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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아사하(happygirl527@hanmail.net)
출처 - ‥GooD`아사하♡(http://cafe.daum.net/ASAHA)
작가말 - 퍼가실 땐 출처 꼭 밝히고 퍼가주세요.
만약 출처 없이 퍼가진 곳을 발견하면 불펌으로 간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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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잠시 후. 하다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한 우리들은 어색하게 또 다시 백설공주 도시락통을 꺼내들
었다.
"....."
도시락을 모두 펼치고 밥을 먹는 동안에도 우리 두 사람은 조용할 뿐이었다.
그랬다. 우리들은 두 사람에서는 할 말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무인도에 우리 두 사람을 내려놓아도 난 나혼자 쫑알거리다가 이내 지쳐 쓰러져 버릴 지도 모를
정도의 우리들이었다.
"....으.."
찌푸둥한 몸을 풀며.저딴 소리를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흘려보내었다.
요상한 소리를 내뱉어놓고. 입에 물고 있던 숟가락을 도시락통에 올려놓으며 황급히 반휘령의
눈치를 살피었다.
역시나 내 걱정에 아니나 다를까. 반휘령은 표정을 굳히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하냐."
그리고 곧 들려온 반휘령의 목소리.
난 반휘령을 향해있는 내 시선을 돌리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몸이 찌푸둥하네."
"왜."
"잠을 잘못잤나...=_=.."
"백설공주 이불이 불편했냐."
어머. 백설공주라고 말했어.- 0 -...드디어.
어제 까지만 해도 백설공주를 신데렐라라고 하다에게 빡빡 우기더니만...드디어 백설공주.
왠지 반휘령의 입에서 백설공주 이불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느낌이 좀 이상한 듯 싶었지만. 반휘
령은 언제나 그랬듯 그런 내 감정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백설공주 이불 안 덮었어."
"왜."
내가 예민해진걸까...
왜 반휘령의 '왜'라는 한마디에 뭔가 많은 뜻이 함축되어서 나를 압박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
는 것일까?
"그거 원래 나 안 덮어."
"...."
"그나저나. 왜 그 이불을 가져간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다고."
"....."
=_=
역시 반휘령은 아무 대답없이 날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렇게 싸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으려다가.이내 지금 이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다간 백발 백중
체해버릴 거라는 결론에 다다른 나는 수저를 말끔히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 문득 떠올라버린 아까 교문에서의 선배 모습.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반휘령의 목소리 한개.
"음악선배를 예전에도 알았어?"
"어."
"예전 음악 선배 모습은 어땠는데? 아까 들어보니까.원래 노란 머리였나 보던데."
"궁금하냐?"
짐짓 무거운 반휘령의 표정.
역시 평소부터 음악 선배를 싫어하더니.내가 음악선배에 관해 질문 하는 것에 대해.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아니. 뭐 궁금한건 아니구.- 0 -.."
"너 기억 안나지?"
"뭐가?"
"걔."
"걔?"
"새끼."
"새끼?"
"설음악 말이다."
아.~ 반휘령이 무척이나 표정을 굳히며 말을 했을 때서야 나는 반휘령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음악선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데 걔. 새끼...라니..- 0 -...
벙진 얼굴로 물끄러미 반휘령을 보았다.
"선배가 뭐?"
"아니다."
"뭐야. 뭐? 음악선배가 뭐?"
"아니라고."
"응-_-;;"
결코 멋지게 쿨하게. 대답 해 줄거란 생각은 이미 예전에 버렸었다.
그렇지만.어느때나 당하면서도 어느때나 느끼지만.이 녀석 정말 싸가지가 없다.
어서 밥이나 빨리 먹고 내려갔으면 하는 바람만 간절하디 간절했다.
그렇게 삭막하기만 하던 반휘령과의 점심식사시간은 막을 내렸다.
정말 일분이 한시간 같은 기분은 처음 느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_=.
"야야야.음악선배 졸라 멋지지 않아?"
"존나 멋져.존나 멋져.!!"
교실에 발을 딛고서 부터 내 귀를 후벼파고 드는 세쌍둥이의 방방 뛰는 음성.
평소 같았으면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저.빨리 자리로 돌아가기 망정이었는데, 오늘 세쌍
둥이의 대화주제가 음악선배라는 사실에 내 귀는 이미 솔깃해져 있었다.
문턱에 들어섰을때. 반휘령과 온누리.
우리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문 턱에 멈춰섰다.
"선배가 전교회장 되기 전. 2학년때 음악선배 모습 보는 것 같아.!!!!"
"최고야.최고. 근데 이제 전교회장씩이나 됐는데, 예전처럼 하지는 못하겠다.그치? 아쉬워."
"왜 못해. 집안 빵빵하겠다.본래도 그랬겠다. 돈으로 막으면 되지.캬캬캬캬."
세 쌍둥이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여전히 멈춰 세 쌍둥이의 대화를 은근히 듣구있는데. 내 옆에서 함께 멈춰섰던 반휘령이 나를 아
주 차갑게 스쳐지나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그렇게 덩그라니 문턱에 서있던 나는 한 손에 도시락 통을 쥐고서 성큼성큼 세 쌍둥이에게 다가
섰다.
"어이. 온누리 왔냐."
"응."
"너 어제부터 왜 점심시간만 되면 반휘령하고만 휙 사라지냐?!!"
"아. 밥 같이 먹어."
조금 흥분한 듯한(많이 흥분-_-;;) 아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조용스럽게 대답을 내뱉고는 도시락통을 놓아두기 위해 내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흥분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아리가 내 뒤를 따랐고, 한 사람이 가는 곳엔 모두
가 다가간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결국 세 쌍둥이가 모두 내 자리로 몰렸다.
도시락통을 책가방안에 넣어두면.
"니 가방 존나 신기하다?"
"다른 애들하구 똑 같은데."
내 가방을 손으로 쿡 찍은 아리에게 난 모르겠단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다르지.!! 다른 애들 가방엔 화장품 가방 한개 넣으면 빵빵해지는데~"
"=_=이건 핸드백이 아니라 학교 가방인데.."
"우리꺼도 핸드백 아니고 학교 가방이다 짜샤-_-"
아리는 내 어깨를 퍽. 쳤고, 아픈 마음에 아리를 올려다 보면 그녀의 표정은 친한 친구에게 장난
을 치고 나서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난 그런 그녀의 표정에 살짝 굳은 표정을 풀었다.
"도시락통이 들어갔는데.것도 3단 도시락통이 들어갔는데. 더 들어갈 것 같네."
"응. 들어가."
"진짜?-0- 진짜?-0-"
정말 놀래하는 아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핸드백과 같은 피카츄 가방과는 무척이나 다른 내 가방을 보며 놀랬을 거라 생
각 된다.
"아.근데!!"
"응?"
"너도 봤냐?"
"뭘?"
아리가 내 눈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난 삽시간에 굳어버리는 표정을 숨기려 애를 쓰며, 아리를 또렷히 쳐다보았다.
아리와 내가 어쩌던지 말던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던지 말던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다는 듯 보
이는 두 여자는 내 가방을 들고서 쑥덕대기 시작했다.
"야야야.이 가방 진짜 신기하다."
"도시락통이 들어간다."
"야. 매봐."
"미쳤어?>_< 이걸 어떻게 매."
"입 다물고 매봐. 이거 매고 교실 한바퀴 돌면 오천원 준다."
"진짜지?"
- 0 -..여전히 내 눈에는 아리가 가득 들어찼지만. 귀는 두 여자의 방정맞은 대화에 초점이 맞춰
져 있었다.
그녀들이 주절주절 대화를 나누고서.속닥속닥 내 동의 없이.내 가방을 가져간 사실을 느낌으로
만 감지하면서 아리의 눈을 마주보았다.
"..미친년들..."
아리가 붉고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면 곧게 아리를 보고 있던 나는.
"얼굴 떼."
너무 가깝게 달라붙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 쳐다보며 곧은 시선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제야 무안한 듯 얼굴을 바로 떼어버리는 아리.
그리고는 벌겋게 달아오른 아리의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손을 휙휙 부채질 하듯 얼굴에 바
람을 불어넣고는..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아리였다.
아무 말을 안 하려는 아리를 보고.더 이상의 말이 없을 듯한 아리를 보고.
"뭐 말하려던 거였어?"
"아.!!!!"
분명 그녀는 내게 하려던 말을 잊은 듯 보였다.
내 질문에 자신이 아까 내게 내뱉으려던 말을 되새기며.
"그러니까. 음악선배...너랑 좀 친하냐?"
"친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같이 사라지고.접때는 선배랑 같이 커플 모임에도 오고..하튼 오늘 봤냐."
"어떤거?"
"선배 머리카락 원래대로 원상복귀 된 거."
아리의 표정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뭔가 꿈을 꾸는 듯한 달콤함이 서려있는 모습.
"봤어. 그런데 음악 선배 예전에 머리색이 노란 색이었단 말이야..?"
"몰랐다고?"
"응."
"지금 너 몰랐다고?"
"응..=_=.."
점점 아리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다가. 결론 지은 듯 말했다.
"안친하구나. 두사람.-_-."
"으응?"
"음악선배 전교회장 하기 전까진 존나 멋졌지. 뭐.전교회장 하면서도 멋지지만.."
"전교회장 하기 전까지? 존나 멋져?"
"지금 반휘령 모습 보이지.응? 니들 좀 친하니까."
"글쎄..친한 거라곤 생각 안하지만..보이긴 보여."
아리가 창밖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고 있는 반휘령을 넌지시 쳐다보며 말을 뱉었다.
난 건방진 반휘령의 모습을 잠시 감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저놈의 두배라고 생각해봐라.하는 짓이 두배."
"두배?"
"아니다. 두배하고도 한배. 그러니까 세배. 아니..것보단 모자란가?"
<32>
"뭐라구?"
"여태껏 내가 쳐 씨부린 말 뭘로 들었냐."
아리의 표정이 한껏 굳어지며 나를 노려보았다.
아리만의 매서운 표정이었다.
나는 조용히 아까 아리가 내뱉은 말을 곱씹어보았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아니,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
"너 일학년때 몇반 이었냐?"
"갑자기 건 왜?"
"아, 얼른 말해봐."
자신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않고 딴지를 거는 듯한 내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는 아리.
하는 수 없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왠지 꺼림직한 느낌이 드는 것을 무시한 채 대답을 해야만 했다.
"7반."
"아. 그 반이 일학년 중 유일하게 이층에 있는 반이었지..아마?"
"응."
역시나..하는 아리의 표정.
"그니까 너희 7반이 젤루 구렸지.소식통 젤 늦구. 왕따반이었지."
"..=_=.."
"쓸데없이 일학년 일등반이라고만 불리고.니들은 다 범생이었냐?"
아리의 표정은 이제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범생이'라는 단어가 내뱉어 질땐 아주 무시무시하게 구겨지는 아리의 표정이었다.
"근데 그게 왜?"
"음악선배가 울 고등학교 들어와서 일학년.이학년때 얼마나 최고였는 줄 알아?"
"....."
"세 개의 탑을 거머지고 있었지..."
회상을 하는 듯한 아리의 몽롱한 표정.
아까 음악선배에 대해 물었을 때와 아주 흡사한 표정이었다.
어쩜 이 아이는 이렇게도 표정이 쉽게 바뀔 수 있는거지..
마음속으로 살짝 놀래어 하며 아리를 들여다 보았다.
여전히 꿈꾸는 소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 얼굴. 이건 인정하지? 선배가 중학교때 부터 진짜 유명했었다. 얼굴로. 이 지역에서 최고
의 얼굴. 신이 내린 얼굴.이란 수식어가 붙기도 했었지. 반휘령 들어오기 전에만 해도 울 학교에
서 최고의 인물은 단연 음악선배만이 오직 최고였어."
"반휘령이 들어오고 나서 바꼈단 말이야?"
"그렇지. 두 사람이 희비를 엇갈리고 있지. 솔직히 울 학교에 인물 많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
람 만이 서로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대단한 것이지."
"아..그래?"
저런 눈으로 공부를 한다면...전교 일등이 무슨 소용이랴. 전국 일등도 했겠다.
"그리고. 둘. 공부. 이것도 역시 인정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지. 난 첨에 안 믿었어. 너무 완벽하잖
아. 역시 신은 불공평했어. 반휘령은 그래도 공부는 못하지.."
"=_="
"하여튼. 셋. 주먹. 야 솔직히 중학교때 얼굴보다 주먹으로 얼마나 더 유명했었는데.."
"응? 주먹?"
에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꿈에서 막 깬듯한 표정을 지으
며 나를 노려보았다.
"진짜라니까.완전 최고였어."
".."
"근데 의문이 있다. 아주 큰 의문.!!!울 전교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어도 나오지 않는 그 한개."
전교 아이들 중에..나는 포함 되지 않나봐.
그런 걸 맞대어 생각해본 기억이 없는데....?
내가 그걸 생각을 했건, 어쨌건 무척이나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음악 선배가 반휘령보다 더한 문제아였다니..- 0 -..
아니, 매일 모범생이라고 생각을 했다가..지금 다시 생각을 해보니, 반휘령과 비슷한 선배의 모
습도 왠지 아주 많이.어울리는 것만 같다.
"의문점이지. 무척이나 큰 의문."
"그게 뭔데?"
"음악선배가 2학년때 까지만해도 졸라 막나가는 인생의 씁쓸한 외길을 쭉쭉빵빵들하구 걷고 계
셨었는데.."
쭉쭉빵빵?
살며시 일그러지는 내 표정에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아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왜 갑자기 3학년이 되자마자 전교회장선거에 나가서.."
