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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4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윤석열 대통령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정상회담
2022년 경북 봉화 광산 매몰 사고로 광부 2명이 고립된지 10일 만에 무사히 구조
10월26일 오후 6시쯤 경북 봉화군 소천면 서천리의 아연광산 지하에서 광부 7명이 갱도 레일작업을 하던 중 제1수직갱도 하부 46m 지점에서 갑자기 밀려든 토사가 갱도 아래로 쏟아지면서 50대와 60대 광부 2명이 고립됐다.
경북소방본부는 구조작업을 벌려 11월4일 오후 11시3분 광산 매몰사고로 고립됐던 광부 2명을 지하갱도 295m지점에서 구조했다 사고 발생 221시간 만이다.
고립된 동안 이들은 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을 치고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견디고 작업할 때 가져간 커피믹스와 떨어지는 물방울을 마시며 장장 열흘 견딘 바람에 걸어서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양호한 건강 상태였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지하에 갇혀 있어서 갱도를 벗어날 때는 시력 보호를 위해 들것에 실려 눈을 가린채 안동병원으로 이송됐다.
2021년 제주 서귀포 해상에서 낚시로 무게 31kg, 길이 118cm의 대형 다금바리 잡아
2015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프랑스 최고 훈장 받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4일 한국·프랑스 간 경제와 문화·예술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Légion d'honneur Grand Officier)를 받았다.
2000년부터 ‘한·불 최고경영자클럽’ 한국 측 위원장을 맡아온 조 회장은 2013년부터는 ‘한·불 상호 교류의 해’ 한국 측 조직위원장도 맡아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해왔다. 방한(訪韓) 일정에 맞춰 서울에서 훈장을 직접 수여한 올랑드 대통령은 “한·프랑스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한 조양호 회장에 대한 감사 인사”라며 “프랑스는 조 회장과 같은 친구를 갖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1802년 나폴레옹 1세가 제정한 프랑스 최고 훈장으로 5개 등급으로 나뉜다. 프랑스 대통령에게만 주는 그랑크루아를 제외하면 그랑도피시에가 최고 등급이다. 이 훈장을 받은 한국인은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자가 유일했다. 조 회장의 이날 수훈으로 부자(父子)가 프랑스 최고 훈장을 받게 됐다.
2015년 아프리카 수단에서 항공기 이륙 직후 추락 40여명이 사망
2015년 국내 최초의 돔 구장 고척스카이돔 개장
2010년 세계 최고령 114세 블랑샤르 수녀 별세
세계 최고령자인 프랑스의 외제니 블랑샤르 수녀가 114세를 일기로 2010년 11월 4일 카리브해의 생마르텔레미섬 병원에서 별세했다.
1896년 2월 16일 생마르텔레미에서 태어난 그는 네덜란드령 쿠라사오에서 수녀로 활동하다가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고양이를 키우며 30여년을 지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생전 별명이 '스위트(Sweets)'일 정도로 사람들에게 친절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 5월 일본의 카마 치넨 할머니가 115세 생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나면서 세계 최고령자가 됐다. 샌본의 가족들은 "우리 할머니는 실제로는 공식기록보다 한 해 전인 1895년에 태어나 올해 이미 115세"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9년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별세
2009년 11월 4일 오전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72·현 성지건설 회장)이 숨졌다.
박 전 회장은 이날 오전 자택에서 스스로 목을 맸으며, 서울대병원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숨진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회장은 지난 2005년 이른바 ‘형제의 난’ 이후 두산그룹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 동생인 박용성 회장과 그룹 경영권 문제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회사 비자금 조성 사실을 폭로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2008년 2월 시공능력 50위권인 성지건설을 인수해 재기를 꾀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건설경기가 침체돼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 당선
2005년 `은방울 자매` 박애경씨 별세
‘마포종점’, ‘삼천포 아가씨’ 등의 노래로 유명한 ‘은방울 자매’의 박애경(68·본명 박세말)씨가 지병인 위암으로 4일 별세했다.
박씨는 올해 1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이후 투병생활을 해오다 이날 오후 11시쯤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서 사망했다. 빈소는 서울 반포동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오전 8시며 장지는 경기도 안성시 우성공원묘지다. 유족으로는 남편 권혁두씨와 2남이 있다.
