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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파랑길(2011년 3월28일~2011년 4월7일)
3일은 함께 3일은 홀로(혼자) 5일은 같이
옆구리에 동해 끼고 갈매기 따라 걷는 길.
해운대 해수욕장-달맞이 공원-해일정-송정해수욕장-연화리-대변리(3/28일 숙)20.31Km-기장읍-기장대로-임광로-해맞이로-서생면-대송리-진하리(3/29일숙)-간절곶 27.99Km-진하해수욕장 4.22Km 총 52.52Km-울산고속터미널715번 버스 31.1Km)===>3명이 함께한 거리.
부산 광역시 오륙 도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 까지
해변 길 숲길 마을길 해안도로를 연결하는 688Km를 2014년 까지 정부가
해 파랑길이라는 이름으로 조성을 한다는 기사를 보고 나는 무작정 이 길에 도전하기로 했다.
내 아우 徐 사장은 내 얘기를 듣고 자신의 지인인 이용희 선생이 경험하고 책으로 쓴 “길에서 길을 묻다”라는 책을 내게 챙겨 줬다.
네이버의 길 찾기에 들어가 빠른 길 찾기에서 자전거 도로를 클릭해서
내가 걸어갈 길들을 사전에 검색하고 수첩에 썼다.
유럽의 길들에는 걷기정보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걷기 길 정보는 없고 자전거 길이 부분적으로 정리 되고 있는 시점인 듯하다.
각 행정구역별로 예를 들면 해운대 찜질방, 기장군 찜질방 식으로 검색을 해서 찜질방간에 연결하는 찜질방 지도도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저렴한 방법으로 숙박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걸어가야 할 지역별로 민박집을 검색해서 방대한 민박 리스트도 미리 만들었다. 이런 노력은 해당지역의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위급 시에 지원요청도 가능 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런 조금은 귀찮은 준비는 많은 즐거움을 준다.
여행은 준비가 더 신나는 일이다.
그리고 많은 생각들을 가능하게도 해 준다.
이런 준비를 하면서 내 머리 속에는 순례자의 길인 산티아고 가는 일에 늘
설레 있다. 칠십이 되기 전에 나는 반드시 이 곳에 가봐야 겠다는 생각.....
그러려면 15Kg 정도 무게로 하루 30Km씩을 지속적으로 거뜬하게 걸을 수
있는 체력이 기본이다.
3월말은 봄이 시작되는 시기여서 기차를 타고 구례에 가서 섬진강을 따라서
매화꽃과 산수유를 보면서 광양으로 내려가서 동쪽으로 해안을 따라 걷는 것도 같이 검토를 했다.
지속적으로 지도를 들여 다 보고 준비를 하다가 최종적으로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4월7일 까지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걸어가기로 했다.
4월8일 이후에는 이미 잡아 놓은 일정들을 소화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10여일의 걷기 일정을 잡기 위에서 탁상 달력에 “나를 위해 시간을
쓰겠다.” 라는 구호를 써 놓고 다른 약속들을 피해서 확보한 소중한 일정이다.
3월28일 월요일 새벽5시반 에 집을 나서서 수원역으로 향했다.
배낭은 저울질 해 보지는 않았지만 12Kg 이상이 될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친구들 둘(世와 容)과 열차 내에서 합류해서 7시12분
부산행 통일호 열차로 출발했다.
계획당시 처음엔 KTX로 갈까 했지만 조금 일찍 출발하면 도착 시간은 거의 같은 시간대여서 통일호 선택에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느리게 걷고 움직이는 여정이니 바쁠 일이 없다.
집에서 준비해 온 간식거리로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열차는 금방 부산역에 이른다. 열차는 분비지 않고 자리는 넉넉했다.
부산역에 내려서는 출구를 찾지 못해서 한 바퀴 돈 후에야 제대로 나가는 곳을 찾았다. 부산역도 옛날과는 많이 변해있다.
버스 타는 곳을 물어 해운대 까지 이동한 후 적당한 곳에서 내렸다.
몇 번인가 부산에 올 때마다 먹었던 복어 국이 생각이 나서 친구들을 꼬드겨서 비싸지만 첫 날이니 호사를 하자고 부추겼다.
어차피 비용은 분담 방식이니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복국 집의 이름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지나가던 처녀들에게 해운대에서 복어 국을 제일 잘하는 집이 어딘지를 물었더니 주저함 없이 금수복국(해운대구 중동 1394-65 051-742-3600) 이라고 알려 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길 건너 바로 앞에 금수복국 간판이 보인다.
막걸리 한 병과 곁들여서 特으로 시켰다. 1인당 35,000원씩이다.
비싼 값이다. 그렇지만 맛에서 참으로 손색이 없는 복 국이다. 모두 맛있게 먹었다. 정말 맛있다.
출장 시 회사 돈 내고 먹을 때보다 내 돈을 내고 먹는 음식은 더 맛이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 옆에는 뇌졸 증 장애 노인이 우둔한 자세로 복국대접을 받고 있다.
노인을 모시고 온 분이 누님이 서울로 가시면서 꼭 대접하라했습니다,
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으로 불편한 분을 모시고 나온 식사자리로 짐작이 간다. 몸이 불편한 그 분에게 복 국은 더욱 값지고 간절한 것이었을 것 같다.
친구 중 容이는 먹어 본 음식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극찬을 한다.
점심 단단히 챙겨 먹고 1시 반에 달맞이 길로 걷기 시작했다.
달맞이 길가에는 이곳을 방문한 유명배우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길가의 벚나무의 꽃망울 들이 방금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있다.
부풀어 오른 숫처녀 젖가슴 같다 라는 표현이 적합 할 것 같다.
가로등에 장식으로 붙어 있는 벚꽃 사진과 가로등 아래의 플라스틱 커버는 아름다운 길에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의 모습이다.
우리의 금수강산은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는데 늘 디자인 면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경제가 더 발전하고 사회가 진화되면 우리국민들도 눈을 뜨고 낡은 것들은 부서지고 새로운 조형물과 건물들이 만들어져 유럽의 선진국들보다도 더 아름다운 나라가 우리 후손들에게는 반드시 만들어 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이동하는 길가에는 봄이 왔는데도 무리를 이루어 고운 단풍을 간직한 채로 있는 길가에서 잘 자리는 남천의 모습이 예뻐서 카메라의 첫 사진으로 담았다.
