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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법화경과 그 영향
3. 일련(日蓮)과 일련정종(日蓮正宗)
영국의 앵글로·색슨족은 1000년경에 세계의 종말이 오고 예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는 무시무시한 재앙과 도덕적 타락이 말법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경전에서는 이 시기를 정법의 정신이 소멸한 말법시대로 규정한다. 후기 헤이안시대에 사람들은 승병의 출현과 도덕의 붕괴, 제국의 약화, 반란, 그리고 잔혹한 봉건적 전쟁을 목격하였다. 그러한 사건들이 말법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널리 여겼지만 정확하게 언제 말법시대가 일어날지는 불분명했다. 일본인들 대부분은 1052년에 발생한 장곡사(長谷寺, Ch?kokuji)의 방화를 말법시대의 시작으로 여겼다. 그러나 일련(Nichiren)은 이미 1034년에 말법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친란은 1224년이 말법 이후 683년이라고 계산했다. 어쨌든 이 시기 이후 일본의 신앙은 종교적 영성을 기대할 수 없는 이 말법 시기에 어떻게 불교도로 살며, 불교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절박한 상황을 인식하는 데서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종교적 영감을 위해 의지할 수 있는 표준적인 원전조차도 없는 우주와 종교의 대재앙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헤이안시대 다음은 가마쿠라(鎌倉, Kamakura, 1185-1333)시대이다. 가마쿠라는 헤이안의 몰락을 이끌어 낸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을 잠시 통치했던 미나모토 원씨(源氏, Minamotos)가 택한 곳이다. 예상과 달리 가마쿠라 시기에 말법 이론은 불교의 창조적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 일본불교는 개인적·사회적·종교적 조화와 위안을 위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법연(法然, H?nen, 1133-1212)과 그의 제자 친란(親鸞, Shinran, 1173-1262)이 발전시킨,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자비로 일체 중생을 구원하는 아미타불에 귀의하자는 매우 단순한 신앙도 나타났다. 다른 한편 도원은 개인의 내적 수양만이 외부에 의존하는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 금욕적인 성향의 조동선(曹洞禪)을 중국으로부터 도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문제에 대한 일련의 해결책은 전혀 달랐다. 일련은 예언자였다. 그는 『법화경』에 근거하여 당시의 잘못에 대해서 예리하고 거침없이 말하였다. 그는 다른 모든 종파에 대해 비판했으며 정부에 대해서는 진리를 따르고 이단의 교리를 억제하라고 했고, 교토의 황제에게는 『법화경』을 통하여 일본에 불국토를 건설하라고 하였다. 그는 이 가르침이 계속 전파되어 일본에서 나아가 전세계로 확대될 수 있으며, 중생을 정신적 타락에서 구해내, 바로 이 세상에 석가모니 붓다의 정토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일련은 1222년에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11살에 출가하였고, 비예산에서 천태종을 공부하고 이어서 당시 일본의 다른 모든 종파의 이론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의 경전 지식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심지어 그에게 동조하지 않는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는 매우 인기가 없었다) 그의 학식에 대해서만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이성적 논쟁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경전의 증거를 인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한 숙련된 이론가였다.
