呂祖曰(여조왈) 宗旨只要純心行去(종지지요순심행거) 不求驗而驗自至(불구험이험자지)
1. 번역 : 여동빈 큰 스승이 말하였다.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뜻은 단지 순수한 마음을 행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純心行去) 효험을 구하지 아니하여도 효험이 절로 일어난다.
2. 참뜻 : 여동빈 근 스승이 말하였다.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뜻은 으뜸가는 신의 뜻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나게 하여 그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면 효험을 별도로 구하지 않더라도 효험이 절로 일어나게 된다.
大約初機病痛(대약초기병통) 昏沉散亂二種盡之(혼침산란이종진지) 卻此有機竅(각차유기규) 無過寄心於息(무과기심어식) 息者自心也(식자자심야) 自心為息(자심위식)
1. 번역 : 대체로 초기에 겪는 문제에는 멍해지는 혼침(昏沉)과 오만 생각이 다 떠오르는 산란(散亂) 두 가지가 있다. 이를 극복하면 기틀을 이루는 구멍(機竅)이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숨에 마음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없다. 숨이라는 것은 절로 나타나는 마음이 되고 절로 나타나는 마음은 숨이 된다.
2. 참뜻 : 넋의 작용을 그쳐 얼의 작용을 일으키고자 수련할 때에 초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멍해지는 현상과 오만 생각이 다 떠오르는 현상이 있다. 이는 그릇된 견해에 입각해 수련하거나 지나치게 어려운 방식으로 수련한 결과인데 자신에게 걸맞는 바른 수련을 하여 이를 극복하면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드러난다. 그러한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숨에 마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숨은 비유적 표현으로 마음에 나타나는 대상을 가리킨다. 색깔, 형태, 소리와 같은 표상이나 뜻이 마음을 이루는데 이러한 것들이 그러한 대상이 된다. 이러한 대상들이 절로 생겨나는 마음이며 절로 일어나는 마음은 그러한 대상들로 이루어진다.
一動而即有氣(일동이즉유기) 氣本心之化也(기본심지화야) 吾人念至速(오인념지속) 霎頃一妄念(삽경일망념) 即一呼吸應之(즉일호흡응지) 故內呼吸與外呼吸如聲響之相隨(고내호흡여외호흡여성향상수) 一日有幾萬息(일일유기만식) 即有幾萬妄念(즉유기만망념) 神明漏盡如木槁灰死矣(신명루진여목고회사의)
1. 번역 : 한 번 움직이면 곧 기(氣)가 생기는데 기는 본래 마음이 변하면서 생긴 것이다. 우리 사람의 생각은 지극히 빨라서 순식간에 하나의 헛된 생각이 한 번의 숨쉬기와 같이 일어난다. 고로 안으로 호흡하는 것과 더불어 밖으로 호흡하는 것이 메아리처럼 서로 따르는 것과 같다. 하루에 수만 번의 숨을 쉬니 곧 수만 번의 헛된 생각이 있게 된다. 신의 밝음이 새어나가 다함이 나무가 말라 재가 되어 죽는 것과 같다.
2. 참뜻 : 마음이 변해서 생기는 대상을 뭉뚱그려 기(氣)라고 부를 수 있다. 짐승에도 기가 있고 인간에게도 기가 있고 으뜸가는 신에게도 기가 있다. 짐승에게도, 인간에게도, 으뜸가는 신에게도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과 공간과 같은 것 역시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변해서 된 것이니 일종의 기로 볼 수 있다. 마음이 한 번 움직이면 기가 생겨나는데 이 기는 순식간에 나타나는 헛된 생각이며 한 호흡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 호흡은 하나의 뜻으로 이루어진 관념과 형상이나 소리와 같은 표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내호흡은 마음에서 절로 일어나는 기를 가리키고 외호흡은 육체로 경험하면서 마음에 나타나는 기를 가리키는데 이러한 기는 메아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하루에 수만 번의 호흡을 하는데 이는 수만 번의 헛된 생각을 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면 얼의 작용은 약화되어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나무가 말라서 재가되어 죽는 것과 유사하다.