1956년 가요계에 데뷔해 은방울 자매로 활동한 박씨는 ‘마포종점’, ‘못잊을 그리움’, ‘무정한 그 사람’ 등 다수의 히트곡을 남긴 원로 가수다
2002년 국내 감자칩서 발암물질 검출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시판 중인 감자칩·감자튀김 등 기름에 튀긴 식품에서 발암 의심 물질인 아크릴아마이드가 검출됐다는 발표가 나와 이 음식을 즐겨 먹는 어린이들의 주의를 요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감자칩과 감자튀김(프렌치프라이) 제품 4종을 조사한 결과, 외국과 비슷하거나 낮은 농도의 아크릴아마이드가 검출됐다고 4일 공식 발표했다. 식약청은 그러나 이번에 검출된 아크릴아마이드의 농도가 즉시 건강에 피해를 나타낼 수준은 아니라고 밝혔다.
식약청 발표에 따르면, 국내 시판 감자칩에 함유된 아크릴아마이드는 900~1700ppb, 감자튀김의 경우 300~1600ppb였다.
아크릴아마이드는 12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음식을 튀길 때 생기는 무색 투명한 화학 물질. 동물 실험에서 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인체에도 암을 일으키는지 여부는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아 ‘발암 의심 물질’로 분류돼 있다.
지난 주 일본 언론은 일본에서 시판 중인 프렌치프라이와 감자칩에서 아크릴아마이드가 검출됐다는 조사 결과를 보도한 바 있다. 또, 지난 4월 이후 스웨덴·영국·미국 등에서도 튀긴 식품에서 아크릴아마이드가 검출됐다는 발표가 잇따랐다.
1999년 이영욱 연구팀, 은하계 형성에 관한 논문 네이처지에 발표
은하계의 형성원리를 규명할 수 있는 획기적인 논문을 우리나라 연구팀이 발표했다. 연세대 우주망원경연구단 이영욱 교수 등 5명으로 구성된 연구팀은 1999년 11월 4일 "지금까지 오래된 별들의 집합체로만 알려진 `오메가 센타우리`(Omega Centauri)가 100억년 전 태양계가 포함된 `우리 은하`와 충돌해 파괴된 위성은하임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이번 자료분석 과정과 연구 결과를 정리한 논문이 세계 최고의 과학전문지인 `네이처(Nature)`지 1999년 11월 4일자에 게재됐다. 네이처지는 이 교수의 논문이 기존 은하형성 이론을 뒤집을 획기적인 결과로 높이 평가했다. 또한 이 교수팀은 이 논문을 통해 `오메가 센타우리`가 `우리 은하`와 1만5000광년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장 가까운 은하라는 사실도 입증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은하 중 우리 은하와 가장 가까운 은하는 1994년 영국의 천체물리학자들이 발견한 `궁수자리 난쟁이 은하`로 7만8000광년 떨어져 있다.
지금까지 은하의 형성기원에 관해서는 하나의 가스층이 중력의 수축작용에 따라 은하를 형성한다는 기존 이론과 소규모 은하 여러 개가 충돌과 합병함으로써 이뤄진다는 새로운 이론이 팽팽히 맞서 왔다.
1997년 국민신당, 이인제 전경기지사를 대통령선거 후보로 결정
1995년 노태우 구속과 92년 대선자금 공개, 5.18특별법제정 제6차 국민대회 열림
1995년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 질 들뢰즈 자살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질 들뢰즈(70)가 1995년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자살했다. 들뢰즈의 갑작스런 자살 소식은 ‘들뢰즈붐’이 일기 시작하던 시점이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1925년 파리의 보수적인 가정에서 출생한 들뢰즈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파리 8대학 철학교수를 지냈다. 교수시절 그는 철학, 문학, 과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명강의로 이름을 떨쳤다. 1987년 은퇴한 이후에는 집필과 방송활동에 관여해왔다.
유럽에서 그가 유명해져 논쟁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 것은 1972년. 펠 릭스 가타리와 함께 정치학과 정신분석의 상호관계에서 현대적 삶을 조명한 ‘안티 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정신분열’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들뢰즈는 이 책에서 인간의 욕구를 개인적인 것으로 보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에 반기를 들고 모든 욕구는 ‘사회적’임을 논증했다. 니체의 ‘안티 크리스티’가 19세기의 고정관념에 대한 전복을 시도한 기념비였다면, ‘안티 오이디푸스’는 니체주의적 틀 안에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종합, 20세기의 고정관념을 뒤엎은 대저로 평가받고 있다.