"근데..말이 안되는게. 만약 선배가 그정도로 문제아였다면. 반휘령보다 더 한 문제아였다면, 안
뽑힐 가능성이 높지 않아?"
"다르지. 반휘령과는...정말로 막나가는 반휘령과. 어느정도 컨트롤이 된 자신만의 세계를 사는
음악선배와는 좀 다르지. 공부를 하잖아."
"선생님들의 신임도 얻고 있고?"
"사고를 매일 치긴 쳤지만.결국 빵빵한 선배집 재산으로 막으니.."
그건 어느정도 이해가 갔다.
요즘은 정말 뜸해졌지만.예전엔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한가지씩의 사고를 물고오는 반휘령 때문
에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결국 돈으로 모든 걸 막아야만 했었다.
경찰서며, 어디며..아주 빠르게 오고가는 걸 보고 자랐기에 이 얘기엔 무척이나 무덤덤 할 수 있
다.
그렇지만.선배가..문제아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었다.
"정말 신기하고 궁금하다. 왜.전교회장 선거에 나가셨는지."
"......그러게.."
"아.!!저번에 전교회장 선거할 때.한마디 했었어."
"뭐라고?"
"자신은 지금부터 바껴야 된다구. 약속을 지켜야된다고. 멋지게 말했었는데..하긴 나두 그때 뻑
갔지.한방에.!!!그냥."
"아. 전교회장 선거할 때. 나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선배에 관해 내가 몰랐던 게 어쩌면 너무도 당연했다.
아리의 말 대로 일학년땐 재수 좋게도 7반에 걸렸기 때문에.많은 공부하는 아이들과 친할 수 있
었으며.학교에서 누가 유명인사가 됬던 별로 신경쓰지 않았으니..
역시 내가 음악선배에 대해 호감을(멋지다는 생각.) 가지게 된 것도 선배가 검은머리에 착실한
전교회장으로 거듭 났을 때부터 였으니까.
"그래도..여전히 좀 믿기 어렵다."
"난 전교회장이 된 선배의 모습을 믿기 어려웠었다-_-"
"그럼 저번에 술집에서도..?"
"엉. 다들 두루두루 친하지. 옛날엔 맨날 함께 했는데 요즘엔 뭐가 그리 바쁘신지.. 그러고 보니
요즘 너랑 계속 다니더라..? 짜증나.별 사이도 아닌 것 같구만.!!"
음악선배와 자주 만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무서운 사람이었어..?"
왠지 내가 지금 아는 선배와는 너무도 다른 얘기를 들어서인지. 쉽사리 믿겨지지 않는 반면에 조
금이나마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검은 머리에 반듯한 교복.
정말 단정하고 어디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신사적인 모습이었는데..
오늘 아침에도 바깥 모습만 바껴있었지.선배의 행동은 여느때와 다름이 없었지 않았는가..
"싸울때만 무서운 사람이었어. 성격도 좋아서 인기가 캡짱이었지."
"응.그랬겠다."
"발렌타인 데이때 얼마나 초콜렛을 많이 받았냐면.!!!! 아악!!내가 그때.발렌타이 전날. 정성을 다
해서 만들었는데.!!초콜렛을.!!!!!!선보이지도 못하고...꺼이꺼이.ㅜ0ㅜ"
토닥토닥. 아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교실을 연신 방방 뛰어다니며.내 가방을 맨 채 힘겨워 하는 두 여인의 모습을 한심스레 쳐다보며
열심히 머릿속은 뒤엉켜지고 있었다.
그래서..오늘 단비가 음악선배에게 고함을 내질렀던 거구나.
예전의 모습이 반휘령보다 두 배나 더 끔찍했다면.안봐도 비디오이니.
게다가...단비 역시 근신을 먹을 정도의 학생이었고..
아, 증말. 여러모로 복잡하네..-_-..이거 의외로 선배에 관한 생각이 많이 들었었네. 내 머리통에.
***
"여어.온누리. 잘 가지구 교무실까지 무사 입성."
자신이 선생님께 건네받은.수업중 졸은 벌로 선생님께 아주 친절히 교탁 앞까지 마중을 나가 건
네 받은 서류뭉치들을 내 품에 콱 던져버리듯 쥐어주고는 싱긋 웃는 아리.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이걸?"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돕고 사는거지."
"친구가 돕고 사는 거란건 충분히 알겠는데...이건 벌이잖아."
"돕고 사는 처지에 벌이고 아니고 따질게 뭐있어.!!서로 좋음 됐지.>_<"
"아니. 사양할게. 이건 너를 위해서도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아."
고개를 도리도리 내 저으면.아리가 살짝 눈고리가 올라간 모습을 한 채 나를 노려보았다.
"야!!!진짜.내가 왠만함 벌 다 쳐 받는데..이건 좀 아니다고 본다."
"왜?"
"교무실 가는 건 존나 싫다고.!!차라리 학생부실이라면 모를까."
'학생부실'이라는 단어에 내가 잠시 움찔 거렸다.
그때 학주의 모습이 그대로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잠시 멍해져있는 틈을 타. 내가 정신을 차렸을땐 이미 세 쌍둥이는 내 주변에서 말끔히 사
라져 버린 뒤였다.
"야. 아리야!!!- 0 -!!"
내가 아리의 사라져가는 뒤 통수를 보며 애타게 불렀지만.그녀는 나를 완전 무시했다.
저런 모습을 보니 왠지 반휘령이 떠오른다.-_-.
아리가 이걸 한번 맡기고 간 이상 다시 돌아올리란 만무했기에 난 짧게 한숨을 내쉬며 결국. 내
품에 떠맡겨지듯 안겨진 서류를 잡아들었다.
# 교무실.
교실에서는 이제 막 봄이 온 듯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교무실에 도착하니 숨이 탁 막
힌 듯 답답할 뿐이었다.
난 자연스레 인상을 찌푸리며 아리에게 이 서류들을 몽땅 넘겨주고 교실을 유유히 벗어나던 선
생님을 찾아야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찾았을 땐.여유롭게 커피한잔을 손에 쥐고 컴퓨터로 메일을 쓰는 중이었다.
"선생님. 여기요.."
"아, 고맙다. 그런데 내가 분명히 아리를 시켰던 것 같은데 왜 누리가 온 거야?"
커피를 컴퓨터 옆에 내려놓은 뒤 의자를 빙글돌려 내 손에 들린 서류를 받아드는 선생님이었다.
"아리가 급한 일이 생겨서요. 제가 대신왔어요."
"급한 일? 보나마나 교무실 오지 않으려 그랬겠지. 여기 오면 좋은 소리 들을 게 하나도 없으니
까."
그런 걸 알면서 일부러 시키신건가요?
아니면.이 서류를 들고 교무실에 직접 가시면 손가락 뼈가 부러져서 튼튼한 아리에게 시키신건
가요.
선생님의 말이 달갑지 만은 않았다.
그저 학생을 심부름꾼 쯤으로 여기는 듯한 행동이 예쁘게 보이지 만은 않았다.
"저 가볼게요."
고개를 꾸벅 숙인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그렇게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뒤로 휙 고개를 돌려버리면.내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
리 한개.
"잠시만."
"네?"
"시간 괜찮지?"
"바쁘진 않아요.."
선생님의 표정이 환하게 풀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 표정을 잠시 살피던 선생님은 서랍속에서 아까 내가 건네준 서류더미의 약 두배의 분량으로
추정되는 서류더미를 꺼내들었다.
설마..설마..
침을 꼴깍. 삼키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입에서 역시나.라는 감탄사를 내뱉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된다니까..아주 쉬운거니까 부탁 좀 할게."
"뭔데요?"
"내가 지금 맡고 있는 반이 3학년 1반이거든?"
"....."
"우리 반 학생들 기록되어있는 명부인데. 이걸 그대로 컴퓨터에 옮기면 되."
"이 전부를요?"
"응. 고맙다. 부탁좀 하자?"
"..아..네."
"4층 상담실 가면 컴퓨터 있을거야. 거기가서 사용해."
떫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선생님의 교과목인 음악 시간에 실기점수를 빵점 맞을 자신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무조건의
복종 아닌, 복종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왜 자신의 반일을, 것도 삼학년 일을 이학년에게 맡기다니..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으며 교무실을 나섰다.
"후..아주 제대로 걸렸구나."
자신의 모든 일을 학생들에게 떠맡겨 버리는 걸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아주 제대로 걸려 버린 것
만 같은 온누리는 또 다시 한 손엔 알 수 없는 서류더미를 가지고 있다.
참 불쌍한 인생 온누리. 그러니까 바로 나.
중얼중얼 거리며, 정신을 차렸을 때.나는 어느덧 4층 상담실 앞에 멈춰서있었다.
"이런데 까지 와야되나.정말."
계속해서 불평불만이 터져나오는 이때. 정말.선생님만 아녔으면..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한 손에 서류를 가득 챙긴 채 상담실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보통 사용하지 않는 상담실이라서.가끔 들렸었지만 늘상 아무도 없던 상담실이라서. 별 생각 없
이 내가 상담실에 발을 내딛고, 문을 타앙. 닫았을 때.
"...어?"
문을 닫고 고개를 막 돌리는 순간. 내 눈에 바로 들어와버린 선배의 모습은 나를 당황케 했다.
아직 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노란머리에. 안경을 쓴 채로 컴퓨터 앞에 앉은 선배의 모습은. 말
그대로 문제아의 이미지와 최고 모범생의 이미지를 고루 갖춘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33>
"여긴 어쩐 일이야?"
# 상담실.
내가 이 곳에 왔다는 사실을 방금 알아차린 듯한 선배의 물음이 들려왔다.
난 조용히 서류를 들어보였다.
"심부름?"
"예.."
"선생님 심부름인가보네?"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를 한번 쳐다보고는 바로 선배의 맞은편에 놓여있는 컴퓨터로 다가갔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는 동안 선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그래? 뭐 묻었어?"
"아니요. 노란머리가 계속 눈에 들어와서요."
"왜. 이상해?"
"아뇨. 예뻐요. 아, 아니다. 남자한테는 멋있다고 해야되는거지-0-;"
혼비백산한 정신머리로 나는 중얼중얼. 연신 선배의 온 신경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아무 말이라도 다 듣기 좋다.^-^"
선배가 눈썹을 찡긋 거리며 웃어주었다.
저런 모습을 보고..대체 나보고 저런 모습을 보면서..반휘령의 두배가량 악동이었다는 사실을 믿
으라는 말이야?
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선배를 빤히 쳐다보다가 또 다시 불쑥 튀어나온 말.
"문제아였다면서요?"
"응?"
"합- 0 -."
선배의 되 물음이 나오기 전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있다가.선배의 되물음이 내 귀를 통해 들려오
는 순간 난 두 손으로 황급히 입을 막는 어설픔을 보여야만 했다.
그런 내 모습에 다시 핏. 웃으시던 선배는 조용히 입을 떼었다.
"누가 그래?"
"아..아니요. 그게 아니라.....그러니까.."
또 다시 정신 없이 중얼중얼 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선배가 쉽게 입을 열었다.
"맞아."
"네..?"
"나 문제아였어. 문제아. 꼴통."
별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선배가 주절주절 말을 내뱉었다.
선배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여서 일까..
난 또다시 되도 않는 말을 내뱉었다.
"반휘령 보다 더 문제아?꼴통?"
"그런가..? 아..그런가보다."
"정말요?!"
"지금 휘령이 녀석보다도 훨씬 더 꼴통이었다. 그래두 공부는 했을걸?"
그렇게나 믿지 못하겠던 모든 말들이 선배의 한 마디에 그저 모두 수긍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덧붙여서....
선배.그거....결코 웃으면서 할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전.
"사고치구..돈으로 메꾸고..2학년때 까진 엄청 놀았어."
"네?"
"노는 걸 무진작 좋아했거든."
"..- 0 -.."
"그치만 걱정마. 여자문제는 없었으니까^-^"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것과 곁들여져서 내 눈에 들어오는 선배의 미소.
선배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문제만 치던 반휘령도 신기하게 여자 문제로 일을 일으킨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수많고 수 많았던 일 중에...단 한번도.
이런 점에 대해서 아주머니는 아들 참 잘키웠다고 늘 즐거워 하시지=_=..
"근데..왜 전교회장이 되신거예요?"
"왜? 안어울려?"
"노는 걸 좋아하시는데. 전교회장은 노는 게 허용이 안되잖아요."
"노는 건 다 가능해."
내가 무슨 말이냐는 듯한 시선을 보이면..
선배는 또 다시 피식. 웃으며.
"노래방 가두 안잡구요. 친구들하고 말타기 해도 안잡아요^-^"
"아...= 0 =.."
진짜 븅~신. 난 대체 뭘 생각한거야.
내가 혼자서 도리짓을 하고 있으면 선배는 말을 이어갔다.
"약속."
짧게 떼어진 선배의 한 단어.
..약속....?
"내 진짜 모습은 어디에도 없어."
"네?"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변하고 싶은게 내 진짜 모습이야."
"그 아이요?"
"나와 약속을 한 그 아이."
선배의 얼굴에 슬프고 달콤한 미소가 띄워졌다.
그리고 조그맣게 열어진 창 사이로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선배와 나를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벌써 봄이네요.."
"응. 그러게."
"눈도 내린지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신기하네."
"...그 아이가 봄이랑 닮았어요?"
내 질문에 선배가 몸을 움찔 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 너무 웃긴 비유인가? 그치만..선배가 그 아이를 얘기할 때. 봄이 온것 같았어요. 싱그러운.."
내가 내뱉은 말이지만, 참 우습기 짝이 없었다.
봄을 닮았다니. 대체 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길래 봄이랑 닮았다니..