일련의 첫 저서는 유명한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Rissh? Ankoku Ron)』이었다. 이것은 일련이 1260년에 호조[北條, H?j?]에게 바친 것이다. 호조는 미나모토가(家)로부터 강력한 권력을 물려받았다. 『입정안국론』에서는 일련의 특징과 그의 많은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련이 자신을 찾아온 손님과 나눈 대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왜 이 세상이 이와 같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통하여 많은 징조를 보아 왔다. 기근, 전염병 등으로 온 나라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말과 소 같은 가축들이 길가에서 죽어 가고 있고, 사람들조차 길가에 방치된 채 죽어 가고 있지 만 누구 하나 이들을 묻어 주지 않는다. 인구의 반 정도가 피해를 입었고 이제 무사한 집은 없다. … 불교의 삼보(三寶)는 남아 있다. … 왜 세계가 이미 쇠퇴해 가고 국가의 법이 끝나고 있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대는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Gosho Translation Committee 2003: 6-7)
일련에 의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사악해져서 모든 수호신들이 이 나라를 떠났고, 대신 악마들이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말 그대로 악령에 휩싸인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경전에 나온다. 일련은 그 한 예로서 『금광명최승경』의 한 장을 인용했다. 이 경은 특히 왕도(王道)에 대한 정치적 조언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에서 매우 인기 있었던 경전이다. 이 경전에는 사천왕이 이 경전을 받들지 않고 사악한 짓을 행하는 국가들에서 떠나고 그 나라들에는 결국 무시무시한 재앙이 뒤따랐다는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다른 경전에서도 이러한 재앙의 원인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사악한 신, 보다 엄밀하게는 적어도 잘못된 경전이나 소승의 경전을 따랐기 때문이다. 일련은 중국에서도 황제가 불교를 탄압했을 때 외부의 침입과 재앙이 있었다고 했다. 특히 아미타불을 숭배하는 법연의 정토종이 냉혹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어서 일련은 염불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염불(念佛)무간(無間)]고 했고, 선종을 천상의 악마[선천마(禪天魔)]로 단언했으며, 진언종(眞言宗)을 나라를 망치는 사악한 힘[진언(眞言)망국(亡國)]으로 간주했고, 율종(律宗)을 국가의 도적[율(律)국적(國賊)]으로, 천태는 ‘구식이다’라고 말한다. 일련은 불교와 당시 일본의 정치 상황을 동일선상에 놓고 파악했다. 일본에서 진정한 통치권은 황제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통치하려고 하는 것처럼 진정한 붓다는 『법화경』에 나오는 영원한 석가모니불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도 많은 붓다들과 경전들이 있어 각 종파마다 서로 다른 붓다와 경전을 최고로 받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로부터의 일탈은 종교에서나 정치에서나 하나같이 재앙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의 황제, 하나의 붓다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곳에서도 일련은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자 하지만 군주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 만일 한 국가에 두명의 군주가 존재한다면 평화로울 수 없다. 한 가정에 두 명의 가장이 있다면 가족 사이의 분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한 권의 경전이 다른 경전의 왕이 되어야 한 다. (Petzold 1977: 49-50)
사악한 가르침을 숭배함으로써 국가에 재앙이 생겼기 때문에 정부는 사악한 교리들을 제거할 의무가 있다. 일련은 일부 불교도 가운데 이러한 결론에 불만을 나타내는 자가 있겠지만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경전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였다. 『대반열반경』에서 붓다는 전생에 몇몇 브라만들이 불교를 비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들을 죽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대로 두면 계속 불교를 비방하여 벌을 받게 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경전에서 대승의 추종자들은 만일 정법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장을 하고 파계(破戒)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입법계품」에서 선재의 좋은 벗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날라(Anala)왕은 ‘살생은 처벌을 통해서 나쁜 사람을 변화시키는 신성 한 봉사’라고 말하고 있다. 무착과 법장에 따르면 오직 진정한 대보살만이 파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련은 스스로를 위대한 보살로 간주하였고, 지금과 같은 말법의 시대에는 사람들을 재앙에서 보호 하기 위해 삿된 것을 억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일련이 실제로 ‘이교도’를 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견이 있다. 오히려 그는 정부가 재가자들로 하여금 이단자들을 더 이상 후원하지 않게 해서 이단자들을 굶주리게 한 뒤 진리의 길로 이끌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Petzold 1977: 77). 그러나 일련은 의심할 여지없이 제자들에게 정당한 사유로 싸움을 인정하였다. “현생에 그대는 광포한 영혼들이 떠도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분명 사후에 불국토에 태어날 것이다”(앞의 책: 83). 경전에 나오는 살생 허용을 일본에서만 이용한 것은 아니다. 동양 무술에 열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국 승려들이 사는 소림사의 ‘무술 승려’들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중 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이용하여 “중국불교도호”라고 명명한 전투기를 마련할 기금을 모을 수 있었으며, 이 전투기는 한국전쟁에서 이른 바 미국이라는 “악마들”을 타파하는 데 쓰였다. 드미에빌은 대승불교가 계율에 유연성을 부과하여 비대승불교보다 ‘자비’를 위한 살생을 더 정당화한 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일련은 정법이 나타날 때까지 재앙은 계속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따르는 데 실패한 것은 업의 상당한 과보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참된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마음도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한 나라나 세계의 불일치는 세계의 커다란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더 큰 재앙, 특히 외적의 침입이 뒤따를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쿠빌라이 칸의 몽골군이 침입한 것을 일련은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일련은 폭도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거의 사형당할 지경(신이 중재하였다고 전해진다)에 이르렀고, 2번 유배되었다. 그는 1282년에 죽었다고 하지만 믿을 만한 자료는 거의 없다.
