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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6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탄자니아 여객기 호수에 불시착
2022년 한국 일본해상자위대 창설 70주년 기념에 군수지원함 소양함 파견
2021년 베트남 하노이 지하철 첫 개통
2021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서 교통사고로 유조차 폭발, 99명 사망 100여명 부상
2021년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추진 27년 만에 건립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한국인 원자폭탄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을 추진한 지 27년 만에 세워졌다. 2021년 11월6일 나가사키시 평화공원에선 강창일 주일본 한국대사와 여건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단장 등 한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인 원자폭탄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약 7만4천명이 사망했다. 이 중 수천명~1만명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제에 의해 공업 지역인 나가사키로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 등 우리 동포가 미군의 원폭 투하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다른 원폭 투하 지역인 히로시마시에는 1970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현지 평화기념공원에 건립돼 매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날인 8월 5일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렸지만, 나가사키에는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가 없어 추모 행사를 열지 못했다.
2017년 박성현 선수, 신인으론 처음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
2012년 버락 오바마 미대통령 재선
2009년 국회, 한.인도 CEPA 비준안 처리
2009년 11월 6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인도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CEPA) 비준동의안이 전체 의원 197명이 표결에 참석한 가운데 찬성 192표, 기권 5표로 통과됐다.
CEPA 비준안은 자동차 부품, 철강, 기계 등 인도로 수출하는 한국 제품 4천459종의 관세를 철폐하거나 감축하는 내용을 담고있다. 자동차 부품 관세는 8년내 1-5%로 인하되고 냉장고와 컬러TV는 8년 내 50%가 감축된다.
또 한국으로 수입되는 인도 제품은 쌀과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민감품목을 제외하고 품목 수 기준으로 93%, 수입액 기준으로 90%의 관세가 각각 철폐되거나 감축된다.
양국은 163개 전문 직종의 인력 이동도 서로 개방하기로 했다.
관세를 낮추거나 폐지하고, 양국의 투자를 자유화하고, 서비스 시장을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CEPA는 FTA(자유무역협정)와 같은 성격이다.
경제동반자 협정(CEPA)은 2010년 1월 1일부터 발효되며, 다른 경쟁국들이 거대한 인도시장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 우리나라는 인도시장을 선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게됐다.
이번 협정은 우리나라가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국가와 맺는 첫번째 FTA다.
2008년 부탄 5대 국왕 최연소 즉위
2005년 원로 영화 감독 최훈(崔薰) 씨 타계
원로 영화감독 최훈(崔薰·83)씨가 6일 오후 6시45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22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나 평안교원대 국문과를 졸업한 고인은 1958년 영화 ‘모녀’로 데뷔했고, ‘얄개전’(1965) ‘엄마냐 누나야 강변 살자’(1968) 등 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 당시 첫선을 보인 하이틴 영화는 70년대 후반 고인의 조감독 출신인 고(故) 석래명 감독(2003년 타계)의 ‘얄개전’ 시리즈를 통해 이어지면서 크게 히트하기도 했다.
고인은 1973년 대종상영화제 감독상을 받았고 1993년 예총 예술문화대상을 받았다.
2005년 대한항공 비행 시뮬레이션 대회
2005년 로버트 김, 10년 만에 고국땅으로
미국 해군정보국 정보분석가이던 로버트 김(64, 한국명 김채곤)이 2015년 11월6일 오후 5시40분쯤 부인 장명희씨와 함께 1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1996년 9월 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대사관에 미국의 군사기밀을 건넨 혐의로 FBI(미국연방수사국)에 체포되었다
그가 징역9년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 받고 7년10개월의 수감생활 2개월의 가택연금, 1년간의 보호관찰 등 9년의 시련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씨는 입국성명을 통해 “그동안 잃은 것도 많지만 더 많은 것을 얻었다”면서, “초등학교 학생의 돼지 저금통부터 칠순 할머니의 후원금까지, 그리고 감옥소에서 받은 수많은 위문편지들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버팀목이 됐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김씨는 이어 “저는 분명히 스파이도 아니었고 한국 정부가 고용한 사람도 아니었다”고 밝힌 뒤, “하지만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그는 또 “자유의 몸이 된 이 순간 미국이나 한국 정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자회견 중에는 간간이 자신의 구명에 소극적이었던 정부에 대해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씨는 “한국 정부에서 파견한 무관과 연관된 일이고 나라를 위한 일이었는데 정부가 ‘개인 간의 일’로 축소하고 무시를 한 것은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이번 방한 중 정부측 인사와의 만남 일정을 잡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계속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도 했다.