나조차도 내가 뱉은 말에 웃음을 짓고 있으면 선배는 고개를 짐짓 무겁게 도리짓 해보인다.
"그래 맞아. 몰랐는데...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그렇다."
"..그리워....하는 여자예요?"
"어떻게 알았어? 우와. 신기하다."
약간은 어색해져버리고. 침묵된 분위기를 풀기라도 하려는지 선배의 목소리가 어설프게 방방
떴다.
난 그런 선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또 다시 분위기를 다운 시키는 말을 내뱉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이외의 사람과의 약속 때문에 자기 자신을 바꾸려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런가..."
"뭐, 저도 멋있게 말은 하긴 했지만...헤헤. 경험이 없어서요. 정확하지는 않아요.!!"
이번엔 침체된 분위기가 모두 내 탓만 같아서 방긋방긋 웃었다.
그렇지만...이번엔 선배가..
"사랑하는 거랑..사랑하지 않는 거랑..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시소같은 분위기.
누군가가 내려가려 하면 꼭 누군간 올라가야 하는.
누군가가 올라가려 하면 꼭 누군간 내려가야 하는...시소같은 분위기.
난 그 시소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건 진정한 사랑을 할 때까지의 과제."
***
약 삼십여분 정도 전과 마찬가지로 서류와 그것을 담은 디스켓을 선생님의 책상위에 고이 올려
두고는 교무실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하교시간이 조금 많이 지나 인기척이 없는 복도를 통해 교실을 찾아가야만 했다.
조금 전 상담실에선 멋대로 내뱉었던 내 말을 끝으로 선배와 나는 모두 침묵을 유지했다.
어느 한사람 역시.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싶어 하는 마음 한개 없이 타자의 자판소리 만이 상담실
안을 울릴 뿐이었다.
"후."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듯한 날.
왠지 선배와의 대화에서 난 무척이나 무거운 짐을 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선배가 점점 좋아지고 있던 찰나에 선배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아니면..봄을 닮은 그 여자가 부러워서 일까...?
누군가에게 그리운 상대가 된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기쁜 것이다.
누군가에게서..그리운 상대로 기억될 수 있는 건 무척이나 큰 행운 일 것이다.
"대체 난..."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교실에 다다라.앞문에 스르륵.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대체 난..정말 난...
사랑을 받는 것은 따뜻한 것이겠지. 그리운 사람이 되는 것은 포근한 것이겠지.
누군가에게...기억되는 존재라면..잊혀지지 않을 존재라면..참 아름답겠지...
"아무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슬플거야.매일 눈물 흘릴거야..."
정말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이 미련한 사람은...
사랑이란 단어가 너무나도 낯선 이 사람은..매일 울고있습니다.매일..매일..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떠오르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
아빠.엄마. 사막에 버려진 조그만 씨앗은..오가는 사람들의 정성어린 손길에 꾸준히 자라고 있어
요. 비록, 사랑으로 가득 차는 다른 식물들과는 달리..비쩍 마른 마음으로 자라고 있기는 하지만.
누구보다 꿋꿋하게..강한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어요. 오늘도 그렇게 자라나고 있어요.
거기서...괜히 오해하지 마시구.웃으면서 지켜봐주세요.. 저 녀석 이정도 컸구나. 웃으면서..
어느 누구도.어느 생물도.세상 어느것도 못 알아 들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나는.모든 슬픔
을 홀로 다 쥔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야 뒷문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던 반휘령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집에 안 갔어...??"
아주 쉽게 말라버린 입술 틈으로 조그맣게 삐집고 나간 목소리였다.
내 말에는 대답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오던 반휘령은 내가 주저앉아있는 차가운 바닥에 함께 주
저 앉아버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내 옆자리에..
그리고는 자신의 커다란 손을 내 눈에 가져다 대어버린다.
"뭐하는거야."
"가만히 있어라."
".....왜..뭐하는건데?"
"누가 우는 거 보면 쪽팔리잖아."
반휘령의 차가운 손이 어리어리 하게 어지럽던 내 눈 위에 가득 찼다.
왜 이렇게나 차가운 건지...왜 지금껏 집에 가지 않은 건지..어쩌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정직한
손을 한 채 반휘령은 내 옆에 있어주었다.
"...안울어."
"니가 안 우는데 내 손에 묻는 이건 뭐냐?"
"콧물.- 0 -...."
"장난치지마라..."
내 말에 움찔 거리면서도..정확하게 움찔 거렸으면 서도.....장난이라고 넘어가는 반휘령은....
다른 사람들이 행여나도 보면 내가 쪽팔리지는 않을 까 걱정해서 자신의 손으로 흐르는 내 눈물
모두 막아준 반휘령은.... 내 옆에 있어주었다.
"우는 게 니 특기냐? 특기 할게 그렇게 없어서?"
아무도 없을거라고 생각한 옆자리에..힘들 때 고개를 돌려보면 항상 삐뚠 모습을 가진 반휘령이
있었다. 활짝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무너지려는 날 잡아주고 있었다.
<34>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때가..
어린 아이의 눈에 마냥 크게만 보이던(지금 역시 크게 보이긴 하지만.) 그 집에서 살게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그 날. 아마..가족 모임이 있다고.그러니까는 반휘령의 할아버지 생신이 있다며 어쩔 수 없이 날
두고 가야했던 날. 그날.
혼자 그 큰집에 덩그라니 남겨져 있다는 생각에 계단에 쪼구리고 앉아 아저씨, 아주머니를 기다
리며 마냥 울고있을 때. 현관 문이 열리고 조그만 반휘령이 들어왔었다.
그리고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아서 거기서 집어온 사탕 하날 조그만 내 손에 올려주며.
"혼자 우는게 젤 쪽팔리는 거 아니냐?"
"응. 젤 쪽팔리는 거."
그래. 이렇게 지금과 똑 같은 말을 했었어. 그리고 나 역시 똑같은 대답을 했었지.
혼자 울지 말라구.사탕을 입에 물어주며 그렇게 말했었어.
빙그르. 웃음이 띠였다. 예전 생각을 하면 좋을 건 분명 하나도 없었지만, 어쩌면 말이다.
아주 어쩌면...내가 지금껏 반휘령의 집에서 웃으며 살 수 있었던건.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건.
싸가지는 매우 없지만, 사고도 다부지게 치지만.항상 슬플땐 옆에 있어주던..그러니까 혼자 울지
않게끔 도와주던 반휘령 덕분이 아녔을까.
"젤 쪽팔리는 짓 하지마라."
여전히도 내 옆에 털썩 주저앉은 반휘령이 내 뒤통수를 치며 말했다.
분명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씁쓸한 웃음을 띠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반휘령의 손에 아주 살짝 맞은 뒤통수를 연신 부벼대었다.
"왜 뒤통수를 후려.- 0 -."
"그거 아냐?"
"뭘?"
내 뒤통수를 후려논 마당에 뭘 아냐니.
뻔뻔스럽게.. 이상한 말이기만 해봐!!!(그럼 어쩔건데?-_-;;)
이내. 눈물을 쓰윽쓰윽.닦구는 말라버린 볼에 손을 가져다 대며 반휘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뭔가 무게를 잡던 반휘령은..
"...넌 맞아야 눈물을 그치는 거."
"그게.너 지금.무슨 말이야."
"옛날에도 그랬고..지금도 그러하다."
조금은 어색한 발음으로 얘기를 내뱉은 반휘령이었다.
마지막의 그러하다는 뭔데?=_=..
그렇지만 반휘령을 똑바로 직시하던 눈을 내려깔고 피식. 웃어야만 했다.
"맞다.!! 기억났다.!!!너 그때두 내 뒤통수 때렸다.그치?-0-"
그제서야 내 기억에서 잊혀진 부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난 어쩜 반휘령이 내게 사탕을 주는 그 달콤한 모습 까지만 기억했을까?
도대체 왜 그 녀석의 매운 손이 내 뒤통수를 후렸다는 것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까?
"사탕을 줬는데도 무슨 애가 눈물을 안그쳐."
"내가 그땐 그냥 맞구 웃었는데.!!!이제는 아니다.너 정말 그땐 그러는 거 아녔어."
"뭐래."
"세상에 우는 애 뒤통수를 후리는 애가 어딨어!!- 0 -!!"
내가 흥분을 한채 말을 내뱉었다.
반휘령이 흥분한 내 표정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넌 맞아야 웃는 거 아녔냐?"
"뭐? 너 그런 말이 어딨어.!!!그럼 담번에 내가 또 울면 뒤통수 후리겠다?"
"엉."
"뭐..??"
당연하다는 듯 내뱉은 반휘령의 말에 난 움찔 거리며 반박을 했다.
그러면.반휘령은 내 커다란 목소리에 피식. 작게 웃어보이다가....
이내. 굳어버린 모습으로 나를 응시했다.
"왜?"
이상한 시선에 반휘령을 잠시 들여다 보이면.그저 굳은 표정을 그대로 한 채로 반휘령은 자리에
서 일어서버렸다.
"응? 가는 거야?"
"안갈거냐?"
"가방도 챙겨야되구..- 0 -"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려 엉덩일 차가운 바닥에서 떼어내면.그런 날 보지도 않고 쓰윽 스쳐 밖
으로 가버리는 반휘령.
한 손엔 가방을 꾹 쥐구서.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신발을 낚아 채듯 가지고서..
난 벙하니 그런 반휘령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들썩이던 엉덩일 금새 타부작 바닥에 붙였다.
왜 갑자기 그러는거야...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녀석 같으니라고..-_-^..
"이상한 놈.."
또 무언가에 급작스레 화가났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괜히 달려가서 반휘령의 성질을 긁어대느니. 좀 있다 집에가서 지금 이 상황은 없었던 것 처럼
헤헤헤. 웃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낮게 중얼거리곤 3층 복도에서 반휘령의 모습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자 차가운 두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아까 까지는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젖어있던 볼이 이내 말라서 번질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
다.
난 다시한번 볼을 쓱쓱. 맨 손으로 닦아내고는 교실에 가방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잠겨져 있지 않
은 뒷문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오늘 정말 복잡해. 휴."
혼자 있으면 정말 많은 혼잣말이 생겨나곤 한다.
보통들 이런 상황에선. 아무것도 없는 곳에 혼자있는 상황에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기 마련이
건만...난 조잘조잘 혼자서 혼잣말을 하는 것에 익숙하다.
아무 말이 없으면 혼자있는 것이 너무 실감나서 일까?
난 언제부턴가 혼잣말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교실에 무사히 발을 내딛고. 내 자리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책상위에 올려져 있는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콰앙.!!!!
"꺅.!!!!!!"
우악스레 닫혀버리는 뒷문을 느끼며.가방을 쥐고있던 손에 힘이 풀려버렸다.
주위를 두리번 거려대었다. 저물어져 가는 해는 이미 하늘을 검게 물들어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사방이 어두운..깜깜한 그 한 가운데에 홀로 멈춰서서 멍한 시선을 허공에 띄워보냈다.
잠시 후. 바닥에 처참히 부딪힌 가방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떼어지지 않으려는 걸음을 억지
로 한발짝.두발짝. 내딛어댔다. 아주 천천히..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걸음 걸이 조차 제대로 내딛어 지지 않았다.
"...누구...세요..?.."
불길한 예감이 온 몸을 휘감아왔다.
방 안에 꼼짝없이 갇혀 하루를 지새우던 그때의 그림이 마치 멋진 영상을 그리듯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검은 색 실타래로 뒤엉킨 영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면. 그 순간. 근근히 날 지탱하며 온 몸에
퍼져있던 악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그렇게 힘겹게 서있던 다리의 힘이 풀
어지는 순간 난 그 자리에 털푸덕.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쿠당탕탕.
내 어깨와 등이 책상에 부딪히며 커다란 소리가 조용하던 교실안을 울려대었다.
혼이 빠져나간 듯한 눈으로 그저 멍하니 뒷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힘으로 인해 바닥에서 나
뒹굴고 있던 책상과 의자들과 함께 난 그저. 정말 멍 하니 뒷문을 바라 볼 뿐이었다.
"누리야? 누리야.?!!"
멍하니 내 시선이 고정되어있던 뒷문이 급작스레 벌컥 열리며 제법이나 익숙한 얼굴이 내 눈에
들어찼다. 그렇게 선배의 두 눈이 둥그렇게 커다래졌다.
그리고는 움직일때마다 다리에 체여 걸그치던.의자와 책상이며 모두 밀어뜨려놓은 채로 한달음
에 내게 달려들었다.
"..괜찮아? 왜 이러고 있어?"
"......아니요..아니..."
"왜.왜그래.!!"
"......."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뭔지 몰라도 내가 정말 다 미안해."
선배의 짙은 향기가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곧 이어 날 품에 안은 선배의 팔에 힘이 더
주어졌다는 생각이 들때면..
이젠 얼굴조차 희미한 수채화 처럼 남겨져 있는.그 향기조차 너무나도 아마득한 기억속에 남겨
져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버렸다. 매마르고 어두운 곳에서 거칠한 손으로 날 매만지며 안
아주던 할머니의 모습에 복받쳐오르는 슬픔을 억누를 수가 없이 목구멍에서 꽉 막혀버린 눈물을
난 참 억세게도 뽑아내고 있었다.
"...우으....으.."
꽉 다문 입술이 부르르 떨려왔다. 선배의 품에 안긴 채로 뜨거운 눈물을 뽑아대었다.
몇 년간 떠올리기를 무서워 하던 할머니의 따뜻함이 너무 오랜만에 떠올라 버려서 그저 눈물을
흘리며 이젠 기억을 할 수 조차. 느낄 수 조차 없는 무언가를 한참 그리워 할 뿐이었다.
"무서워 하지마.괜찮아..울지마..겁내 하지마."
