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지역 묘
▲이항복(李恒福,1556-1618)묘 위치: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산5 화산들옆 작은 구릉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경주(慶州) 시호 문충(文忠)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지게 되었다. 선조13년(158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저작(著作) ·박사 ·정언(正言) ·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시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인평대군(麟坪大君,1622-1658)묘 위치 :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 산46-1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셋째 아들. 이름 요(穽). 시호 충경(忠敬) 자 용함(用涵) 호 송계(松溪) 인조 8년(1630) 인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636년의 병자호란 때에는 부왕(父王)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했다. 1640년 볼모로 선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풀려 귀국하였다. 효종 1년(1650) 이후 4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정통하였으며, 병자호란의 국치(國恥)를 읊은 시가 전해진다. 또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송계집》《산행록(山行錄)》 등이 있다.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서성(徐敵,1558-1631)묘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달성(達城) 시호 충숙(忠肅) 자 현기(玄紀) 호 약봉(藥峯).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선조19년(158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1592년 병조좌랑(兵曹佐郞)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함북(咸北)에 이르러 두 왕자와 황정욱 등이 포로가 되자 혼자 탈출했다. 왕명에 따라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병조정랑(兵曹正郞), 직강(直講)이 되고 명장(明將) 유정(劉綎)을 접대했다. 그 후 암행어사에 이어 제용감정(濟用監正)에 특진, 이어서 5개도의 관찰사와 3조의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광해군 5년(1613)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 11년간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형조판서에 복직,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과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각각 왕을 호종했다. 이인기(李麟奇) 등과 남지(南池: 耆老會)를 조직, 역학(易學)을 토론했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 문집에 《약봉집(藥峯集)》이 있다.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묘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산11 이름 광(壙) 은언군(恩彦君) 인(琉)의 아들로서, 은언군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남이므로 사도세자의 손자가 된다. 정조3년(1779) 아버지 은언군이 홍국영(洪國榮)과 함께 역모했다는 벽파(僻派)의 무고에 따라 강화부(江華府) 교동(喬洞)으로 쫓겨나자, 아버지와 함께 빈농으로서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 처음 전계군에 봉해졌다가 헌종 15년(1849) 아들 원범(元範)이 즉위하여 철종(哲宗)이 되자 대원군(大院君)에 추봉(追封)되었고다.
▲정기안(鄭基安,1695-1767)묘 포천군 가산면 가산리 4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온양(溫陽) 시호 효헌(孝憲). 자 안세(安世) 호 만모(晩慕) 초명 사안(思安). 좌의정 순붕(順朋)의 후손이며 유신의 아들이다. 4년(1728)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정언·헌납·사간(司諫)·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1752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대사간·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유경선(柳敬先,1519-1575)묘 위치 :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산34 듬뱅이 야산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문화(文化) 자 흠중(欽中), 가산면 방축리에서 출생했다. 명종8년(1553) 과거에 합격한 뒤 도총부도사를 거쳐 웅천현감. 제주판관, 양산군수를 역임했다. 선조2년(1569) 한성부서윤을 거쳐 영암군수. 경원부사를 지냈고 선조6년(1573) 충청수사가 되었다. 이듬해 회령부사.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흔히 이곳 주민들에 의해 병사공묘(兵使公墓)라 불린다.
▲정만석(鄭晩錫,1758-1834)묘 포천군 가산면 가산리 240-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온양(溫陽) 시호 숙헌(肅獻) 자 성보(成甫) 호 과제(過齊) 죽석간(竹石間) 지중추부사 기안의 자이다. 정조4년(1780) 사마시 정조7년(178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찰방 전적 대간직을 거쳐 여러차례 암행어사로 나갔다. 암행어사로 전라도 해남지방에 갔을때 오리의 횡포와 거듭된 흉작으로 주민들이 아사지경에 이르렀음을 보고 오리를 응징하고 조정에 상소하여 국조(國租)를 하사받아 주민들을 구제하여 준데대한 송덕비가 전해온다. 또한 교리로서 정조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장령이 되고 누차 왕명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안무했다. 병조참의를 거쳐 동래부사로 부임 뇌물을 받고 대마도와 통신서계(通信書契)를 위조한 역관을 주살하여 관기를 바로 잡았다. 이어 도총부부총관 형조참판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충청도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홍경래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위무사로 파견되었고 1812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홍경래란으로 피폐된 민생을 수습하여 주민들에 의하여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후 한성판윤 호조판서를 거쳐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1829년 우의정에 올랐다. 판중추부사로 전임한 관리로서 청백하기로 이름났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별세후 예장으로 치를 것을 나라에서 권했으나 본가에서 이를 반대, 서민장으로 치렀다.