일련은 말법시대에는 『법화경』을 통한 신앙에 의해서만 구제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일련의 가르침에 따르면 『법화경』이야말로 완벽한 것이며, 궁극적인 진리를 전하며, 말법시대의 사람들은 단순한 가르침을 원하며, 실로 말법시대는 이 『법화경』의 진리를 전할 때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이 방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나라이며, 이 가르침은 일본을 기점으로 전세계로 확산되리라고 보았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다른 종파들은 이 궁극적인 진리를 준비하는 데 할애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므로 이제는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일련의 『법화경』에 대한 가르침의 내용은 삼대비법(三大秘法)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삼대비법은 본존(本尊, honzon 혹은 御本尊, gohonzon), 제목(題目, daimoku), 계단(戒壇, kaidan)이다.
일련종에 의하면 본존이란 숭배의 주된 대상을 의미한다. 일련에 따르면 붓다는 『법화경』의 영원한 붓다인 석가모니이다. 또한 이런 이유로 실제 궁극적인 가르침은 『법화경』 전체에 있다기 보다는 우주적 붓다로서 석가모니불을 다루고 있는 이 경전의 후반부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붓다가 예배의 주된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의 육체적 본존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한 우주의 상징이며 일련이 『법화경』에 기초하여 제작한 만다라(曼茶羅)이다. 일본불교에서 이것은 ‘붓다와 보살이 묘사되어 있거나 혹은 교리를 표현한 경배의 대상이다. [많은 일본불교 학파에서 그것은] 깨달음이나 진리의 구체화이다’(English Buddhist Dictionary Committee 2002: 390-1). 여기서 본존은 석가모니를 본존불로서 중앙에 배치한 만다라이다. 이 만다라는 일련이 1279년에 디자인하였고 『법화경』에 기초한 것이다. 정중앙에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 Namu My? h? renge ky?)』을 배치하는 것이 공식이다. 이 둘레에 석가모니, 다보여래, 그밖에 『법화경』에 나타난 다른 중요한 인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들은 각각 적당한 자리에 배치되어있다. 또한 일련정종에서는 일련의 이름도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본존은 전체성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다. 천태에서와 같이 불멸의 붓다로서의 석가모니는 본존불이다.