이날 오후 5시10분쯤 김씨가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환영객들 사이에서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김씨는 환영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다 백동일(白東一·57) 예비역 대령을 발견하고 다가가 그를 힘차게 껴안았다. 백씨는 1996년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할 때 김씨로부터 기밀 문서를 넘겨받은 인물. “선생님, 죄송합니다” (백동일) “이제 다 잊고 앞만 보고 갑시다”(로버트 김)…. 몇 마디 나누지 않아 백씨는 이내 김씨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먹였다.
백씨는 “10년 만에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몇 주 전부터 외우다시피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감정이 차올라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고 했다.
로버트 김의 이번 ‘10년 만의 고국 방문’은 그가 2005년 10월 미 법원으로부터 형집행 종료를 통보받아 풀려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2000년 사진작가 김근원씨 별세
산 사진 전문작가 김근원(78)씨가 2000년 11월 6일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1950년대부터 작품활동을 해 온 김씨는 설악산 권금성 등 전국의 산 사진만 20여만 점을 남긴 산 사진의 개척자이며 1인자였다.
경남 진주의 부유한 집안 출신인 김씨는 집안이 기울어 서울로 옮겨와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진주 시절 13세 때 삼촌으로부터 선물 받은 카메라 한 대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김씨가 산 사진을 시작한 것은 지난 1954년이다. 피란 갔다가 폐허 속의 서울로 돌아온 그를 포근히 감싸 안아 준 북한산을 필름에 담은 것이 첫 걸음이었다.
그 후 40년 가까이 1년에 200일 이상을 등산장비와 촬영장비까지 3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을 누볐다. 키 160cm, 체중 50kg의 깡마른 체구에 회갑을 넘겨서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산에 오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제가 좀 들어드릴까요”라고 했다가 혼쭐이 난 산악인도 부지기수다. 그의 산 사진작품의 특징은 광각 렌즈나 필터를 사용하지 않는 ‘정직한 사진’이다. 평소 “흑과 백 사이에 무한의 농도가 있다”며 흑백사진을 고집해 왔다.
1998년 서울 월드컵 경기장 기공식
서울시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치루게 될 상암지구 월드컵 주경기장 명칭을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확정짓고 1998년 11월 6일 김대중 대통령과 고건 서울시장 등 관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가졌다.
2001년 12월쯤을 완공으로 한 주경기장은 보조경기장을 합쳐 4만6천7백평에 건물면적 1만7천7백70평 규모로 연면적이 3만8천3백70평에 달한다. 주경기장은 지상6층, 지하1층, 최고 높이 48.3m 규모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건설되며, 이 안에 길이 1백5m, 폭 68m의 천연 잔디구장이 들어서게 된다. 경기장의 외양은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21세기의 희망을 담을 수 있는 ‘전통소반’과 ‘팔각 모반’을 두겹 겹쳐놓은 상태로 형상화된다.
또한 경기장의 전체 이미지를 마포나루에 드나들던 황포돛배가 모여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며 경기장 지붕은 우리나라의 이미지와 문화를 띄운다는 의미로 전통 방패연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1998년 전세계 300만번째 도메인 네임(lizzybee.com) 등록
1997년 TDX 1000만 회선 돌파
1995년 조선 중종때 정온의 시신, 파주군서 미라로 발견
조선조 중종때 정5품 찬의(贊儀)를 지낸 정온(鄭蘊)의 시신과 당시의 의복 30여점이 4백50여년전 매장될 당시의 원형 그대로인 상태로 발견됐다. 이 미라는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금릉리 산 18의10 경주 정씨 제안공파 선산에서 6일 오전 11시쯤 묘지 이장작업을 하던 종친회에 의해 발굴됐다.
