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글은 삼국사기 지리지,고려사 지리지,세종실록 지리지,신증동국 여지승람 그리고 경국대전을 비교해
가며 쓰여진 글 입니다.역사는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단 해당시기의 정치권력과 함께하는 해석권력
을 가진자들의 얘기가 강단이자 제도권의 역사란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따라서 기존의 역사해설서 곳곳에
는 역사의 진실보다는 권력자들,승자와 다수자들의 편견과 아집이 아주 많이 들어가 있다.삼국사기지리지
를 시작으로 조선역사를 가름한다는 정사서들의 지리지들을 보면,그 스케일은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크다.
질과 양에서도 그렇고,강역의 스케일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하다.우선 통일신라 경덕왕 시대의
조선국 후예인 신라의 영토는 '9州, 5小京,117개 郡과 293개의 縣' 을 보유했던 광대한 제국이였다.따라서
광대한 역사의 동국이자 조선을 찾아 나설려면,흔히 듣고 볼수있는 정사서들 내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만큼,일반인들이 접할수 없는 '外書,文集,秘書' 등을 찾을 필요는 없다.
2, 삼국사기가 가짜가 아니고 반도에서 쓰여 졌으며 그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반도에는 삼국사기지리지
스케일의 삼국이나 통일신라는 담을수가 없다.진실대로 그 신라(동국)의 강역이자 활동 무대를 지리지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옮겨 놓는다면 그 지역은 반드시 광활한 중원 대륙이어야 한다.그래야 9명의 종2품의
절도사(관찰사,부윤과 동급 벼슬)가 근무지이자 요순시대와 周나라가 구분했다는 9州가 그려질수 있다.
그런후 종4품 117명의 군태수들이 근무,활약했던 郡과 293명이나 되는 종5품과 종6품의 현령과 현감들의
근무지를 찾아 넣을수 있을 것이다.여기에 더하여 중원경을 비롯해 5곳에 小京을 두어 통치했다는 것 자체
가 그만큼 통일신라의 강역이 넓었다는 뜻이다.삼국시대의 광대한 규모는 고려를 지나 이씨왕조 세종(1418
~1450) 시대에도 반도에는 도저히 담을수 없는 91개 郡과 180여개의 縣을 황제의 휘하에 두는 나라였다.
이어 중종(1506~1544) 시대에도 관할내의 지방에 84개 郡과 171개 縣을 보유한 광대한 나라였다.
3, 우리는 여기서 중앙정부의 관직과 품계로 지방으로 파견되었던 종 9품 벼슬인 '참봉,훈도,역승' 과 같은
직책(벼슬)도 아무나 할수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이들은 우선 한글이 아닌 한자를 알아야 업무
를 수행할수 있었다.즉 일반인들 대부분이 문맹자였던 시대에 이들은 문맹자가 아니였다.이러한 하위직들
도 지방에서는 높은 벼슬로 당연히 세습된다.통일신라를 물려받은 왕씨 고려는 현종(1009~1031)에 이르러
확고하게 강역을 재정비 한다고 쓴다.현종은 우선 난무한 節度使(대륙의 제도) 제도를 폐지하고,전국에 5개
의 都護(5방향)와 75개 지역에 安撫使(고등치안관)를 두웠다가,다시 4개 도호와 8牧을 설치했다고 고려사
지리지는 쓴다.그 후에 다시 고려의 전 영토를 5개 道와 2개의 양계(兩界)로 재정비 한후 '양광도,경상도,
전라도,교주도,서해도,東界와 北界' 구분지었다고 한다.바로 이때의 고려 영토에는 '4京,8牧,15府,129郡,
335縣,29鎭' 이 있었다고 쓴다.이러한 지리지의 고려영토를 반도에서 설명하기는 정말 어렵다.