차량이 오 가는 도로를 따라 기장으로 넘어 서니 해풍과 햇빛에 말리고 있는 미역들이 보인다.
줄기는 줄기대로 미역귀(사실은 뿌리 부분)는 귀대로 구분해서 말린다.
미역냄새가 코를 상큼하게 해 준다.
동네 중심에 들어서니 갈매기들이 요동을 치고 공중을 훨훨 날아다닌다.
동네 아이들이 새우깡을 던져 주고 이를 받아먹으려고 갈매기들이 춤을 춘다. 저 멀리 낮은 산위에는 솔개 한 마리가 비행연습을 하고 있다.
솔개는 제자리에 머무는 멈춤 비행을 잘 하는 새다.
이렇게 머물며 땅위를 보다가 먹을 것을 보면 쏜 살처럼 하강을 할 것이다.
빨강 등대와 하얀 등대도 보인다.
이곳의 등대들은 바다의 배를 위하기보다는 육지의 관광객들을 위해서 만들어 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생선 네 마리가 그물로 덮여 말려지고 있다.
기장 팔경 중에 죽도가 보인다.
송정해 수욕장 방향의 국립수산과학원 방향으로 향했다.
셀카(스스로 찍는 사진/나는 혼자 나를 사진 찍는 기술이 발달 되어 있다)한 장을 찰깍했다.
처음으로 노란 리본에 달려 있는 해 파랑길의 표시를 봤다.
해변언저리에는 밀려 든 수초들이 잘 짜여 진 카펫처럼 보인다.
파랑 바탕에 갈색 톤의 실을 섞어 짠 아름다운 자연이 만들어 낸 카펫이다.
바닷장어를 잡아서 머리는 남겨둔 채로 배를 갈라서 내장을 빼고 빨래 줄에 주렁주렁 달아 놓은 모습은 생경하다.
널어놓은 장어 사이로 색 바랜 집개 하나도 묘한 조화를 이룬다.
가장자리 파도와 육지가 만나는 바위사이로 조밀하게 매달려 있는 어린 홍합의 무리는 꿀벌들이 여왕벌을 둘러싸고 분가 할 때의 모습을 닮았다.
어촌의 돌담 사이의 깨진 단지 속에 심어 놓은 민들레는 작년의 민들레 홀씨를 아직도 날리지 못한 마른 꽃대와 함께 노란 꽃들을 피우고 있다.
항구 마을에 장사판을 벌리고 있는 곳에서 생 오징어 구이를 사서 맛을 봤다.
대변항에서 첫 날 밤 몸을 풀었다. 한자의 뜻은 다르지만 대변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랫동안 잘 기억 될 것이다.
끝 부분 있는 깨끗한 집을 찾았는데 새롭게 지은 펜션이다.
전화로 숙박 가능성을 묻고 관리실 위치를 알려 줘서 숙박비를 물으니 8만 원 이란다. 조금 깍아달라 했더니 깍아 줄 수 없다고 거절을 한다.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으니 저녁은 라면으로 해결하기로 결정을 했다.
컵 라면에 삼치 캔 하나로 충분하다.
속내의와 양말은 빨아서 방바닥에 죽 늘어 말리면서 잤다.
이런 방식은 방안의 습도 조절에도 좋다.
아침에 다음 행선지로 방향을 잡고 읍내에 들어가서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돼지 국밥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새로 이사해 간 군청과 경찰서 부근에 가면 해결 될 것이라고 이겼는데
이도 아니다. 군청과 경찰서 부근에는 아무것도 아직 없다.
지루한 길을 가다가 점심은 꽃이 피는 식당이라는 간판이 붙은 집에서 백반으로 했다. 음식이 토속적이고 정갈하다.
돼지고기와 집에서 담근 된장 음식이 참 맛이 있다.
저녁은 매운탕으로 하고 민박 집 앞에서 방을 정하고 6만 원을 지불했는데
방은 따뜻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넓은 방인데 주인 할머니는 기름 값이 비싸다고 걱정을 한다.
친구 世의 강력한 주장으로 집을 옮기기로 했다.
펜션을 운영하는 다른 젊은 아주머니로부터 새롭게 소개받은 펜션은 같은 값인데 시설은 배도 더 좋다. 펜션도 젊은 여인네들이 경쟁력이 있나 보다.
동해에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간절 곶을 이르러서 비교적 오랫동안
머 물었다. 욕망의 불꽃 세트장이 잘 지어져 있다.
점심은 쟁반 자장으로 하고 우리는 울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시골 버스를
기다리다가 우리 행색이 궁금해서 처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만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로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상대의 말문이 터진다.
자기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몇 년 전부터 이 바닷가에 와서 살고 있고,
연금 240만 원을 타서 부인에게 140을 주고 본인이 100을 쓴다고 자랑삼아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공무원이나 군인으로 일했던 사람 같다.
부인과 함께 국내를 차를 타고 여행하고 차에서 숙박도하고 밥도 지어 먹고
비 무장 지대에도 들어 가 보기도 했고, 해외여행도 많이 했는데 해외여행 비용은 자식들이 자기 어머니에게 주는 용돈을 모아서 사용한다고 했다.
찜질방에서 잠을 자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고 민박도 이부자리가 좋지 않아서 자신은 개인 침낭을 같고 다녔다고 나름의 노하우를 알려 준다.
나이는 74인데 훨씬 젊어 보인다.
이야기의 시작에 자기가 몇 살로 보이냐 고 물어서 60대 중반이라고 했더니
기분이 업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울산 버스터미널-방어진 일산 해수욕장 버스16.9Km-현대중공업-울산호텔현대-남목3동 6.27Km-주전해수욕장 버스6Km 총 6.27Km(3/30일숙)-당사동-정자해수욕장-관성해수욕장-읍천-나아해수욕장27.56Km-문무대왕이 있는 봉길해수욕장6.88Km 총34.44Km(3/31일숙)-나정해수욕장-감포해수욕장-양포항19.57Km-구룡포항버스16.61Km구룡포해수욕장2.16Km
총 21.73Km(4/1일숙) -호미곶 9.63Km 총계72.07Km===>혼자 걸은 거리
버스로 울산 터미널까지 이동하여 친구들은 가고 마트에서 화장품과 컵라면
닭 가슴살 캔을 비상식량으로 준비해서 방어진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일산 해수욕장에서 하차했다. 이젠 홀로 혼자 걷는 길이다.