정온의 미라는 신장 1백70㎝ 정도로 얼굴 형태와 상체 및 하체의 뼈, 살 등이 썩지 않았으며 치아와 상투, 수염 등도 원형 그대로 보존돼있는 등 매장될 당시의 모습 거의 그대로였다.
또 시신을 둘러싼 7겹의 옷가지는 물론 시신과 내관 벽의 공간을 채워 넣은 20여점의 비단 옷가지와 신발 등도 썩지 않았으며 건(巾)을 맨 끈도 시신의 목에 그대로 묶여있는 상태였다.
정온의 시신을 원형 그대로 보존한 관은 이중 목관과 그 위를 석회관이 둘러싸고 있는 3중 구조 형태로 돼 있었다.
또 연결부위마다 송진과 유황 화합물이 칠해지고 시신이 누워있는 관 바닥은 수분침투를 막기위한 회백색 가루가 깔려있는 등 외부와 완전히 차단돼 있었다.
소나무로 된 외관의 크기는 가로 90㎝, 세로 2백㎝, 두께 12㎝이며 내관은 가로 60㎝, 세로 1백80㎝, 두께 10㎝ 크기의 향나무관으로 내-외관 모두 부패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정온은 성종때인 1474년 이조판서를 지낸 제안공 정효상(1432-1481)의 2대 손으로 중종시절 찬의(贊儀)를 지냈다.
종친회장은 “할아버지 시신의 관절이 움직이고 살도 아직 탄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1990년 한국-소련 간 직통전화 개통
한국과 소련간의 직통국제전화 4회선이 1990년 11월 6일 0시를 기해 개통됐다. 소련과의 직통회선 개설은 1989년 1월부터 양국간에 논의돼오다 8월 이우재 체신부장관이 소련을 방문, 소련 우전부장관과 직통회선개설 각서를 체결했었다.
이날 개통된 직통회선은 서울-부산을 거쳐 일본의 하마다와 동경-나오에쓰에 이어 나훗카-모스크바로 연결되는 선으로 그동안 양국간 통화완료율은 매우 낮은 7~8% 선에 머물렀으나 앞으로 훨씬 더 편리하게 연결될 수 있게 됐다. 한국에서 모스크바는 001-7-095-xxx-xxxx로 하면 되고 소련에서 한국은 810-82-지역번호-xxx-xxxx로 연결하면 된다.
1989년 중앙고속도로(춘천-대구) 착공
대구와 춘천을 잇는 전장 2백80km의 중앙고속도로가 1989년 11월 6일 착공됐다. 이날 충북 제원군 봉양면 장평리 현장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가졌다.
모두 2단계의 공사로 진행되는 중앙고속도로는 지금까지 춘천에서 대구 구간이 지형적 어려움으로 상당부분 우회하거나 거친 산악길을 달리는 바람에 자동차로 무려 6시간 걸리던 것이 그 절반으로 단축되며 대구-김해간에 건설될 80km 고속도로와도 연결돼 춘천-부산까지 거리도 7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게 됐다.
중앙고속도로 착공은 낙후된 강원내륙 지방과 충북, 경북일부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고 강원과 영남권의 교류를 활발히 할 수 있게 했다. 또 이로 인해 전국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 지역일대 관광자원이 본격 개발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중앙고속도로는 이날 착공을 시작으로 1995년 8월 29일 대구-군위(38.2km), 서제천-원성(37.6km), 춘천-홍천(26.2km)등 1백2km 길이의 1단계 구간이 개통됐다.