▲심통원(沈通源,1499-1572)묘 포천군 소홀면 이곡리 42 이곡초 등교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청송(靑松) 자 사용(士容) 호 만취당(晩翠堂) 순문(順門)의 아들이며 영의정 연원(漣源)의 아우이다. 중종32년(1537)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명종1년(1546)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우승지. 좌승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이어 예조참판. 대사헌.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우의정을 거쳐 명종19년(1564) 좌의정에 올랐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듬해 왕의 외척으로 윤원형(尹元衡)등과 함께 권력을 남용했다는 탄핵을 받고 사직, 선조가 즉위하던 1567년 관직을 삭탈당했다.
▲성여완(成汝完,1309-1397)묘 위치 : 포천군 신북면 고일2리 산3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 창령(昌寧) 시호 문정(文靖) 호 이헌 판도총랑 군미(君美)의 아들이다. 충숙왕5년(1336) 문과에 급제, 예문춘추 검열을 거쳐 군부 정랑이 되어 양광도를 안렴하고 상서우승.지형부사.어사중승.전법 판사를 지냈다. 그 후 해주.충주의 목사를 역임, 공민왕 때 민부상서가 되고, 신돈이 주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후에 풀려나와 우왕 때 정당문학상의에 이르러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공양왕 4년(1392)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 왕방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조선 개국 후에 노인직으로 검교문하시중에 창성부원군으로 봉해졌으나 사퇴하고 절개를 지켰다.
▲성석린(成石璘,1338-1423)묘 위치 : 포천군 신북면 고일2리 산3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 창녕(昌寧) 시호 문경(文景) 자 자수(自修) 호 독곡(獨谷) 부원군 여완의 아들 공민왕 6년(1357) 문과에 급제한 후 학유(學諭)·전리총랑(典理摠郞)을 지냈다. 신돈(辛旽)과 대립,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좌천되고, 1384년(우왕 10)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수 양백연(楊伯淵)과 출전하여 적을 격퇴하고, 수성좌리공신(輸誠佐理功臣)이 되었다. 그후 양백연의 옥사에 연좌되어 함안(咸安)의 수졸(戍卒)로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다.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공양왕을 내세운 공으로 찬화공신(贊化功臣)이 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 일파로 추방되었다. 그후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 등을 거쳐 좌정승에 오르고, 태종 1년(1401)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진 후, 1415년 영의정이 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초서(草書)를 잘 써서 당대의 명필로 유명하였다.
▲김중행(金仲行,1397-1512)묘 위치 : 포천군 창수면 주원1리 산137 태조6년(1397) 황해도 관찰사 소성(素性)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감찰사로 봉임하다가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여 생육신들과 행동을 같이할 당시 단종1년(1453) 벼슬이 숭의당 군자주부에 이르렀으며 이후 관직을 모두 사퇴하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중종7년(1512)에 별세 하였다. 후일 숙종대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사례장으로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 137번지 현장소에 안장하였다.
▲인흥군(仁興君,1604-1651)묘 위치 :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산18-1 조선 제14대 선조의 제12왕자 자 가온 호 취은 시호 효숙(孝肅), 정효(靖孝) 어머니는 정빈민씨이다. 광해군 2년(1610) 7세때 인흥군에 봉해 졌으며 인조 2년(1624) 이괄난으로 왕이 공주로 피란할때 수행하였고 1627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고도 병자호란으로 집상을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왕을 수행했다. 종친부 유사당상사옹원 제조를 거쳐 효종1년(1650)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서 세폐요구와 축성등 병비에 대한 문책을 요령있게 답변하고 돌아왔다.