갑자기 혼자가 되면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리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나는 영국에서 가족과 서로 이별하고 만나는 연습을 많이 해서
이 역시 잘 훈련이 되어 있음은 다행이다.
일산 해수욕장은 깔끔하게 정리 되어 있다.
해수욕장 끝으로 이동하여 바위산을 넘으려 시도했는데 현대 중공업의 경비 초소가 길을 막는다.
해 파랑길이 제대로 열리려면 이렇게 막혀진 바닷가 바윗길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가는 길을 막는 것은 기업의 횡포 아닌가?
적어도 해 파랑길을 걷는 걷 꾼에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현대중공업의 담벼락은 길기도 길다.
공장안의 슬레이트 건물 벽에는 “내가 잘되어야 나라가 잘 되고,나라가 잘 되어야 우리가 좋다” 라는 글귀가 보인다. 현대의 선대 회장의 어록 같았다. 삼성의 사업보국과 흡사하다.
이미 영혼의 나라로 간 회장이 광고로 환생을 한 현대 이지만 공장 담벼락을 걸으면서 한 개인의 업적이 세삼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세습의 나라다.
북한은 권력의 세습이 있고, 남한에는 富의 세습이 엄연히 존재한다.
경제인들의 모임이 청와대에서 이뤄지면 모두가 재벌 2세들이 자리를 함께 한다. 이젠 기업의 역사와 함께 3세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신문에 나는 사진들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대통령 앞에 서 있는 그룹의 회장들은 모두가 두 손을 앞에 단정하게 모으고 서 있다. 한 그룹의 경우에는 고용된 회장이 참석을 했는데 양팔을 편안히 내려놓고 있는 사진이다. 또 다른 그룹의 여자회장은 커피 잔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자기의 재산이 걸려 있는 회장들은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두려움을 알고 있고, 월급을 받는 사람은 그런 불안이 없고, 감이 없는 여인은 커피 잔을 들고 있다 라 고 나만의 해석을 했다.
說禍라 할 수 밖에 없는 낙제점수는 아니고..... 라는 표현 때문에 괘씸죄가
성립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최고층보다는 항상 아래나 주변에 있는 졸개들이
갈기를 세우고 으르렁 대고 있는 아직도 후진국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위치가 높을수록 언행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말하기 좋다하고 남의 말은 말을 것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 까 하노라.
주전 해수욕장 까지는 산을 넘어야 하는데 지도를 보니 내륙으로 구부러진 표시가 되어 있어 제법 험한 산길이 예상된다.
길가에서 1인 시위(피켓은 블랙리스트가 왠 말이냐? 노동3권 보장하라)를 하고 있는 직장인에게 주전을 물었을 때 고개를 넘어 가야 한다는 답에 버스를 타고 넘어야 겠다라는 결정을 했다.
한 시간도 넘게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에는 젊은 여자 둘이 신나게 주절댄다.
옆에 있는 나라는 존재는 이미 의식하지 않고 깔깔대고 큰소리로 남편 이야기들을 한다. 어디에선가 전화가 걸려오자 그 전화에 매달려서 또 신나게 이야기 해댄다. 남편 말고 또 다른 사내가 있을 것 같은 여자들이다.
버스를 타고 넘는 산길은 구불구불하고 갓길도 없고 도중에 정거장도 없어서 정말로 버스를 타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6Km 가 넘는 길이니 걸었다면 2시간은 족히 걸었을 것이다.
혼자 한 첫 날부터 큰 고행을 할 뻔했다.
주전에는 봉화대 유적이 있으니 울산에서는 가장 높은 산 인듯하다.
서울이나 용인의 봉화대에서 올린 신홋불이 이곳까지 도달하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 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헸다.
해수욕장의 중간쯤에서 내려 바로 앞의 민박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젊은 주인여자는 혼자 하는 여행객은 재워주기가 좀 그렇다고 전제를 하고 자기가 나와 보겠단다.
내 모습이 볼 사나운 모습은 아니어서 좋아 보였던지 오히려 5만원을 3만원으로 할인해서 재워주겠단다. 처음에 전화로 거절했던 보상인지도 모른다.
짐을 방안 넣고 저녁식사가 가능한 바로 옆의 식당에서 단품 메뉴인 올갱이 탕을 시켰다. 올갱이탕은 토란 줄기 같은 것을 연하게 넣고 들깨가루로 맛을 냈는데 먹을 만 했다.
펜션의 방은 깔끔한 여 주인을 닮아서 단정하게 정리 되어 있고, 커튼도 잘 어울리고 특히 주방과 침실 사이에 또 하나의 커튼을 달아서 운치를 더해 준다. 스스로 깍아 준 집이어서 에너지도 수건도 아껴 쓰기로 하고 자고 난 후에 방도 깨끗하게 정리 했다. 주인에게 문자로라도 인사를 남길 까 했는데
내 출발 인기척에 인사를 나온다. 식사는 했느냐? 묻고 반찬이 없지만 자기들 식구들과 같이 하자고 겉 치례가 아닌 속마음을 건네 온다.
따뜻한 사람냄새가 난다. 이때 이미 나는 컵라면 한 개와 닭 가슴살 한 캔으로 아침을 마친 상태다.
이런 일에 아주 익숙해져서 삼치 캔 보다는 닭 가슴살 캔이 훨씬 좋고, 작은 보온 통 2개에는 하나는 커피를 만들어 담고, 하나는 물만 담아서 점심에도 밥집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를 한다.