1995년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총리 피살
중동평화를 추진한 공로로 1993년 PLO 아라파트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에서 암살됐다. 73세였다. 범인은 라빈총리의 평화노선에 반대하는 극우 유태인 학생이었다.
1922년 러시아출신 이민자의 후손으로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그가 영국의 식민지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것은 19세인 1941년이었다. 1948년 독립전쟁 당시엔 예루살렘을 수비하는 하렐 여단사령관으로 싸웠으며 1949년 군대표로 아랍과 휴전협정 조인식에 참석했다. 1967년에는 3차 중동전인 6일 전쟁을 총지휘한 명지휘관이었다. 주미대사, 노동장관,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항상 강경노선을 추구한 매파로 1987년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봉기)운동때는 군에 강경진압을 지시해 아랍세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가 평화의 사도로 변신한 것은 인티파다의 강경진압이 실패로 돌아간 1992년 노동당수로 다시 복귀하면서였다. 그는 평화와 안보를 슬로건으로 내걸어 총선에서 승리했다.
1994년 한글점자연구위원회에서 한글 점자 통일안 발표.
1993년 독일 영국 덴마크 스위스에서 쿠르드족반군 행동으로 보이는 테러로 터키 대사관 등 터키계 건물 폭파
1993년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 열반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이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에게 `참선 잘하라`라는 말과 함께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앉은 상태에서 열반했다. 성철 스님은 한국 근대 선불교를 중흥시킨 고승으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하는 선문답으로 유명하다.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철조망을 치고 10년간 생식과 6년간의 장좌불와를 통해 독특한 선풍(禪風)을 이루었다. 장서가 5천권에 이를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나 가사 하나로 평생을 지내 무소유를 실천했다.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35년 해인사에서 하동산 화상을 은사로 득도하고 1938년 운봉 화상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1981년 조계종 제7대 종정에 올랐다. 열반했을 때 많은 사리를 남겨 공력(功力)을 입증했다.
1992년 미국 제42대 대통령에 빌 클린턴 당선
40대의 빌 클린턴이 1992년 11월 4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조지 부시를 누르고 미국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득표율은 부통령 알 고어를 런닝 메이트로 한 클린턴이 43%, 부시가 38% 그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대부호 로스 페로가 19%를 획득했다.
전문가들은 과거 12년동안 대통령을 배출한 공화당의 패배로 `레이건 보수혁명`이 종결됐음을 선언했다. 또 로스 페로의 선전은 기성정당에 대한 국민의 비판을 반영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탈냉전 시대를 이끌어갈 전후 세대교체의 첫 주자로서 전세계인의 주목을 받았으며 1993년 1월 20일에 공식 취임했다
1990년 윤석양 이병 보안사 민간인사찰 폭로
1990년 강원도 인제 군측교에서 관광버스 추락 사망 21명 부상 21명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연)이 1989년 11월4일 정동문화체육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사회적·정치적 부정부패를 해소하고 건전한 시민의식을 고양하며, 건전한 생산 활동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경실련은 발족과 동시에 부돈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정 감시단’, ‘세입자 문제 대책본부’를 구성하고 범국민운동을 전개 했다
1985년 KBS 1TV에서 가요무대 첫방송
1983년 대구 광명그룹 도산
1983년 버마, 북괴와 단교. 정부승인 취소
1982년 현대미포조선소 제2공장 준공. 세계 제1의 대단위 수리조선소 준공
1980년 레이건, 제40대 미국대통령에 당선
미국 제40대 대통령에 공화당의 전캘리포니아주지사 로널드 레이건이 1980년 11월 4일 당선됐다. 레이건은 69세로 미국 대통령선거사상 가장 나이가 많았다. 레이건과 민주당의 카터대통령, 무소속의 앤더슨 3파전으로 치러진 결과 득표율은 각각 51%, 41%, 7%를 기록했고 선거인단수는 489명, 49명, 0명이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레이건의 압승이었다.
투표 1주전에 있었던 TV토론회에서 이미 승패가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배우로서 화술이 뛰어난 레이건은 수수한 카터보다 `대통령답다`는 인상을 유권자에게 심어주었다. 카터의 지도력부재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강한 미국`을 주장하는 레이건에게 투표했다.