4, 이것이 사실이라면 왕씨 고려는 통일신라보다 강역을 더 개척한 것이 된다.일찌기 고려는 광종 11년(960)
에 왕경개성부를 '皇都(황제가 정사를 펴는 곳)' 라고 개칭했으며,성종 14년(995)에는 황경 개성부에 6개의
赤縣과 7개의 畿縣을 속하게 할 정도의 황도 스케일을 자랑했다.다.여기서 8牧의 목은 중국사로 말하면,
'刺使' 와 같은 직책과 지위로 성종때는 12牧까지 둘 정도로 광대한 고려였다.이러한 '牧' 제도는 이씨조선
고종32년(1895)의 행정개편으로 역사서에서 사라진다.고려시대의 강역은 통일신라시대 보다 커졌고 왕경
개경부도 '皇都' 로 개칭한 것을 보면 현대륙의 유일한 통일皇國 지위로 왕씨의 고려가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한 지리지를 두고도 사가들의 농단에 의해 고려사는 황제국의 '本紀' 가 아닌,말단 제후국 기록인 '世家'
로 명명해 협소한 조선의 역사를 엮어 간다는 비극이다.고의와 의도성이 들어간 고려사인 것이다.
5, 근세조선에서의 지방조직을 보면,최고의 관직 품계인 종2품의 '관찰사,부윤,절도사' 들은 대체로 겸직을
하거나 군대와 관련이 있는 병마절도사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문제는 그 하부 조직인듯 하면서
도 별도의 '大都護와 都護' 란 국경및 변방에 배치한 무관조직 들이다.도호란 무관 관직은 대체로 정 3품(대
도호)과 종 4품(도호)의 고급무관으로 대도호는 牧使와 같은 직급이며,도호는 바로 그 아래 직급에 해당한다.
문제는 중앙정부에서 도호와 대도호부사를 지방으로 파견할 때의 그들이 할일과 존재의 목적은 바로 '영토
확장지(개척지)및 점령지역,변방의 이민족들 진압,관리,정벌,방어' 의 목적(고려시대의 윤관과 근조선의 김
종서 같은 인물들이 변방의 이민족 정벌과 개척사업을 함)이며,또 이런 기관들이 설치된 지역은 국경(변경)
지역이란 것을 밝혔다.그런데 이러한 '대도호' 지역을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들을 보면
'강릉,안동,영변,영흥(함흥)' 이란 4곳에 설치했고,관리자로 정3품의 大都護府使 들을 파견했다는 것이다.
6, 대도호의 아래 단계인 '도호부' 지역을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보면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나라의 변방도 아
닌 '水原' 을 비롯해 동국의 39곳이나 설치 했다는 것이다.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다시 확인해 보면,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보다 6곳이 늘어나 45곳에 도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도호부의 설치
목적이 나라의 국경이나 변방지역의 이민족 진무나 개척 점령지를 관리하기 위한 지방조직 이었다면,과연
현재의 반도에 이들을 넣어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반도 내륙의 중앙인 경상북도 안동과 동해 바닷가의
강릉지역에 어떠한 이민족들이 침략해와 난리를 피웠으며,거점으로 삼았기에 정3품의 고관이 통치하는 大
도호부를 설치 한다는 것인가? 반도에서 이런 대도호부들을 설치했다면 이건 국력 낭비가 된다.이러한 기록
들은 대륙 전체로 확대해 옮겨 놓으면 아주 적절하게 맞는다.평양 근처의 영변,함흥 근처에 이식된 영흥에
대호부가 자리 함도 정말 어색하다.우리는 일단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의 그 '東國(朝鮮)' 은 반도를 의미하
지 않는다는 것이고,輿地의 '輿' 도 황제의 수레(통치지역)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7, 이러한 도호부가 현재의 경기에 이식된 지명들에는 수원을 비롯한 8곳이나 있지만,그 아래에 자리를 펴게
한 충청도는 반도에서 바다를 접하고 있음에도 이민족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호부 자체
가 없다는 것이다.역사의 충청도에는 정3품의 목사가 4명이나 내려가 정사를 펼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음
에도 그 목사들이 군림하고 있었던 관청의 흔적 조차(忠州,淸州,公州,洪州)보이지 않고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이유는 이미 해당지역에 역사에서 말하는 목사나 관찰사가 보임했던 근거가 없다는 것을 권력자들과 제도권
사가들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그리고 경국대전을 비교해 근세조선
조의 지방 문관들과 무관 조직의 품계및 보임 관리들을 보면,'종 2품 관찰사가 8명,부윤이 4명,정 3품의 대도호
부사 4명,목사가 20명,종 3품 도호부사가 44(45)명,부사가 1명,종 4품 군수가 82명,서윤이 1명,守가 1명,종 5품