예쁘게 꾸며진 방도 칭찬하고 영국의 B&B처럼 별로 등급을 표시해서 펜션도 시설에 대하여 고객들이 미리 알고 묵을 수 있으면 좋겠고, 만일 그런 조건이 이뤄졌다면 이집은 1등이라고 칭찬을 하고 내가 걷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그렇게 먼 길을 어떻게 혼자 걷느냐고 깜짝 놀란다. 자기들도 오랫동안 캐나다에 머물다가 귀국했다고 한다.
해 파랑길이라는 표시는 가끔씩 잊을 만하면 얼굴을 내민다.
동해안을 경비하던 군부대들은 이제 많이 철수를 했다.
비어 있는 초소들이 대부분이다.
철조망과 부서진 참호, 참호 안에 피어 난 민들레가 흔적을 지운다.
참호 안의 병사들이 통행이 번번했던 통로에 노란 민들레가 통일과
민족의 평화로 연결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기원을 했다.
근무했던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서 로프로 길이 표시되어 있고, 오르는 가파른 길에는 자동차의 타이어를 깔고 야간 식별을 위해서 하얀 페인트를 칠해 놓았다. 부표에 북한군의 모습의 판을 세워 물위에 띄우고 사격 훈련을 한
사격 타겟이 바닷가에 방치 되어 있다.
해병대 병사들이 이동하는 트럭에는 운전자와 선임탑승자의 이름이 크게 보이도록 붙어 있다.
난폭운전과 주민들에게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겠다는 실명제의 모습이다.
해안 마을이 나타나면 등대가 보이고, 등대가 보이면 그 마을의 동쪽으로 방파제가 만들어 져 있고 방파제의 끝에는 높은 바위산들이 바다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 뿌리 끝에는 꼭 군부대의 초소들이 배치되어 있다.
옛날 오랜 옛적에 화산이 터져 용암이 전체적으로 흐르면서 바다 속에서 식어버린 흔적들이 역력하다.
동해안의 마을의 구조는 모든 이런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
방파제로 쓰이는 5각 콘크리트 구조물은 현지에 레미콘 트럭이 시멘트를 싣고 와서 만들어 진다. 이 구조물은 명칭은 무엇일까?
바위 군 초소 앞을 지나는데 아낙네 혼자 뭔가를 체취하고 있다.
안으로 조금 들어가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하고 다가가서 무엇을 따는지를 물었더니 따깨비를 따고 있고, 옛날에는 먹지 않은 것이고, 지금 자기가 따고 있는 이 바다는 자기 동생이 산 곳이라고 설명을 한다.
아마 동생이 바다를 이용할 수 있는 어업권을 허가 받은 모양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동생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까맣게 그을 은 이 아낙네가
자랑스러워하는 동생인 모양이다.
정자항은 큰 장이 선다. 대게 집이 즐비하고 생선을 파는 상가도 잘 조성이 되어 있다. 난자항은 없을까?
상가 앞에서 미역귀 5천 원 어치와 울릉도 호박엿인 땅콩엿과 흰엿을 5천
원치 샀다. 각각은 3천원인데 2개를 사면 5천 원이고, 호박엿은 절대로 이에 붙지 않는 다고 선전하고, 흰엿에는 콩가루를 많이 묻혀 주면서 갖고 가면 녹게 될 것이라고 친절하게 알려 준다. 땅콩엿에 붙어 있는 깨 모양은 가짜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땅콩이 조금 붙어 있는 깨엿 모양 호박엿이다.
이름으로만 일고 있던 월성 원자력이 나온다.
걷기 시작한 둘째 날의 고리 원자력도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나라의 보안상 지도에 표시를 없애 버린 모양이다.
원자력 발전소 초입에는 낚시꾼들이 많다. 아마 원전에서 나가는 온수 때문에 고기들이 많이 모이는 모양이다.
현대도 원전도 걷 꾼(우리가 처음 만들어 낸 말)들에게는 불편한 요소다.
혼자 뒷산을 걸어서 넘는다. 길고 지루하다.
중간쯤에는 방사능폐기물처리소가 있다. 무시무시한 곳을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방사능 수치를 공개적으로 측정하는 계기판들도 보인다.
얼렁뚱땅 잘 하는 한국인들인데.....
한수전의 효율운영을 위해서 협력업체들에 의뢰 하고 있을 것이고,
혹 과당경쟁에 의해서 점검이나 챙김이 부실한 것은 아닐지....
잘못 다루면 국민들에게 큰 재앙이 되는데.....
제2 제3의 안전대책들은 있는 것일까?
하는 걱정들이 산을 넘는 동안 내내 생각을 무겁게 한다.
새로운 지역의 이름들을 기억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름처럼 어이 봉열이 나네 나여. 라고 되뇌면서 나아 해수욕장과 봉열 해수욕장의 지명을 머리에 입력했다
문무대왕릉이 있는 봉열 해수욕장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날은 저물기 시작한다. 마을 슈퍼에 들려 냉 캔 커피를 사서 단숨에 들이키며 땀을 식히고,
닭 가슴살은 아예 없어 사지 못하고 컵 라면도 없어서 사발 면을 샀다.
이 동네에서 가장 깨끗한 펜션이 어디냐고 물어서 숙박 장소를 확인 하고
식사 할 곳을 찾으니 원자력에 작업하는 외부인부들을 위해서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는 정보를 얻어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가슴이 확 뚫리는 기분이다. 이렇게 한번 씩 김치나 된장 음식을 먹어야 코에 쪄든 비릿한 바다 냄새를 제거해 주는 효과가 있다.
슈퍼 주인이 알려 준 펜션 앞에 가서 전화를 했더니 주인 할망은 외출해 있고 전화 속의 할망은 슈퍼는 자기 동서가 하는 곳이니 그 곳에 가서 안내를 받으라 한다.
그 집의 안내를 이미 받아 집 앞에 와 있다고 했더니 방문이 열려 있고 불도 넣어 놨으니 우측 옆으로 들아 가서 101호 방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안내를 한다.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었더니 한 두어 시간 걸린단다.
광열이 재식이 전화 오고 현우는 문자를 보내온다.
지난번 바래길인 남해를 같이 한 친구들은 그 때가 너무 좋았나 보다.
친구 따라 인도가기 바람을 넣어본다. 동무가 있어야 1달을 갈 수 있을 텐데....
