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밤의소묘, 29×40㎝, 종이에 먹과채색, 2019
■ 파리
환쟁이·글쟁이·풍각쟁이…
겉은 화려, 속으로 우는 존재들
밤이면 모여 호사한 시간 연출
그저 자기 위로의 몸짓들일 뿐
미술시장 뉴욕으로 이동하고
트렌드가 속속 바뀌어 가도
美에 관한 한 여전히 오늘의 도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슬픈 위안. 정작 그것을 만들어 내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질 때 그 손짓이며 숨소리도 함께 멎는 것임을 오직 자신만이 안다. 그러니 예술이고 인생이고 간에 무자비한 시간 속에 속절없이 지고 안타깝게 가는 것임은 매한가지다. 주인이 떠나가고 물질로서의 예술품들만이 동그마니 남겨진들 그것에 체온과 호흡을 불어넣었던 자가 사라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겨진 예술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그걸 만든 자들은 대체로 저 홀로 우는 자들이다. 상처와 눈물, 고독과 고통을 비벼 넣어 꽃으로 토해내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그 빛이 선홍빛으로 타오를수록 상처도 깊고 외로움도 절절하다고 보면 대충 맞겠다.
물론 이제는 다르다. 한 가객(歌客)이 내뱉었듯 “이 빌어먹을 놈의 현대미술”도 이제는 불친절하고 폭력적일수록 매력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모든 예술가치는 재빨리 금융가치로 환산된다. 따라서 소위 성공한 예술가들에게는 외로울 새가 없다. 더 이상 ‘고독’이 잘 안 된다. 가장 큰 변화는 ‘예술과 그것이 아닌 것’의 경계마저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은 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하면 되는 그 무엇이 돼 있다.
파리라는 도시. 가끔 검붉은 석류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핏빛 껍질 속에 보이는 말간 연분홍 씨들. 어둠이 오면 일제히 불을 켜서 호사한 시간을 연출하지만 화려하고 견고한 그 외피 속에는 올망졸망 여리고 외로운 석류알 같은 존재들이 모여있다. 사람들이 일러 예술가라고 부르는 온갖 ‘쟁이’들… 환쟁이, 글쟁이, 풍각쟁이 그리고 광대들. 겉으로 화려하고 속으로 우는 자들이 이 화려한 도성의 한 모퉁이에 모여서들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누군가를 위해 언어와 색채, 악보를 만드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결같은 자기 위로의 몸짓들일 뿐이다. 외로워서 하는 짓거리들일 뿐인 것이다. 언젠가 파리의 한 화랑에서 스무 살 넘어 파리로 유학 왔다가 귀밑머리 희끗해질 때까지 40여 년간이나 눌러앉은 화가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이 도시의 무엇이 잡아끌길래 삶의 종장(終場)에 이르기까지 돌아가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소매 끝을 잡는 사람은 없다. 이 도시에서도 춥고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지만 누군가 알아주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머물러 있게 된다.’ 누군가 알아주는 것 같은 그 느낌…. 그것이야말로 생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허다한 예술가들이란 그런 환상과 착시의 느낌 속에서 사는 존재들이 아닌가 싶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의 눈짓과 신호로 모여드는 곳, 그곳이 파리다.