1979년 이란 학생들 미국 대사관 인질극
1978년 들어 팔레비 국왕에 대한 반발이 이란 곳곳에서 거세게 몰아쳤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등은 연일 팔레비의 퇴진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였고, 평생의 정적 호메이니도 망명지에서 총궐기를 촉구했다. 결국 팔레비가 1979년 1월에 도망하고 2주후 호메이니가 망명, 15년 만에 귀국함으로써 이란에 불어닥친 이슬람혁명도 결실을 맺었다.
혁명후 이란 전역이 반미(反美)로 급선회한 것과는 달리 이란 정부 일각에서 미국과의 긴장 완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무렵인 1979년 11월 4일, 400여명의 과격파 학생들이 이란 내 미국 대사관에 난입, 70여명의 대사관 직원을 인질로 삼았다. 직접적으로는 10월에 미국으로 거처를 옮긴 팔레비의 이란 송환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미국과 접근하려는 이란 인사들에 대한 견제이기도 했다.
미국은 미국내 이란인 추방과 이란인 자산동결, 이란산 석유수입금지 등으로 맞서며 한편으로 인질구출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하는 바람에 더욱 궁지로 몰렸다. 이는 카터의 재신임 실패로 귀결됐다. 이미 석방된 13명의 흑인·여성을 제외한 인질 52명은 알제리의 중재로 444일 만인 1981년 1월 20일 전원 석방됐다.
1978년 광천 침투공비 민간인 살해 도주사건
충남 광천 말봉산에서 나무하러 갔던 여인 2명이 공비에게 살해되고, 도주하면서 주민 3명을 추가 살해하고 도주.
1973년 단양서 동양 최초의 동굴벽화 발견
동양최초의 동굴벽화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됐다. 건국대 조사단은 1973년 11월 4일 충북 단양군 대강면 고수리 종유동굴에서 신석기 시대에 그려진 암각벽화 한 점을 발견했다고 고고학반의 김기웅 교수가 발표했다.
벽화는 길이 70cm, 폭 30cm 크기인데 원시인이 종교의식으로 표현한 물고기뼈 아니면 나뭇잎을 그린 내용일 것이라고 김교수는 추정했다. 벽화는 동굴입구로부터 5m가량 들어간 곳 왼쪽 아래 벽에서 2cm가량 덮인 흙을 들어낸 다음 발견됐다. 조사단은 또 굴입구로부터 10m지점에서 농경용 석기 2점, 수렵용 석기 1점, 조약돌 2점 등 신석기유물도 찾아냈다.
1966년 제1회 전국기능올림픽대회 개막
1961년 한국-룩셈부르크, 국교 수립
1961년 소련, 북극해서 31회 핵실험
1961년 해외여행금지법 폐지
1961년 딘 러스크 미국무장관 내한
1956년 소련군, 헝가리 부다페스트 진주, 카다르 친소정권 수립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인들이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바르샤바동맹 탈퇴와 반소중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인민봉기를 일으켰다. 反스탈린 운동을 배경으로 발생한 밑으로부터의 개혁요구가 봉기로 발전한 것이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의 제20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이 시작되자 동유럽에서도 反스탈린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헝가리인들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타고 반소봉기를 일으켰다. 시위에 가담한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10만이 넘었으며, 이들은 밤새도록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이튿날 새로운 총리에 임명된 개혁파의 기수 임다 나지는 4일 후인 28일 민주화와 바르샤바기구 탈퇴를 약속하는 등 사태수습에 나섰다. 나지가 11월 1일 바르샤바 탈퇴와 중립화를 공식선언하고 나섰지만 소련 탱크는 이미 부다페스트 가까이 진주해 있었다. 3일 후인 4일에는 마침내 2천대의 소련 탱크가 시내로 진입, 나지 정권을 무너뜨리고 야노시 카다르 정권을 탄생시켰다. 소련군의 무차별 반소시위 진압과정에서 3만2천명이 희생된 것으로 서방측은 추정했다
1952년 미국 34대 대통령에 아이젠하워 당선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민주당의 스티벤슨을 누르고 제34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공화당에서 대통령이 배출된 것은 후버 대통령 이래 20년 만이었다. 1952년 11월 4일 실시된 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미국 대통령선거 역사상 가장 많은 3,390만표를 득표했다. 미국 48개주 531명의 선거인단 가운데 39개주 442명의 지지를 얻어 압승했다. 스티벤슨은 2,730만표를 획득, 9개주 선거인단 89명의 표를 획득했다.