집사람을 동행하기에는 견디기기 어려울 듯한 30일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바닷가든 어디든 사람들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말을 붙여 오지 않는다.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그립다.
아침은 삼치 캔과 사발 면에 부서진 미역귀를 잔뜩 넣은 식사를 했다.
사발 면이 미역 면이 되어 미끈거린다.
집 떠난 지 몇 일이 되었는데도 안부를 물을 생각도 하지 않는 자식들도 생각하는 기회가 된다.
이런 서운함이 통했는지 딸아이 전화 오고 多然이 사진도 들어온다.
가족은 뭔가?
어디까지 의지해야 하는 존재인가?
인간은 누구나 결국은 혼자 아닌가?
푸른바다는 항상 푸르다 너무나 푸르디푸른 바다여서 무엇을 쏟아 부어도
푸름은 항상 그대일 것 같다.
문무대왕릉을 보려고 바닷가로 나갔는데 바다 속에 바위만 댕그라니 놓여 있다. 용이 되어 왜구를 지키겠다는 유언과 함께 불교식으로 화장을 해서
물이 넘나드는 이 바위 속에 잠들었다고 한다.
바닷가에는 하얀 천막들이 쳐있고, 아침부터 한 부부는 음식들을 차려 놓고 자기네 가족의 복을 빌고 있다. 무엇을 빌고 있을까?
문무대왕은 이미 신의 존재로 일반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성 싶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유구하다.
우리 국토를 걸을 때 늘 느끼는 일은 수많은 민초들의 이야기와 흔적들이 마을마다 구석구석 기록되고 흔적이 남았으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생각이다. 생존에 너무 급급했던 탓일까?
마을에서 긴 세월 정직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 마을의 어귀를 너무 사랑해서 늘 산책을 하던 어부의 이야기..... 이런 평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우리들이 남겨야 할 유산이 아닌가?
원자력의 증설로 같은 마을이 두 동강이가 나니 전체 마을이 헤어짐이 없이 같이 이전하게 해달라는 호소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 뒤에는 이전에 대한 금전 보상의 물욕들이 숨어 있겠지만 ......
원자력발전소가 배치된 지역은 주민과의 우호를 위해 마을을 위해 뭔가를 지원하고 있다. 주민들의 반대를 잠재우기 위한 일들이다.
고리원자력도 월성원자력도 모두 증설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마을에 미술가들을 동원해서 벽화 그림을 잘 그려 놨다.
일본의 쓰나미 돕기 운동과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교과서에 우겨대는 일,
공항을 유치하기 위해서 터지게 싸움질하는 지자체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순된 일들이 세상에는 즐비하다.
어제는 충실하게 걸었으니 30Km정도는 걸었을 것이다.
오늘은 실증이 난다.
그래도 발걸음은 계속되어 양포항에 이른다.
양포항은 화장실이 참 깨끗하고 넓다.
동해를 걷다 보면 유독 깨끗한 마을들이 있다.
이런 곳은 지자체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나이가 든 아주머니들이 마대부대에 열심히 쓰레기를 주워 담는다.
버스 탈 만한 곳으로 이동해서 가계에 들려서 비상음식들을 챙기고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서 입에 물고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동네 할머니 두 명도 버스를 기다린다.
연신 자기들 동네 사람들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신발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샀는지 색상과 생김새가 비슷하다.
허리가 구부려진 것도 같다.
버스를 기다리는 대각선으로는 미역과 실파를 길거리에 펼쳐 놓은 할머니가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고 있고, 자세히 보니 내가 물건을 산 가게의 마크가 삼성의 옛 벳지를 그대로 그려 놓고 가운데는 D 자를 써 표시하고 있다. 주인이 오래전에 삼성에 근무했나 보다.
할머니 둘은 차만 지나가면 연신 태워 달라고 덤벼들더니 결국은 차를 하나 얻어 타고 가버렸다.
나만 덜렁 혼자가 되었다.
호두와 잣을 꺼내어 먹고 정자 항에서 산 엿도 먹으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와서 올라탔는데 잔돈이 없고, 부산이나 울산에서 잘 되던 선불카드가 이곳에서는 되지 않는다.
운전기사는 기다릴 테니 가게에 가서 잔돈으로 바꿔오란다.
다행히 버스에 손님은 내가 유일했다. 구룡포에 까지 휭 하고 편하게 이동했다. 해는 떨어지고 이미 어두워진다.
매운탕과 돼지국밥을 하는 식당에 들어가서 혼자인데 무엇을 먹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돼지 국밥을 권한다.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혼자 식당을 찾아 밥을 먹는 일에 익숙해진 것도
2009년 영국에서부터 유럽에 걸친 혼자여행에서 잘 훈련이 된 덕분에 거리낌이 없다.
식당 집은 아들의 카드 사용액으로 가족 간에 설전이 이뤄진다.
아마도 아들이 가끔 거짓말로 부모들을 속인 경력이 있는듯했다.
돈을 치루면서 가까운 곳의 숙소 쓸만 한곳을 물었더니 호텔 간판이 붙어 있는 높은 건물을 알려 준다.
호텔은 겉보기에도 허름해서 실속이 없을 듯해서 길에 나와서 택시 기사에게 구룡포 해수욕장 쪽으로 가면 펜션을 구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깨끗하게 지은 집이 있다고 알려 준다.
좁은 도로를 손전등을 키고 30분 이상 이동했다.
보이는 첫 집 앞에서 전화로 숙박 가능여부를 물었더니 엘리베이터 타고 3층으로 올라오라고 한다.
바다와 백사장이 잘 보이는 방이다. 그냥 쓸 만하다.
허리도 뻐근하고 허벅지 안쪽으로는 탈이 났다.
연고를 듬뿍 발라 줬다. 쎄리스톤지가 최고로 좋다. 먼 길을 걸을 때 필수품이다.
내일은 늦게 까지 쉬고 호미 곶으로 출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2009년에 다녀온 서양의 끝인 포르투갈 리스본의 호까 곶의 이름은 누가 만든 것일까? 서쪽의 끝을 보기 위해서 식구들 모두 리스본에서 열차와 버스를 타고 지도의 끝 동네를 구경했다.