곧 105세가 되는 화가 김병기 선생과 우연히 30여 년 전 파리의 한 호텔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낙엽이 날리는 거리를 코트 깃을 올리고 걸으며 선생은 옛날을 회상했다. ‘나는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살고 파리에선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는데 어디에 있든 미국보다 이 도시가 더 그립게 떠올려지곤 해요. 그것이 바로 파리의 매력입니다.’ 파리에 갈 때마다 그 어른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도대체 농업국가 프랑스는 어떻게 ‘아름다움’으로 제국의 신화를 새로 쓰게 되었을까. ‘칼’로, ‘화폐’로, ‘땅으로’ 제국의 역사를 썼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그들은 어떻게 ‘붓과 팔레트’로 제국을 일으키게 되었을까. 그리고 다른 모든 제국의 역사가 허물어져 갔는데도 어째서 이 ‘미(美)’의 제국만은 아직도 그 불길이 요요하게 타오르고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바다에 무역선을 띄우지 않고도 가만히 앉아 ‘아름다움’으로 부(富)를 쌓아 올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을까. ‘고상한 취향’이 장차 굴뚝 없는 산업이 되리라는 것을 어떻게 간파했을까. 또한 어떻게 ‘파리 만국 박람회’를 열어 신기술이 아닌, ‘새로운 도시’와 ‘새로운 미술’을 선보일 전략을 세웠으며 어떻게 그것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질 줄 알았을까. 그리하여 고전과 미(美)의 바다인 이탈리아를 제치고 자신들의 땅에 근대 이후 사라져가던 ‘아름다움’의 새로운 제국신화를 낳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이제 미술시장도 거대 자본의 흐름을 따라 뉴욕으로 옮겨갔다. 미의 트렌드 또한 속속 바뀌어 간다. 어제 ‘아름다운 것들’은 오늘 아름답지 않게 된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것은 ‘어제의 도시’였던 그 파리는 아직도 아름다움의 왕좌를 지키고 있고 미에 관한 한 여전히 ‘오늘의 도시’라는 점이다. 영등포보다도 작은 파리의 그곳에는 400개가 넘는 갤러리들이 포진하고 있다. 실로 불가사의다. 그 도시에서만은 아직 ‘비싸면 좋은 것’이라는 우리 시대의 천박한 상업 논리에 고개를 젓는 그들만의 철학 같은 것이 또한 있다. 물론 이것이 파리의 매력이고 말고다. 자본만으로 거래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곳에는 있다. 변치 않는 미의 에스프리 같은 것. 시와 음악, 영화와 미술이 함께 어우러져 난만하게 꽃피우며 이루어지는 에너지가 있다. 나는 ‘역마’를 넘어 쌍마의 기질을 타고난 사내.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다 보면 그야말로 인생 자체가 노마드임을 절감하게 된다. 그런데 다녀도 다녀도 파리에 대해선 아직 배고프다. 돌아서면 다시 그곳이 그리워진다. 이게 대체 웬 매직일까 싶다. 허다한 이방인들이 나처럼 아름다움에 허기져 포충망에 걸려 파닥이는 나비 신세인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이들을 잡아끄는 것일까. 덧없이 가는 인생의 시간 속에서 그나마 머물러 서서 바라볼 수 있는, 그 어떤 것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이 ‘예술’ 혹은 ‘예술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 말이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음산한 중세도시’서 ‘근대미술 수도’로 탈바꿈
파리는 본래 좁은 골목들의 중세형 도시였다. 하수체계가 원활하지 않아 내다 버린 쓰레기와 오물로 센강은 악취가 진동할 정도였고 한 번씩 전염병이 창궐하곤 했다. 그 도시에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이가 19세기 중엽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과 그의 고문관이었던 오스만 남작(Baron Georges-Eugene Haussmann, 1809∼1891)이었다. 황제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오스만은 도로에 가스등을 세우고 길을 확장해 음산한 거리를 밝게 했으며 여성들도 밤에 산책할 수 있도록 했다. 다양한 편의 시설을 설치해 파리를 개조했으며 직선 대로들을 남북으로 연결했다. 그 결과, 대혁명 즈음에 인구 50만 명에 불과했던 도시는 60여 년 후 그 열 배 가깝게 불어나게 된다. 개선문 주변으로 방사형의 12개 대로가 뻗어가도록 했으며, 그 도로들이 주변 인접 도시들과 연결되도록 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와 함께 문학과 철학, 건축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술 도시로서의 명성을 갖추게 됐다. 조토, 루벤스, 렘브란트, 푸생과 바토, 앵그르와 코로, 밀레, 쿠르베 등의 미술가들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와 입체파로 연결되면서 그곳을 근대미술의 수도로서 떠오르게 했고 철학과 문학이 견고하게 그 뒷받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