▲김흥근(金興根,1796-1870)묘 위치 : 포천군 일동면 기산리 46 소야골마을 금주산 동쪽 기슭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시호 충문(忠文). 자 기경(起卿) 호 유관(游觀) 영의정 홍근(弘根)의 동생. 순조 25년(1825)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헌종 1년(1835) 예조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안동김씨의 세도를 배경으로 방자한 행동이 많았으므로 탄핵을 받아 광양(光陽)으로 유배되었다. 철종 2년(1851) 풀려나 다시 좌의정이 되고, 다음해 영의정에 올랐다.
▲양사언(楊士彦,1517-1586)묘 위치 :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 조선 전기의 문신, 서예가 본관 청주(淸州) 자 응빙(應聘). 호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 명종 1년(154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 ·평창군수(平昌郡守) ·강릉부사(江陵府使) 함흥부사, 철원군수, 회양(淮陽)군수를 지내는 등 지방관을 자청하였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 때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安邊)군수로 재임 중 지릉(智陵)의 화재사건에 책임을 지고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나오는 길에 병사하였다. 시(詩)와 글씨에 모두 능하였는데, 특히 초서(草書)와 큰 글자를 잘 써서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렀다. 작품집에 《봉래시집(蓬萊詩集)》이 있고, 작품 중에는 많이 알려진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아니오르고 메만높다 하더라” 등이 있다.
▲이국주(李國柱,1487-)묘 위치 : 포천군 화현면 지현리 산5 중종20년(1525)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의장고(儀仗庫)의 낭청, 제용주부가 되었다. 그는 이때 부인 여주 민씨의 상배를 당해 독신으로 지내던 중 51세 때 아들 우민(友閔)의 주선으로 비안(比安) 박씨 문중17세 낭자와 재혼했다. 67세 때 한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선조때 명현으로 좌찬성을 지낸 오봉 이호민이다. 선생은 늦게 아들을 얻어 호민이 어릴때 이천현감(伊川懸監)으로 재직중에 별세하니 나이 70세였다. 아들이 현달한 뒤 연선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이사검(李思檢,1387-1446)묘 위치 :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 213-1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 양성 시호 공소(恭昭) 고려의 강릉도절제사자헌대부 정절공 이옥의 아들이다. 태종 5년(1405) 무과에 급제 사직을 지내고 태조 8년(1408)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세자를 보좌, 상호군에 승진하였고 세종 11년(1429) 좌군검총제, 세종 12년(1430) 경상좌도처치사(慶尙左道處置使)로 왜인들의 사변을 우려 성을 축조함에는 연호군(煙戶軍)으로 할 것을 품의하였다. 세종 16년(1434) 중추원부사, 세종 17년(1435) 동지중추원사로 명나라에 정조사로 가 북방 변경의 경보를 알리고 칙서를 받아왔다. 세종 19년(1437) 경상좌도도절제사를 거쳐 세종 21년(1439) 동지중추원사로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는 비변책을 건의, 병조에서 시행케 하였다. 세종 25년(1443)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고 이해에 하삼도목장(下三道牧場)을 순찰, 세종 26년(1444) 공조참판이 되고 내퇴마 외퇴마를 줄이지 않게 건의하였다. 이해 경창부윤(慶昌府尹)이 되었고 1445년 자헌대부 지중추원사에 오르고 이듬해 세종 28년(1446) 8월29일 66세로 졸하였다.
▲조경(趙絅,1586-1669)묘 위치 : 포천군 신북면 만세교리 1-1번지 신평리 함바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양(漢陽) 시호 문간(文簡) 자 일장(日章) 호 용주(龍洲). 주봉(柱峯) 광해군 4년(16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형조좌랑 ·목천현감(木川縣監) 등을 지내고, 162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정언(正言) ·교리(校理) 등을 역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을 지내고, 1636년 사간(司諫)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斥和)를 주장, 이듬해 집의(執義)로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군을 격퇴하자고 상소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뒤 응교(應敎) ·집의 등을 지내고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냈다. 1645년 이조참의가 되고, 대제학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 때 이도(吏道)를 쇄신, 관리 등용의 공정을 기해 명망을 얻었다. 1648년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효종 1년(1650) 청나라 사문사(査問使)가 와서 그를 척화신(斥和臣)이라 하여 의주에 귀양보냈다.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내고 은퇴, 행부호군(行副護軍)이 되어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글씨도 잘 썼다. 문집에 《용주유고(龍洲遺稿)》, 저서에 《동사록(東 錄)》이 있다.