비상식량인 컵라면과 닭 캔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바람이 제법 세게 분다.
짐을 챙겨서 10시쯤 나왔는데 출입문이 바닷바람에 닫히는 바람에 주인아주머니를 찾아서 마스터키로 다시 문을 따는 상황을 만들었다.
전화기를 방에 두고 나온 것으로 착각을 했는데 문을 따고 찾아도 전화기는
보이지 않았다. 찾던 전화기는 오른 쪽 안 호주머니에 잘 간직되어 있다.
서울을 출발한 龍군의 이동 시간이 문자와 음성으로 통보 되어 온다.
시간이 잘 맞아 떨어질 것 같다.
같이 출발한 친구들을 중간에서 보내고, 혼자되어 홀로 걷다가 다시 친구를 새롭게 만날 순간이다.
호미 곶 해국자생지 해안 도로 매 바위라고 표시된 우측 해안도로는 아름답다. 차량도 거의 오가지 않는 호미 곶 면장의 보호식물 안내판이 붙어 있는 해국이 많이 자생하고 있는 군락지다.
호미 곶에 거의 이를 무렵 바다 속에 세워져 있는 손 모양의 조형물을 배경으로 셀카 한 장을 찍었다. 나는 셀카의 도사다.
피사체의 배경을 잡는데도 일가견이 있다.
(호미곶-아무르모텔 15.54Km(4/2일숙)-도구해수욕장5.07Km-버스로양덕지구18.28Km-칠포해수욕장-오도13.73Km 총18.80Km(4/3일숙)-월포해수욕장-장사해수욕장18.03Km-버스로강구항9.76Km-청암장모텔4.86Km총22.89Km(4/4일숙)-고래불해수욕장-병곡면사무소30.99Km-병곡휴게소-영덕심층온천수2.61Km총33.60Km(4/5일숙)-후포해수욕장15.54Km-울진버스 38.97Km-삼척버스62.99Km-동해버스14.15Km묵호항-어달항-어달해수욕장-신라회집(무지개펜션)6.35KM총21.89Km(4/6일숙) -동해고속버스터미널5.56Km-서울강남터미널264,68Km)총계 112.72Km===> 둘이 같이 걸은 길
전체 걸은 거리는 237.31Km
龍군은 내가 도착한 10분 후쯤 호미 곶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이른 새벽 출발해서 정오경에 포항에 도착하고 버스를 타고 다시 택시로 이곳까지 이동해 왔다. 찾아 온 친구가 고맙고 반갑다.
친구와 함께 등대를 배경으로 지나가던 관광객에게 부탁해서 사진 한방을 찍었다. 이제 또 다시 동반자가 생겼다.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이니 45년쯤 묵은 친구다.
친구와 술은 묵을수록 좋다고 했다.
어디 그냥 친구인가? 나의 가장 가까운 K형을 소개 해주고, 우리 집 사람과 인연을 맺게 해준 귀한 친구다.
미리 친구를 위해 보아둔 그럴싸한 횟집에 들려서 회를 시키고 물 회도 주문하고 소주 한 병도 시키고 오랜만에 환타도 한 병 시켜서 늦은 점심을 푸짐하게 Welcome Lunch로 했다. 바쁠 일이 없는 우리들이다.
공무원으로 정년을 하고 두 번이나 새 직장에서 충분히 수고한 친구는
4월1일 마지막 인사차 출근을 하고 바로 그 이튼 날 짐을 싸서 내 동행이 되었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신발도 스틱도 옷이나 장비들도 새로 장만 하느라고 큰돈이 들었다고 한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에 이런 걷기는 그만이라고 좋아 한다.
다행이다. 하번도 이런 홀가분한 자신만을 위한 여행은 처음이라고.....
여행이 아니고 고행이라고 수정해 줬다.
뒤에 생각해 보니 여행도 고행도 아니고 樂行(처음 사용하는 단어여서 글씨밑에 붉은 점선이 나온다.)이다. 즐거운 걸음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호랑이 꼬리 하향방향으로 방향을 잡고 도로를 따라 영일만을 끼고 걷다가 하선대를 지나서 입암의 아무르모텔054-291-0990에 둥지를 틀었다.(4/2일宿)
모텔은 욕조가 있어서 좋지만 물을 끓일 수가 없어서 아침에 끓인 물을 달라고 부탁했다가 정수기의 온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6시나 7시가 될 쯤엔 눈을 뜨고 행차 준비를 하면 9시경 숙소를 나서게 되는 걷는 일이 출근하는 사람들의 일처럼 몸에 베어버렸다.
조금 내려가다가 문을 연 음식점이 있어서 된 장 찌게를 주문했다.
호미 곶으로 해맞이를 하러 갔다 돌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문을 열고 영업을 한다고 주인이 말한다.
영일만의 도구 해수욕장까지 걸은 뒤 POSCO 쪽과 포항시내는 버스로 건너
뛰기로 하고 버스로 양덕토지정리구획지구까지 이동했다
새롭게 조성되는 지역은 아직은 허허 벌판이다.
중국집 서태후(포항시 북구 양덕동 1255-11 054-252-1515)에 들어가서 탕수육과 자장면 그리고 백알(고량주) 한 병을 시켜서 잘 먹었다.
실력 있는 집이다. 대낮에 도수 높은 한 잔 술이 얼큰하게 오르니 걷는 길이 더욱 흥겨워진다. 이만한 행복이 어디 있는가?
많은 해수욕장들도 생김이 다르다. 어느 해수욕장은 터키의 검은 조약돌 못지않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하면 어느 해수욕장은 모래로 쌓여서 걷기의 진행 속도가 떨어진다.
서해안은 가는 모래인 세사로 되어 있어서 바닷가 모래가 단단하고, 동해안은 굵은 모래여서 발이 빠지기 때문에 속도에 저항이 생기는 것 같다.
대구해양수련원이 있는 곡강천 옆으로 길을 잘못 들어서 잡초와 갈대가 깊은 둑길로 가니 길이 아니어서 갈대와 억샌 풀들이 길을 막는다.