* 모든 대상의 소재가 되는 절대자의 마음을 기(氣)라고 지칭할 수도 있다. 기라는 단어는 다른 한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然則欲無念乎(연즉욕무념호) 不能無念也(불능무념야) 欲無息乎(욕무식호) 不能無息也(불능무식야) 莫若即其病而為藥(막약즉기병이위약) 則心息相依是已(즉심식상의시이)
故回光必兼之調息(고회광필겸지조식)
1. 번역 : 그렇다고 하여 생각이 없어지기를 바래야 하는가? 생각을 없애는 일은 불가능하다. 숨쉬는 일을 멈추는 일을 바래야 하는가? 숨쉬는 일을 멈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 병을 없앨 수 없으나 약이 될 수 있다면 마음과 호흡을 서로 의지하게 만들 수 있을 따름이다. 고로 돌리며 비추는 일(回光)은 반드시 숨을 고르는 일을 병행해야 한다.
2. 참뜻 : 사람들이 생각만 하면 헛된 생각만 한다고 하여 생각이 사라지기를 원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마음에 떠올리는 것들이 모조리 헛된 표상과 헛된 관념이라고 하여 떠올림을 그치기를 원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일 역시 불가능하다. 수양의 핵심 중 하나는 그치는 일(止)에 있다고 하니 과거나 현재나 생각하는 일이나 표상과 관념을 사라지게 하는 일에 몰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고 결국 바르게 생각하며 참된 표상과 참된 관념을 떠올리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바른 표상과 바른 관념을 드러내는 일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此法全用耳光(차법전용이광) 一是目光(일시목광) 一是耳光(일시이광) 目光者外日月交精也(목광자외일월교광야) 耳光者內日月交精也(이광자내일월교정야) 然精即光之凝定處(연정즉광지응정처) 同出而異名也(동출이이명야) 故聰明總一靈光而已(고총명총일령광이이)
1. 번역 : 이 비법은 전적으로 귀에 들리는 빛(耳光)을 사용한다. 빛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빛(目光)과 귀로 들을 수 있는 빛(耳光)이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은 밖에 있는 해와 달이 어우러지며 나타나고 귀에 들리는 빛은 안에 있는 해와 달이 씨앗과 같은 정(精)을 섞으로 나타난다. 정(精)이라는 것은 곧 빛이 엉겨 머물러 있는 장소(光之凝定處)인데 같은 뜻이지만 이름이 다를 따름이다. 고로 보는 것에 있어서나 듣는 것에 있어서 밝다는 것은 하나의 신령한 빛일 따름이다.
2. 참뜻 : 돌리며 비추며 숨을 고르는 비법은 순전히 귀에 들리는 빛, 으뜸가는 신의 뜻을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으뜸가는 신의 뜻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으뜸가는 신의 뜻과 귀로 들을 수 있는 으뜸가는 신의 뜻이 있는데 눈으로 볼 수 있는 으뜸가는 신의 뜻은 물질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곳에 있는 으뜸가는 신의 관념이 으뜸가는 신의 표상과 어우러지며 생겨나고 귀에 들리는 빛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으뜸가는 신의 관념과 으뜸가는 신의 표상이 정자나 난자와 같은 씨앗과 같은 정(精)을 섞으며 나타나는 것이다. 정(精)이라는 것은 으뜸가는 신의 뜻을 있게 하는 씨앗과 같은 것으로 으뜸가는 신의 뜻이 엉겨 응축되어 있는 곳으로 볼 수 있다. 마음에 드러나는 진리와 진실은 하나의 신령하고 밝은 으뜸가는 신의 뜻이 변하여 마음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坐時用目垂簾後(좌시용목수렴후) 定個準則便放下(정개준즉편방하) 然竟放又恐不能(연경방우공불능) 即存於心聽息(즉존어심청식)
1. 번역 : 앉아서 눈을 발을 드리운 것처럼 한 후에 눈길을 코 끝에 맞추어 놓으면 자연히 마침내 내려놓게 되고 불안은 사라져 마음에서 숨을 듣게 된다.
2. 참뜻 : 마음을 살피며 얼의 작용을 일으켜 넋의 작용을 그치면 마침내 넋의 작용으로 인해 생긴 마음은 사라지고 으뜸가는 신의 뜻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드러난다.