▲김조택(金祖澤,1680-1730)묘 포천시 내촌면 마명리 조선 중기의 문신 광산(光山) 자 극념(克念) 호 평재(平齋) 아버지는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숙종 38년(1711) 생원시에 3등 21인으로 합격하여 음사로 현감이 되었고 경종 2년(1721) 정시 문과에 병과 5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경종 3년(1722)에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영조 2년(1725) 사면되어 귀환하였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종숙(金宗淑,1400-1471)묘 포천시 내촌면 내리산 12번지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호 동추(同樞) 밀직사사공 김승의 제4자로 출생 벼슬은 가선대부 행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성종 5년(1474) 3월에 정헌대부 의정부 찬성을 지낸후 아드님인 좌의정 문정공 김질의 훈로로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상락부원군에 추증되었다.
▲김질(金 礩,1422-1478)묘 포천시 내촌면 엄현1리 내촌중학교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시호 문정(文靖) 호 쌍곡(雙谷) 김종숙의 아들이다. 1450년 세종 32년 식년시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서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부인은 영의정 정창손 따님이다.
후일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장인인 정찬손의 강압을 받아 그의 사실을 고변하여 훼절하기도 하였으나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좌익공신 3등에 책훈되고 판군기감사로 승진되었다. 그후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1459년에 병조참판이 되면서 국방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다음에 세조의 두차례에 걸친 서도순행을 위한 평안도 황해도 순찰사가 되었으며 1461년에 평안도, 안동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1463년에 공조판서에 오른 뒤 병조와 형조의 판서를 거쳐 세조 12년(1466)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되었으며 다음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예종 1년(1469)에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471년에 상(王)을 잘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 2등과 상락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74년에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어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은 세조의 병제 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경국대전 편찬사에도 참여하였다. 1465년에는 병전을 교열하였으며 1470년에는 이전(吏典)의 교정도 맡았다.
▲김무(金碔,1441-1514)묘 포천시 내촌면 내리 산 12번지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김종숙의 4남 조카인 문경공 만보당 김수동과 영안군 김수경이 함께 1506년 연산의 폭정을 바로 잡기 위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세운 공으로 정국공신에 책훈되었다. 그 뒤 정헌대부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풍양군(豊陽君)에 봉해졌다. 공직생활중에도 너무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로서 청백록에 올라 있다. 그리하여 후손은 물론 세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김의동(金義童)묘 포천시 내촌면 엄현리)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김질의 장남 음사로 출사하여 여주목사를 지냈으며, 습봉은 길안군(吉安君) 이다.
이경여(李慶與,1585-1657)묘 포천군 내촌면 음현리 산22(매화동)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시호 문정(文貞) 자 직부(直夫) 호 백강(白江), 봉암(鳳巖) 목사 수록(綏錄)의 아들이다. 선조34년(1601) 사마시, 광해군1년(1609)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부수찬 부교리를 거쳐 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인조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했다.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하여 선비 양성의 방책을 상주했고,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인조20년(1642) 배청친명파로 몰려 청나라 심양에 억류되었다가 귀국 후 우의정에 올랐다. 이후 청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한때 억류되었고 영중추부사로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의 사사를 반대하다가 유배되기도 했다. 효종 즉위 후 영의정이 되었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 났으며 저서로 {백강집}을 남겼다.
1) 왕족묘역 ▲수도군(守道君?-?)묘 포천시 소흘읍 무림2리 휘 덕생(德生). 자 회부(晦夫) 호 묵은(黙隱) 정종(定宗)의 7남. 어머니는 숙의윤씨(淑儀尹氏). 명선(明善)의 품계에 이르렀으나 관직을 삭존(削尊)당하였다. 사후에 신원되어 영종정경(領宗正卿)의 벼슬과 군(君)에 추봉(追封)되고 희정(僖靖)의 시호를 받았다.
▲의성군(誼城君,1411-1493)묘 내촌면 음현3리 팔야동 휘 채(寀) 시호 호민(胡敏) 자 자홍(子弘) 효령대군(孝寧大君 補)의 장남. 1424년(세종 6) 군에 봉해지고, 1431년(세종 13) 정헌(正憲)의 품계에 특가(特加)된 후 숭록에 올라 1489년(성종 20) 현록대부가 되었다.