뒤로 돌아 갈까 하다가 그냥 전진했다.
잘 가다가 만나게 되는 험한 삶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래서 어려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우리는 앞으로 전진 했다. 친구에게 길에서 배우자고 운을 띄었다.
삶도 같은 것 아닌가?
칠포 해수욕장을 지나 오도에 둥지를 틀었다. 칠포해수욕장장에는 행글라이딩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길을 따라 오르는데 요란한 기계음이 들린다.
엔진을 단 스케이트보드에 젊은이가 타고 신나게 가파른 내리막길 포장자동차도로를 달려 내려온다. 대단히 위험스럽게 보인다.
이런 때 죽을 수 있지요.그렇지만 멋지지 않아요? 라는 반응이 요즘 젊은 세대란다. 부서지는 파도를 카메라에 담아 본다.
백마를 타고 모래밭을 달리는 풍경도 보인다.
바닷가 식당 오도의 명인털보물회 054-261-2969 010-7588-2969에서 저녁을 먹을 때는 옆 손님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무식한 놈들이다.
이 집은 털보가 직접 잡은 100% 자연산이라는 홍보를 하는 집이고 매운탕 맛은 우수했다.
지역의 일당들인 이 사람들은 주변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버릇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칠포해수욕장애서 장사 해수욕장까지 걷고는 영덕 게로 판을 벌리는 강구 항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강구항은 언젠가 대게를 먹으러 차로 방문해서 하루를 묵은 곳이다.
한번 본 곳은 흥미를 잃는다.
자신의 진한 추억이 묻혀 있는 곳이 아닌 한 ....
다른 나라 여행도 가본 곳은 제외하고 새로운 곳으로 도전해야겠다.
강구항에서 초 노인들이 운영하는 곰치국밥을 저녁으로 잘 먹었다.
영덕의 블루로드는 아름다운 길이다.
• 해맞이공원 - 석리 - 대게원조마을(경정리) - 축산항(죽도산)
• (약 15km/소요시간 5시간)
장사해수욕장은 1950년 9월14일 인천 상륙작전 직전에 전날 부산항에서 출발한 학도 의용군들이 이른 새벽 동해의 중간 허리를 찔러 인민군들이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게 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였다.
손자병법의 聲東擊西.동에서 소리 지르고 치기는 서쪽을 친다는 의미다.
꽃다운 200여 젊은이들이 바닷가에서 생을 마감한 전적지이다.
엉뚱한 이야기지만 걷는 길을 가볍게 하기 위해 龍이는
국립과학수서연구소에는 백백교 교주의 해골과 여인의 음부하나도 일제시대 보관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국과수가 보관 중인 뇌는 백백교 교주 전용해의 것으로 추정된다. 1923년 경기도 가평에서 사이비종교 백백교를 창시한 전용해는 신도들의 금품을 갈취하고 여신도들을 간음했으며 314명의 신도를 죽였다. 전 교주는 1937년 일본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도주했다가 1937년 경기 양평 용문산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일제는 뇌 구조와 살인 행각의 상관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전용해의 뇌를 보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문제의 생식기 주인은 베일에 싸여 있다. 일부에서는 1909년에 문을 열어 1918년 화재로 소실된 기생집 '명월관'에서 활동하던 기생 명월이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일제는 명월이와 동침한 남성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줄줄이 사망하자 원인을 규명한다며 이 여인이 숨진 뒤 그녀의 생식기를 적출해 포르말린 용액 속에 넣어 보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비는 온도가 몇 도냐? 고 친구가 묻는다, 비는 언제나 5도란다.
이유는 “비가오도다” 말 되네.
인간사는 자신은 비극이고 타인은 희극 이란다.
구경 중에 최고의 구경은 불구경이고.....
모래언덕의 거친 마른 풀 위에서 우린 휴식을 취했다.
마누라들에게 잘 못한 일들이 많아서 친구는 무릎 꿇고 100년을 손을 들고 있어야 한다고 친구의 부인이 판결을 했단다.
나는 아마 1000년쯤 될 것 이라고 친구가 말 한다. 요런18눔 같으니라고.....
피데기는 반 건오징어다.
처음에 무슨 말인지를 몰랐는데 갈호 속에 잘 해설을 한 간판을 보고 알았다. 갑자기 오징어 반 마른 것이 먹고 싶다.
오징어 말리는 족대를 보고 가다가 말리고 난 후에 오징어 다리를 남겨 둔 것 서너 개를 주울 수 있는 횡재를 했다.
龍이는 오징어 이삭을 주었다고 좋아 했다.
요즘 오징어는 냉장 시켰다가 녹여서 말리는 괴정을 거치는 것 같다.
오징어의 가격이 좋을 때를 맞춰서 작업이 이뤄지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7번국도 우측으로 난 바닷가 해변 길을 택해서 금진 정도에서 묵었다(4/4일宿)금진에서 노물, 축산 해수욕장과 대진 해수욕장으로 거쳐서 병곡까지 이동하여 심층수 온천탕에 숙소를 정하고 이튼 날 목욕탕 입욕 티켓은 공짜로
얻어서 (4/5일숙) 다음 날 때를 밀고 호강했다.
저녁에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9시경 깜깜한 바닷가의 호젓한 길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던 별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하늘의 별을 보며 노상방뇨를 했다.
사람에게 별이 보일 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고단하게 저녁 까지 걸었으니 30킬로는 족히 걸었다.
4/6일 병곡에서 평해로 걷다가 龍군이 발을 겹(접)질렀다.
큰 불상사가 날 뻔 했다. 그래서 신발은 목이 긴 것이 유리하다.
걷기는 속도가 떨어진다. 이런 저런 핑계로 우린 버스로 이동하기로 결정을 했다. 어차피 걸어서 삼척까지 이동하기는 불가능하기도 했다.
우리의 이름은 걷 꾼이다. 걷 돌이들 보다는 걷 꾼이 훨 났다.
홍어 그것은 2개의 설이 있다.