1988년 중국 운남성 일대 진도 7.6 강진 1천명 사망 2,872명 부상, 이재민 50만명
1984년 아시아-태평양전기통신협의체(APT) 서울총회 및 관리이사회 개최
1983년 미국, KAL기 블랙박스 수색중단
1983년 북괴공작원 버마로부터 추방
1981년 안기부, 학원침투 교포간첩단 검거 발표
1980년 조치훈, 일본 바둑 명인위 획득
1979년 계엄사,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전모 발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전모를 발표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은 “이 사건은 주범인 전(前) 중앙본부장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욕으로 빚은 내란목적의 살인사건이며 군부 또는 여타 조직의 관련이나 외세의 조종이 개입된 사실은 전연 없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사건현장에는 박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김계원 외에 만찬석을 도와준 여인 2명이 함께 있었고 김재규는 만찬 도중 박 대통령과 차 경호실장을 총으로 쏘아 살해했다는 것이다. 평소 이권개입이 많다는 대통령의 경고와 정국수습책의 거듭된 실패로 해임설이 돌자 불안한 상태에 놓인 김재규는 박 대통령이 군(軍) 후배이며 연하인 차 실장만을 편애한다고 생각, 박 대통령을 제거하면 자신이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적임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또 부마사태를 대통령 제거의 계기로 역이용, 거사 후 계엄군을 장악하면 사후수습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살해계획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1980년 1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5월 24일 교수형을 당했다.
1978년 충주에 임경업 장군 사당 충렬사 개수
1978년 이란, 팔레비왕 군사내각 수립
1976년 조치훈 일본 바둑 명인위 획득
1975년 모로코, 평화대행진 선발대 서부사하라 국경내 10km까지 진입
1972년 태국 학생들 일본상품 불매운동 결의
1970년 이탈리아-중국 국교 수립
1968년 닉슨, 미국 37대 대통령에 당선
리처드 닉슨(Richard Mihous Nixon)이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으로 1968년 11월 6일 당선됐다. 1946년 캘리포니아에서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정계에 입문하였고 하원의원 시절에는 비미활동위원회에서 알자 히스 등의 대소협력을 고발하여 반공주의자로 이름을 떨쳤다.
1952년 D.D.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56년에 재선되었다. 1960년 대통령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 민주당 후보 J.F. 케네디에게 패하였으나 1968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H. 험프리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미국-중국 관계개선을 위하여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외교적 성과를 올렸으며 1969년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하여 발표한 ‘닉슨독트린’은 유명하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말미암아 1974년 8월 대통령 임기 중에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1968년 월남평화협상 시작
1966년 아동문학가 마해송 별세
한국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1923년)을 어린이 잡지 ‘샛별’에 발표해 우리나라 창작동화의 길을 열고, 색동회 회원으로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쳤던 한국 아동문학계의 큰 별 마해송(馬海松)이 1966년 11월 6일 향년 61세로 숨을 거뒀다.
정초에 미리 써놓은 유언장에는 “공부도 재주도 덕도 부족한 몸으로 외롭단 인생을 외롭지 않게 제법 흐믓하게 살고 가게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라고 씌어었었다. 명륜동에서 20여년을 살다 정릉으로 옮긴 감회를 7월 26일까지 조선일보 ‘일사일언’ 난에 7회 연재했던 ‘이사기(移徙記)’가 고인의 마지막 글이었다.
마해송은 전래동화를 편집하거나 외국동화를 번역하는 작가가 아닌, 한국 최초의 창작동화를 쓴 작가였고 수필가였다. 한문투, 번역투의 글들과 달리 간명하고 깔끔한 문장을 주로 구사했다.
마해송은 경기 개성에서 태어나 니혼(日本)대학 예술과를 졸업한 뒤 일본의 ‘문예춘추(文藝春秋)’ 초대 편집장을 지내고 1930년에는 ‘모던 니혼’을 창간해 일본 문화계를 주름잡았던 글로벌 지식인이었다. 일제때는 우화적인 기법을 통해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을 일깨우려했고, 광복후에는 사회성과 주제의식이 강한 동화를 썼다. 이때문에 소파 방정환과는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으면서도 그의 영웅주의와 눈물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조선일보에 써 소파와는 다른 문학관을 분명히 했다. 광복 후에도 어린이 관련 활동을 멈추지 않고 1957년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초안을 썼다. 재미 의사 겸 시인 마종기가 그의 아들이다.
1964년 이화령(회산)서 버스 전복 22명 사망 10명 부상.
1964년 대구 가뭄(-65.1.28까지 84일간 눈 비 내리지 않음)
1962년 동해북부선 개통
1962년 아랍연합, 사우디아라비아와 단교
1961년 유엔, 핵실험 금지안 가결
1959년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한 필리핀 대통령(1943-45) 라우렐 사망
1959년 능의선 기공식(능곡-의정부)
1956년 아이젠하워 재선
1956년 11월 6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재선(再選)에 성공했다. 상대는 4년 전 선거 때와 똑같은 민주당의 애들라이 스티븐슨이었고 결과 역시 일방적인 승리였다.