선거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아이젠하워의 개인적 매력이었다. 그는 정치경험은 전무했지만, 생애 내내 군인으로 살았고 연합군총사령관으로도 제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유럽 여러나라에도 지명도가 높았다. 특히 그의 솔직한 인품에 매료된 대중은 그에게 `아이크`라는 애칭을 부여했다
1952년 러시아 캄차카 반도 진도 9.0 지진 발생
1950년 서양화가 이인성 사망
1946년 유네스코 발족-유네스코 현장 발효
세계 각국의 교육, 과학, 문화의 보급 및 교류를 통해 국가간의 이해를 돈독히 하고 협력관계를 촉진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전을 확보하려는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1946년 11월 4일 유네스코 헌장 발효와 함께 정식으로 발족했다.
유네스코 헌장은 1945년 11월 16일 영국과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런던에 소집된 44개 연합국 교육문화회의에서 채택됐다. 이는 1942년 10월 유럽 여러 나라의 문교장관들이 런던에서 문교장관회의를 열고 전쟁으로 파괴된 교육시설 및 문화재를 복구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설립을 촉구하는 결의를 하자, 미국이 이에 동조하여 1944년 국제기구안이 제시됨으로써 설립이 구체화된 것이다.
1차 총회는 발족 15일 뒤인 11월 19일 파리에서 열렸다. 현재 유네스코의 회원국은 188개국, 준회원국은 6개국이며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있다. 우리나라는 1950년에 가입했고 종묘, 불국사 석굴암, 팔만대장경, 강화군·화순군·고창군의 고인돌과 경주유적이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됐다.
1937년 세계최대 일본 전함 `대화(大和)` 기공
1933년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 통일안 발표
1926년 조선어학회, '가갸날'제정
1926년 11월 4일은 음력 9월 29일로,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여덟 번째 맞는 회갑일, 즉 반포 480년이 되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 식도원(食道園)에 모인 조선어연구회 인사 등 100여명은 “이 날을 경절(慶節)로 하자”는 지석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갸날’을 제정했다. 가갸날을 음력 9월 29일로 정한 것은 조선왕조실록 권113 세종28년 9월조의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是月訓民正音成)’라는 기록을 근거로 삼아 음력 9월의 마지막날을 기준했기 때문이다.
가갸날은 1928년에 명칭을 한글날로 바꾸고 1932년부터는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 10월 29일을 기념일로 삼았다. 1582년 이전까지는 율리우스력이 사용된 점을 감안, 음력 9월 29일을 율리우스력에 따른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1934년에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으로 다시 환산, 양력 10월 28일을 한글날로 기념했으나 1940년 7월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광복 후 1946년부터 다시 날짜가 변경됐다. 책에 정인지 서문의 ‘세종 28년 9월 상한(上澣)’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한글학회가 상순의 끝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을 한글날로 다시 확정했기 때문이다.
1926년 한글점자 완성
1926년 11월 4일 제생원의 맹아부 교사인 박두성씨가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을 완성하여 발표했다. 훈맹정음은 한글 풀어쓰기 원칙을 응용하여 받침을 글자 아래 쓰지 않고 가로쓰기를 한 것이 특징이다. 한글점자는 초성 ㄱ·ㄴ·ㄷ은 4점, ㄹ·ㅁ·ㅂ은 5점, ㅅ·ㅈ·ㅊ은 6점, ㅋ·ㅌ은 1, 2점, ㅍ·ㅎ은 4, 5점을 기본점으로 만들었으며,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 은 대칭의 원리를 이용해 만들었다. 한글점자는 부피가 큰 단점이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단음절 약자인 1종 약자 및 다음절 약자인 2종약자를 만들었다.
최초의 점자는 1829년 프랑스의 맹인 L.브라유가 고안한 것인데 그의 이름을 따서 서양에서는 점자를 브라유라고 한다. 브라유는 6점식 점자이고 1870년경 미국인 W.B.웨이트가 고안한 4점으로 된 뉴욕 포인트라는 점자도 있다. 최근에는 6점 점자만이 전세계적으로 통용되어진다.
1921년 일본수상 하라 다카시(原敬), 도쿄역에서 피살
1920년 조선체육회, 첫 전국야구대회 개최
조선체육회가 창립기념으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 했다. 조선체육회는 일본인들의 조선체육협회에 대항에 순수한 우리민족이 주체가 돼 만들어진 체육단체였다.