息之出入不可使耳聞聽(식지출입불가사이문청) 惟聽其無聲(유청기무성) 一有聲即粗浮而不入細(일유성즉조부이불입세) 即耐心輕輕微微些(즉내심경경미위사) 愈放愈微(유방유미) 愈放愈靜(유방유정) 久之忽然微者遽斷(구지홀연미자거단) 此則眞息現前而心體可識矣(차즉신식현전이심체식의)
1. 번역 : 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소리를 귀에 들리지 않게 하고 오직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다. 한 번 소리가 나면 거칠고 떠서 가늘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인내심을 갖고서 가볍고 가볍게 하고 정교하고 정교하게 하며 작게 하고 더욱 내려놓으면서 더욱 작게 하며 더욱 내려놓으면서 더욱 고요해야 한다. 오래도록 하면 절로 미세한 숨이 갑자기 끊어진다. 이것이 곧 참된 숨이 앞에 나타난 것인데 마음과 몸이 알 수 있다.
2. 참뜻 : 마음에는 두 가지 소리가 나타나는데 넋의 작용에 의한 소리가 있고 얼의 작용에 의한 소리가 있다. 얼의 작용에 의한 소리는 소리 없는 소리에 비유되기도 한다. 한 번 넋의 소리가 일어나면 얼의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인내심을 갖고서 넋의 소리를 그치고 얼의 소리에 집중하여 더욱 얼의 소리를 크게 하고 더욱 넋의 소리를 그치면 어느 순간 미세하게 남아 있던 넋의 소리가 끊어지면서 으뜸가는 신의 소리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상태는 몸과 마음으로 절로 알 수 있다.
蓋心細則息細(개심세즉식세) 心一則動氣也(심일즉동기야) 息細則心細(식세즉심세) 氣一則動心也(기일즉동심) 定心必先之養氣者(정심필선지양기자) 亦以心無處入手(역이심무처입수) 緣氣為之端倪(연기위지단예) 所謂純氣之守也(소위순기지수야)
1. 번역 : 대체로 마음이 가늘어지면 숨도 가늘어진다. 마음이 하나이면 기(氣)를 움직인다. 숨이 가늘어지면 마음도 가늘어진다. 기가 하나이면 마음을 움직인다. 마음을 머물게 하려면 필히 기(氣)를 길러야 한다. 또한 마음을 가지고서 시작할 곳이 없는 관계로 기(氣)를 실마리로 삼는 것이다. 이른바 순수한 기(純氣)를 지켜야 한다.
2. 참뜻 : 마음에 나타나는 것에는 표상이나 관념이 있는데 표상이나 관념이 되기 전의 상태를 기(氣)로 지칭하기도 한다. 철로 만든 여러 형태의 도구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도구가 되기 전의 철이 기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대체로 얼의 작용이 일어나 으뜸가는 신의 소리가 들리면 마음도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된다. 마음이 한 번 움직이면 기를 움직이고 으뜸가는 신의 소리가 들리며 마음도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된다. 기가 한 번 움직이면 마음을 움직인다.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계속 머무르기 위해서는 기를 길러야 한다. 또한 마음으로 시작할 방법이 마땅히 없으니 기를 실마리로 삼아야 하는데 마음에도 넋의 작용으로 인해 생겨나는 마음이 있고 얼의 작용으로 인해 생기는 마음이 있으며 기에도 넋의 기가 있고 얼의 기가 있다. 얼의 기(純氣)를 지켜나가는 일이 기를 기르는 일이다.
子輩不明動字(자배불명동자) 動者以線索牽動言(동자이선색견동언) 即制字之別名也(즉제자지별명야) 既可以奔驅使之動(기가이분구사지동) 獨不可以純靜使之寧乎(독불가이순정사지령호)
1. 번역 : 그대들은 움직임을 뜻하는 동(動)이라는 글자를 정확히 알지 못 한다. 동이라는 글자는 묶어 끌어당겨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곧 다스림을 뜻하는 제(制)라는 글자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빠르게 달려 그것을 움직일 수 있다면 어찌 완전히 고요해짐으로써 편안해지지 않겠는가?