스티븐슨은 풍부한 행정력과 세련된 언변까지 갖춘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국민들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아이젠하워를 선택했다. 다행히도 군인 출신의 그에 유리하게 1952년 선거때는 한국전쟁 중이었고, 1956년 때는 수에즈운하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될 때였다. 1952년, 아이젠하워가 37년간의 군인생활을 접고 정치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공화당·민주당 양당 모두 그를 향해 손짓했으나 그는 공화당을 선택했고 민주당 집권 20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당선 후에는 ‘한국전을 종식시키겠다’는 선거공약에 따라 한국을 방문했다. 1948년 대통령 선거때 맥아더가 후보로 나섰으면 그 역시 떠밀려 출마할 뻔한 일이 있었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가 평소 ‘장군님’, ‘사랑하는 아이크’로 부르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맥아더와 사이가 안좋은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를 견제하기 위해 아이젠하워를 대항마로 내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1954년 유엔총회서 미국-영국 등 60개국, 원자력 평화이용 공동결의안 제출
1951년 허정, 국무총리 서리 임명
1950년 맥아더, 중국 월경(越境) 성명
1949년 북한, 중국과 국교수립
1947년 폴라로이드 사진기 개발
1947년 11월 6일 미국 폴라로이드사 사장 에드윈랜드 박사(MIT 명예교수)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처음 개발했다. 폴라로이드 사진은 필름에 부착된 현상인화 정착액 주머니가 필름을 뺄 때 카메라 안에 장치된 룰러에 눌려 터지면서 필름에 골고루 묻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촬영 후 흑백 필름은 10초 만에, 칼라 필름은 약 1분 만에 인화가 되며 암실조작이 필요없고 촬영한 장소에서 바로 인화되어 사진촬영 즉시 사진을 볼 수 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정식명칭은 폴라로이드 랜드 카메라이며 ‘1분 카메라’라고도 불려진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발명은 일대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사진사에서는 큰 충격이었다. 최근에는 일반 카메라 뿐만 아니라 공업용·의학용·상업용·보도용 등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 기술은 발전을 거듭해 1964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자셔터식 AE카메라인 ‘폴라로이드 오토매틱 100’이 개발되었고, 1972년에는 접는 식의 1안 리플렉스 전전동(全電動) 카메라인 ‘폴라로이드 SX-70’도 개발되었다.
1945년 일본 연합국총사령부(GHQ), 일본재벌에 해체 명령
1937년 도로규칙 개정(1938.4 실시)
1937년 이탈리아-일본-독일 방공(防共)협정 가입
1937년 영국의 배우 포브스 로버트슨 사망
1922년 안창남 도쿄~오사카 왕복우편비행대회서 우승
1907년 미국, 파나마 독립승인
1906년 일본, 남만주철도회사 설립
1905년 YMCA창설자 조지 윌리엄스 사망
1893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사망
러시아가 배출해 낸 최고의 작곡가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가 1893년 11월 6일 콜레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향년 53세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총결산이라 할 수 있는 ‘비창’ 교향곡을 자신의 지휘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하고 1주일 후였다.
우랄지방의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1840년에 태어난 그는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나, 어학쪽에 더욱 재능을 보여 6, 7세에 벌써 독어, 불어를 구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당시 상류계급의 풍조에 따라 법률학교에서 공부한 후 법무성 관리로 근무했으나,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 1860년 안톤 루빈스타인이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개편한 이 교실의 제1기생이 됐다. 그 뒤 모스크바 음악원이 설립되자 교관으로 일하다가 철도 경영자 부호의 미망인 폰메크 부인을 알게 돼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부터 교직을 떠나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작품은 1854년 14세 때의 ‘왈츠’에서 시작하여 1893년에 완성된 교향곡 제6번 ‘비창’(작품 74)으로 끝났다. 교향곡 6곡, 미완성의 교향곡 1곡, 교향시 1곡, 오페라 11곡, 발레곡 3곡 이외에도 다수의 실내악곡 ·피아노곡 ·가곡 및 협주곡 등이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작품들은 음악회장에서 자주 연주된다. ‘피아노 협주곡 1번’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4.5.6번’ 등이 유명하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발레곡들도 많이 공연되는 작품들이다. 이 외에도 오페라 ‘오이겐 오네긴’ ‘카드놀이 여인’도 서양의 오페라 극장에서 유명한 작품들이다. 감정에 섬세하게 말하는 그의 음악적 성향은 독일 낭만주의 음악 성향과 매우 가깝다.
