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초상, 21×15㎝, 종이에 먹과채색, 2020.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20세기 철학의 아이콘이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미술가, 문학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 파리
스페인서 온 피카소, 시인들과 교류
지성의 힘을 빌려 회화로 감정 표출
철학자 사르트르와 조각가 자코메티
실존과 본질 놓고 끈끈한 유대감 나눠
에펠탑 빛을 신호로 도시가 깨어나면
장르끼리 섞이며 제3의 상상력 분출
흔히들 말한다. 프랑스는 화가의 나라, 영국은 작가의 나라, 그리고 독일은 철학자의 나라라고. 일부분은 맞고 일부분은 틀린다. 특히 프랑스에 대해서 그렇다. 예상과 달리 프랑스는 화가와 조각가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시인과 소설가, 극작가의 나라이고 무엇보다 철학자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술이 두드러지고 오랫동안 세계 미술의 수도였던 것은 맞지만 들여다보면 그 번성함의 좌우에는 문학과 철학이 있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쉽게 만나질 것 같지 않은 미술과 철학, 감성과 논리의 세계가 자주 극명하게 겹치거나 행복한 동행을 이룬다는 점이다. 물론 미술과 문학의 동행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동네에서는 서로 등을 돌리고 각을 세웠던 것들이 그 도시에서는 어깨동무를 한다. 그리하여 쉼 없이 제3의 물결, 아니 제3의 파장을 만든다. 그 파장 속에서 서로 다른 영역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컬래버를 한다.
이를테면 화가 폴 세잔의 ‘흐르는 시간을 화면에 멈춰 세울 수 있는가’와 같은 생뚱맞은 고민은 사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명제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세잔은 철학적 미술가라고 할 수 있고 베르그송은 미술가적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겹쳐지는 것은 두 사람만의 경우가 아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장 폴 사르트르. ‘실존’이라는 말을 발명한 그의 개별자 의식은 뜻밖에도 행동하는 소설가 앙드레 지드의 ‘방(房)으로부터의 탈피’와 연결된다. 파리라는 도시가 아니었으면 이 같은 이질성이 그토록 잘 섞이고 조화할 수 있었을까 싶다.
파리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문학과 예술의 가로지르기를 그토록 왕성하게 했을까. 우선 파리는 거대도시가 아니다. 그리고 생 제르망이나 마레 등 예술가들이 만나는 장소가 특정화돼 있었다. 그만큼 스킨십이 쉬웠다. 거기에 일몰과 함께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뀌는 파리의 밤 문화가 예술가들로 하여금 그런 합종연횡이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런던은 낮 동안 산책하고 애프터눈티를 나누며 담소한 후 저녁이 오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문화인 데 반해 파리는 밤이 되면 새로운 생기로 살아나는 도시다. 에펠탑의 불빛을 신호로 도시는 깨어나고 그 도시의 불빛 아래로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살강 하고 와인잔을 부딪는 사이에 장르와 장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도시는 낮과는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꽃피어난다. 파블로 피카소가 스페인을 떠나서 파리로 온 것은 그 도시가 세계 미술의 중심이라는 까닭도 물론 있었겠지만 풍성한 방계 분야의 여러 예술가와 교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게 파리로 옮겨온 피카소에게 사실 화가보다는 시인 친구가 많았고 종종 그들이 영감의 원천이었다.
불과 열아홉 나이에 자신의 나라를 떠나 파리로 온 그는 기욤 아폴리네르, 장 콕토, 폴 엘뤼아르 같은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로부터 쉼 없이 자기 그림의 이미지를 얻어냈다. 예컨대 엘뤼아르 같은 시인과 교류하면서 그의 시적 상상력을 끝없이 회화로 구현해낸 것이다. 시인들이야말로 그의 교사였던 셈이다. 그들의 지성의 힘을 빌려 분출하는 자신의 감성과 섞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국민 시인이었던 폴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는 시적 언어의 회화적 변용에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바다 그림을 그렸는데 1894년부터 1945년까지 매일 새벽에 기록했다고 알려진 262권의 방대한 수상록 ‘카이에(1973)’ 속에 직접 그린 크로키며 데생들이 삽입됐다. 그는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방법 입문(1895)’ ‘드가, 춤, 데생(1936)’ 등 본격 미술 평론서를 쓰기도 했는데 특히 인상파에 속하면서도 엄격한 고전주의를 견지한 에드가르 드가를 예찬했다. 그에 대해 ‘섬세하고 생기발랄하면서도 열정을 절제하는’ 우아한 화풍, 쉽게 그리기를 거부하는 수도사적 정신이라고 찬탄했다.