▲무송군(茂松君?-?)묘 내촌면 음현3리 팔야동 휘 전( ) 의성군(誼城君 寀)의 아들.
▲유성군(儒城君?-?)묘 내촌면 음현3리 팔야동 휘 임(任). 무송군의 장남.
▲숙혜옹주(淑惠翁主1413-1464)묘 창수면 주원1리 태종의 9번째 옹주. 어머니는 소빈노씨(昭嬪盧氏). 1425년(세종 7) 성원위(星原尉) 이정녕(李正寧)에게 출가하여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정양군(定陽君,1442-1492)묘 소흘읍 이곡리 휘 순(淳)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의 3남.
▲봉산군(鳳山君,1469-1519)묘 소흘읍 이곡리 휘 돈(敦). 정양군(淳)의 장남. 부인 청송심씨와 쌍분
▲덕림군(德林君1482-1541)묘 소흘읍 이곡리 심통원 묘 하단 휘 자(孜). 정양군(淳)의 4남. 품계는 승헌(承憲)에 오름.
▲광원군(廣原君,1514-1567)묘 내촌면 내4리 휘 구수(耈壽). 세종대왕 5남인 밀성군(密城君 琛)의 증손. 광성정(匡城正) 전(銓)의 2남. 사후에 군(君)에 추봉되고 승헌(承憲)의 품계가 추증됨.
▲숙의김씨(淑儀金氏,?-?) 일동면 화대리 중종의 후궁. 중종의 5녀인 숙정옹주(淑靜翁主)의 어머니. 묘는 원래 능성구씨의 가족묘인 양주군 소헌현(소軒峴)에 있었으나 최근에 이 곳으로 이장되어 숙정옹주의 남편인 능창위(綾昌尉) 구 한(具澣)의 자손들에 의해 외손봉사(外孫奉祀)되고 있다.
▲한음군(漢陰君,1530-1618)묘 가산면 정교리 휘 현(俔) 호 교취당(交翠堂). 임영대군(臨瀛大君 )의 증손. 청화군(淸化君)의 3남. 1562년(명종 28) 무과에 급제, 훈련원 정자를 제수받았고, 1579년(선조 12) 훈련원도정으로 승배(陞拜)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왕을 호가(扈駕)하였고, 그해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2품의 승계와 함께 봉군(封君)받았다. 이듬해 순안(順安)에 머무르며 영사잠(永思箴)을 지어올려 부총관에 제수되었으며, 1597년(선조 30) 중국사신 양호(楊鎬)를 영접하였다. 1617년(광해군 10)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대북파(大北波)인 이이첨(李爾瞻) 등을 반박하다 화를 입어 의창군(義昌君)과 함께 삭직(削職)되어 그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한음군의 묘는 원래 서울 강남구 서초동에 있었으나 1970년 정교리로 이장하였다. 석물은 모두 개수한 것으로 묘갈·혼유석·상석·망주석·장명등이 있다. 묘갈은 김란동(金瀾東)이 지었고, 행장은 6세손 이경조(李景祖)가 지었다.
▲밀산군(密山君,1585-1658)묘 소흘읍 무봉리 휘 찬(澯). 선조의 백형(伯兄)인 하원군(河原君 )의 손자. 아버지는 당은군(唐恩君) 인령(引 )이며 어머니는 판서 박계현(朴啓賢)의 딸이다. 처음 밀산부정(密山副正)에 제수되었고 정의(正義)의 품계에 올라 군의 봉호를 받았으며 벼슬은 도총관과 사옹원제조에 올랐다.
