린 희미한 김 사이로 기다란 띠 하나가 검게 보인다.
당신은 그 띠를 가까운 데 있는 숲으로 여긴다.
다가가보면 숲은 높다란 두둑에 자란 쑥으로 변한다.
당신의 머리 위로, 온통 안개가 당신을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바람이 살짝 불기라도 하면 창백하고 푸른 하늘 한 조각이 뿜어져나오는 듯한 성긴 김 사이로 언뜻 보이고, 황금처럼 노란 햇살이 갑자기 쳐들어와 기다란 물줄기처럼 흐르기 시작하며 들판을 가격하고 숲과 충돌한다.
다시 사위가 어두워진다.
이러한 투쟁은 한동안 계속된다.
그러나 마침내 빛이 승리를 거두고 데워진 안개의 마지막 파도가 식탁보처럼 말렸다가 다시 펼쳐지기도 하고, 휘말려 올라갔다가 부드럽게 빛나며 깊은 창공 속으로 사라지는 그런 날은 정말 청명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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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신은 먼 곳으로, 초원으로 길을 나선다.
시골길을 따라 10베르스타 정도 가니 드디어 큰길이 나온다.
끝없이 늘어선 짐마차들을 지나, 처마 밑에서 사모바르가 쉭쉭대는 여관들을 지나, 활짝 열린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아득한 들판을 가로질러, 푸른 삼밭을 따라 당신은 한참을 가고 또 간다.
이 버드나무에서 저 버드나무로 까치들이 날아다닌다.
기다란 쇠스랑을 쥔 아낙들이 들판을 어슬렁거린다.
낡은 남경목면 카프탄을 입고 어깨에 보따리를 둘러멘 행인이 피곤한 다리를 끌며 터벅터벅 걷는다.
키는 크나 녹초가 된 말 여섯 필이 끄는 지주의 육중한 마차가 맞은편에서 나타난다.
창밖으로 쿠션의 모서리가 삐져나왔고, 하인석에 깔아둔 가마니에는 진흙이 눈썹까지 튄 하인이 외투를 걸친 채 밧줄을 꼭 쥐고 비스듬히 앉아 있다.
나무로 지은 비뚜름하고 작은 집들, 끝없이 이어진 담장, 사람이 살지 않는 상인들의 석조 가옥, 깊은 골짜기 위에 세운 오래된 다리가 있는 군의 소도시가 나온다…멀리, 더 멀리 가보자!…
초원이 나타난다.
언덕에서 바라보면 얼마나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가!
둥글고 낮은 언덕들, 꼭대기까지 개간해 씨를 뿌린 언덕들이 폭이 너른 파도처럼 출렁인다.
덤불이 무성한 골짜기가 그 파도들 사이로 굽이친다.
작은 숲들이 직사각형 모양의 섬처럼 흩어져 있다.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좁다란 드로시키들이 질주한다.
교회들이 하얗게 빛나고, 둑으로 네 곳의 흐름을 막은 개울이 버드나무숲 사이로 반짝인다.
저멀리 들판에 느시들이 한 줄로 늘어선 것이 불쑥 보인다.
오래된 지주의 저택이 행랑채, 과수원, 헛간을 거느리며 작은 연못가에 안락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멀리, 더 멀리 간다.
언덕들은 갈수록 작아지고, 나무들도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초원이 나온다, 망망하고 아득한 초원!
겨울날에는 토끼들을 쫓아 높이 쌓인 눈더미를 헤매고, 차갑고 매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눈을 부시게 하는 부드러운 눈의 자잘한 반사광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불그스름한 숲 위로 펼쳐진 하늘의 초록빛을 감상하기도 한다!…
한편, 주변 모든 것이 빛나면서 무너지고, 녹은 눈의 두툼한 아지랑이 사이로 데워진 흙냄새가 풍기는 첫봄의 날들, 눈이 녹은 곳에는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볕 아래 종달새들이 순진하게 노래하고, 물줄기가 즐겁게 소란 부리고 아우성치며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소용돌이치는 첫봄의 날들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되었다.
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봄에는 작별하기가 쉽다.
행복한 이들도 봄에는 멀리 떠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안녕히, 나의 독자들이여, 언제나 좋은 일만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