야구인들이 의기투합해 그해 6월 윤익현을 위원장으로 조선체육회 발기인회가 발족됐고 한 달 후인 7월 13일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창립총회 열고 장두현이 초대 회장에 올랐다.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첫 행사가 바로 경기도 경성부에서 열린 전국야구대회였고 이것은 전국체전의 효시가 됐다.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중학부와 청년부 각각 5개 팀이 출전한 가운데, 중학부에서는 배재에 돌아갔고 청년부도 배재구락부가 우승을 차지했다.
처음 시작하는 국가 체육행사라 대회 운영이 오락가락하기도 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당시 입장료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는데 결국 성인 50전, 어린이 5전을 받았다. 예상보다 많은 관중으로 대회 수입이 약 200원에 달하기도 했다. 시구는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인 월남 이상재 선생이 했고, ‘청년단 야구대회 우승기’는 이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1911년 독일-프랑스, 모로코협정 체결
1904년 소설가 이태준 출생
월북작가 이태준씨가 1904년 1월 7일 강원도에서 출생했다. 휘문고보와 일본 상지대학을 거친 이태준은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로 문단에 등단했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월북 전까지 70여 편의 단편과 10여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뛰어난 기교로 인물의 성격을 탁월하게 형상화했던 그는 문장가꾸기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작가로도 이름나 있다. 또 일제치하에서 순수문학을 옹호했던 구인회와 `문장`지를 이끌며 순수문학 진영의 좌장역할을 했다. 그러던 그가 해방 이튿날부터 임화를 중심으로 한 좌익계열에 관여하고, 곧 월북해 펴낸 작품들은 한결같이 계급투쟁을 강조하거나 북한의 이념을 잣대로 미국과 남한에 대한 적개심을 높이는 것이었다.
월북 후 그는 부르조아 반동작가라는 비판의 화살을 받음으로써 사형은 면했지만 작가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노동자로 추방된다. 집필금지 후 1957년 함흥 콘크리트블록공장 노동자로 끌려간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이태준에 대한 연구는 40여년 동안 금기시 되어 오다가 지난 1988년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후 활발해지고 있다.
1901년 영왕 비 이방자 여사 출생
1899년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출간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출간되면서 인간은 비로소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 책은 초판본이 1899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에서 나왔지만, 엄청난 충격파를 예상한 출판사가 발행연도를 신세기의 개막에 맞춰 1900년으로 삼은 덕분에 꿈의 해석은 20세기를 열어젖힌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20세기를 움직인 현대의 고전으로 추앙 받지만, 독일어로 쓴 초판본 600부가 다 팔리는 데 무려 8년이나 걸렸다. 유아 시절 이미 성욕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어머니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와 경쟁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 프로이트 이론들은 인간행동 동기를 이성에서만 찾고자 했던 `19세기적 지성`의 입장에선 혁명이면서 동시에 반역이었고 이단이었다.
그러나 전통의 가치와 인습을 과감히 무너뜨린 그의 주변으로 알프레드 아들러, 칼 융 등 당대 최고의 정신분석학자들이 몰려들었고, 1908년 4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의를 열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스트레스성 정신장애인 '포탄 쇼크'로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자 192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 계기였다.
점차 프로이트의 이론은 초창기의 종교처럼 빠르게 확산됐고, 실증주의자들은 그의 이론을 유사종교만큼이나 무가치한 사이비 과학이라며 폄하했다. 하지만 프로이트 이론이 20세기에 미친 영향은 실로 광범위했다. 초현실주의 문학, 초현실주의 미술이 나타났으며 프로이트는 20세기 이후적 인간과 그 이전 인간을 구분 짓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경계선이 됐다.
1847년 독일 작곡가 멘델스존 사망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 야콥 루드비히 펠릭스 멘델스존이 1847년 11월 4일 사망했다. 그는 1809년 함브루크주에서 태어났다.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은행가였고, 할아버지 모제스 멘델스존은 당대에 널리 알려진 계몽주의 철학자였다. 그 3대의 이름 모제스, 아브라함 그리고 야콥이 드러내듯, 멜델스존가는 유태계였다.
음악가 멘델스존은 마흔도 못 채운 삶을 통해서 관현악곡 ‘이탈리아 교향곡’과 ‘스코틀랜드 교향곡’, 오라토리오 ‘성 파울로’ ‘찬미의 노래’ ‘엘리야’ 등 수많은 곡을 만들었다. 멘델스존의 작품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곡은 그가 열일곱살때 서곡을 쓰고 서른 세살에 완성한 극음악 ‘한 여름밤의 꿈’이다.
1716년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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