▲낭선군(朗善君,1637-1693)묘 영중면 양문리 휘 우 자 석경(碩卿). 호 관란(觀瀾). 인흥군(仁興君) 영(瑛)의 장남. 어머니는 군수 송희업(宋熙業)의 딸. 15세에 낭선군에 봉해졌고, 오위도총부도총관, 사옹원제조,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을 차례로 역임했다. 1662년(현종 3) 제종(諸宗)과 더불어 7조어필(七祖御筆)을 간행하여 임금에게 바치니 그 상으로 자헌(資憲)의 품계에 올랐다. 이듬해 사신으로 연경에 다녀왔으나 1664년 화를 입어 파직되어 한강변에 관란정(觀瀾亭)을 짖고 자호(自號)로 삼았다. 얼마 후에 복직되어 임금을 따라 온천에 갔었다. 1671년(현종 12) 연경에 다녀왔고 1674년 현종이 승하하여 수릉관(守陵官)에 취임했다. 1679년(숙종 5)『선원록(璿源錄)』을 발의할 적에 절목(節目)을 개진(開陣)해서 제조(提調)가 되었다. 1686년(숙종 12) 다시 연경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만수전(萬壽殿)의 화재사건이 일어나 왕보(王寶)가 불탓으므로 왕명을 받들어 다시 썼다. 1688년 장열왕후(莊烈王后)가 별세하여 명정과 지문을 썼고 다시 종친부유사당상을 역임했다. 다음해『열성어해집(烈聖御解集)』을 편집하며 종부시제조와 감수를 맡았다. 1690년(숙종 16) 왕명으로 선원보(璿源譜)를 태백산에 장치(藏置)하는 일을 맡았다. 시호는 효민(孝敏)이며 문학과 행실에 돈독하였고 글씨를 잘썼다.
▲전평군(全坪君,1659-1698)묘 영중면 양문리 휘 확 자 노백(魯伯) 호 노주(鷺洲) 낭선군 우의 계자. 생부는 낭원군 간(侃). 1675년(숙종 1) 전평부정(全坪副正)에 제수된 뒤 차례로 품계가 올랐으며, 1679년(숙종 5)『삼조어필(三朝御筆)』을 임금에게 올려 명의(明義)의 품계로 특가(特加)되면서 군으로 봉해졌고 뒤에 도총관에 올랐다.
▲전계군(全溪君,1664-1700)묘 화현면 명덕리 휘 부(溥). 인흥군(瑛)의 손자. 낭원군(侃)의 3남. 소의(昭義)의 품계에 이르렀고, 사후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추증됨.
▲여성군(礪城君,1688-1731)묘 소흘읍 직동리 휘 집(楫) 시호 효헌(孝憲) 자 제경(濟卿) 호 수분와(守分窩) 인조의 고손. 생부(生父)는 영창군(瀛昌君) 심(沈). 화천군(花川君) 비의 계자. 1704년(숙종 30) 여성군으로 봉해진 후 부총관을 거쳐 1719년 도총관에 승진, 종부시조제를 겸했고 1725년(영조 1)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양왕(兩王 : 王羲之·王獻之)의 필법을 터득하여 글씨에 뛰어났고 팔분체(八分體)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평생 효행으로 이름 높아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회평군(懷平君,1827-1844)묘 포천읍 선단리 휘 명(明). 시호 효민(孝愍) 초휘 원경(元慶).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장남. 사후 군의 추봉과 함께 현록대부에 추증되었다.
▲영평군(永平君,1828-1901)묘 포천읍 선단리 휘 경응(景應) 초휘 욱(昱). 전계대원군의 2남. 회평군의 제. 시호는 효정(孝貞).
▲청안군(淸安君,1851-1904)묘 포천읍 선단리 휘 재순(載純) 시호 문충(文忠) 자 덕일(德一) 호 성석(醒石) 전계대원군의 손자이며 영평군(景應)의 계자(繼子). 생부(生父)는 증 판서 휘응(徽應). 1868년(고종 5)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부교리를 시작으로 여러 요직을 거쳐 1876년(고종 13) 통정의 품계에 올랐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포위망을 헤치고 궁궐로 들어가 동궁을 보호했다. 1884년 평안도관찰사가 되고, 1887년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며 1894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이듬 해 임최수(林最洙) 등과 함께 춘생문사건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다음 해 아관파천으로 특사·궁내부대신에 발탁되어 중요직을 차례로 역임하고 1899년(광무 3) 청안군에 봉해졌다. 1902년에는 전권대신으로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하기도 하였다. 벼슬은 판돈녕원사에 이르렀다.
▲풍선군(豊善君,1875-1890)묘 포천읍 선단리 휘 한용(漢鎔). 전계대원군의 증손. 청안군(載純)의 계자(繼子). 생부(生父)는 재철(載徹). 사후에 가선(嘉善)의 품계와 함께 군에 추봉됨.