드가 또한 다른 누구보다도 이 시인의 작품평에 늘 민감했고 그가 가리키는 지향점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면에서라면 누구보다도 사르트르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사르트르가 20세기 철학의 아이콘이 되면서 많은 예술가가 알게 모르게 그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코메티와의 관계는 각별했다. “미술가는 문학가의 등에 업히지 않고서는 멀리 갈 수 없다”는 말처럼 자코메티도 사르트르가 쓴 ‘자코메티의 그림(1947)’ ‘절대의 탐구(1948)’와 함께 실존과 고독을 응시하는 ‘철학적 조각가’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들은 가끔 ‘카페 퇴마고’나 ‘카페 플로레’에서 조우하면서 서로의 예술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틴토레토(Tintoretto), 앙드레 마송, 데이비드 라포우자드(Lapoujade), 폴 르베롤(Rebeyrolle) 등에 대한 뛰어난 평론을 남겼지만 자코메티에 관한 글에는 미술평론적 담론을 뛰어넘을 정도의 동지애적 유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포로수용소, 정어리 상자 속 같은 그곳에서 두 달을 지내며 절대에 가까운 어떤 체험을 했다. 내 생활공간의 경계는 바로 내 피부였다.” (사르트르, ‘상황’ 중에서) 뼈가 피부가 되는 것 같은, 그리하여 타자(他者)와의 간극이 사라져버리는 절대고독과 실존 상황을 자코메티가 조형언어로 형상화시켰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자코메티에 대해 “출구 없는 고독을 되돌려주는 조각가며 인간과 사물을 세계의 중심에 다시 가져다 놓는 화가”라고 평하며 실존주의적으로 분석했다. 1901년 이탈리아에서 가까운 스위스 스탐파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난 자코메티는 다감함 유년 시절을 보낸 문학소년이었고 세계와 자아의 분리 및 공간에 대한 공포가 의식의 그림자처럼 깃들어 있었다.
그에게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출구를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명제가 인체 조각에서 본질만 남기고 다 버리게 한 하나의 동력이 됐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시절 파리 예술계의 특징 하나. 한 문장 한다고 하는 문인일수록 그림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콕토 같은 경우 그의 이름이 붙은 미술관을 가질 만큼 당대에 화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오래전 서울에서까지 그의 전시회가 열릴 정도였다. 그 이름을 열거하기조차 힘들 만큼 많은 시인이나 철학자, 소설가가 미술평론이나 미술사에 관한 글을 남기곤 했다. 문인이 그림을 그렸던 경우도 두 손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감성의 뿌리는 하나이되 표현의 방법이 다르게 분출될 뿐이었다.
여기에 철학이 가담함으로써 명실공히 ‘벨 에포크’의 신화를 낳았다. 이처럼 장르와 장르를 가로지르며 제3의 상상력이 꽃필 수 있었기에 예술 도시 파리의 신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단순한 만남의 장소를 넘어 인문과 예술의 에스프리를 끊임없이 낳았던 문학과 예술의 카페들이 그 신화의 산실이 됐음은 물론이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어떻게 세계 문예의 首都가 됐나
현대 문학의 문을 연 샤를 보들레르와 로버트 프로스트 그리고 20세기 후반 세계 지성계를 강타한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또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일컫는 폴 세잔과 앙리 마티스의 도시 파리. 그 파리는 어떻게 문학과 철학 그리고 미술의 도시가 됐을까.
그것은 파리라는 도시가 지닌 학문과 예술의 오랜 전통 위 코즈모폴리턴적 종합성과 수용성에 기인한 바가 컸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중세 스콜라철학의 중심지였으며 사실주의 문학의 교두보였고 낭만주의 미술의 전진기지였던 전통이 파리 문예의 벨 에포크를 이루었고 이것이 전 세계로 확산돼 가면서 세계 문예의 수도처럼 됐던 것이다.
특히 1900년 4월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새로운 건축양식인 아르누보를 선보이는 등 문화와 예술의 선진 도시적 면모를 보였고 이후 새로운 예술 탄생의 진원지가 됐다.
그 결과 장르와 장르를 가로지르며 학자, 문인, 예술가의 창조적 상상력이 타오르게 됐고 이런 기운으로 문예의 전성기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