"...."
"다 내가 잘못 했으니까 울지마...울지마.."
토닥토닥.
내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는 선배의 손길은.찢어질 대로 찢어져버린 내 가슴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
"선배가 문 닫은거예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차가운 두 손으로 쓱쓱 닦으며. 내 앞에 앉은 선배에게 넌지시 물었다.
벌써 해가 어둑해져서 교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까맣기만 하다.
별도 서너개 보일 정도로 뒤덮인 어둠. 그러나 그 속에서도 빛을 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사실이
었나 보다.
음악선배가 그러한 사람인 듯 싶었다.
"그냥..."
"문 닫았다구요?"
"응.-_-;;"
선배가 미안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귀신 인것 처럼 해서 놀래키려구 했는데.그렇게 귀신을 무서워 하는지 몰랐어.."
"......예.."
사실 귀신이 무서워서 운 건 절대 아니었지만.알 수 없는 이 감정을 설명하는 것 보단 차라리 귀
신을 무서워 하는 아이로 설명되는 것이 가장 편하고 좋을 듯 싶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며 선배가.
"다신 안 그럴게요. 울보 공주님."
'울보 공주님'이라는 말에 내가 움찔 거렸다.
공주님이란 말은 안 어울릴지 모르겠지만.울보라는 말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오늘만 해도. 울고 겨우 닦고 진정을 했더니 또 울고...
그러고 보니. 오늘은 두번 다 혼자서 울진 않았네.
고개를 두어번 흔들었다.
"근데... 너."
"..?"
"너무 많이 우는 거 아냐?"
"네?"
"내가 볼땐 웃는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는 것 같어."
"설마요.!!"
"진짠데....내가 첨 봤을 때도 너 울고 있었는데."
"처음 봤을때요?"
"응."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를 처음 봤을때라...내가 그때 울었던가?
언제 처음 만났었는지 떠올리다가.난 그만 포기 하고 말았다.
하긴. 오죽 잘 우니까는..첨 봤을 때 울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었다.(사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많이 울 수 있을까?"
"예?-0-;"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많이 울 수가 있는 걸까...나 같이 눈물 없는 애는.."
선배가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에서 느껴져 오는 빛이 선배를 부드럽게 비추는 듯 했다.
난 선배의 터무니 없는 질문에 그저 벙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곧. 난 대답할 거리를 찾아내었다.
"음..눈물은요."
"응."
"그냥 흘러요."
"응?"
"난요. 이 세상에서 눈물이 없는 사람은 없다구 생각해요. 눈물이 있지만..그걸 아무렇게나 쏟아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그걸 꾹 참아내는 사람이 있다구 생각해요."
"....."
"엄마아빠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요. 이젠 정말 얼굴도 까마득해요."
".."
"그런데, 가끔 그 향기가 느껴지고는 해요. 그 향기가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가끔 느껴져요.
코가 아닌 심장으로 부터.. 그땐 특별하게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흘러요. 눈물이 많이 있는데, 전
그걸 모조리 쏟아 낼 참인가 봐요."
난 선배를 바라보았다.
슬픔으로 가득찬..너무나도 일렁이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물이 많은데...참지 말아요. 선배는 너무 참고 있어요..아파보일 정도로.."
<35>
절대 사양하는 나를 무시한 채로 기어코 집까지 함께 동행해 주시겠다던 선배였다.
30여 분 후.
선배와 나는 굳게 닫혀있는 커다란 대문 앞에 멈춰섰다.
잠깐 동안 공허한 공기가 우리들 주변에 내려앉는 듯 했다.
"여기였지?"
"한번 오셨었는데. 기억 하구 계시네요."
"응. 이래뵈도 아이큐는 최고라고~"
신기해 하는 나를 향해 브이자를 그려보이는 선배의 모습. 마냥 즐겁게만 보이는 선배의 모습.
난 피식. 웃어보였다.
그런 내 모습에 선배 역시 즐거운 듯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앉자."
"네?"
"여기까지 데려다 줬는데, 바로 가라고 내쫓는 건 아니겠지?"
"아..그럼요.!!"
그나저나. 여기엔 앉을 곳이 없는데..
의자를 찾아 두리번 거리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선배는 대문 앞에 놓여진 계단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으셨다.
난 선배의 그런 모습에 잠시 놀래어 있다가. 나 역시 선배의 옆에 엉덩일 붙였다.
그저 차가운 공기에 까마득히 식어버린 시멘트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서울에도 별이 다 있네."
"사람들은 서울 하늘엔 별이 없다구 말하지만.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주 봤거든요."
"그러게. 신기하네..."
어두운 하늘에 밝게 빛나는 십자수가 놓여져 있는 듯 반짝거리는 별들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
다. 머리 위로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처럼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제법 되는 양의 별들이 밤하늘
을 비추고 있었다.
오늘따라 별이 유난히도 밝게 빛나는 것은.. 엄마,아빠가 나를 위로해주고자 하는 마음일까?
또 다시 울적한 기분이 내 머리를 애워쌌다.
알게모르게 조금씩 어둠으로 덮혀가는 내 얼굴을 본 것인지, 선배가 목소릴 틔웠다.
"머리."
".."
"검은색으로 다시 염색 할까?"
"검은색으로요?"
"응."
"왜요?"
어찌보면 무척이나 쌩둥맞은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검은 머리카락 보단 노란 머리카락이 더 어울리고 왠지 멋있어 보이는 사실에 난 이런
모습으로 놀람을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반응에 선배가 재미있다는 듯 살짝 웃었다.
"약속 지키려고.포기 안하려고."
"약속이요?"
"응. 그애와 한 약속 지켜야만 하겠어."
선배의 눈동자가 또렷해지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애와 한 약속...약속.
봄이 닮은 아이를 떠올리던 선배의 표정이 머릿속에 떠올라버렸다.
밝고 어느때보다도 온화한 그 표정. 지금 선배의 표정이 꼭 그랬다. 그때의 표정이었다.
"멋있어 지겠다고 했으니까.."
"...."
"포기 한다는 건 너무 우스운 거였어. 역시...약속은 지켜야 될것 같네. 그 아이가 잊은 것 같아도
내가 약속을 기억하니까...지켜야겠어. 나중에 기억해내면 나 원망하지 않게."
"....."
"딱 봤을 때. 그 애가 날 알아봤을 때. 뿅 갈수 있게. 한눈에 반할 수 있게끔.."
선배가 눈을 꼬옥 감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난 그런 선배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주 갑자기. 몇개 없는 별들이 곧 내 머리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왔다.
"선배."
"응."
"난요.."
".."
"내가 만약 그 아이라면요. 내가 만약..봄을 닮았다면요."
만약 그렇다면요. 내가 정말 봄을 닮아있다면요...
"선배가 좋아하는 모습이 더 멋있다고 생각 할 것 같아요. 나를 위해 억지로 둔갑해있는 모습 말
구. 진정으로 선배가 원하는 모습이 더 멋있다고 생각 할 것 같아요."
"...."
주절주절. 내가 말을 끝내고 난 후. 정말 밤하늘과 같은 정적이 흘렀다.
무겁고 어두운 정적이 우리 주변에 또 한번 내려앉았다.
쓸데 없이 또 나서 버린 걸까? 생각했다.
난 또 다시 무거워진 분위기에 멋쩍은 듯 베실베실. 웃으며.
"아, 그러니까요. 제 말은....그냥 노란 머리가 더 멋있는 것 같다구요."
"응."
"네?"
"응이라구. 응. 그런 것 같아. 그런 것 같다구요."
선배가 살며시 감고있던 눈을 번쩍 떴다.
난 그런 모습에 움찔 놀래며 말을 내뱉었다.
"노란 머리요?"
"설음악은 멋대로인 노란 머리가 낫다. 이거 아냐? 난 검은 머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거 아
냐? 그러니까..설음악은 못된 망아지 녀석."
"아니요.!! 제 말은..."
"하하하. 알고 있어. 놀래는 거 너무 웃기다."
"..."
"네 말은..내가 노란 머리일때가 제일 설음악스럽다. 그 말?"
"네. 그거요. 사실..선배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제일 음악선배 같다는 말은 웃기는 게 될 테지마는
요. 전 그런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내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 흡족해했다.
그리고는 어느새 차가운 느낌마저 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익숙해진 시멘트 계단에서 엉덩일 떼
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역시 선배를 따라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엉덩이에 물을 끼얹기라도 한듯 축축히 젖은 느낌
이 약간 찝찝해져 왔다.
"좋은 말 고마워."
"아, 뭘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저두 모르겠어요. 선배를 보면 계속 할 말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본 적도 얼마 없으면서.
꼭 선배를 많이 아는 사람인 것 처럼 느껴져요. 이상해요. 정말루.."
"...그래? 것 참 신기하네."
"그러게요. 무척 신기하네요."
내가 끄덕끄덕.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면, 선배는 그런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 머리위에 살며시 앉혀진 선배의 커다란 손에 놀래어 선배를 똑바로 바라보면.
"내일 학교에서 보자."
몇 초 지나지 않아 선배의 손이 내 머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그 손을 내게 흔들어 보이는 선배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찼다.
뒷 모습을 보이면서도 계속 손을 흔드는 선배의 모습에. 나 역시 선배에게 분명 보이지 않을 모
습 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손을 열심히 흔들어보였다.
선배는 전혀 보이지 않을 거란 걸 무척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점점 작아져 가는 선배를 보며 참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선배!!!선배는 노란 머리가 무척 잘 어울려요.!!!!"
내 목소리가 제법 컸지만, 선배는 끝내 돌아보지 않고 점이 되어 사라졌다.
내심 조금은 용기를 내었던 말이었는데, 선배가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울적하긴 했지만. 만약
그 말을 들었다면 또 얼마나 내 자신이 우스워 질지 느껴졌기에 애써 담담했다.
선배가 사라진걸 재차 확인하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런데.
"선배는 노란 머리가 무척 잘 어울려요~"
"하다야?"
"내가 누누히 말했지.!! 남자는 나 빼곤 다 늑대라고- 0 -!!"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담장위로 빼꼼이 솟아있는 하다의 뾰로통한 얼굴
이었다.
내가 놀란 듯 주춤 거리며.하다의 흥분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이내 삐그덕. 하고 열리는 대문.
"잘들 논다.아주."
"..- 0 -.."
대문을 열며 유유히 다가서는 반휘령이었다.
니들 대체 뭐니..=_=.. 게다가.반휘령. 그 말투는 뭐야.!!
베베 꼬는 듯. 직설적인 반휘령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를 내뱉는 반휘령을 똑바로 직시
했다.
"아까 하교한 애가. 이제야 들어오냐?"
"네가 먼저 가버렸잖아."
"언제는 우리가 같이 집에 오는 사이였냐? 내가 널 기다려?"
"건 아니지만...어쨌든."
"학교 마치고 잽싸게 집으로 텨올 생각은 않고. 그저 남자라면.."
"야. 너 왜그러냐. 오늘.?!"
반휘령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황당함이 치밀어 오를 뿐이었다.
차라리 하다가 한다면 가만 듣고는 있겠지만..-0-.
도저히 참지 못한 내가 반휘령을 향해 탁. 쏘아대면.
"내가 뭘."
언제나처럼 굳은 표정의 반휘령이..너무나도 내겐 익숙한 모습의 반휘령이.. 그 뻔뻔스런 얼굴을
한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반휘령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반휘령과의 유치한 말 싸움이 사라졌다 싶으면..아니나 다를
까. 복병 하다가 가만히 담장에 붙어있지 않고 대문으로 튀어나왔다.
"누나 저 선배랑 사귀냐?"
"아니."
"근데 왜 자꾸 같이 댕겨? 대체.무슨 마음으로 같이 손을 잡고 날아다니는 거야."
"손을 잡다니..=_=..날아 다녀?"
"누나의 표정을 보고 내가 해본 말이야. 왜? 찔려?"
바보 하다.
혼자 꽁알꽁알. 잘도 떠들어대는 하다였다. 그런 하다를 가만 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리 저었다.
"아니야. 안 사겨."
"그으래?"
"응.-0-."
"그럼 내가 음악 선배한테 여자친구 소개시켜줘도 되겠네?"
"응?"
"왜?왜왜왜? 안돼? 건 안돼겠어?!!"
"=_=..돼."
하다가 얼굴을 내게 방정맞게 들이밀었다.
하다야...혹시 그거 알아..? 마치 금방 너의 모습이 김은총을 순간적으로 떠올리게 했다는 그 끔
찍하다 못해 경악스러운 사실을..
잠시 벙져있는 나를 지나쳐 새초롬한 표정을 짓던 하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읊조렸다.(역시 내 귀엔 들렸다.-_-;)
"누나가 남자 사귀면.누가 내 점심 챙겨줘.흥-0-."
...응? 하다야?-_-
<36>
다음 날.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하다와 반휘령보다 먼저 학교갈 준비를 끝마치고 대문 밖에서 기다린 것이..
나름대로 무척이나 이런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다.
누구나 경험해보지 못한 자들은 모를 기분이 바로 지금 내 기분이었다.
"새벽 공기는 이렇게나 맑구나..신선해.^ㅇ^"
차가운 공기에 하얀 이를 그대로 드러낸채 싱글 웃었다.
숨을 들이쉬었을 때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정말 아침의 싱그러움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비록 지금 시간이 새벽이 아니었지만, 매일 늦어서 허둥지둥 뛰어나오느라 이렇게 시간을 내어
공기를 들어마신 적은 처음이었기에 무척이나 새로운 기분이었다.
한 손에 가방을 꼭 쥐고서 담벼락에 붙어 섰다.
그리고는 반하다와 반휘령 형제가 밖으로 형상을 드러낼때 까지 기다리려했다.