2. 참뜻 : 그대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제대로 알지 못 하고 어떻게 하면 제대로 움직여 으뜸가는 신의 뜻과 마음을 나타나게 하는지 알지 못 한다.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마음을 제어해야 하는데 이는 얼의 작용을 일으켜 넋의 작용을 그치는 것을 가리킨다. 넋의 작용을 완전히 그치면 어찌 얼의 작용이 일어나 마음이 으뜸가는 신의 마음과 같아지지 않겠는가?
此大聖人視心氣之交(차대성인시심기지교) 而善立方便以惠後人也(이선립방편이후인야)
1. 번역 : 이러한 가르침은 큰 성인이 마음과 기(氣)의 어울림을 보고서 알맞게 방편을 세워 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법이다.
2. 참뜻 : 큰 깨달음을 얻은 이는 마음과 마음에서 드러나는 것, 마음의 움직임을 깊이 탐구하여 그러한 것들의 어울림을 알아내서 다양한 수단들을 찾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알맞게 전수함으로써 후인들에게 은혜를 베푼다.
丹書云(단서운) 雞能抱卵心常聽此要妙訣也(계능포란심상청차요묘비결) 蓋雞之所以能生卵者(개계지소이능생란자) 以暖氣也(이난기야) 暖氣止能溫其殼(난기지능온기각) 不能入其中(불능입기중) 則以心引氣入其聽也(즉이심인기입기청야) 一心專注焉(일심전주언) 心入則氣入(심입즉기입) 得暖氣而生矣(득난기이생의)
1. 번역 : 단(丹)을 다루는 글에서 말하길 ‘닭은 알을 품고서 능히 마음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데 이는 중요하고 신비한 비결이다. 무릇 닭이 알을 부화시킬 수 있는 까닭은 따뜻한 기운 때문이다. 따뜻한 기운은 그 껍질을 따뜻하게 하는 데에서 그치고 껍질 속으로 능히 들어가지는 못 하는데 닭이 마음으로 이끌어 껍질 속에 들어가게 해 소리를 듣는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집중하는 것이다. 마음이 들어가면 기(氣)도 들어간다. 따뜻한 기운을 얻으면 결국 부화한다.
2.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다루는 글에서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을 닭이 부화하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닭은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나게 하는 이를 가리키며 알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고 부화하는 새끼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가리킨다. 따뜻한 기운에 비유되는 으뜸가는 신의 뜻이 알에 비유되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정화한다고 하여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드러난 것은 아니다. 으뜸가는 신의 뜻을 마음에 항상 간직한 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집중하고 생각하면 으뜸가는 신의 뜻은 닭이 알 속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들리게 되고 마침내 부화하는 새끼에 비유되는 감추어진 으뜸가는 신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故母雞雖有時出外(고모계수유시출외) 而常作側耳勢(이상작측이세) 其神之所注未嘗少閒也(기신지소주미상소간야) 即暖氣亦晝夜無間而神活矣(즉난기역주야무간이신활의)
1. 번역 : 고로 어미 닭이 비록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항상 곁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어 신(神)을 쏟아붓는 일에는 조금의 틈도 없게 하니 곧 따뜻한 기운 역시 밤낮으로 틈이 없어 신(神)이 살아있다.
2. 참뜻 :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으뜸가는 신이 마음에서 항상 살아있어 활동하게 해야 한다.
* ‘일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비결에서는 세 가지를 중시하는데 그 세 가지는 으뜸가는 신(先天眞一之氣, 精水)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天心, 意土)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뜻(光, 神火)이다.’ (참조 : 태을금화종지 번역 및 이해, p22) 신(神)은 으뜸가는 신의 뜻을 뜻하기도 하고 으뜸가는 신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으뜸가는 신을 가리킨다.