묘역은 원래 양주 홍제원에 있던 것을 1964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석물은 1979년에 개수한 것이다.
▲청풍군(淸豊君,1890-?)묘 포천읍 선단리 휘 해승(海昇) 호 송석(松石). 전계대원군 고손. 풍선군의 자.
▲신주(辛鑄,1430-1526)묘 포천읍 선단1리 분토골 조선 전기의 무신 . 본관 영산 자 성지(成之) 양지현감 포필(布弼)의 자. 1453년(단종 1) 무과에 급제하고 1457년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벼슬은 병조참판과 여러도의 관찰사를 역임했다. 함길도절도사로 있으면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것으로 전해 온다.
▲이 즙(李즙,1438-1509)묘 창수면 주원1리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성주(星州) 시호 공숙(恭肅) 자 화숙(和叔) 성원위(星原尉) 정녕(正寧)의 장자. 어머니는 숙혜옹주(淑惠翁主). 1469년(세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6년(성종 7)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1479년(성종 10) 별시공과(別試工科)에 합격하였고 2년 후 임계현령으로 나갔다. 1485년(성종 16) 통정의 품계로 올라 충청도와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호조·이조참판·대사간·홍문관제학을 거쳐 1492년(성종 23) 동지중추부사로 특배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사헌부대사헌에 올랐고 이어 경기도관찰사·한성판윤·공조·호조판서 등의 중직을 역임하였다. 1508년(중종 3)에 이조판서·좌참찬·대사헌·우찬성을 거쳐 70세가 넘어 기사(耆社)에 들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며 김세필(金世弼)이 행장을 지었다.
▲김 확(金확,1572-1633)묘 창수면 추동리 황골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 정경(正卿) 호 금사(金沙) 척약재( 若齋) 구용(九容)의 8대손. 의금부도사 대섭(大涉)의 아들. 어머니는 심 전(沈詮)의 딸. 지봉(芝峰) 이수광(李 光), 교산(蛟山) 허 균(許筠)의 처남. 하 곡(荷谷) 허 봉(許 )의 문인.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었으며, 1618년(광해군 10) 문과에 급제하여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를 역임하고, 1623년 명륜당과 정록청(正錄廳)을 중수한 공으로 병조정랑이 되었다. 1625년(인조 3) 직강·사예·사옹원정을 차례로 역임하고 통훈(通訓)으로 승계, 원주목사·순창군수 등의 외직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순창에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1629년(인조 7) 상의원정(尙依院正)과 철원부사를 역임하였으나 3년후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와 문장에 뛰어났고, 종증조부인 진사 윤복(胤福)에 의해 김씨의 소유가 된 영평의 금수정(金水亭)을 임진왜란 후 재건하여 안동김씨의 별업(別業)으로 세전(世傳)시켰다. 저서로 『금사고(金沙稿)』가 전한다.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의 딸인 동래정씨와 합장
▲서경우(徐景雨,1573-1645)묘 소흘읍 송우리 송우초등학교 뒤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달성(達成) 자 시백(施伯). 호 만사(晩沙) 약봉 서성의 장남. 어머니는 여산송씨로 목사 송 영(宋寧)의 딸. 서울 약현(藥峴) 출생.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올라 진사가 되고, 1603년 정시문과에 급제, 주서(注書)로 임명되었다. 1607년(인조 40) 서장관(書壯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정언·수찬·교리·지제교·장악원정·정주목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통정에 올랐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관직을 떠나 집에 머물러 있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일계급 삭훈(削勳)되었다가 이듬 해 이 괄의 난 때 상중(喪中)에도 어가(御駕)를 호종한 공으로 품계가 회복되었다. 1635년(인조 13) 인묘(仁廟)를 장릉(章陵)으로 추존하고 종정(從正)을 포상할 때 승지로 임명된 후 호조참의·대사간을 거쳐,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호종한 공으로 대사헌이 되었다. 그후 안변부사·형조판서를 거쳐 1644년(인조 22) 우의정과 판중추부사를 차레로 역임하였다. 만년에 관직을 떠나 유유자적 하였다.