담벼락에 닿자 마자, 차가운 벽의 감촉이 척추를 따라 머리에까지 찡.하게 울리면.
"뭐하냐."
활짝 열린 대문의 한 가운데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반휘령이 보였다.
난 이때다 싶은 마음에 얼른 담벼락에서 몸을 떼었다.
그리고는 오늘따라 늦장을 부리는 듯한 반휘령을 올려다 보았다.
"차 기다리고 있지. 그러고 보니 오늘 따라 좀 늦네.."
손목에 채여있는 시계를 힐끔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7시 50분. 평소같음 50분 전에도 차를 대기하고 계시는 아저씨였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늦어지고 있었다.
시계에서 시선을 떼어 반휘령을 한번 쳐다봤을 땐,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져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표정이 왜그래..=_=.."
"..."
"...하다는??"
어떠한 말에도, 어떠한 음색에도 미동없는 반휘령을 보며 말을 돌리고 싶었다.
괜스레 지금쯤 학교 갈 준비를 하고있을 하다를 끄집어 내었다.
그러나 반휘령은 역시나 무 표정으로 날 가만 내려다 보았다.
"어제 뭐 들었냐?"
"뭘 듣다니?"
"오늘 부터 그 사람 휴가 간다는 말."
"응? 그사람? 휴가?"
분명..반휘령이 말한 그 사람은...김기사 아저씨일테고...그렇다면..
"김기사 아저씨가 휴가 갔다는 말이야?!!"
"어."
"난 못들었어.!!!"
분명 난 어제 듣지 못했단 말이야. 집에 들어가자 마자 방으로 쏙 들어가서 잠에 빠진 내게 진정
으로 그 말을 전했다니? 응?
일부로 나를 골탕먹이려 말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쳤을 때 난 이미 반
휘령을 의심이 80% 섞인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절대 반휘령은 이런 내 시선에 동요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다는? 하다도 알고 있어?"
"어제 반하다가 너한테 말한다고 갔다."
"하다가?"
"엉."
반휘령의 말 한마디로써 난 반휘령에게 가해져있던 의심의 눈초리를 모두 거두어 들이며 빙글
웃었다.
그리고 날 괴롭히려던 마음만으로 똘똘 뭉쳐져 있을 반하다를 향해 이를 갈았다.
"하다 어딨어.? 지금 집에 있어?"
"오늘 일찍 간다던데."
"학교엘..?"
반휘령의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나의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난 비장한 각오를 다짐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행동에 반휘령의 표정이 또 다시 급격히 일그러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난
현재 반하다를 향한 증오로 가득 찬 가슴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뭐냐? 어디가?"
"학교가야지. 이러다간..버스를 타더라도 지각이야. 택시를 타더라도...- 0 -.."
그렇다. 지각이였다.
만약 하다가 어제 예쁜 마음을 먹고서 김기사 아저씨가 휴가를 다녀온다는 말을 바람에 실려오
는 노랫소리 만큼이라도 들려주었다면 난 절대 지각 이라는 것과 연관 되지 않았을 테다.
것도..난 이번주의 주번이란 말이다. 일찍 학교를 가야되는.!!
하다 이녀석, 날 괴롭히고자 하는 마음이 뭉게뭉게 드러나는 짓을 서슴치 않고 했더랜다.
난 타박타박 무겁고 무거운 걸음을 떼어 비탈진 길을 걸어내려갔다.
"버스? 택시?"
분명 내가 반휘령보다는 몇 걸음이나 앞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 나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 날 향해 묻는 반휘령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오직 어서 학교로 돌아가 우선 지각을 피하고, 그 다음 순위로 하다의 뒤통수를 커다란 도시락통
으로 한대 퍽. 쳐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한 나는 반휘령을 향해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버스."
"몇 번 타야되는 건 지는 아냐?"
반휘령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꿋꿋하게 걷던 걸음을 급작스레 멈추었다.
"몇 번?"
"학교까지 가는 번호."
"모르는데..-_-;;"
"근데 무슨 버스를 탄다고 지랄이냐?"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반휘령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
보았다.
난 그녀석의 눈빛을 그저 피하며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었다.
"그냥 택시타."
"안 돼."
"버스 번호도 모른다며.!!"
"그래도 안 돼."
"대체 무슨 똥고집이냐.? 어?"
반휘령이 짜증난다는 듯 나를 향해 다그치듯 물어왔다.
난 몸을 연신 움찔대며.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돈 못 챙겨 나왔단 말이야."
"내가 거지로 보이냐?"
"아니. 거지로 안보여."
"근데."
"그면 너 혼자 택시타구가. 버스번호야 찾으면 나오는거지. 뭐."
새초롬하게 그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휙 돌리었다.
***
"지각이다.지각.- 0 -"
# 버스 안.
벌써 8시 20분을 가르키고 있는 시계를 들여다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겨우겨우 버스 번호를 알아내고, 한번의 버스를 놓친 뒤 힘겹게 잡아탄 버스 한대.
그러나 이미 지각이라는 것은 내 눈앞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한숨 내쉬지마. 땅 꺼져."
"말도 안되는 소리 마."
"지각 한번 한다고 뒈지는 거 없으니까 걱정마라."
분명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있는 제법 많은 아이들 때문에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내리는 문 쪽에 붙어서서 연신 한숨만을 푹푹 내쉬는 모습이 짜증났는지, 반휘령
은 아까부터 계속 나를 건드리고있었다.
대체 왜. 혼자 택시 타고 가라니까 이렇게 옆에 붙어서 괴롭히는 거야, 정말.
반휘령 답잖게 말이 조금 많아진 것도 같고.. 하여튼 이상해졌다. 분명히 이상해졌어.
이런 감정은 뭔가를 숨기는 걸 잘 못하는 내 성격 탓에 얼굴에 적나리하게 드러나버렸다.
"그딴 표정..구려."
"-_-"
"...."
반휘령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쓰윽. 창밖으로 돌리었다.
정말 당장이라도 시속 80으로 달리고 있는 버스의 뒷문을 힘으로 구겨 열어낸 뒤 뛰어 내려버리
고 싶은 심정이었다.
꿈틀꿈틀. 버스가 터질만큼 꽉꽉 차있진 않았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로 인해 내가 뻗대고 서 있을
수 있는 자리가 한 없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지 못하던 내가 손잡이를 꽉 잡고 있던 손을 놓았을 무렵. 사건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끼익..-
"꺅!!"
"꺄악!"
지각한 학생들을 위해서였을까, 출근길로 인해 꽉꽉 막혀있는 도로위를 그나마 힘차게 달리고
있던 버스가 갑작스럽게 급정거를 해버렸다.
사건은 도로 한 복판 위.
"아니, 저 새끼가..!!!! 운전 제대로 못해?!!!!!!!"
급정거가 되어버린 바람에 이리저리 휘청대고 있던 사람들이 이모저모 투덜거림을 한없이 토해
내었을 때. 다른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기사아저씨의 성난 목소리는 내 귀에 정확히 박혀
왔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뺨과 무릎의 아픔까지도 함께 느껴졌다.
"뭐하냐..?"
잠시후 들려오는 반휘령의 낮은 목소리.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인해 한껏 더럽혀진 바닥에 붙어있던 몸을 힘겹게 떼었다.
버스가 급정거를 했을 때 뭣보다 고통받는 이는 아무것도 잡지않고 꿋꿋히 서있는 사람들의 몫.
나 역시 잠시 버스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커다란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으...그렇게 빤히 보고만 있지말구 좀 일으켜봐.."
"...꼴깝떤다."
"꼴깝이구 뭐구 일으켜봐.ㅜ_ㅜ"
바닥을 쓸어버린 것인지 뺨이 따가워짐을 느꼈다.
팔도 아무렇게나 바닥에 부딪혀 버린 바람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기도 버거웠다.
"어머..바닥에 박았네.박았어."
"제대로 받았구만>_<"
"어쩜 좋누..아가씨가..."
힘이 쭉. 빠진 채 사람들의 여러시선과 수근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절대 움직이지 않는 나.
그런 나를 일으키려는 반휘령의 손길이 허리츰에 느껴져왔다.
무릎이 까져서 피가 흐른 다는 걸 느낄 수 있었을때... 그러니까는. 반휘령이 나를 완전히 바닥과
떼어놓았을 때.
"씩씩..이새끼들..운전을 이따구로...-0-^.."
한껏 열이 오른 아저씨가 씩씩대며 버스를 출발시켰다.
그러므로...힘겹게 이제 막 일어섰던 나는.
"엄마야.!!!!!-0-!!!!"
힘들게 일어선 보람도 없이 그렇게 땅과의 접촉을 다시 한번 시도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걸 느끼며..반휘령의 힘바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난 다시 힘을 쭉 뺀 채 바닥에 붙어있어만 했다.
"일어나. 쪽팔려.."
반휘령의 목소리가 내 귀를 후벼파며 들어왔다.
그러나 난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내 머릿속엔 반하다의 개구진 얼굴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애새끼..ㅜ_ㅜ..너 오늘 진짜 죽었어.!!! 장난친 사람의 최후를 보여주마..!!
<37>
"와하하하...뭐냐.그 꼴은~?"
# 8시 50분. 교실 안.
어딘가에 들렸다 오겠다며 사라진 반휘령을 신경쓰지 않은 채 나는 교실에 발을 딛었다.
그리고 역시나 내 과관인 몰골을 보며 웃음보를 터트리는 세쌍둥이들.
그덕에 조용하던 아이들의 시선마저 내게 한되 모아져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패 싸움했어? 야, 얌전하게만 보이더니 엄청나구만..아침 댓바람 부터 쌈질이라.."
"싸운 거 아니야.-0-."
"그럼? 어떻게 하면 몰골이 그렇게 망가질 수가 있지?"
뒷문에 가만히 발을 딛고 있는 나를 보며 마구 웃어대는 세쌍둥이.
한달치의 웃음거리를 내가 모두 표현한 듯 그들은 그렇게나 즐겁게 웃고 있었다.
난 표정을 굳히며 조금 주춤 거리던 발걸음을 바닥에서 떼어, 자리로 향했다.
쌍둥이들을 스쳐 자리로 걸음을 옮기면, 언제나 그랬듯 그녀들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엉덩일 떼
며 나를 따라 다가온다.
"......."
"..."
"...."
오늘 부터는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을 바꾼건지. 은아리양은 조용히 나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예전같으면 두개골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흔들리도록 소리를 질러댔을 그녀였는데..
평소처럼 하더라도 무척이나 곤란한 기분이 들었겠지만, 이렇게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이니
곤란하다는 감정을 뛰어넘어 두려움이 내 온 몸을 엄습해오는 듯 했다.
내게서 절대 시선을 떼지않고, 공허한 표정으로 날 가만히 바라보는 아리를 향해 작게 한숨을 내
뱉고는 내가 졌다는 마음을 가진 채 중얼거렸다.
"버스에서 넘어져서 그래."
"뭐? 버스?"
"응. 버스."
내 말에 아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언제 정적을 지켰냐는 듯 그녀들은 일제히 무
척이나 비슷한 웃음소리로 교실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반 아이들의 인상이 찌푸려 지건, 어쨌건 그녀들은 무척이나 당당했다.
"버스에서 넘어지면 그렇게 산발이되냐.?"
"어머. 우리 진짜 버스 조심히 타야겠다...어딜봐서 저게 사람몰골이야>_<"
손뼉을 쳐대며 꺅꺅. 가는 목소리를 내뿜는 여자들.
난 그녀들을 한번 쳐다보고는, 언제나 그래왔듯 책상에 머리를 가만히 숙였다.
책상 표면에 달라붙어있던 차가운 공기가 머리를 지끈 거릴 정도로 차갑게 식혀버리면 어느 새
온 학교를 울리는 일교시 시작 수업 종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제 자리로 떠나는 세 쌍둥이를 따라 시선을 돌리다 잠시 스쳐지나간 맨 뒷자리는 여전히
빈 채로 따뜻한 아침의 햇살만을 받고 있었다.
오늘 일교시도 땡땡이 치려나..?
***
"뭘 그렇게 노려보고 있냐.?"
".."
"야!!"
"응??"
갑작스레 내 귓가를 울려대는 아리의 목소리에. 마치 꿈에서 깬듯 몽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리는 이런 나를 반휘령과 비슷한 표정으로 내려보고 있었다.
"뭘 하기에 불러도 모르냐?"
"아.."
"뭐 했는데?"
"그냥.. 운동장 쳐다보고 있었어."
"너 공부시간 부터 지금 껏 계속 그런 거 아냐? 지금은 점심시간이고-_-"
아리의 짜증섞인 목소리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리었다.
이젠 오후의 뜨거운 햇살을 받고 있는 여전히도 빈 자리.
일교시 수업하기 전. 잠시 들렸다 오겠다던 반휘령은 지금 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왠지 시선이 계속 운동장 저 너머에 있는 교문을 향해 있었다 싶었는데, 그게 점심시간 까지 이
어 졌다니.. 아니라고 부인을 할 수도 없는 것이. 공부시간에 들은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아, 맞다. 쪽지."
"쪽지?"
"엉. 어떤 꼬맹이가 전해주던데?"
쪽지..??
타이트하게 줄여진 교복 마이 주머니를 힘겹게 뒤적거리던 아리가 이윽고 내 얼굴 앞으로 척. 예
쁘게 접혀있는 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를 보며 의아해 하는 나를 보며, 무척이나 당당한 웃음을 짓는 아리.
"나 안 읽어봤다.!!그거 금방 받았는데도 안 읽어봤다.!!!!"
"응..."