1884년 영국, 뉴기니아를 보호령화
1880년 오스트리아 소설가 로베르토 무질 출생
1860년 링컨, 미국16대 대통령에 당선
1860년 11월 6일, 미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됐다.
그는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풍부한 독서를 통해 지식을 얻었고, 연속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의 정치인으로 유명해졌다.
링컨이 당선된 직후 남부 주들이 노예제도 폐지론에 반발해 연방을 탈퇴, 남부연합정부를 구성했고, 결국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했고, 승리를 이끌어냈으나 재선 후 연극을 보던 중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1854년 `행진곡의 왕` 미국 작곡가 존 필립 수자 출생
1836년 프랑스의 왕 샤를10세 사망
샤를 10세는 루이 16세와 루이 18세의 남동생으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5세의 아들인 도팽 루이 페르디낭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 루이 16세 치하에서 마리 앙트와네트의 총신 가운데 한 명으로 살았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추문이나 왕가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제3신분이 궐기하자, 마리 앙트와네트와 함께 제3신분 박해에 동조하여, 국민들로부터 원망을 사게 된다. 제3신분이 중심이 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나 국민의회를 왕비와 함께 왕명을 빙자하여 박해, 탄압한 일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발단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으로 망명하여 반혁명파와 함께 전국 각지를 전전했다. 망명하는 동안 그는 반(反)나폴레옹의 기수가 되어, 나폴레옹 실각을 위한 원조금과 자객을 프랑스에 보냈다. 그리하여 1800년 12월 24일에 왕당파에 의한 나폴레옹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결국 나폴레옹을 실각하는 데 실패한 데다가,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프랑스에 귀국하나, 나폴레옹이 되돌아와 백일천하가 시작되면서 다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이처럼 그를 비롯한 부르봉 왕가는 나폴레옹에 대해 무력하기만 했다. 이 때문에, 보르되에서 반(反)나폴레옹 연설을 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한 루이 16세의 딸 마리 테레즈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부르봉 왕가의 유일한 남자”라는 야유를 듣기도 했다.
왕정이 복구된 후에도 1820년에 차남이자 제일 좋아했던 자식인 베리 공작이 암살되는 비운의 사건을 겪는다.
1824년, 형 루이 18세가 서거하면서 국왕으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루이 18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루이 18세는 프랑스 혁명 시절의 자유 사상을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던 반면, 샤를 10세는 혁명 전의 귀족들에게 특권을 다시 부여할 정도로 보수반동적이었다. 심지어는 당시 시행되었던 입헌 군주제에 대해서도 철두철미하게 반대하며 절대 왕정의 부활을 기원했다.
이와 같이 형 이상으로 반동적인 전제 정치를 행했기 때문에 1820년대 말에 이르러 프랑스의 경제가 불안하게 되었고, 1830년에는 프랑스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른바 ‘7월 혁명’이다. 이 혁명으로 인해 퇴위당한 샤를 10세는 앙리 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시민들에 의해 루이 필리프가 왕이 되었다.
루이 16세와는 달리 체포되어 처형되지는 않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1836년까지 생존했다. 그는 북이탈리아의 고리치아에서 죽었다.
1818년 벨기에의 색소폰 발명자 아돌프 삭스 태어남
1814년 벨기에의 악기 제조인 아돌프 삭스 출생
1811(조선 순조 11) ‘심청가’ ‘박타령’ 등 판소리 여섯마당 정리한 동리 신재효 태어남
1506년 연산군 사망
1107년 윤관 여진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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