제목은 목탁을 치면서 리듬에 따라 ‘나무묘법연화경’을 독송하는 것을 말한다. 지의의 주석에 의하면 종자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듯이 『법화경』이라는 제목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일련에 의하면 그것은 제목을 독송할 때 수행자 안에서 주관과 대상이 동일하다 는 것을 통해 깨달아지는 붓다의 모든 가르침의 본질이고, 불성(佛性) 자체이다. 불성으로서, 『법화경』의 제목은 그러므로 바로 영원한 본존불, 석가모니이다. 일련은 믿음을 가지고 이 제목을 외우면 지옥에 떨어진 사람도 구해 낼 수 있으며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무수한 겁 이전에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불, 모든 중생을 하나도 남김 없이 성불로 이끌어 주는 『법화경』의 진리, 우리 중생들은 다른 중생들과 결코 다르거나 분리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를 인식하면서 『법화경』을 외우는 것은 생사의 궁극적인 정법을 상속받는 것이다. 이것은 일련의 제자들과 평신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이것이 『법화경』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Gosho Translation Committee 2003: 216)
제목은 일련에게 경전 전체 내용보다 더 적합한 것이다. 이 제목을 암송하는 것은 말법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 행위이며 불교의 가장 뛰어난 실천이다. 진리를 버리면 개인과 국가를 재앙으로 이끄는 것처럼 불교의 수행―특히 『법화경』의 제목을 독송하는 수행―을 통한 마음의 변화는 이 세상을 불국토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일련을 연구하는 학자 우마다 교케이(?田義遜, Gy?kei Umada)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다라를 응시하며 이 신성한 제목을 암송하는 사람은 가슴과 정신,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융화된다. 또한 신자는 자신 안에 최고 존재의 훌륭한 자질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에 따라 짧은 인생이 영생을 얻고, 한정되었던 공덕도 무한하게 된다. … 여기에 일련종 신앙의 핵심이 들어 있다. 모든 신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종교적 삶이 가능해진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 현재 존재 안에서 불국토가 실현된다. (Petzold 1977: 36-7에서 인용)
마지막으로 계단은 계율을 받는 장소 혹은 승려의 자격을 수여하는 장소이다. 이에 대해서는 각 교파마다 해석이 각양각색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법화경』의 수행을 통해서 불국토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계단은 본존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예배드리는 신도의 집에도 설치할 수 있다. 계단은 이 종파에 처음 가입한 사람들의 중심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련은 계단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비밀스러운 장소인 것처럼, 특히 일본의 계단은 미래에 전세계에 진리를 세우는 모든 사람 들을 위한 거대한 입문식 장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장래에 진리를 세우고 (일본어: k?sen-rufu, 廣宣流布) 그곳을 유치하여 평화·행복과 번영을 위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막대한 입문식 홀이 세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황금시대가 오면 … 이 시기의 타락과 부패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 그때 성좌(聖座)는 절대 권력자의 칙령과 허가로 완성될 것이다. 그곳은 석가모니가 대승경전들을 설했던 곳인 영취산의 낙원에 비견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의 도래를 기다려야만 한다. (Petzold 1977: 64-5에 있는 Anesaki)
다른 예언자들처럼 일련도 탄압받았고 고난의 날들을 살았다. 수많은 그의 추종자들은 사악한 법을 끝까지 거부한 까닭에 수년간 박해를 당했다. 일련은 『법화경』에서 끊임없이 박해당했던 상불경보살과 자신을 동일시하곤 했고, 그는 『법화경』의 전파자가 직면하는 고난과 박해의 설명을 자신과 추종자들이 겪어야 할 어려움에 대한 예언으로 보았다. 특히 만년에 이르러 일련은 붓다가 『법화경』의 유포를 상행보살(上行, Vi?i??ac?ritra)에게 부촉한 제15품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 보살은 말법시대에 『법화경』을 유포하려 했던 보살들의 대표이고, 일련은 상행보살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스스로 그의 화신이라고 여겼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적어도 이것은 후대의 추종자들이 일련을 이해한 방식이다. 일련은 당시 최상의 가르침인 『법화경』을 전파했다는 측면에서 자신을 좀 특별한 존재로 보았음이 확실하다.
일본에서 『법화경』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모든 중생들의 부모와 같다. … 나 일련은 다른 모든 종파의 불교도뿐만 아니라 모든 군주 중의 군주이고 지도자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배자들과 어리석은 중생들은 우리를 탄압한다.