"야. 넌 그런 식으로만 넘어가냐? 나 졸라 대단하지 않아?그거 안 펴봤다니까.?"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_=
내가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아리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날 잠시 내려보다가 이내 내 뒤로
다가왔다.
내 어깨에 손을 척 걸치고는.
"궁금해. 같이 보자."
"응?"
"내가 볼 수 있었는데 안 본거잖어. 대체 누구한테 온건지나 확인 좀 하자."
분명 그녀가 내 쪽지를 보지 않은 건 당연한 이치였으나, 왠지 모르게 그녀의 제촉에 나는 쪽지
를 당연히 아리와 함께 펴 봐야된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렀다.
누굴까...누구지..하다인가? 미안해서? 요놈..
오늘 자신이 한 짓이 미안해서, 음악실으로 향할때(음악실이 일층에 있음.) 몰래 숨어서 이 망가
진 내 몰골을 보다가..양심에 찔려서 쪽지를 보낸 것이라 나는 장담하고 쪽지를 펼쳤다.
너무나도 예쁘고 반듯하게 접혀 있는 것이라, 하다가 진정으로 접은 것이 맞는 지 의심이 가기도
했지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체육실로 와줄래? 음악이가.."
아리가 쪽지를 내려다 보며 읊은 목소리였다.
...음악이가...
역시 하다놈이 이렇게나 반듯하게 쪽지를 접어올 리가 없었다. 어디 한 군데 안찢어지고 글자가
제대로 표시 되어있다면 무척이나 전달이 잘 됐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인 녀석이니..
하여튼. 반하다. 끝까지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_- 아주 오늘 다 죽었어.!!(아까부터 이말만;)
은근히 반하다라는 개구장이 녀석에게 기대를 해서 일까. 섭섭한 마음이 물씬 풍겨드는 이때.
내 뒤에서 쪽지를 읊고, 또 읊던 아리가 내 등을 찰싹 내리쳤다.
"야이 기집애야."
"아, 아퍼.."
"지금 그 아픈게 문제야?"
"뭐가 문제란 거야?"
금방 맞았던 곳이 잠시 후에야 아른 거려왔다.
열점이 그 부위에만 정확하게 모아져 있는 듯 한 없이 뜨거워져옴을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날 보며 못마땅한 눈초릴 보내는 그녀.
"왜?"
"왜라고? 뭐가 문제냐고? 너. 음악선배랑 대체 무슨 사이야.?"
"음악선배랑..? 무슨 사이냐니?"
"이런 쪽지까지 주고 받을 사이가 어떻게 되냔 말이야.!!여자 후배들한텐 잘해줘도 이렇게 잘해
준 적은 없었단 말이야.!!!!-0-^!!"
아리의 목소리가 내 귀를 따갑게 울렸다.
...그런 아리의 말에, 이런 상황에서도 음악선배에게 있어서 내가 조금은 더 특별하다는 말에 잠
시 미소가 띄워졌다면 난 제정신이 아닌걸까?
어느 새. 나는 아직까지 교실에 들어오지 않고 바로 땡땡이를 쳐버린 반휘령의 걱정과 하다에 대
한 분노는 봄 햇살에 눈 녹듯 말끔히 녹여버리고 말았다.
"무슨 사이냐고."
"좋은 선 후배 사이지."
"뭐? 야. 니가 무슨 연예인이냐. 좋은 선후배 사이일 뿐이예요. 좋은 오빠동생일 뿐이예요. 스캔
들 무마하려는 연예인이냐고!!"
"왜 아까부터 계속 승질이야-_-;; 아무 사이 아니래두."
조금 많이 흥분한 듯한 아리가 날 내려다 보며 고래고래 소리쳐댔다.
난 저따위 말을 제정신 아닌 아리에게 던져놓고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리의 시선을 피해 뒷문으로 향했다.
"야.!!!너 한명만 잡어.!!!!너 음악선배랑 잘되면 반휘령은 내꺼다.?!!!"
뒤에서 아리의 고함소리가 빽. 울려퍼졌다.
그렇지만..아리야. 그런 일은 절대. 하늘이 두쪽 나지 않는 한 없을 거야.
마치 지례가 뒤에서 폭파하듯 난 그녀의 그런 목소리에 더욱 걸음을 빨리했고, 종이를 한번 더
힐끔 쳐다보며. 왠지 두근 거리는 가슴을 안고 4층에 자리한 체육실로 향했다.
비록, 하다와 함께 밥을 먹기로 했었지만, 오늘은 그냥 너도 한번 외면을 당해보려무나.
매우 못된 생각을 하며 난 빠른 걸음으로 체육실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내가 생각해도 믿기 어려울 만큼 빨리 도착한 체육실이 내 눈 앞에 드러났다.
"후아..."
한번 숨을 들이쉬고 약간 열려있는 체육실 문을 몸으로 밀었다.
내가 발을 딛자 뿌연 먼지들이 허공을 두리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먼지가 바닥에 내려 앉은 것인지 뿌옇게 내 시아를 흐리고 있던 모든 것이
맑아지면서 확연한 물체의 윤곽이 드러났다.
말이 체육실이지, 체육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더 지저분한
광경이었다.
왜 이런곳에서 선배가 날 보자고 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둘러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선배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고 계시려나..?"
한발 발을 떼었다. 발을 떼자마자, 내가 있던 바닥에선 옅게 먼지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렇게 바닥에 차분히 가라앉은 먼지들을 한번 더 헤집으며 난 뜀틀 위에 걸터앉았다.
역시나 뜀틀 위에도 먼지가 일렁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정말...한마디로 말해서 먼지 왕국이었다. 다시 한번 왜 이곳에서 굳이 만나자고 하신 건지 궁금
해왔다.
설마 잊으신 건지.. 저번에 선배가 직접 찍은 전화번호로 연락을 하려 호주머니에서 폰을 집어
들었을 때. 제법 가까운 곳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플립을 열던 손을 멈추고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면 반가운 선배의 모습이 드러
나겠지... 왜 부른 걸까? 궁금함에 궁금함은 더해지고 있었다.
끼잉...-
문이 살며시 열어지고, 또 다시 크게 일렁이는 먼지들 때문에 내 눈엔 그저 검은 교복의 형태만
이 보일 뿐이었다.
"..선배?"
뜀틀에 걸터있던 엉덩이를 떼며 폴짝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문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검은 교복 몇개가 내 시아에 더 들어찼다.
그리고 모든 먼지가 가라앉고,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때..
"야!! 저 기집애 손에 있는 폰 뺏어!!!"
<38>
"놔.!!!!!놓으라구!!!!"
"이년 꽉 잡아라. 오도가도 못하게."
"놔!!"
내 거센 발길질에 의해 이 곳은 또한번 먼지들이 허공에서 흩날려대었다.
희뿌연 먼지들에 가려 그 형태만 얼추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인 곳에서 지금 난. 전혀 모르는 사람
들을 몇 상대하고 있는 셈이었다.
두 손목이 각각 하나씩 남자아이 둘 에게 잡힌 채로, 그것을 빼내고자 악을 내질러 대었다.
"이 년 존나 시끄럽네. 야. 입도 막아."
"입을 어떻게 막아. 손이라도 깨물면 어쩌려고..."
"아오. 이새끼 존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내 팔목을 붙들고 있는 남자를 향해 빽 소리를 내지르는 남자 하나.
아직 선명히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본 듯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한참 동안의 발버둥 질과 목놓아 소리쳐 대는 통에 모든 힘을 다 빼 낸 뒤 지친 숨을 골라대었다.
난 증오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실루엣만을 간간히 비추고 있는 그를 노려보았다.
"..놔..제발..놔...."
힘 없는 목소리를 연거푸 뱉어내었다. 부탁에 부탁을 거듭하는 나의 매마른 목소리에도 그들은
꿈쩍 않았다. 그저 내 손목을 더 힘주어 비틀어 댈 뿐.
그러는 새. 짙게 깔려있던 안개가 밝은 아침을 맞이한 듯 개어지면..먼지들이 모두 제자리에 돌
아 가면.. 내 눈을 가리고 있던 희미한 얇은 막이 걷히는 듯 싶으면..
"안녕. 음악이 여자친구.^-^"
..하..
힘에 부친 실소가 터져나왔다. 간간히 실루엣만을 보이던 그의 얼굴이 내 눈에 정확히 박혔다.
내 핸드폰을 한 손에 쥐고 벵글벵글 돌려보며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 여유로운 미소라...
안면있는 모습에, 낯설지 않은 모습에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판 듯 정신이 몽롱해져오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당신..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글쎄....대체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일까.?"
"...하...정말.."
능글맞은 웃음을 띄우며 얼이 빠진 날 비웃는 엄영태.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나를 함정속으로 처 넣고 또 처 넣는 것은..
음악선배의 친구로써 단 한번 마주했던..엄영태. 아무리 뒤져봐도 별 기억없는 엄영태.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해야되는 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를 향해 내가 독기를 내 뿜은 것도
아니었으며, 상처를 준 기억 또한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남에게 상처를 준다지만, 단 한번 마주한 그에게 이런 수모를
당할 만치 잘못 한 건 없을거라 생각된다.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이야.!!!!!!!!"
내게 이런 짓을 가할 만큼 그 어떤 증오섞인 눈동자가 아닌 그를 향해 소리쳤다.
분명 그의 눈은 내가 자신에게 해를 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시켜주고 있었다.
그랬기에 내 눈빛은 더더욱 증오에 휩 싸일 수 밖에 없었다.
"야. 잘 잡아.!!절대 못 풀게!!"
"힘들어 뒤지겠다.새끼야!!"
"좀만 더 기다려 봐."
"유란이가 하라는 대로 얼렁 하고 끝내. 존나 돈 땜에 이게 무슨 쌩 고생이냐."
엄영태와 내 손목을 아주 비틀어지게 쥐어 잡고 있는 한 남자의 주고 받는 대화였다.
힘을 뺀 채 엄영태만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나는 그들의 대화에..눈을 질끈 감았다.
내 손목에 가해지는 그들의 힘이 쎄졌다가 다시 약해졌다가..두세번 반복되고 있다는 걸 느끼며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서유란..?.."
매마른 입술을 삐집고 건조하디 건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몇번이고 들어본 그 익숙한 이름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내뱉어졌다.
서유란이란 이름을 내가 내뱉음과 동시에 어깨를 움찔 거리며 한발짝 몸을 뒤로하는 엄영태였
다. 아마 그녀는 익명으로 날 괴롭히고자 했을 테다.
"야야. 음악이 여자친구야..?"
"....."
"웬만하면 평소에 다른 사람한테 해될 짓을 하지 말지 그랬냐..응? 피해같은 거 주지 않으면, 원
망도 안 살거 아냐."
비꼬는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정말 치솟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더 이상 난 저항하지 않았다. 목 놓아 부르짓지도 않았다.
그저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상황을..그리고 정말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엄영태의 얼굴을 말 없이
직시할 뿐이었다.
그는 내 눈을 한번 바라보고는 표정을 확. 굳힌 채로 한걸음 한걸음. 내게로 가까워졌다.
"나도 여자 하나 데리고 셋이서 이러는 거 존나 쪽팔려..이 얼마나 치사한 방법이냐. 여자 하나 묶
어 놓고 남자 셋이서 이 지랄 하는게..그렇잖아?"
그의 웃음으로 인해 누런 치아 몇개가 드러났다. 숨 소리마저 들릴 듯한 그 거리에서 난 그의 얼
굴에 침을 한가득 뱉어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게 평소에 잘했으면 우리도 돈 땜에 이딴 일에 안 휘말리잖아..제기랄."
"웃기지마. 니들은 쓰레기야.인간이 절대 될 수 없는 쓰레기..."
"뭐?"
"그따위 돈 몇푼 때문에..이런 짓 따윌 한다는 건 쓰레기라 가능한거야. 니넨 쓰레기일 뿐이야. 세
상에서 말끔히 사라져야..."
짝.
독하게 내뱉던 건조한 목소리가 끊기며, 강한 마찰음이 높게 울렸다.
중학교때 여자아이들에게 제법 맞아보던 뺨이었지만, 남자의 손이라 그런지 얼얼한 기분에 멍해
질 정도로 아파왔다.
"피식.. 그래.찔리기는 한가봐?정곡을 찔렀나보네.."
잘못 맞았는지, 입안이 터져 피가 입에 고여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린내 나는 피맛이 입안을
온통 감돌고 있으면 절로 인상이 써지는 게 당연했다.
입에 가득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낸 채 엄영태를 바라보았다. 내 입에서 쏟아져 나와 매트를 적
신 피를 가만히 보던 엄영태가 고개를 들어올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계속 떠들어대라.계속...성질만 돋궈라..썅아."
엄영태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를 난 직시하고 있었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하나도 무서우면 안됐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듯한 그를 보면서도 나는
고개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 내 모습에 내 손목을 잡고 있던 두 사람이 움찔 거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독하다고 욕 하겠지..징그럽다고 욕 하겠지..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쓰레기들일 뿐이었다.
"서유란이 무슨 짓을 하라고 시켰는지는 몰라도..."
"너 괴롭히는 짓^-^"
금새 엄영태의 굳은 표정이 풀렸다. 그러나 그는 많이 화가난 상태였다.
"...그 딴거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니들 멋대로 해. 다만 내 목숨이 끊기지 않는 이상 난 끝까지
니들 붙잡고 안놔줄거야. 알아?"
"오우..소름끼쳐....그치만.우리도 무척이나 돈이 필요했을 뿐이란다.그러니까 너무 원망하지 마
려무나."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러나 입술을 꽉 깨물어야했다. 나는 이런 일 따위에 흔들리지 않
는다고, 이딴 일에 상처받지 않는다고..그럴 정도로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엄영태는 점점 내 곁으로 다가왔다.
