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참된 회심>
구원의 마리 헬레나 지음
I. 하느님의 계획
3. 인간의 자유의지(뜻) (1)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생명과 자유이다. 무에서 생명으로 불러주심은 기적에 가까운 선물이다. 거기에다 자유까지도 선사해 주신 것이다. 하느님 뜻을 따르고 하느님 안에서 살도록 창조하셨고 인간이 이 선물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자유를 주신 것이다. 인간이 선사받은 이 자유의지 (뜻)는 하느님의 뜻을 내가 받은 자유의지(뜻)로 껴안을 수도 배척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시기에 인간이 자유롭게 이 선택을 하도록 지켜보신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자유의지는 하느님이 원한 바를 인간도 원하고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되게 자신의 자유의지를 제대로 잘 사용하는 것이다.
간혹 사람들은 말한다. 왜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이런 문제들이 생기게 하실까? 처음부터 자유의지를 주시지 말고 모두가 하느님께 순명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을까? 그 답은 하느님은 로봇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 있는 존재를 만들 능력이 없어서 생명 없는 로봇을 만들지만 설령 그럴 능력이 있다 해도, 자기를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죽어도 안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ego)는 자기가 죽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자아(ego)의 속성이 자신이 스스로 지배권을 갖고 지배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거스를 줄 아시면서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실 수 있었다. 이 자유의지(뜻)의 가치를 잘 알아야 고귀한 선물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이 "자유"를 너무나 존중해서 아무리 천국이 좋다 해도 강요에 의해 데려가고 싶어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정말 좋은 것이 있으면 코를 꿰어서라도 그곳으로 자기의 처자식을,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로 데려가려 한다. 나중엔 그들도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에서 커다란 독거미가 몰래 다가와 주인공인 왕을 독으로 쏘자 마비되어 쓰러진다. 그러자 거미는 거미줄로 왕자를 칭칭 감아 놓고 사라진다. 그때 주인공의 신하가 왕이 죽은 줄 알고 울고 있다가 반대편에 거미와 한통속 인적들이 나타나자 몰래 숨는다. 적들은 거미줄에 감긴 왕자를 보고선 "아직 안 죽었어. 잠깐 마비된 것뿐이야. 거미는 이렇게 마비시켜 놓고 피를 빨아먹는 것을 좋아하거든. 피가 계속 신선하니까...." 신하는 왕이 아직 안 죽었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생기가 돈다. 구할 생각을 하니까… 그때 적들은 왕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영의 세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한 영혼이 자기의 실수이든 타의에 의해서이든 악마의 독침을 받을 때 용서와 사랑으로 독을 풀어 내지 못하면 어둠과 억압에 눌려 힘을 못 쓴다. 이때 악마는 저항 못하는 그들을 칭칭 묶어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간다. 독이 몸에 돌고 있는 동안에는 몽롱하고 비몽 사몽처럼 방향 감각이 없어진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아예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른다. 그저 힘들고 죽겠다는 것 밖에…
문제는 주님을 불러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그저 멍청하니 넋 빠진 상태로 있으면서 한다는 말은 고작 “아이고 힘들어라… 아이고, 그만 살면 좋겠다.... 지금 하던 것 때려치우고 편히 쉬면 좋겠다… 어서 이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등의 생각 뿐이다. 아예 싸울 마음도 의지도 없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독에 쏘이지 않는 사람들의 활동이다.
기도와 실제 행동으로 그들이 깨어나도록, 또 적의 손에서 빼내오도록 힘을 쓰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의식을(자유의지를) 잃고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도우는 것은 대단히 큰 선행이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마비된 영혼을 대죄 중에 있는 영혼으로 묘사한다.
"양손이 젖혀진 채 굵은 사슬에 묶이고 몸은 기둥에 동여진 채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진수성찬이 바로 곁에 놓였으니,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음식을 입에까지 옮길 수가 없고, 게다가 잔뜩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는 이제 막 숨이 넘어 갈락 말락 하고 있습니다. 이승의 죽음이 아닌 영원한 죽음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그래 이런 꼴을 보고만 앉아서 그의 입에 먹을 것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이것이 지독한 잔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대신 여러분의 기도로써 그 사슬을 끊어 준다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부디 여러분의 기도 중에 이런 영혼들을 항상 기억해 주십시오"(영혼의 성 7궁방 1.4).
인간은 이런 면에서 하느님이 안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자유를 존중하기에 강요를 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은 자기 뜻에 의해 지옥 가는 이웃을 그냥 그렇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처럼 울며불며 주님 대전에 앉아 구해주시라 부르짖으면 이 기도하는 이의 간청(뜻)에 따라 구해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영혼들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만큼 고통을 당했고 모두 용서해 주셨다. 따라서 이 은총을 받아들여 활용하는 이는 바로 주님의 고통을 주님대전에 되돌려 바치면서 그분의 고통과 수난, 죽음을 보시고 이 죽어가는 마비된 영혼을 살려주시라 그 옆 사람을 위해 간구할 때 그의 뜻에 따라(그를 구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도 하기에) 주님의 뜻과 부합한 그 기도가 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뜻을 스스로 자원해서 따르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축복과 부요함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이 소유하신 모든 축복과 선과 은총이 그에게 흘러 들어오고 하느님의 뜻을 자기의지(뜻)로 거부하면 이 은총의 통로를 자기 스스로 차단한 것이기에 그 힘(은총)을 받지 못해 말라비틀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내 안(뜻)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요한 15,5-6).
인간은, 자기 스스로 뭘 해 보라고, 하느님이 되라고 끊임없이 유혹을 받지만 실제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받은 자유의지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기쁘고 공손하게 받아들일 때 빛을 발하는 자유의지인 것이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라는 환상을 악마는 끊임없이 펼쳐 보이지만 한 두 번만 시도해 보아도 덧없고 허무하고 쓰거운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은 자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끝까지 영원히 속는다. 하느님이 원하시고 마련하신 하느님의 의지 (뜻) 안에 나의 의지(뜻)가 녹아들 때 참여로서 나도 하느님과 똑같은 하느님이 되고 하느님과 나의 구별이 없어져 마치 자신이 하느님인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마치 한 방울의 물인 인간의 의지가 바다인 하느님의 뜻 안에 잠겨 하나 되어 있으면 이 물방울이 자기 자신은 대양과 같은 바다라 느끼는 것처럼, 영혼도 하느님 뜻 안에 자기 뜻이 하나 되어 잠겨 있으면 하느님인양 느끼는 것이다. 물방울과 바닷물의 성분이 똑같기 때문에 전혀 이질감이 없이 자신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고 있다. 하느님과 구별 짓는 것이 자아(ego)이기에 자아(ego)만 빼내 버리면 하느님과 하나(합일) 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참된 회심/ 구원의 마리 헬레나 지음/ 기쁜소식)
도서 구입처: 참된 회심 | 도서 | 가톨릭 인터넷서점 바오로딸 (paulin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