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화엄사상
3. 중국의 화엄사상
조사(祖師)라는 것은 선조를 공경하는 유교문화권에 있는 동아시아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아마 선종에서 법통의 계승과 연관해서 기원한 것 같다. 중국의 화엄종에는 다섯 명의 조사가 있는데 두순(杜順, Dushun, Tu-shun, 557-640), 지엄(智儼, Zhiyan, Chih-yen, 602-68), 법장(法藏), 징관(澄觀, Chengguan, Cheng[1]kuan, 738-839), 그리고 종밀(宗密, Zongmi, Tsung-mi, 780-841) 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의 계보에 대해서는 화엄종을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화엄종(華嚴宗)이라는 표현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징관(澄觀)이다. 그러나 법장이 화엄종을 체계화했으므로 종종 화엄종의 실제적인 창시자로 법장을 말한다. 그렇지만 화엄종의 독창적인 요소들이 두순 이전과 종밀 이후에도 존재했다고 해서 화엄종의 조사들이 모두 같은 견해를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Gimello 1983: 321을 보라).
화엄사상은 철학적이라기보다 법계, 환상적인 경험의 세계, 신비한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더 치중한다. 때로 화엄은 선종의 철학적 혹은 교리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말해진다. 논쟁은 때로 단정적인 선언으로 바뀐다. 제1대 조사인 두순은 그 당시에 철학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 특히 병을 치유하는 능력으로 유명하였다. 그가 승려들을 이끌고 여산(廬山)에서 선정을 닦고 있을 때 그 지역의 모든 곤충들이 그의 말을 듣고 산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제자들은 살생계(殺生戒)를 어기지 않고 먹거리를 재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어떤 무서운 용은 두순이 도착하자 고민하다가 떠났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널리 알려진 견해에 의하면 두순은 사실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대중과 가깝게 살다간 중국불교의 위대한 스승 가운데 하나이고, 그의 신통력은 불교 전파와 대중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중요한 것이었다. 그가 예수처럼 적은 양의 음식으로 많은 대중을 먹이는 신통력을 발휘했다는 설화도 있다. 두순의 종교적인 수행은 『화엄경』 독송으로 집약된다. 경전안에서도 나타나듯이 대승경전을 독송함으로써 얻는 신통력은 동아시아 불교의 중요한 특징이고, 『화엄경』을 독송하고 신통력을 얻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예들 들어 은둔한 승려인 보안(普安, Puan, P’u-an, 530-609)은 경전을 독송한 힘으로 자신의 초라한 암자에 떨어져 내린 거대한 바위를 옮길 수 있었고, 탐욕에 가득 찬 삭두타(索頭陀)가 선동하여 매수한 궁수들이 자신을 죽이러 오자 땅에 얼어붙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죽은 신도들을 살려 내기도 했다. 보안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화엄경』의 힘이라고 했다.
두순과 보안은 농부처럼 시골에 살면서 기적을 행하는 수행자였다. 전승에 의하면 법장도 젊은 시절에 대북(大北)산에서 잡초를 먹고 사는 고행을 했다고 한다. 그는 28세까지 제2대 조사인 지엄의 속가 제자로 있었고, 당의 측천무후가 그를 새로운 조사로 임명하자 그때서야 출가자가 되었다. 법장이 설법을 하면 그의 입에서는 광명이 나오고 땅이 흔들리는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Chang 1971: 237- 8). 두순이 대중의 벗이었던 반면에 법장과 그가 체계화한 화엄종은 측천무후와 궁중의 정치적 야망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Wu Zetian, Wu Tse-t’ien, 625-705)는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스스로 황제가 된 여자이다. 이런 점에서 유교의 사가(史家)들은 그녀를 무자비하게 비난하였다.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도 였던 측천무후는 정통 유학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마침내 불교를 중국의 국교(國敎)로 만들었다.21) 그녀는 대승불교의 교리를 활용하였다. 즉, 보살이 일체중생의 이익을 위해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지상에 미래불로 나타날 미륵보살의 화신이 그녀라는 이념을 널리 퍼트렸다. 미륵보살의 도래는 대중적으로 유토피아의 건설과 결합되었다. 또한 그녀는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묘사하였다. 불교 설화 속에서 전륜성왕의 일반적인 특징은 사회의 조화를 이루고 낙원을 보증한다. 결국 전륜성왕이 미륵불이다. 측천무후는 자신이 그 둘의 화신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든 중생을 불성(佛性)으로 묘사하는 여래장사상에 자연스럽게 매료되었고, 특히 『승만경』에 서 불교도인 왕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여래장의 가르침을 시작하는 점에 이끌렸다. 법장은 『대승기신론』의 불성이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 불성이론을 상즉상입의 화엄철학을 건립하는 기로로 삼았다. 측천무후도 『화엄경』에서 불교국가의 이념을 창조하려고 할 만큼 『화엄경』에 매혹되었다. 「입법계품」은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면 재가 여성들의 계율 면에서 문제의 여지가 있지만 여성에게 보살의 스승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게다가 붓다가 무수한 보살들에게 둘러싸여 설법을 하며, 붓다의 마음이 모든 실체에 두루 충만해 있으며, 모든 중생들 속에 존재하고, 모든 것들이 독립하여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경』의 교리는 측천무후에게 궁중과 백성들과 위성국가들을 연결 하는 하나의 흥미로운 정치적 모델을 제공했다. 일본에서도 역시 성무(聖武, Sh?mu, 724-48년 재위) 천황이 『화엄경』의 사상적 기반 아래서 통치하였고, 그러한 목적으로 현재 일본 화엄종의 본찰이 된 동대사(東大寺, T?daiji)의 건립을 지원하였다. 동대사는 커다란 청동 비로자나불상으로 유명하다.
화엄의 정치적 의미는 법장이 측천무후에게 보여 준 상즉상입의 유명한 예에서 잘 나타난다. 법장은 인도의 추상적인 개념을 시각 도구를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매우 중국적인 방법을 택한 훌륭한 스승이었다. 측천무후가 복잡한 화엄경사상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일례로 그녀가 화엄의 상즉상입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자 법장은 초를 놓고 시방(十方)의 모든 곳에 거울을 설치하도록 했다. 초에 불을 붙이자 촛불은 각각의 거울에 비쳐졌고, 그 모습은 다른 거울에 다시 비쳐져서 하나의 거울에 다른 모든 거울들의 모습이 비치게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인법이다. 불행하게도 측천무후와 화엄의 긴밀한 관계는 그녀가 죽은 후에 유학자들 사이에서 화엄이 대중화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9세기의 탄압에서 화엄종은 하나의 종파로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나 화엄의 핵심 사상은 그 당시 성행했던 수행 중심적인 선종과 정토종에서 수행과 교리의 기초를 형성한 중심 가르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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