神活者(신활자) 由其心之先死也(유기심지선사야) 人能死心元神即活(인능사심원신즉활) 死心非枯槁之謂(사심비고고지위) 乃專一不分之謂也(내전일불분지위야) 佛云置心一處(불운치심일처) 無事不辦(무사불판) 心易走(심이주) 即以氣純之(즉이기순지) 氣易粗(기이조) 即以心細之(즉이신세지) 如此而已(여차이이) 而心焉有不定者乎(이심언유부정자호)
1. 번역 : 신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먼저 죽어야 한다. 사람이 능히 마음을 죽이면 으뜸가는 신이 즉시 활동한다. 마음을 죽이는 일이 나무가 말라죽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고 오로지 마음을 하나로 모아 나누어지지 않게 함을 가리킨다. 부처가 말하길 ‘마음을 한 곳에 두고 일하려 하지 말고 힘쓰지 말라.’고 했다. 마음은 달아나기 쉽기에 기(氣)로써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기는 거칠어지기 쉽기에 마음으로써 그것을 가늘게 한다. 이와같이 하면 어찌 머무르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2. 참뜻 : 으뜸가는 신이 마음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넋의 작용에 의해 생긴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 넋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마음을 죽이면 으뜸가는 신은 즉각적으로 활동한다. 넋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마음을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일은 나무가 말라죽는 것과 같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넋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마음과 얼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마음 두 가지가 인간의 마음에서 발견되는데 넋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마음을 사라지게 하여 얼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마음 하나만 남겨 놓으라는 말이다. 부처가 마음을 한 곳에 두라는 말 역시 얼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마음 하나만 남겨 놓으라는 말이고 일하려 하지 말고 힘쓰지 말라는 말은 넋의 작용을 그치라는 말이다. 으뜸가는 신의 마음은 쉽게 사라지기에 으뜸가는 신의 뜻으로 인간의 마음을 정화해야 하고 뜻은 욕망에 오염되기 쉬우니 으뜸가는 신의 마음으로 뜻을 다듬어야 한다. 이와같이 한다면 어찌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사라져 머물지 않겠는가?
大約昏沉散亂二病(대약혼침산란이병) 只要靜功(지요정공) 日日無間(일일무간) 自有大休息處(자유대휴식처) 若不靜坐時(약부정좌시) 雖有散亂亦不自知(수요산란역부자지) 即知散亂即是卻亂之機也(즉지산란즉시각란지기야) 昏沉而不知(혼침이부지) 與昏沉而知(혼침이부지)
相去矣奚啻千里(상거의해시천리) 不知之昏沉眞昏沉也(부지지혼침진혼침야) 知之昏沉非全昏沉也(지지혼침비전혼침야) 清明在是(청명재시)
1. 번역: 대체로 멍해지고(昏沉) 오만 생각이 다 나는 두 병은 조용히 있는 일(靜功)을 성취하고 매일 그리하면 큰 휴식의 장소에 있게 되어 낫는다. 만약 조용히 앉아 있지 않으면 오만 생각이 다 나더라도(散亂) 스스로 알지 못 한다. 산란을 아는 일이 산란을 물리치는 기틀이 된다. 멍한데 그러한 상태를 알지 못 하는 것과 멍한데 그러한 상태를 알아채는 것은 서로 천리나 떨어져 있는 것과 같다. 알아채지 못 하는 멍한 상태가 진짜 멍한 상태이고 알아채는 멍한 상태는 완전히 멍한 상태는 아니다. 맑고 밝음이 이 안에 있기 때문이다.
2. 참뜻 : 멍해지고 넋의 작용으로 인해 오만 생각이 다 나는 두 병은 얼의 작용을 일으킬 줄 알고 매일 얼의 작용을 일으켜 넋의 작용을 그치면 고쳐진다. 만약 얼의 작용을 일으켜 넋의 작용을 그치지 못 하면 넋의 작용으로 인해 오만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한다. 넋의 작용에 의해 오만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넋의 작용에 의해 오만 생각이 일어나는 일을 멈추게 하는 바탕이 된다. 멍한데 멍한 상태를 모르는 것과 멍하지만 멍한 상태를 알아채는 일은 깨달음의 경지에 큰 차이가 있다. 알아채지 못 하는 멍한 상태가 진짜 멍한 상태이고 멍한 상태를 알아채는 멍한 상태는 완전히 멍한 상태는 아니다. 으뜸가는 신이 활동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그러하다.