눈을 질끈 감는 것 또한 약하게만 보일까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아..그러게....음악이한테만 있지, 왜 서유란이 침발라놓은 반휘령을 건드리냐..그 건방진 후배
새끼를..."
엄영태는 나를 내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사진기. 엄영태가 날 표독스럽게 노려보고는 호주머
니에서 꺼내든 건 사진기였다.
하하...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서유란..정말 유치하고 더러운 인간이야. 더러운 인간.
손가락하나 까딱이지 않고, 고개조차 숙이지 않은 채로 난 여전히도 그를 노려보았다.
엄영태는 살며시 떨리는 손을 내 교복 마이에 얹었다. 더러운 진딧물이 내 몸을 기어다니고 있는
듯한 소름끼치는 기분이 들었지만 난 끝까지 그를 노려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독해..울며불며 매달려야될 상황인데...참 독하네..고아라 그런가..너 원래 이렇게 더러운 짓 막
하고 다니는 애였냐, 혹시?"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엄영태의, 그 더러운 인간의 입에서 흘러나온 고아라는 한마디에 난 또
다시 흔들렸다. 무척이나 답답했다. 될 수 있다면 증오로 가득 찬 내 마음을 가위로 잘라내어 불
에 던지고 싶었다.
그의 손이 첫번째 마이단추를 끌렀을 무렵...그 표정이 한심하게 변해가고 있을 무렵..
절정에 다다르는 수치심이 내 온몸을 미세하게 자극하고 있을 무렵.
챙강.!!!!
잠궈두었던 문 고리가 부숴지며 누군가가 문을 힘차게 열어젓혔다. 빛 줄기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던 체육실에, 형광등도 켜져 있지 않던 체육실에 한꺼번에 많은 양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야.영태야!!뒤에..!!!"
"누구야.!!"
두번째 단추에 손을 가져갔던 엄영태가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체육실에 도착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그의 등장으로 인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온 몸에 힘이 빠지는
듯 했다. 뜨고 있던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무래도 버거웠나보다. 이런 상황에서 강할 수 있다는 건..아직 내겐 불가능 했나보다. 두 손이
자유롭게 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가 없었다. 그저 난 눈을 감았다.
치고 받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을 안심하고 놓아도 될 거란 마음이 들어버려서 눈을 스르륵. 감았다. 부릅 떠야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온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난 그렇게 그 곳에서 눈을 감았다.
<39>
따뜻한 빛이 온 몸을 감싸안는 느낌에 꼭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어둠에서만 꽉꽉 막혀있
던 내 눈에 갑작스레 너무 많은 빛이 들어와서 인지, 별안간 눈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아.."
갑작스레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아까의 광경에..너무나도 어두운 그 광경에 문득 정신을 차리
고. 눈을 번쩍 떠보였다. 아까와 같은 깜깜한 어둠이 짙게 내려깔려 있으면 어떡하나..하는 본능
적인 생각은 이내 눈을 뜨는 순간 잊혀질 수 있었다.
"누리학생 일어났어.?"
검은백을 들고서 몸을 빙글돌려 나를 쳐다보는 양호선생님. 지금 이렇게 짙은 약냄새가 진동을
하는 곳은 다름아닌 학교 양호실이었다.
분명 아까 그 어둠속에 빛과 함께 등장했던 사람은 선생님이 아니었을텐데..주변을 훑어보았지
만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양호실엔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날 보던 선생님이 무얼
찾는지 눈치 챈듯.
"널 엎고 온 그 학생은 조금 있다가 다시 올라올거야."
"아..어떻게 된거예요?"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구. 내가 봤을 때 넌 이미 쓰러져있는 상태였어.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
도 생긴거야.?"
선생님의 얼굴에 옅은 호기심이 내비췄다. 난 고개를 그저 내리저었다.
"원래 빈혈기가 있어서 자주 쓰러져요."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빈혈기가 온 몸에 퍼져있는 건 사실이었으니.. 대충 둘러댄 내 말
에 선생님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시며.
"그으래?"
"...."
"하여간. 지금 난 퇴근할 시간이야. 조금 있다가 올라오면 같이 나가렴."
검은백을 팔에 걸고선 유유히 문으로 빠져나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시계로 시선이 돌아갔다. 시계가 가르키는 시간은 벌써 6시. 모든 학생들이
하교를 끝마치고 선생님들이 퇴근을 할 시간이었다.
"하아.."
작게 한숨을 쉰 뒤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했다. 멍한 머리속으로 엄영태의 징그러운 웃음소리가
삐집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조그만 머릿속을 계속해서 엄영태의 웃음소리가 울려대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별탈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물씬 들었지만, 아까 그 장면을 떠올리면
여전히 끔찍하고 또 끔찍할 뿐이었다. 서유란..엄영태..
번뜩 들어오는 생각에 난 내 옷무새로 시선을 돌리었다. 분명 아까 엄영태에 의해 풀려있던 마이
의 첫 단추가 꼼꼼하게도 잠겨있었다.
달캉.
왠지모를 안도감에 온 몸에 들어있던 긴장이 풀려버리는 순간.양호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
다. 자연스레 내 시선 역시 문으로 향했다.
"선배?"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계시는 선배.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멋쩍은듯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내가 선배의 등장에..의외의 등장에 놀란듯 선배를 가만 보고만 있으
면. 어느새 길다란 걸음으로 침대 정 중앙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내게 다가와있는 선배.
"괜찮아.?"
"네..전 괜찮아요. 그나저나..어떻게 오셨어요.?"
"점심시간에 너희반에 내려갔더니.나랑 같이 밥 먹으러 간다고 하길래. 체육실로 갔다니까 너무
이상하잖아. 그래서 달려갔더니 너 쓰러져있고..엄영태랑 그 외에 애들 있더라. 대체 이게 어떻
게 된 일이야.?"
선배의 표정 속엔 매우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나에 대한 걱정과 그에 대한 분노가 한되 뒤
섞인듯했다. 난 물끄러미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선배는 정말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든다는
듯 복잡한 눈을 한 채로 무릎위에 올려져있던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엄영태랑 무슨 연관이 되어있는거야."
"엄영태는 어떻게 됐어요.?"
징그럽게 웃고있던 그는 어떻게 됐나요. 야비하게 돈 때문에 여자 말 고스란히 듣는 그는 어떻게
됐나요.. 너무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선배에게 결국 물어봤다. 동문서답과 마찬가지인 내
질문에도 선배는 기분나쁜 내색하나 하지 않은 채 친절히도 대답해주셨다.
"학생부로 넘겼어."
"학생부요...?"
"그런 짓을 한 건 용서못하지. 학교 차원에서도.. 아마 강제전학쯤 가게될거야."
"아..그렇구나.."
"그나저나 너랑 엄영태가 도대체 무슨 사이야. 원래 아는 사이도 아니었잖아. 어떤 관계인데?"
"...."
말 할 수가 없었다.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서유란과 어떤 사이였다. 내가 서유란에게 밉게
보여서 이런 짓까지 당할 정도였다. 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가 없었다. 왠지 내가 더 비참하게만
느껴지는 것 같아서.. 그 뒤에서 조종하는 서유란은 상대하는 건..내가 더 비참해지는 것 같아서.
"말 하기 곤란해.?"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선배의 눈을 피한 것이었다. 이런 내 행동을 선배는 눈
치 챈듯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아무사이 아니라곤 못넘어가겠다."
"..."
"오늘은 좀 많이 심각했었어. 만약 안갔다면...후."
선배가 고개를 내리저었다. 선배의 한숨소리에 난 고개를 자연스레 푹 숙여버렸다. 또 다시 눈치
없이 흐르려고 하는 눈물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아까 그 장면이 온 머리를 휘저어 버려서 어
찌할수 없이 끔찍할 뿐이었다.
누구보다 강할거라고...혼자인 만큼 강할거라고...그따위 더러운 일에 상처받지 않는다고..
혼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결국 난 약해진 채 울고만 있는 모습이었다. 결국의 난 울고만 있
을 뿐이었다.
점점 고개가 숙여졌다. 그 순간 음악선배가 내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품에 꽉 안겨..
"더이상 안 물을게. 울지마.괜찮아..이제 다 괜찮아.."
듣고 싶었던 걸까. 괜찮다는 말을 꼭 듣고 싶었던 걸까. 선배의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듯한 목
소리에 난 연신 소리없는 눈물만을 뽑아내었다. 선배의 품에 안긴채..내 등에 얹어졌던, 그래서
날 너무나도 짓누르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만 같은 기분에 젖어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선배의 품 속에서 눈물만 뽑아내고 있었을까, 난 조용히 선배의 품에 묻고있던 얼
굴을 떼어내었다.
"다 울었어? 그러고 보면 매일 우는구나.누리는.."
매일 운다는 선배의 말에 찔끔 놀라긴 했다. 강한 사람이 되고싶다는 마음과는 달리 매번 쓸데없
이 흐르는 눈물은 바보같은 사람이 되어버리게 만들기 쉽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난 무릎위로 몸을 숙였다. 무릎에 머리를 데고선 한껏 달아오른 머리를 삭혀가고 있었다. 선배는
그런 내 등을 두번 톡톡.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봄."
선배가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파묻고있던 고개를 들어올렸을 땐.이미 선배의 손이 침대 옆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후였다. 그 틈을 타고서 밖에서 맴돌던 바람이 이곳으로 스며
들어왔다.
"봄. 정말 봄."
"바람이 따뜻하네요."
"그러게. 이제 정말 봄이 온 것 같네."
따뜻한 바람이 우리 둘 밖에 없는 이 공간에 잔뜩 머물렀다. 괜스레 아까까지만 해도 곤두서있던
신경이 한결 부드러워 지는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느낌. 선배역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잠시 곁
눈질로 본 선배의 얼굴엔 싱그러운 미소가 비춰있었다.
"그리고.."
선배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선배가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가 이내.
"이젠...나도 가슴에 겨울만 넣어두지 말고 봄을 맞아야겠다.."
"네?"
"겨울 말고 봄.."
이상하게도 쉴새 없이 두근거리는 내 심장을 꿰뚫는 듯한 선배의 목소리와 눈빛에 난 그만 입을
꾹 다물고 선배를 바라볼 뿐이었다.
"궁금하다고 했지."
"뭐.."
"그날.. 나 한테 특별한 날.너랑 꼭 함께하고싶던 날. 그게 뭔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특별한 날..."
"그거 아직도 궁금해.? 여전히도 그게 궁금해.?"
이상하다. 분명 그냥 쉬운 말인데...웬지모르게 그 말에 대해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계속 드는 건 왜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해요."
나랑 연관이 되어있다는 사실에..궁금해요.여전히도...그게 여전히도..
"그날이..그러니까..그 날이.."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을 지으시는 선배가 양호실 벽에 몸을 기대었을 때도. 내 시선이 선배가
아닌 한참 봄을 맞고있는 바깥으로 향해갔을 때도 선배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특별한 날.. 아직 의문으로 한켠에 남겨져 이젠 점점 잊혀져만 가던 그 특별한 날에 대한 이야
기가..뭔가 많이 특별할 듯만 한 그 이야기가.. 선배의 입에 의해 이어졌다.
"십년 전 막 9살이 되던 설음악이라는 꼬마아이에게 무척이나 특별한 날이였어."
"...."
"늘 무뚝뚝하고 내게 관심없는 부모님께..그 나이때는 한번쯤은 관심을 받고싶었었나봐. 그게 설
사 좋지 못한 일이더라도..관심을 꼭 한번은 받아 보고 싶었었나봐.
그 날도. 잔뜩 사고를 쳐놨지만, 돈으로 쉽게 해결해버리곤 혼 하나 내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무턱대고 집을 뛰쳐나와버렸었어. 늘 그랬듯이.늦은 밤 놀이터 그네에 혼자 앉아있었어."
부모님.. 여전히도 가슴이 쓰라리게 아려왔다. '부모님'이라는 한 단어에 가슴이 찢겨질 듯 아려
왔다. 그러나 선배의 눈이 너무나도 슬퍼보여서..여태껏 많은 눈물을 담고있듯 슬퍼보여서..
조용히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일 밖이었다. 선배의 쓸쓸한 얘기는 양호실로 차고들어오는 봄바
람에 조용히 실린 채로 이어져 갔다.
"그리고..봄을 닮은 소녀를 만났어. 지금 설음악을 이렇게 휘두르는 봄을 닮은 소녀를 처음 만났
어. 그날.."
<40> 소년과 소녀.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십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19세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음악이가 어린 9살이었을 때.
지금은 18세로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누리가 어린 8살이었을 때.
그 누가 보아도 순수하고 또 순수했던 그들의 만남이야기.
***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하늘에.
노랗게 노을이 물들었어요.♬
"오빠.!!"
쿵쾅쿵쾅. 커다란 집의 어두운 계단을 타고 급하게 내려오는 인형같은 여자아이.
어렸을 때도 무척이나 예쁜 어린 단비입니다.
오빠를 힘차게 불러대는 걸 보니, 역시나 어린 음악이를 찾고 있는 거겠죠?
"오빠아아아.>_<"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며 계단을 타고내려와 반짝거리는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폴짝 예쁘게도
착지를 한 단비는 고개를 거실 이리저리를 훑어봅니다.
다급하던 표정은 이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방긋 웃는 미만 띄우는 걸 보니 그렇게나 찾아대
던 음악이를 찾은 모양입니다.
단비는 음악이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잘 따릅니다.
음악이는 그런 단비가 귀찮기는 하지만, 부모님과 한참 놀 나이에 단비와 놀아주는 사람이 음악
이, 자신 뿐이라는 사실을 음악이 역시 경험해보았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이는 단비의 행동이 귀찮기는 하지만 꾹꾹. 오빠답게 참아주고 있는 중입니다.