인 현령이 34명,판관이 34명,도사가 8명,令이 1명,종 6품 현감이 141명,찰방이 23명,監이 1명,교수 72명 등 총
807명 이란 고등문관' 들이 나라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8, 여기에 지방을 진무하는 무관으로 관찰사와 부윤이 겸직하기도 하는 '종2품 병마절도사 8명,정3품의 수군절
도사가 11명,병마수군절제사가 1명,병마절제사가 2명,종3품의 병마우후사 6명,병마첨절제사 53명,수군첨절제사
12명,정4품의 수군우후사 5명,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 105명,병마만호 18명,수군만호 54명,정6품의 병마평사
2명,종6품의 병마절제도위 209명 등 387명이란 고급무관' 들이 겸직을 하면서 지방 곳곳을 물 셀틈 없이 지키고
있었다.그런데 이런 거창한 문무 조직들은 우리가 흔히 역사에서 말하는 倭亂이나 胡亂때 아무런 역활도 하지
못하고,그때마다 슬그머니 사라지거나 있어도 쓸모가 없는 허무한 조직이 된다는 것이다.특히 무관직들인 병마
절도사나 수군절도사들은 높은 고급무관으로 과거에서 武科를 합격했던 사람들로 왕명에 의해 임명되나 이들도
국가가 변란을 맞이 해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 유명한 이순신도 동인(남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변방의 하위 직책을 지내다 수군만호,수군절도사를 지낸
다음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고 하나,이순신도 동인이자 남인들의 후광을 받지 않았다면 수군절도사나 삼도수군
통제사는 될수가 없었다.이순신과 연관된 모든 기록을 봐도 그는 용감한 장수였기 보다 말기 폐결핵 환자 였다는
사실이다.실제로 정3품의 문무관 조직들은 지방에서 좀 큰지역의 왕(王)이며 현령(현감)이란 직책도 왕경으로
부터 떨어져 매달려 있다는 뜻의 지방의 王을 의미한다.비교해 본다면 반도 보다 영토가 큰 일본도 현재의 지방
조직으로 縣이 43개(통일전에는 蕃이 300여개) 정도다.현재의 일본은 '1都(동경도),1道(북해도),2府(교토,오사카),
43縣' 으로 구분되고 있다.
9, 세종실록지리지는 세종실록 163권중 149~155권에 해당하는 8권 분량의 지리지다.세종의 명으로 세종 6년
(1424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단종2년(1454)에 완성을 보는 지리지로,세종14년(1432)이미 존재했던 '新撰 8도
지리지' 를 바탕으로 작성,편찬되었다고 한다.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는 실록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1910년 8월 이전까지 이씨왕조의 사람들은 알수가 없었다.즉 세종실록지리지는 20세기가 되면서 알려지게 되
었다.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1937년 일제의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최초로 '교정세종실록지리지'를 간행했다고
한다.반도에서는 1929년~1932년 사이에 지리지의 존재를 겨우 알수 있었고,1975년 실록국역사업 일환으로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에서 최초로 우리말 번역을 했다.경국대전은 경제 6전과 속 6전의 합으로 세조6년 (1466)
7월에 戶典 편찬을 시작으로 긴 시간의 수정과 이어지는 편찬을 거쳐 시작 20년 만인 성종 16년(1485)에 완성
시행된 것으로,건국후 90년 만에 완성한 법전이다.이것도 193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교정한후 활자 인쇄
로 간행했다.1985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번역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12년(1481)에 노수신 등이 50권을 완성했으니 이를 동국여지승람이라고 했다.이것을
성종 16년(1485)과 연산군 5년(1499)에 대대적인 수정 작업(김종직이 작업함)을 거쳐 중종 25년(1530)에 이행,
윤은보 등이 내용을 보완해 55권 22책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을 만들었다고 한다.이것을 1906년 일본인 후지가
미(淵上貞助)가 인쇄로 최초 발간한바 있고,1912년 일본인들의 '고서간행회' 에서 활판본으로 발행했다.바로
이때 반도에 맞추기 위해 많은 교정,수정,첨삭이란 변형을 주었다고 보여진다.1960년에는 서울대소장본을 바탕
으로 한 '영인본' 이 나왔고,1969년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글번역판을 출간했다.55권 22책으로 이루워진 신증
동국여지승람은 대황제국의 인문지리지 답게,'지도,역사(연혁),풍속,궁궐,산과 하천,토산물,조공물,유명사적' 등
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