散亂者神馳也(산란자신치야) 昏沉者神未清也(혼침자신미청야) 散亂易治昏沉難醫(산란이치혼침난의) 譬之病焉(비지병언) 有痛有癢者藥之可也(유통유양자약지가야) 昏沉則麻木不仁之症也(혼침즉삼목불인지증야)
1. 번역 : 넋의 작용에 의해 오만 생각이 다 나는 일은 신(神)이 달리기 때문이고 멍해지는 이유는 신이 맑지 않기 때문이다. 넋의 작용에 의해 오만 생각이 다 나는 일은 바로 잡기 쉽지만 멍해지는 일은 치료하기 어렵다. 병에 비유하자면 고통스럽고 가려운 것은 약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멍해지는 일은 곧 마비가 되어 감각이 사라진 것과 같다.
2. 참뜻 : 넋의 작용에 의해 오만 생각이 다 나는 일은 신이 활동하지만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기에 생기는 현상이고 멍해지는 일은 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오만 생각이 다 나는 일은 고치기가 쉽지만 멍해지는 일은 고치기 어렵다. 병에 비유하자면 오만 생각이 다 나는 일은 약으로 치유 가능한 병이고 멍해지는 일은 감각이 사라지며 죽기 직전의 상태라 고치기 어려운 병이다.
散者可以收之(산자가이수지) 亂者可以整之(란자가이정지) 若昏沉則蠢蠢焉 冥冥焉(약혼침즉준준언 명명언) 散亂尚有方所(산란상유방소) 至昏沉全是魄用事也(지혼침전시백용사야) 散亂尚有魂在(산란상유혼재) 至昏沉則純陰為主矣(지혼침즉순음위주의)
1. 번역 : 흩어지는 것은 거둘 수 있고 어지러운 것은 정돈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멍해지면(昏沉) 지극히 어리석어져 아무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게 된다. 오만 생각이 다 나며 갈피를 못 잡는 마음에는 오히려 그러한 마음을 있게 하는 장소가 있는데 멍한 상태에 이르면 오로지 넋(魄)만이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오만 생각이 다 나며 갈피를 못 잡는 마음에는 오히려 얼(魂)의 작용이 있는데 멍 해지면 순수한 음한 것(陰)이 주인이 된다.
2. 참뜻 : 오만 생각이 다 나고 그러한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니다. 청소할 때 흩어진 것은 모일 수 있고 난잡한 것은 정돈될 수 있는데 마음에서도 얼의 작용을 일으키면 그와 같은 청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멍한 상태에 이르면 아무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으며 어리석어지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인데 그 이유는 마음에 얼의 작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만 생각이 다 나는 산란(散亂)에는 얼의 작용이 일어나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여전히 있지만 멍 해지는 혼침(昏沉)에는 넋의 작용만 있을 따름이다. 산란에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여전히 있기에 으뜸가는 신이 일으키는 얼의 작용 역시 여전히 있지만 혼침에는 넋의 작용을 일으키는 넋만 남게 되어 넋이 의식의 주인이 된다.
靜坐時欲睡去便是昏沉(정좌시욕수거편시혼침) 卻昏沉只在調息(각혼침지재조식) 息即口鼻出入之息(식즉구비출입지식) 雖非眞息而眞息之出入亦於此寄焉(수비진식이진식지출입역어차기언)
1. 번역 : 조용히 앉아 있을 때 졸리면 이는 멍한 상태인 혼침에 빠진 것이다.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은 단지 숨을 고르는 일에 달려 있다. 숨쉬는 일은 입과 코를 통해 이루어진다. 비록 참다운 숨은 아니지만 참다운 숨의 들이쉼과 내쉼 역시 이것에 의지한다.
2. 참뜻 :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떠올리고자 하지만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고 머리가 아프거나 졸리기만 하면 이는 멍한 상태인 혼침에 빠진 것이다. 혼침에서 벗어나는 일은 단지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일에 달려 있다.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일은 숨을 고르는 일(調息)에 비유된다.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일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일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입이나 코로 숨 쉬는 일(息)과 참다운 숨 쉬는 일(眞息)을 고대인들은 구별하는데 참다운 숨 쉬는 일은 마음에서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일을 가리킨다.