▲김 경(金坰,1595-1671)묘 가산면 금현리 다대동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청풍(淸風) 자 중야(仲野) 청풍군(淸風君) 권(權)의 손자. 증 좌승지 흥상(興祥)의 차남. 인조가 임금이 되기 전 포의(布依, 선비)로써 친교가 두터웠다. 인조반정후 별제(別提)를 제수받아 관계에 들어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여러 고을의 현감을 역임했으며, 현종때 통정의 품계에 올라 첨증추부사 겸 오위장을 역임했다.
▲조병준(趙秉駿,1814-1882)묘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풍양(豊壤) 시호 효정(孝貞) 자 경범(景範). 나주목사 원영(原永)의 아들. 1834년(순조 34) 생원이 되었고 1838년(헌종 4)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모친상으로 인해 3년후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를 거쳐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했다. 1845년 가의대부 한성부좌윤을 역임하고 이조·형조·공조참판·도승지·대사성·홍문관부제학·규장각직제학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1851년(철종 2) 병조판서를 지내고, 1852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 1854년 다시 한성판윤이 되었고, 이듬 해 공조판서·대사헌·우참찬을 역임한 뒤 1856년 세번째 한성판윤을 지내고 이듬 해 벼슬이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에는 함경도관찰사 당시에 세워졌던 그의 선정비가 있다.
▲장 면(張勉,1899-1966)묘 소흘읍 이동교리 천주교 묘역 정치가. 본관 인동(仁同) 호 운석(雲石) 인천(仁川) 출신. 기빈(箕彬)의 자.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를 졸업한뒤 1919년 YMCA 영어학교(英語學校)를 나와 도미(渡美), 1925년 맨하턴(Manhattan) 카톨릭대학 문과(文科)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평양교구(平壤敎區)에서 교회 일을 보다가 상경하여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8·15광복 때까지 재직하였다. 1946년 정계(政界)에 진출하여 민주의원의원(民主議院議員)·과도정부입법의원(過渡政府立法議院) 등을 거쳐 1948년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에 당선되 었다. 이해 겨울,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우리 나라 수석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었다. 이어 대통령특사로 교황청(敎皇廳)을 방문한 후 미국에 들러 모교인 맨하턴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駐美大使)로 부임했고, 이듬해 영국 포오덤(Fordham)대학에서 다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주미대사로 서 유엔의 지원을 얻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51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사퇴하고, 이후 야당(野黨)의 지도자로 자유당(自由黨)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1955년 국회의장을 지낸 신익희(申翼熙)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조직하여 최고위원(最高委員)이 되고, 1956년 자유당의 부통령(副統領) 입후보자 이기붕(李起鵬)을 물리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해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상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경상(輕傷)에 그쳤다. 1957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되어 곽상훈(郭尙勳)·박순천(朴順天) 등과 함께 민주당 신파(新派)의 영수(領袖)로 활약하였다. 1960년 민주당 구파(舊派)의 조병옥(趙炳玉)의 런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다가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급서(急逝)와 부정선거로 낙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부정선거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제 5대 민의원(民議員)에 당선되고 이어서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 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잡았다.
집권 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자유민주주의 정책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5·16 군사혁명으로 9개월만에 실각하였다. 그후 정치정화법(政治淨化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한 때 박정희(朴正熙) 군사정부에 의해 이주당(二主黨)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석방된 후에는 주로 천주교 종교생활에 전심하다가 간염으로 별세했다.
▲홍원주(洪原周,1791-?)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 조선 순조·헌종 때의 여류시인 본관 풍산(豊山) 호 유한당(幽閑堂)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인모(仁模)와 여류시인인 어머니 영수합 서씨(令壽閤徐氏)의 3남 2녀 가운데 맏딸이며, 심의석(沈宜奭)의 부인이다. 석주(奭周)와 길주(吉周)의 누이동생이며, 숙선옹주(淑善翁主)와 혼인한 영명위(永明尉)인 현주(顯周)의 누나로, 형제 모두가 당대의 선비요 문장가들이었다.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에 출가하여서는 양자 심성택(沈誠澤)을 기르면서 현모양처로도 모범이 되고 시문을 잘 지어서 명성이 더욱 높았다.
그의 시는 정서적이고, 청신하면서 구구절절이 형제의 우애와 규방의 부덕과 규범 등을 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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