무척이나 새근이 빨리 들었죠?
단비는 나비같은 걸음으로 사뿐사뿐 뛰어 쇼파에서 뒤통수만 삐쭉 보이고 있는 아이에게 조심스
럽게 다가섭니다. 그리고는 호랑이처럼 손을 뒤로 젖히고는 음악이를 놀래키기 위해 준비를 하
는데...
"장난치지마."
부드럽지만 강하고 차가운 느낌이 사뭇 베여있는 음악이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단비는 놀랬습니다. 어떻게 뒤에 서있는 자신을 보지 않고도 자신이 할 행동을 알고 있는 건지
너무 궁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금새 김이 잔뜩 새어나간 얼굴과 아까와는 사뭇 다른 무거운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
어 쇼파 앞으로 향하는 단비.
음악이는 살금살금 기어나오는 듯한 단비를 뚱 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치사해.뒤에도 눈이 달린것처럼 굴고..- 0-..."
"...."
귀엽게 입술을 삐죽내밀고 단비가 중얼거립니다.
그러나 음악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자신도 음악이를 마주보는 쇼파에 털썩 주저앉아 버립니
다.
이야기 할 거리가 있나..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단비는 이내.
"엄마랑 아빠는 어디갔어.?"
"뭐?"
"엄마랑 아빠. 어디갔냐구."
매일 집에 없는 엄마, 아빠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동생이 자신에게 엄마 아빠의 행방을
묻는 게 너무나도 새삼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단비가 자신과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다는 건 까마득히 모른채로요..
"어디갔어?"
가끔은 대답을 않고 있으면 자연적으로 잊혀지는 질문도 있건만, 단비는 이번 만큼은 양보하고
싶지가 않은 가봐요.
음악이 역시 쉽게 대답을 해 줄수 있는 것이었지만..이번 만큼은 자신도 양보를 할 수가 없었답
니다. 왜냐고요?
지금 음악이네 부모님 두분은 음악이의 학교에 갔거든요.. 물론, 좋은일로 학교를 찾아뵌건 아니
지만요.
"몰라."
그래도 음악이는 오빠랍니다.
동생인 단비에게 나쁜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은거겠죠. 음악이는 연신 도리질을 합니다.
그러나 단비는 그런 음악이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단비가 생각하는 오빠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멋진 사람이었으니까요.
"왜 몰라.? 응?왜?"
시큰둥한 표정으로 꺼져있는 TV를 응시하는 음악이에게 얼굴을 가져가며 귀엽게 물어보는 단비
그때였습니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고, 도저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치 온기라곤 찾아 볼
수 없던 집에 봄 바람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다녀오셨어요, 사모님."
부엌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물이 묻은 손을 앞치마에 훔치며 거실로 반갑게 달려나왔습니다.
현관에 멈춰서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아주머니.
그렇습니다. 음악이네 학교엘 다녀오신 음악이의 어머니께서 집에 돌아오신 것입니다.
그녀는 아주머니의 반가운 음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으로 쓱. 들어가버렸습니다.
매우 다르죠.?
여러분이 아시는 모든 가정들과 매우 다르죠.?
보통 어머니께서 집에 들어오시면, 반가웁게 달려나가는 아이들인데 단비와 음악이는 엄마를 쳐
다보지 조차 않습니다.
게다가 안좋은 일로 찾아간 음악이네 학교였을 텐데, 분명 부질없는 목소리를 듣고 왔을 텐데 기
분 나쁜 내색은 하나 없이 여느때와 같이 무표정한 어머니의 얼굴이었습니다.
"엄마 오늘 오빠네 학교 갔어?"
"어?"
"엄마 표정이 이상해.."
쇼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단비가 심드렁히 말했습니다.
분명 단비도 어머니가 집에 들어왔을 때. 꺼져있던 TV만을 응시했었는데 어떻게 엄마의 얼굴을
본 것일까요.?
게다가.. 어느누가 봐도 알아보지 못할 그 무표정을 어떻게 읽어낸 것일까요?
"꼬맹이는 신경쓰지마."
음악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많이 뾰로통한 표정이었습니다.
쇼파에 앉아있던 단비 역시 원망스런 표정으로 오빠를 올려다봅니다.
겨우 두살밖에 차이 안 나는걸 가지고서 너무나도 오빠 행새를 하려드는 게 꼴뵈기가 싫을 뿐입
니다.
단비는 삐진 대로 쇼파에 엎드렸습니다. 음악이는 그런 단비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방금전 무
표정하던 자신의 어머니가 들어간 방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똑똑..
노크를 두번 하고는 아무 대답없는 방을 가만 노려보다가 이내 벌컥. 문을 열어 젖히는 음악이.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지우고 있던 음악이네 어머니께선 예상대로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나 딱 세대만 때렸어요."
"그래.."
"저번에..제가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그랬었어요."
"그래."
"걔는 잘못한거 한개도 없는데 제가 그냥 때렸어요."
이젠 '그래'라던 그 한마디조차 음악이에게서 사라졌습니다.
어머니께선 그저 화장을 지우는 데에만 열중하고 계셨습니다.
음악이의 표정이 많이 구겨졌어요. 다른 엄마들은 자식이 잘못을 하면 화도 내고, 때리기도 하는
데 매일 똑같은 표정으로 대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음악이의 눈에는 너무나도 얄밉게 보였나봐요
"제가 잘못 했다구요.."
"용돈 다 떨어졌니?"
"..."
"얼마가 필요해? 어릴 때 부터 돈 너무 함부러 쓰면 안된다. 아껴쓰는 버릇을 해야지.."
화장을 지우던 손길을 멈추고 옆에 놓여있던 지갑에서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는 음악이의
어머니.
음악이는 그런 자신의 어머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결국 9살이라는 나이에는 너무나도 많은 액수인 만원짜리 몇 장을 음악이에 쥐어주며 음악이에
게서 시선을 떼어버릴테죠.
음악이는 그러기가 싫었습니다.
혼이던, 화던 좋지 못한 것이란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머니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받고 싶
었던 음악이는 지폐를 다 꺼내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고는 방에서 휙 나
와버렸습니다.
"오빠."
"..."
"오빠. 어디가.?!!"
귀를 막고서 단비가 부르는 소리는 어느 한개 듣지도 않은 채로 음악이는 현관을 뛰쳐나가.. 대
문을 뛰쳐나가.. 자신의 집과 꽤 먼 동네의 놀이터까지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장작 20여분 동안 달려 도착한 놀이터.
밤의 기운이 내려앉은 시간이라 그런지 낮엔 북작북작 거리는 놀이터도 한산할 따름이었습니다.
"후.!!!"
음악이는 하늘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직은 어린 아이임이 분명하건만, 어디서 이런 걸 배운건지.. 음악이의 모습은 쓸쓸하기만 합니
다.
집이 아닌 다른 자리에선 누구보다도 온화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부모님께 칭찬을 한번 들어
보고 싶던 음악이였습니다.
그래서 미술공부도 열심히하고, 음악공부도 열심히하고, 싫어하던 체육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피아노 콩클때 나가서 대상을 받았을 때에도 시에서 뽑는 어린이 미술대회에서
금상을 받았을 때에도 잘했다는 칭찬 한마디도, 그 흔한 미소조차 지어주시질 않으셨습니다.
그때부터였을거예요. 음악이가 삐뚤어지기 시작한것은..
착한 아들이 되는 것 보다, 모든 잘 하는 아들이 되는 것보다..차라리 나쁜 아이가 되어서 꾸지람
을 듣고싶다고 생각한 음악이였어요.
그래서 친구들도 괴롭히고..사고도 많이 치고..하라는 것과는 정 반대로 행동했어요..
그렇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답니다.
부모님은 음악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어요. 그저 돈으로 모두 해결해버리는 음악이네 부모님은
음악이에게 화 한톨 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밝게 웃으세요."
그네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음악이의 귓가에 조그맣게 울려오던 목소리였습니다.
'밝게 웃으세요..'
음악이는 언뜻 놀란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았어요.
이내 음악이의 눈에는 얼굴이 하얗고 무척이나 여려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손에 노란 장미꽃
을 하나 쥐고 있는 게 가득 들어찼습니다.
"한숨 쉬지 말구 예쁘게 웃으세요. 자, 이건 선물이예요."
무척이나 순수하고 맑은...마치 이슬같은 눈을 가진 어린 누리가 음악이를 향해 성큼성큼 발을
내딛고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노란 장미꽃을 건냅니다.
얼떨결에 노란 장미꽃을 받아든 음악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누리를 바라봅니다.
"날 알아.?"
음악이가 물었습니다. 몽롱한 표정이었어요.
처음으로 받아보는 정원에서 멋대로 그냥 꺾었을 장미 한송이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들어보는
웃으라는 예쁜 목소리. 자신을 향해 내밀어주는 조그만 손.
이 모든게 처음이라...음악이는 지금 마음을 정리할 수 없이 복잡했습니다.
음악이는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누리는 조용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
습니다.
"온누리예요."
"응?"
"지금부터 아는 사이^-^"
누리가 빙긋 웃었습니다. 음악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아이의 순수한 미소에 절로 같은 미소가 띄
워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누리는 음악이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요.
"바이바이."
아는 사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자신의 이름을 석자를 남기고...안녕이란 인사를 남기고..
빙 돌아 서버리는 누리였어요.
음악이는 누리를 잡고싶었어요. 누리와 친구가 되고 싶은 음악이었어요.
작은 걸음으로 앞서 걸어가는 누리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음악이는 누리를 향해 내달렸어요
"잠시만!!!"
"...?"
누리가 멈춰서 음악이를 향해 고개를 갸웃 거립니다.
그러면 꼬마 음악이는..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쑥스러
운 미소를 지으며.
"나랑 같이 놀자."
풋..하고 웃으실지도 몰라요. 쑥스럽게..무척이나 뜸을 들여 내뱉은 말이 고작 그거라며..
지금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시는 분 중 한분은 웃으실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음악이의 나이가 9살.
아직은 꼬맹이죠? 예쁘게 봐주셔야죠. 순수한 눈으로..!!
선뜻 고개를 끄덕일 것만 같은 착한 얼굴을 한 누리가 고개를 도리질 했습니다.
음악이의 두 동공이 커져버렸어요. 앗. 처음으로 거절을 당하는 것 같네요..
"왜.? 왜 나랑 놀기 싫어?"
"당신이 멋있어 지면 같이 놀거예요."
"....멋있어지면.?"
"난 우는 사람 싫어. 눈물이 많은 사람 싫어."
누리가 또박또박 말했어요. 그리고는 다시 빙글 돌아섰어요.
이번에는 음악이도 누리를 잡을 수가 없었어요. 뛰어 갈 수가 없었어요.
대신 뒤에서 손을 꽉 잡고는 소리쳤습니다.
"내가 멋진 사람이 되면 놀아줄거지?!!!!!"
"..."
"꼭.꼭!!멋진 사람이 되서 니 앞에 짜잔.하고 나타날게.!!!!"
음악이가 뒤에서 소리쳤지만 작은 소녀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더니 점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난생처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아이를 생각하며. 음악이는 그 자리에서 멋진 사람이 되리라
다짐했어요.
그 후. 말썽피우던 것도 모두 멈추고 항상 옷도 단정하게 입고.. 그 놀이터를 매일 찾아갔지만..
소녀를 볼 수가 없었답니다.
어린 음악이의 마음에 담겨져 있는 노란 장미꽃의 첫사랑.
그렇게 음악이의 마음이 그녀를 덮고..또 덮어서 점점 그녀는 음악이에게서 작아져갔어요.
"....멋진 사람이 되서 나타날게....."
- 꼬마 누리와 꼬마 음악이의 첫 만남. 장미꽃 첫사랑.-
***
약 10년 후.
십년이 흐른 지금도 저는 음악이의 곁에서 머무는 바람입니다.
음악이 이야기가 궁금하시다구요.?
곧고 바르게 자라겠다던 음악이는 말썽을 피우며 '문제아'라는 소리를 듣고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고있답니다. 물론 모범적이지 않지만 말이죠.
그리고 오늘은 음악이가 2학년이 되는 날. 그리고....
"죄송합니다.!!!죄송해요!!!"
교문으로 쌩. 하고 달려들어오던 여자아이와 음악이가 부딫혔습니다.
음악이는 샛노란 머리를 한 채로 인상을 마구 찌푸렸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부딫혀 고개를 연신
숙여대는 여자아이를 향해.
"요즘 신입생들은 죄다 이모양이냐. 어찌된게.."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입학식 시작한다, 신입생. 학교생활 조용히 해야 돼.^-^"
방긋 미소지은 음악이였지만, 못된 음악이일 뿐입니다.
이 녀석의 미소는 지금 썩어들어가고 있어요. 못된 웃음. 훗..(-_-;;;)
그리고 음악이에게 고개를 숙였던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어올리고 다시한번 고개를 꾸벅이다가
강당으로 불이나케 달려갔습니다.
"뭐 저런 애가 다있어.."
혼자 중얼거리던 음악이의 눈에 이내 들어오는 노란 명찰 한개.
왠지 노란 색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는 음악이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고 자리에 다리
를 구부리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주워든 명찰에 또박또박 새겨진 이름 석자.
' 온. 누. 리. '
오늘은 음악이가 2학년이 되는 날. 그리고...
음악이의 가슴 속 깊숙이 묻어두었던 첫사랑이 싹을 틔우는 날..
- 바람이 전해주는 음악이의 이야기.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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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또와-유나연재
[연애소설연재]
※나 너에게 길들여지다※ [31화]~[40화]
아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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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16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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