조식(調息)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단어
비유로 쓰인 단어 | 뜻 |
생사 | 마음에 있는 참된 생명을 지닌 존재 |
들숨 | 시각적인 것, 청각적인 것, 촉각적인 것, 후각적인 것, 미각적인 것 |
날숨 | 뜻(주로 언어로 표시) |
凡坐需要靜心純氣(범좌수요정심순기) 心何以靜(심하이정) 用在息上(용재식상) 息之出入惟心自知(식지출입유심자지) 不可使耳聞(불가사이문) 不聞即細(불문즉세) 細則清(세즉청) 聞則氣粗(문즉기조) 粗則濁(조즉탁) 濁則昏沉而欲睡(탁즉혼침이욕수) 自然之理也(자연지리야)
1. 번역 : 무릇 앉아 있을 때에는 반드시 조용한 마음(靜心)과 순수한 기(純氣)를 얻어야 한다. 마음이 어찌하면 조용할 수 있는가? 그러한 작용은 호흡에 달려있다. 숨이 나가고 들어가는 일을 오직 마음이 스스로 알아야 하지 귀로 하여금 들으려 해서는 안 된다. 들리지 않으면 가늘어지고 가늘어지면 깨끗해진다. 들리면 기(氣)가 거칠어지고 거칠어지면 더러워진다. 더러워지면 멍한 상태인 혼침(昏沉)에 빠지고 졸리는데 이는 절로 그러한 이치인 것이다.
2. 참뜻 :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의 뜻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 어찌하면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는 관찰과 생각에 달려있다. 표상이나 관념의 인식은 절로 나타나게 해야 하며 억지로 그러한 것들을 인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억지로 인식하려 하면 넋이 작용하기에 그러하다. 넋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얼의 소리가 들리는데 얼의 소리는 면면히 이어지고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넋의 소리가 들리면 뜻이 끊기고 욕망이 느껴지는데 욕망이 마음에 가득하면 멍해지고 졸음이 오게 된다. 이는 절로 그러한 이치인 것이다.
雖心用在息上(수심용재식상) 又要善會用(우요선회용) 亦是不用之用(역시불용지용) 只要微微照聽可耳(지요미미조청가이) 何為照(하위조) 即眼光自照(즉안광자조) 目惟內視而不外視(목유내시이불외시) 不外視而惺然者即內視也(불외시이성연자즉내시야) 非實有內視
(비실유내시) 何為聽(하위청) 即耳光自聽(즉이광자청) 耳惟內聽而不外聽(이유내청이불외청)
不外聽而惺然者即內聽也(불외청이성연자즉내청야) 非實有內聽(비실유내청)
1. 번역 : 비록 마음의 작용이 숨에 달려있다고는 하지만 올바르게 작용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그 작용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이 작용은 작용하지 않는 작용이라서 단지 극히 알쏭달쏭하게 비추어 들을 수 있을 따름이다. 어찌하면 비출 수 있는가? 곧 눈의 빛이 스스로 비추는 것이니 눈은 오로지 안을 볼 뿐 밖을 보는 것은 아니다. 밖을 보지 않고서도 뚜렷이 깨어있는 것이 곧 안을 보는 것(內視)이다. 실제로 있는 몸 속을 보는 것이 안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어찌하면 들을 수 있겠는가? 곧 귀의 빛으로 절로 들리는 것이니 귀는 오로지 안을 듣는 것(內聽)이지 밖을 듣는 것이 아니다. 밖을 듣지 않고서 절로 깨닫는 것이 곧 안을 듣는 것이다. 실제로 있는 몸 속을 듣는 것이 아니다.
2. 참뜻 :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표상과 관념에 달려있다고는 하지만 얼의 작용이 일어나게 하여 마음의 작용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작용을 깨달아야 한다. 얼의 작용은 넋의 작용과 딱히 구별되지 않기에 알쏭달쏭하게 일으켜 들을 수 있을 따름이다. 어찌하면 으뜸가는 신이 만들어내는 표상을 나타나게 할 수 있는가? 얼의 눈이 스스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니 눈은 오로지 마음을 볼 뿐 육체의 눈으로 외부를 보는 것은 아니다. 외부를 보지 않고서 마음에서 으뜸가는 신이 만들어내는 표상을 보는 것이 안을 보는 것이다. 실제로 몸 속을 보는 일이 안을 보는 것이 아니다. 어찌하면 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얼의 귀가 스스로 소리를 만들어내어 듣는 것이니 귀는 오로지 안을 듣는 것이지 육체의 귀로 외부의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다. 밖을 듣지 않고서 으뜸가는 신의 뜻을 듣는 것이 안으로 듣는 것이지 몸 속에 있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안을 듣는 것은 아니다.