예언자 일련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불신하는 이들을 벌주기 위해 몽골군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계속 경고했다. 일련의 예언은 그의 가르침과 신앙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다.
일련의 사후 수많은 분파들이 생겨났다. 일련정종(日蓮正宗, Nichiren Sh?sh?)에서 일련은 말법시대의 붓다로 간주된다. 이것은 영원불멸한 붓다와 초세간적인 일련을 동일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석가모니는 점점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현재 일련의 종파는 재가운동을 통해서 특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원래 일련정종에서 출발한 창가학회(創價學會, S?ka Gakkai)는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Daisaku Ikeda)회장의 업적을 통해 서구에 널리 알려진 강력한 재가불교도 조직이다. 창가학회는 정치에도 밀접하게 관여하여 한때 공명당(共明黨, K?meit?)과 매우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기도 하였다. 사소한 사건으로 1970년에 밀접한 관계가 단절되기는 했지만 당시 공명당은 당명을 중도당(中道黨)이라고 하였고, 선거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에서 창가학회는 비록 때로 절복(折伏, shakubuku)행위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많은 추종자들을 가진 거대한 조직이다. 원래 『법화경』의 마지막 진리의 가르침을 직접적이고 솔직한(‘예언적’) 방법으로 일련에 의해 발전된 현대의 ‘절복’행위는 다른 거짓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집착을 대결적으로 끊어버림에 의해, 실제로 정서적인 협박과 언어적 협박의 형태로 개종자를 얻는 보다 사 나운 형태가 되어 있다. 창가학회는 1991년 일련정종에 가입했는데 후반기에 (67대) 제사장이 탈퇴시켰다. 이케다 다이사쿠는 1992년에 일련정종에서 파문당했다.
『법화경』의 가르침에 근원을 두고 있는 또 다른 근대 일본의 신도운동은 입정교성회(立正?成會, Rissh? K?sei Kai)이다. 영국에서는 『법화경』에 대해 주석을 붙인 니쿄 니와노(Nikkyo Niwano) 회장의 업적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니와노는 1965년 교황 바울 6세를 방문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4기 개회식에 참석했다. 입정교성회 그리고 창가학회는 수많은 다른 현대 일본의 불교운동과 마찬가지로 대승불교에서 재가신도의 역할과 집단 치료법, 그리고 현세에서 불교의 실천이 개인의 물질적·정신적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들은 불교수행을 개종과 교육, 인본주의적인 행위, 사회복지 행위인 사회에 대한 무한한 이익을 제공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일련정종은 현대사회에서 직접적인 사회적·정치적 참여를 위한 틀을 형성한다. 이 모든 것은 일련이 『법화경』의 수행을 통해 바로 이 세계를 불국토로 변화 시키려는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었다. 니와노는 한 사람을 (불교의) 길 로 안내하는 일은 휴머니즘을 불러일으키는 길이며, 이것이 ‘진실로 이상사회를 창조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Niwano 1981: 42). 정신과 물질이 상호 연관되어 있으므로 불교를 통한 정신의 변화는 자연스럽 게 물질적 환경과 번영을 초래하게 된다.
믿음을 통하여 마음의 변화, 사유의 변화를 거친 사람에게 금전이나 기타 물질적인 행운이 찾아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 나은 방향으로의 개선과 변화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Niwano 1981: 125-6)
결국 모든 인류는 하나의 가르침에 이르게 될 것이며, 모두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정토일 것이다(앞의 책, 135-6). 또한 창가학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붓다가 된다는 것은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저녁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언제 어디서나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옷도 돈도 없이 집안에 병들어 누워 있고, 문 앞에 빚쟁이들이 있는 상황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쓸모없다. (Dumoulin 1976: 263)
이러한 가르침은 전후 일본의 재건과 경제성장이라는 절박한 요구와 분명히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역사상 존재했던 불교, 특히 인도에 존재했던 불교와 얼마나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논쟁거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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