맨맛헝게(만만한게) 홍어 좆이냐? 이 말의 1설은 어장에 홍어가 흔하고, 옆으로 달려 있는 두 개의 꼬리가 먹잘 것도 없어서 어부들이 떼어 내서 항구 길가에 버렸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나뒹구는 꼬리를 발로 걷어차게 되었는데 이로부터유래 했고, 제 2설은 바다 속에서 다른 고기들이 홍어의 뒤에 달린 이 꼬리를 입으로 자꾸 건 들어 본단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가 흔한 말로 팔자를 고친다는 말의 유래도 사람이 죽으면 제사상 앞에
지방을 쓰게 되는데 이 때 쓰는 글이 顯考學生府君神位 라 쓰는데 벼슬을 하면 글씨의 숫자가 달라짐에서 유래 했다고 한다.
친구와 내가 걸으면서 고단함을 달래고 웃자고 한 이야기들이 중간 중간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 오래 걷다 보니 어디에 끼워 넣을지를 몰라 이렇게 말미에 정리하고 있다.
우리들의 이야기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아니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얼마나 좋은 걷기 동반인가?
나라는 자아를 깨 버리고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들을 친구 앞에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우리들이 좋다.
야~~~~ 정말 좋네. 우리가 언제 이런 시간을 갖았는가?
야~~~푸른 바다 좋네. 그 속에 우리들의 이야기들은 끝없이 펼쳐진다.
장항과 군산 바다 사이로 500여 가구가 살던 곳이 있었단다.
그런 어느 날 스님 한명이 탁발을 하러 와서 그 동네의 한 노인이 시주를 했는데 이 동네가 없어질 것 같다고 장탄식을 하더란다.
동네 모퉁이에 있는 돌부처님이 코피를 흘리는 날 이 동네는 없어 질 것이라고 했지. 그래서 이 노인은 날마다 그 돌부처를 확인하곤 해서 동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단다.
동네에서 장난을 좋아하던 총각 한 놈이 돼지를 잡던 날 부처님의 코에 돼지피를 묻혀 놓았고 그 노인은 부처가 코피를 흘린다고 자신의 손녀딸을 등에 업고 산으로 치달았단다. 장난을 쳤던 총각은 산으로 줄행랑을 놓는 노인에게 이것은 코피가 아니고 돼지 피라고 올라가지 말라고 외치면서 따라 갔는데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 위로 올라갔지./
그러자 뇌성이 들리고 바닷물이 일어나서 요즘 일본에서 발생한 쓰나미처럼 그 동네를 감쪽같이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다.
오직 산 사람은 할아버지와 손녀 딸,그리고 장난을 쳤던 총각만이 남았고
그 총각은 손녀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농촌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쓴 진실한 국회의원이
있었다.
일본에 갔다가 구기자가 차로 좋은 값으로 팔린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자신의 고향농촌에 구기자 제배를 장려 했지.
일본의 경우 샘물 가까이 구기자를 심고, 뿌리는 물로, 잎과 열매는 차로 활용을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심어서 팔아 보겠다고 했고, 절대 농약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농약을 주지 않으면 벌레가 생겨 구기자를 잘 키울 수가 없게 되자 아무리 말려도 새벽4시만 되면 농약 통을 메고 모든 농가들이 소독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수출을 할 때 잔류농약이 검출 되어서 당연히 금수품목이 되었다. 싼 값으로 정리하긴 했지만.....
구기자 잎에는 거의 똑같아 보이는 고추 잎을 넣기도 했단다.
이런 대목에서 한국인들은 종족의 유전자를 바꿔야만 한다고 이야기 하곤 한다.
우리들의 약점은 무엇인가? 우리국민의 약점은 뭘까?
양심 바르게 살지 않는다. 정직하지 못하다.
타인을 배려 할 줄 모른다. 원칙을 지키고 준수하지 않는다.
이런 몇 가지가 보완되어야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바른 국가가
될 것이다.
이 핑계와 저 핑계를 묶어서 울진으로 삼척으로 대달렸는데 삼척은 예나 지금이나 허접하다.
다시 동해로 달려서 항공 길과 뱃길과 국도와 고속도로가 같이 지나는 어달 해수욕장의 좋은 펜션에서 하룻저녁을 자고 4/7일 최고로 맛있는 곰치국
황태횟집 033-532-7300 목호 동 일출로 323을 마지막으로 11시20분 버스로 서울로 상경하여 2시 반에 종지부를 찍었다.
봄비는 주룩주룩 내린다.
다음에 내가 다시 동해를 걷게 되면 어달 해수욕장의 까막바위 근처에서
Restart 할 것이다.
이 보행기를 정리 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허리도 다리도 아직 멍멍하다.
더 강도 높은 걷기가 필요하다. 다리와 허리를 무쇠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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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모든것을 털고 떠날수 있는 용기,시간,체력이 부럽습니다.
머너 먼 길 무사히 다녀왔구랴? 사진도 함께 보여 주었다면 더욱 실감이 날 텐데~ 그리고 감포 문무왕릉을 보고서는 바로 나정 해수욕장길로 갔다고 하니 그사이 꼭 들려 봐야 할 곳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갈매기 횟집과 유서깊은 감은사 인데 말씨~
한걸음 한걸음 고도전진 정말부럽네 글씨솜씨여전하고 이제는 어디를가도 만사오케 수준도달 그럴때 몸조심하구려 잘읽었슴니다. 사진이 있었으면 금상첨화로이다.
양박 여행기의 애독자가 됬심다. 님의 성공적인 산티아고 길를 위해 최근 본 여행기에서 옮겨옴: "은하수를 따라 별들의 벌판을 지나 내가 이제 부터 걸어갈 길, 이길은 "카미노" 라고도 불린다.
'좋은길' 또는 '여행' 뜻하는 스페인어다. 책마다 카미노를 걸을때 "배낭은 7 KG을 넘으면 않된다" 라고 충고한다. 7 KG에 한달 넘는 기간동안 필요한 모든것을 담는다. 바지하나,반팔 셔츠두장, 긴팔상의 하나등..
몇가지 옷과 카메라만으로도 7KG 은 간단히 넘는다. 줄이고 또 줄여야 했다.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건 발에 생기는 물집이다 그리고 탈수다: "부엔 카미노!=부디 좋은길 가세요! :<책여행책:박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