聽者聽其無聲(청자청기무성) 視者視其無形(시자시그무형) 目不外視(목불외시) 耳不外聽(이불외청) 則閉而欲內馳(즉폐이욕내치) 惟內視內聽則又不內馳(유내시내청즉우불내치) 而中不昏沉矣(이중불혼침의) 此即日月交精交光也(차즉일월정교광야)
1. 번역 : 듣는다는 것은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본다는 것은 그 형태 없는 형태를 보는 것이다. 눈으로 외부의 형태를 보지 아니하고 귀로 외부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닫혀서 안으로 달리고자 한다. 오직 안으로 보고 안으로 들으면 또한 안으로 달리지 않고 중(中)에 이르러 멍한 상태인 혼침(昏沉)에 이르지 않는다. 이것이 곧 해와 달이 정을 교접하고 빛을 교접하는 것이다.
2. 참뜻 : 안으로 듣는다는 것은 넋의 작용이 그친 소리를 듣는 것이고 안으로 본다는 것은 넋의 작용이 그친 형태를 보는 보는 것이다. 안으로 보고 안으로 듣는다고 하니 눈, 귀를 닫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오로지 안으로 보고 안으로 들어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나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이르러 멍한 상태인 혼침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표상과 관념을 있게 하는 씨앗이 서로 교접하는 방식이고 표상과 관념에 감추어진 으뜸가는 신의 뜻이 서로 교접하는 방식이다.
* 으뜸가는 신의 마음은 연중(緣中)이나 허중(虛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중(中)은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가리킨다. (참조 : 태을금화종지 번역 및 이해, p5, p34)
昏沉欲睡(혼침욕수) 即起散步(즉기산보) 神清再坐(신청재좌) 清晨有暇坐一柱香為妙(청신유가좌일주향위묘) 過午人事多擾易落昏沉(과오인사다요이락혼침) 然亦不必限定一柱香(연역불필한정일주향) 只要諸緣放下(지요제연방하) 靜坐片時(정좌편시) 久久便有入頭(구구편유입두) 不落昏睡矣(불락혼수의)
1. 번역 : 멍한 상태인 혼침에 이르러 졸리면 일어나 걸은 뒤 얼이 맑아지면 다시 앉아라. 청량한 새벽에 틈이 있을 때 한 자루 향이 타는 동안 앉아 있으면 효과가 좋다. 낮에는 일들이 많아 어지러워져 쉽게 멍한 상태인 혼침에 빠진다. 하지만 반드시 한 자루 향이 타는 동안만 앉아 있는다고 제한할 필요는 없다. 오직 모든 세상사를 내려놓고 일정 시간 조용히 앉아 있으면 된다. 오래도록 그리하면 문득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있고 멍한 상태에 빠지며 졸리지 않는다.
2. 참뜻 : 멍한 상태인 혼침에 이르러 졸음이 살짝 오면 생각을 관두고 바람을 쐬며 산보하는 것이 좋다. 그리하면 머리가 맑아 오는데 이는 으뜸가는 신의 활동이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청량한 새벽에 한숨 푹 자고 일어나 틈을 내어 수련하면 효과가 좋다. 낮에 삶에 종사하다 보면 일에 치여 오만생각에 시달려 쉽게 멍한 상태인 혼침에 빠지기 쉽다. 그렇다고 하여 새벽에 틈을 내어 수련하는 방식이 절대적인 방식은 아니고 단지 세상사를 모두 내려놓고 일정 시간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기만 하면 된다. 장기간 수련하면 으뜸가는 신이 의식에 들어와 활동하게 되고 그리되면 멍한 상태인 혼침에 빠져 졸리는 일은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