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살기 좋아졌다지만
우리들의 거리엔 여전히 분노할 것이 넘친다.
장을 보며 분노하고, 밥을 먹으며 분노하고, 아이를 유치원&학교에 보내며 분노하고, 일을 하며 분노하고, 주유를 하며 분노하고, 운전을 하며 분노하고, 월급에 분노하고, 집값에 분노하고, 정치면 기사에 분노하고, 연애면 기사에 분노하고...
분노는 크게 양분해볼 수 있다.
특정 행동에 대한 분노와 특정 이념&사상에 대한 분노로. (물론 현실에선 복합적인 양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겠지만.)
특정 행동에 대한 분노는 대부분 개인 간 시비로 발생한다.
예컨대 운전 중 시비로 유발되는 분노라든가, 층간소음 갈등으로 유발되는 분노, 따돌림으로 인한 분노, 배우자의 외도로 인한 분노, 유산상속 문제로 인한 분노...
사람마다 판단이 다르니 행동이 다르고,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특정 이념&사상에 대한 분노는 주로 집단 간 시비로 발생한다.
이를테면 소수성애자에 대한 분노, 이념 대립으로 인한 분노, 기득권에 대한 분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
집단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정의구현의 방법이 다르면 갈등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분노는 인간의 본성이니 어쩔 수 없다.
운전 중에 심장 벌렁거리는 칼치기를 당하면 누구나 분노가 끓어오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렇다면 당한만큼 돌려주고 싶다. 아니 몇 배로 갚아주고 싶다. 그러나 막상 표출을 하면 범죄자가 된다. 도저히 열이 뻗쳐 참을 수가 없다면 으슥한 곳에 주차를 하고 야구방망이로 내차를 부수는 게 오히려 득이다.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면 당연히 분노가 끓어오른다. 총칼 앞세운 군부독재에 자유를 빼앗기면 분노할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의 선조&선배들이 모두 개인의 보신을 위해 망설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분노에도 가치가 있다.
세상이 살기 좋아진 덕에 목숨을 걸만한 분노는 대부분 사라졌다. 선조&선배 제위의 희생 덕에 남아있는 것들이라곤 대충 보신하며 때워도 되는 분노들뿐이다.
뒤에서 빵빵거리면, 개아들 놈! 욕을 해주면 그만이다.
야밤에 쿵쿵거리면, 열아들 놈! 귀를 틀어막으면 그만이다.
배우자가 바람이 나면, 잘 먹고 잘 살아라! 도장을 찍으면 그만이다.
忍×忍×忍에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분노가 표출된 기사가 실렸다. 바람난 아내에게 응징의 대검이 휘둘러지고, 퀴어 축제에 보수 기독교단체가 맞불 시위를 벌였다.
분노!
다혈질이 아니어도, 조절장애가 없어도 참기 어려운 건 안다. 하지만 분노가 표출된 이후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정당한 분노인가, 표출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적어도 세 번은 꼭 생각해봐야 한다. 일단 폭발하고 나면... 그때는 후회해도 너무 늦다.
김수영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